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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정보
상세설명
경주 최씨의 종가로 신라시대 '요석궁'이 있던 자리라고 전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9대째 대대로 살고 있으며 1700년경 이 가옥을 지었다고 하지만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건물 구성은 사랑채·안채·대문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대문채에는 작은 방과 큰 곳간을 마련하였다. 사랑채는 안마당 맞은편에 있었으나 별당과 함께 1970년 11월 화재로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사랑채터 뒷쪽에 있는 안채는 트인 'ㅁ'자형이나 실제로는 몸채가 'ㄷ'자형 평면을 가지고 있고 'ㄱ'자형 사랑채와 '一'자형 중문채가 어울려 있었다. 또한 안채의 서북쪽으로 별도로 마련한 가묘(家廟)가 있는데 남쪽으로 난 반듯한 길이 인상적이다. 안채 뒷편으로 꽃밭이 있어 집 구성에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대체로 잘 보존하고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지정 당시 명칭은 경주최식씨가옥(慶州崔植氏家屋)이었으나, 경주 최씨가문이 대대로 살아왔던 집이고, 경주의 이름난 부호로 '교동 최부자 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경주교동 최씨 고택’으로 명칭을 변경(2007.1.29) 하였다.
* 위 국가유산은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
관람료 : 무료
종목 : 국가민속문화유산 제0호
수량/면적 : 1필지/6,598㎡
지정(등록)일 : 1971년 05월 27일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학교법인 영남학원
관리자 : 학교법인 영남학원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경주 최부자’의 종가댁이다. 1700년 경 건립된 고택으로 건축 당시 이웃하고 있던 향교의 권위를 해치지 않기 위해 향교보다 세 자 이상 낮게 터를 깎아내고 집을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정석적 형태이며 지어질 당시에는 99칸이었으나 현재는 큰 사랑채와 안채, 솟을대문과 곳간 등이 남아 있다. 고택의 첫인상인 솟을대문부터 겸양의 미가 보인다. 일반적인 대감댁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게 소박하고 낮은 솟을대문의 모습이다. 경주 최부자 가문은 1대 최진립 장군부터 12대 독립운동가 최준 선생까지 지조와 절개, 겸손과 포용의 미덕으로 이름값을 귀하게 만들었다. 9대 진사를 배출하기도 했는데, 권력에의 탐닉을 막기 위해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는 가훈이 내려온다. 일명 ‘최부자 육훈’으로 진사 이상의 벼슬 금지를 비롯해, 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 것, 과객을 후하게 대접할 것, 흉년에 재산을 늘리지 말 것,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할 것 등의 가훈을 지키며 올바른 부자의 정도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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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새소식
소개글
총 4 건
경주최부자댁 소개-
- 경주최부자 12대 가계(家係)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5-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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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최부자 육훈, 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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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25-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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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25-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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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최부자댁 교육장&생활관 안내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5-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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