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번호 : 보물 제1820호
지정일 : 2014년 3월
시대 : 고려시대, 13~14세기
재료 : 화강암
소유자 : 옥천암
보도각백불의 정확한 명칭은 '서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서울 玉泉庵 磨崖菩薩坐像)'이다. 흰색의 호분(胡粉)이 전체적으로 두껍게 칠해져 있기 때문에 백불(白佛) 또는 해수관음(海水觀音)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불상에 호분을 칠하여 백불로 부르고 있는 예로는 이 불상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서울 안암동 보타사 마애보살좌상과 안성 굴암사 약사여래좌상 등이 있는데 특히 보타사 마애보살좌상과 양식적으로 유사하다.
보도각백불은 홍지문 아래 홍제천 개울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신라시대 절인 장의사(藏義寺)의 경내로 추정되나 현재는 옥천암이라는 작은 암자만 남아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도읍을 정할 때 이 마애불상 앞에서 기원했다고 하며, 조선 후기에는 흥선대원군의 부대부인인 민씨가 고종의 천복을 빌었다고 하는 등 왕실과 관련된 관음보살도량으로 유명하다.
현재 마애불상은 근래에 세워진 정면 1칸, 측면 2칸의 보도각이란 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마애보살상은 커다란 사각 형태의 바위면에 저부조로 새겨져 있는데, 바위의 남면은 안쪽으로 움푹 들어간 내곡(內曲)된 구조로 되어 있다.
바위의 왼쪽 면과 뒷면에는 소원을 빌면서 바위를 갈았던 붙임바위가 남아 있어 민간 신앙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마애보살상은 바위의 크기에 맞게 양 무릎을 넓게 벌리고 결가부좌한 자세로 앉아 있다. 머리에 쓴 원통형의 보관(寶冠)이나 목걸이 장식. 그리고 대의(大衣) 안쪽으로 보이는 대각선을 입혀진 내의(內衣)의 표현에는 금색을 칠하여 장식성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또한 관의 좌우에 뻗어 있는 관대(冠帶)에도 타원형의 금판(金板)이 달려 있어 화려함을 잘 보여주고 있으나 조각기법에서 정교하지 못하고 투박하여 관 밑으로 내려온 머리카락은 어깨위에서 팔꿈치까지 내려와 있다. 이 불상은 머리에 쓴 보관으로 보아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으로 짐작되지만 대부분의 관음보살이 보관에 화불(化佛)을 새기는 것과 달리 이 보살상의 보관은 세 칸으로 나뉘어 각각 그 중심과 모서리에 연꽃을 장식하였다.
얼굴은 둥근 편으로 가늘고 긴 눈과 작은 입이 표현되어 있어 고려시대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옷 주름은 전반적으로 부드럽게 흘러내리면서 형식적으로 처리되었다. 손에는 지물(持物)을 들지 않고, 오른손은 가슴 앞으로 올려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고 왼손은 무릎 아래로 내려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대고 있다.
보도각 백불은 양식적 특징으로 보아 대체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관음보살상으로 추정된다.
관세음보살은 중생들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구제하는 매우 대중적인 보살로 관음보살의 보살행에 대해서<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에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그 내용은 무고한 형벌을 받을 때,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맹수에 쫓길 때, 화재를 만났을 때 등 어떠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관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도움을 주는 자비의 보살행을 실천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관음보살은 민간에서 많은 신앙을 받고 예배되었던 불상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이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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