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石窟庵)은 도봉산에 있는 암자로 673년(문무왕 13) 의상 대사(義相大師)가 창건하였다.
조선 시대에 석굴암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는 두 차례의 병란(兵亂)을 거치는 동안 외적(外賊)에 대한 방어와 인근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수호하는 병영 사찰(兵僧寺刹)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석굴암 주변의 가마터에서 외적 방어에 필요한 건물이나 방어물에 필요한 기와와 그릇 등을 만들었다.
창건 이후 석굴암은 6차례나 중창(重創)과 폐사(廢寺)의 과정을 겪었다. 세세한 과정은 기록의 미비로 알 수 없다.
다만 암자 주변에서 발견된 ‘순치(順治) 6년 [1649]’ 명문(銘文)의 암악새를 통하여 병자호란이 발발하였던 인조(仁祖) 말과 효종(孝宗) 즉위 초에 석굴암의 중창이 진행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935년에는 당시 석굴암의 화주(化主)였던 승려 강응담(姜應潭)이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거사 김병용(金秉龍)의 시주로 전각(殿閣)을 중축(重築)하였다는 말이 전한다.
김병용은 석굴암 증축과 함께 관세음보살 탱화(觀世音普薩幀畵) 한 본을 헌납하기도 하였다.
석굴암 기도 법회는 매월 음력 초하루 법회, 매월 음력 축일 저녁 9시 산신 철야 기도, 매월 음력 보름 나한전 인등 기도가 있다. 봉사 활동으로는 매주 일요일[동절기 제외]에 국수 공양을 한다.
석굴암은 법당인 만월 보전(滿月寶殿), 오백 나한전(五百羅漢殿), 범종각(梵鐘閣), 요사(療舍), 석굴 등의 전각이 자리 잡고 있다.
나이가 많거나 직장 생활로 바빠 산에 올라오기 힘든 사람들을 배려하여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에 포교원을 개원하여 언제든지 기도 및 법회에 동참하도록 하였다.
2012년 현재 주지는 승려 유방이고 신도 수는 2,000명 이상이다.
암자 주변에서 대량으로 청자와 백자(白磁)·분청사기(粉靑沙器) 파편들이 발견되었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뿐만 아니라 19세기에 제작된 것들도 발견되고 있어 석굴암의 오랜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지금도 석굴암 주변에 산재해 있는 청자 조각[靑磁片]은 고려 중후기에 해당하는 1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굴암의 승려 정재는 석굴암의 역사와 숨결을 간직하고 있는 유물들을 전통문화 보존과 계승을 위해 만월 보전에 조성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기에 제작된 산신도(山神圖), 복원 불사(復元佛事) 과정에서 출토된 13세기 후반에 제작된 청자 대접, ‘순치 6년’ 명문 기와를 2003년 10월 1일 서울 역사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석굴암 천룡도
지정번호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50
지정일 : 2013. 12. 26.
크지 않은 작은 규모(49×55cm)에 간략한 내용의 신중도로서 人法堂에 봉안했던 불화로 판단된다. 등장 존상 및 화기 중의‘天部會幀’이라는 내용으로 보아 제석범천도 불화 중 위태천 중심의 天龍圖임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위태천은 여덟의 무장한 모습의 팔부중을 거느리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 불화에서는 두 천부중 만을 나타내고 있으며, 위태천의 자세 또한 立像이 아닌 坐像으로서 法床 위에 반가 자세로 걸터 앉아 왼발을 내려딛고 있는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작은 규모일지라도 필선이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며, 색채 또한 적․녹색 위주로 조화로움을 볼 수 있으며, 활기찬 각 존상의 신체 비례 역시 6等身대로 세련미를 보인다.
1745년 화승‘海淸’이 그린 이 불화는 화기의 훼손으로 봉안 사찰을 잘 알 수 없으나 조성시기가 분명하고‘齋主’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재를 지내기 위해 조성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천룡도로서, 18세기 중반 불화의 양식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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