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사(蓮華寺)는 서울시 동대문구 회기동 천장산 자락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직할 말사이다. 서울 동부의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회기동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묘소인 회릉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그 터에는 그녀의 원찰로 지어진 조그마한 절이있다.
이 곳은 일체중생의 근본자성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청정한 연꽃과 같다는 의미에서 연화사라 불려 졌는데, 이후 묘련이라 불려지기도 하였다. 이는 모두 연꽃의 청정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연산군이 생모 윤씨의 명복을 빌고 비명에 간 원혼을 천도하기 위한 도량으로서, 연꽃의 기능 중 화생(化生)의 의미로 붙인 이름인 듯하다.
연화사는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의 회묘를 회릉으로 승격시킬 때 함께 조성된 능의 원찰로 출발하였다고 전해진다. 원찰이란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 이후 주로 왕실을 비롯한 귀족층의 발복이나 기원을 빌어주던 사찰을 총칭한다. 연화사는 이후 연산군의 폭정으로 각지의 사찰이 파괴되면서 사라졌다가 1725년(영조1) 천장산에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 왕후 어씨가 안장된 의릉을 만들면서 이 절도 복구되어 의릉의 원찰이 되었다. 이 후 1882년 임오군란 때 불 타버린 것을 이듬해 정담 스님이 중건하였다. 1993년 이후부터 산신각․독성각․요사채․법당․미륵전 등이 중건되어 오늘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한편 1993년에 미륵전을 중건하고자 해체하였을 때 1884년(고종21) 10월에 쓰여진 미륵전 상량문 『천장산묘련사중건기』가 발견되었다. 이로써 연화사의 원래 이름이 묘련사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즉 묘련이라는 스님이 이 절에서 불사를 하였는데 스님의 성품이 너무 좋아 사람들이 스님의 법명을 따라 묘련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후 1900년 절 이름을 연화사로 다시 복원하였다.
현재는 회릉이 서삼릉으로 이전되고, 그 자리에 경희여중ㆍ고등학교가 설립되면서 옛 모습은 찾을 수 없지만, 그 터 아래 조그마한 사찰이 있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은 울창한 수풀에 둘러싸인 전형적인 사찰의 모습이 아닌 빌딩숲에 인공적으로 뭍힌 도심속 사찰로 그 모습이 변모했지만, 사찰에는 폐비 윤씨는 물론 선의왕후의 원찰로서 많은 상궁들이 조성한 불화들이 남아 있어 왕실 원찰로서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시냇가를 건너 가파른 고개를 지나 당도하는 옛 가람의 모습은 없지만, 도심 속 골목길을 따라 약간의 나무가 있는 곳에서 만날 수 있는 공원같은 곳 - 연화사에서 세속에 찌든 근심을 잠시라도 떨쳐 버릴 수 있으면 좋을 듯하다.
1동네 1작은도서관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연화사 법당 내 회기마루 작은도서관은 동대문구에서 책을 만나는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연화사 아미타괘불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42호인 아미타괘불도는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는 아미타불괘불도로서, 삼존불 하단으로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 문수동자와 보현동자가 배치되어 있다.
칠성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43호로 대한제국기에 제작된 것으로, 치성광불이 두 손을 포개어 금륜을 받쳐 들고 있다.
천수관음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44호인 천수관음도는 조선시대에 조성되었으며, 바다 가운데로 솟아오른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 천수천안의 관음보살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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