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속종단 : 조계종 曹溪宗
주지성명 (법명) : 朴基午 (朴無貳)
건립연대 : 1624
건물현황 : 총 3동 (75.9㎡)
건물현황 : 총 7동(315.15㎡), 법당 4동(212.85㎡), 요사.기타 3동 (75.9㎡)
토지현황 : 총 1,742.4㎡, 대지 660㎡, 임야 92.4㎡, 농지 990㎡
도암은 조선 인조 2년인 1624년 무공화상이 불암산에 있던 옛 절을 이곳으로 옮겨 창건하였다. 이후 고종 15년인 1878년 벽운화상이 중창하고 고종 22년인 1885년 벽운화상이 화승 경선화상을 불러와 불상 1구를 개금하고 탱화 6점을 그렸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고 이를 1965년 김명호 주지가 재창건하였다.
학도암이라는 이름은 “주위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학이 이곳에 날아와 노닐었다”하여 학도암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대웅전 뒤편 암벽에는 명성황후의 염원에 의해 1872년 조성된 높이 22.7m, 폭 7m의 거대한 마애선각관음보살좌상이 있다. 1기의 석등과 배례석을 앞에 두고 자연암벽을 깎아 그 위에 선각하였다.
학도암(전통사찰 제77호)은 ‘학이 찾아드는 곳’이라는 이름만큼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는 절이다. 학은 천신이 타고 다니는 영물로 상징되는 만큼 훌륭하고 좋은 자리에 있음을 알게 해 준다. 명성황후 또한 이곳 14m가 넘는 큰 바위에 고종의 사랑과 자녀의 출산 그리고 그 자녀가 왕통을 잇는것까지 기원하며 관음보살좌상을 조성한다. 그리고 그 소원은 모두 이루어져 지금도 사랑과 자녀 성공을 이루어주는 사찰로 유명하다. 학도암은 1624년 무공(無空)스님이 창건하였고 1878년 벽운화상이 중창하였다. 학도암 입구 오른편 바위에 마애부도가 2기 조성되어 있다. 이 부도는 왼쪽부터 청신녀 월영의 탑과 취근 선사의 탑이 있는데, 이중에 청신녀월영영주지탑은 가경24년(1819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학도암의 뒷편에는 1872년 명성황후가 후원하여 조성한 마애관음보살좌상(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4호)이 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사랑이야기
조선 고종3년(1866년) 민치록의 여식 민자영은 16세에 왕비로 간택을 받아 가례(결혼)를 올렸으나, 고종(15세)은 이미 후궁 영보당 귀인 이씨를 총애하고 있었다. 가례를 올린 첫 날 남편 고종은 왕비의 처소엔 들지 않고 귀인 이씨의 처소에 들었다. 황후가 되었으나 첫날밤에 다른 여인에게 간 것이다. 더군다나 1868년 4월 귀인 이씨가 고종의 첫 아들인 완화군을 낳자, 더욱 총애했으며 명성황후와 대소신료들을 앞에두고 완화군을 안고 왕실이 튼튼해졌다며 크게 기뻐 하였다. 임금을 비롯한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던 나이 18세에 불과한 어린 황후에게 한 궁녀가 부처님을 조성하면 그 가피로 원하는 바를 얻을수 있다며 권선하였다. 명성황후는 고종의 사랑을 얻고 왕자를 낳아 왕통 잇기를 발원하며 가장 기운이 좋은 명당터인 불암산 학도암 큰 바위에 관세음보살을 조성하는 불사를 연다. 당시 최고의 불모였던 장엽을 금어로 임명하고 경복궁을 복원하던 왕실 석공 김흥연 이운철 원승천 박천 황원석에게 명해 관세음보살을 조성하게 한다. 조성을 시작하자 관세음보살의 가피로 인해 명성황후는 차츰 고종의 사랑을 얻게 되었고 조성 완료(1870년)후 몇년 되지 않아 후에 순종이 되는 왕자 이척을 낳게 되는데 이후부터 학도암 관세음보살좌상은 첫째 사랑을 얻고, 둘째 자녀를 얻으며, 셋째 자녀가 성공하는 세가지 가피를 주는 것으로 유명해 지게 된다. 후일 고종은 명성황후 시해 후 1년 뒤 덕수궁에서 홍릉까지 전화를 연결해 매일 아침 명성황후의 무덤에 답변없는 안부 전화를 걸었다. ‘양인들이 만든 이 전어기(전화기의 옛말)라는 것은 멀리있는 사람의 소식도 전해준다 하더니 하늘까지는 닿지 않는가 보오.’라며 슬퍼하였다. 사랑 얻길 기원하며 학도암 관세음보살좌상을 조성하였는데 그 사랑은 죽음 이후까지도 이어졌다.
마애관세음보살 좌상의 문화재적 특징
조선시대 최고의 수려한 아름다움을 간직
마애관음보살좌상은 학도암 뒤쪽으로 커다란 바위 면에 13.4미터에 이르는 크기로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에 조성된 마애불은 열점을 넘지 않는다. 핍박 받았던 조선 불교의 어려웠던 상황을 알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왕실의 후원으로 조성된 관세음보살 좌상은 마애불이지만 회화적 아름다움을 간직한 빼어난 수작이다. 양각의 융기된 선묘로 새겨진 이 관음보살상은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좌상으로 화불이 있는 보관 장식이나 칠보문, 옷 주름 표현 등에서 불화의 도상을 그대로 바위에 옮겨 놓은 것처럼 보인다. 특히 보관 양쪽으로 뻗어나온 관대에 구슬처럼 달린 마름모 모양의 사슬 장식이 양어깨 위에 늘어져 있는 점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 관음보살상의 얼굴은 가늘고 긴 눈과 뭉툭한 코, 작은 입술 등으로 인해 새침한 인상을 준다. 짧은 목에 표현된 형식적인 삼도는 가슴 아래쪽으로 내려가 있다. 양쪽 어깨에는 대의를 걸치고 있으며 안쪽의 내의(內衣)는 가슴 위에 수평으로 입고 그 위에 띠 매듭을 표현하였다. 두 손은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으며, 오른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사뿐히 얹어놓고 왼손은 가슴 앞으로 올려서 들고 있다.
이 보살상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가슴 가운데에 있는 작은 사각형의 홈인데 복장 감실의 흔적으로 짐작된다. 복장이란 불상을 조성할 때 불상 내부에 부처를 상징하는 사리와 불경 등을 넣는 것으로 부조상인 마애불에 그러한 예가 남아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이와 같이 마애불의 가슴부분에 구멍이 있는 예는 전라북도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에서 볼 수 있다.
마애불 왼쪽 벽면에 새겨진 명문에는 불화의 화기와 같이 증명비구 혜묵을 비롯하여 축문을 염불한 통주, 마애불을 조각한 금어의 이름이 보이는데 마애불의 조각가를 불화가인 금어와 동일하게 여긴 점이 흥미롭다. 50여 글자가 되는 명문에 의하면, 1870년에 명성황후가 불심으로 발원하여 조성했다는 내용과 함께 1878년에 학도암을 중창하면서 한씨 일가의 시주로 장선화상 등이 마애불상을 보수했다고 되어 있다. 이 마애관음보살상은 조선 말기의 불상이지만 왕실에서 후원하여 조성된 만큼 조선 말기까지 계속 이어지는 불교조각의 전통을 볼 수 있으며 조성 명문이 남아 있어서 자료적인 가치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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