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힘은 청정 수행의 풍토이고, 청정 수행의 핵심은 선방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동화사 금당선원은 한국불교의 선맥을 이은 역대 선사들을 배출해 낸 선 수행의 중심지다.
1900년 경허 스님이 금당선원을 개원한 이후 동광, 남옹, 고암, 인곡, 석우, 승찬, 효봉, 구산, 향곡, 서옹 스님 등 수많은 고승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1925년에는 동광(東光) 스님이 금당선원에서 안거했다. 이때 남옹(南翁), 고암(古庵), 인곡(仁谷) 스님 등이 함께 정진했다고 한다. 1927년에는 조실 허운송(許雲松) 스님이 여기서 후학을 지도했다.
성철(性徹, 1912~1993) 스님이 29세 되던 1940년 겨울 동안거 때 조주 선사의 ‘무(無)’자 화두를 타파해 오도송을 읊었던 곳도 바로 금당선원이다.
1942년에는 남옹 스님이 입승을 맡고 9~14명의 납자들이 금당선원에서 안거하였다. 1943년에는 15명, 이듬해에는 학봉(學峯) 스님과 17명이 안거하였다. 정화운동 시절 조계종 3대 종정을 지낸 석우 스님 역시 1956년부터 1958년 2월까지 금당선원을 이끌었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는 송광사 조계총림의 방장을 지낸 승찬(僧讚) 스님이 선원의 입승을 맡았다.
이처럼 금당선원은 일세를 풍미한 많은 선지식들이 거쳐 간 곳이다. 효봉 스님은 1958~1959년 이곳 선원에서 수행하고, 다시 1963년부터 1966년 5월까지 선원의 조실방인 미소실(微笑室)에서 후학을 길렀다. 당시 구산(九山, 1909~1983) 스님도 주지를 맡아 선원에서 정진하였다. 1970년에는 서옹(西翁, 1912~2003) 스님이 조실을 맡았고, 1976년에는 큰방을 증축하여 대중의 선방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후 1977년까지는 향곡 스님이 조실로서 수행을 지도하였다. 1980년 동화사는 종단의 수좌도량으로 지정되었다. 수좌의 대표로서 범룡 스님이 주지 및 선원의 선덕 소임을 맡고, 관응(觀應, 1910~2004) 스님이 조실을 맡았다.
수많은 제국(帝國)이 부침을 거듭했어도 청빈과 가난의 공동체인 승가(僧伽)는 여전히 싱싱하게 살아있다. 그것은 일상에 매몰되지 않고 치열하게 수행하는 스님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불교의 중심을 이루는 영남불교의 성지로 산문을 연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은 오늘도 ‘자신의 본 마음의 성품’을 보기 위해 수행자들이 치열하게 정진하고 있다.
금당선원의 역사
금당선원 자리는 통일신라 때 금당암이 있던 곳으로 832년 심지(心地) 왕사가 동화사를 중창했을 당시의 영역도 바로 이곳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동화사는 현재의 수마제전 부근에서 작은 암자로 출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때 금산사 진표 율사로부터 법주사 영심 대사로 전해진 불골간자를 심지 왕사가 받아 팔공산에 와서 던졌고, 그 불골간자가 떨어진 자리에 동화사를 지었다고 한다. 바로 지금의 금당선원 자리다.
동화사에 선원이 생긴 것은 400여 년 전으로 추정되지만, 금당선원이라는 정식 이름으로 개원한 것은 1900년 경허 스님에 의해서다. 경허 스님은 한국불교의 근현대를 개창한 대선사로 당시 극락전, 수마제전, 청풍당 등의 전각으로 구성된 금당암(극락전)에서 납자들을 지도하며 한국의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
역대 선지식의 중요한 수행처였던 금당선원은 한동안 문을 닫았다가 1994년 현 방장스님이신 진제(眞際) 대선사께서 금모(金毛) 스님 등 수좌들과 힘을 모아 다시 개원하였다. 당시 주지였던 무공(無空) 스님이 적극 후원하여 30명 안팎의 스님들이 모여들었다. 1996~1997년에는 진허(眞虛) 스님이, 1998년에는 지해(智海) 스님이 선원장을 맡았다. 1999년부터 2014년까지는 영진스님, 지환스님, 효광스님이 선원장을 맡았으며 그 이후로 지용(智勇)스님이 선원장을 맡고 있다. 그리고 현 종정예하이신 진제 대선사께서 1994년부터 지금까지 조실로 계신다.
1900년 경허 스님이 금당선원을 개원한 이후 동광, 남옹, 고암, 인곡, 석우, 승찬, 효봉, 구산, 향곡, 서옹 스님 등 수많은 고승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1925년에는 동광(東光) 스님이 금당선원에서 안거했다. 이때 남옹(南翁), 고암(古庵), 인곡(仁谷) 스님 등이 함께 정진했다고 한다. 1927년에는 조실 허운송(許雲松) 스님이 여기서 후학을 지도했다.
성철(性徹, 1912~1993) 스님이 29세 되던 1940년 겨울 동안거 때 조주 선사의 ‘무(無)’자 화두를 타파해 오도송을 읊었던 곳도 바로 금당선원이다.
1942년에는 남옹 스님이 입승을 맡고 9~14명의 납자들이 금당선원에서 안거하였다. 1943년에는 15명, 이듬해에는 학봉(學峯) 스님과 17명이 안거하였다. 정화운동 시절 조계종 3대 종정을 지낸 석우 스님 역시 1956년부터 1958년 2월까지 금당선원을 이끌었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는 송광사 조계총림의 방장을 지낸 승찬(僧讚) 스님이 선원의 입승을 맡았다.
이처럼 금당선원은 일세를 풍미한 많은 선지식들이 거쳐 간 곳이다. 효봉 스님은 1958~1959년 이곳 선원에서 수행하고, 다시 1963년부터 1966년 5월까지 선원의 조실방인 미소실(微笑室)에서 후학을 길렀다. 당시 구산(九山, 1909~1983) 스님도 주지를 맡아 선원에서 정진하였다. 1970년에는 서옹(西翁, 1912~2003) 스님이 조실을 맡았고, 1976년에는 큰방을 증축하여 대중의 선방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후 1977년까지는 향곡 스님이 조실로서 수행을 지도하였다. 1980년 동화사는 종단의 수좌도량으로 지정되었다. 수좌의 대표로서 범룡 스님이 주지 및 선원의 선덕 소임을 맡고, 관응(觀應, 1910~2004) 스님이 조실을 맡았다.
수많은 제국(帝國)이 부침을 거듭했어도 청빈과 가난의 공동체인 승가(僧伽)는 여전히 싱싱하게 살아있다. 그것은 일상에 매몰되지 않고 치열하게 수행하는 스님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불교의 중심을 이루는 영남불교의 성지로 산문을 연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은 오늘도 ‘자신의 본 마음의 성품’을 보기 위해 수행자들이 치열하게 정진하고 있다.
금당선원의 역사
금당선원 자리는 통일신라 때 금당암이 있던 곳으로 832년 심지(心地) 왕사가 동화사를 중창했을 당시의 영역도 바로 이곳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동화사는 현재의 수마제전 부근에서 작은 암자로 출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때 금산사 진표 율사로부터 법주사 영심 대사로 전해진 불골간자를 심지 왕사가 받아 팔공산에 와서 던졌고, 그 불골간자가 떨어진 자리에 동화사를 지었다고 한다. 바로 지금의 금당선원 자리다.
동화사에 선원이 생긴 것은 400여 년 전으로 추정되지만, 금당선원이라는 정식 이름으로 개원한 것은 1900년 경허 스님에 의해서다. 경허 스님은 한국불교의 근현대를 개창한 대선사로 당시 극락전, 수마제전, 청풍당 등의 전각으로 구성된 금당암(극락전)에서 납자들을 지도하며 한국의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
역대 선지식의 중요한 수행처였던 금당선원은 한동안 문을 닫았다가 1994년 현 방장스님이신 진제(眞際) 대선사께서 금모(金毛) 스님 등 수좌들과 힘을 모아 다시 개원하였다. 당시 주지였던 무공(無空) 스님이 적극 후원하여 30명 안팎의 스님들이 모여들었다. 1996~1997년에는 진허(眞虛) 스님이, 1998년에는 지해(智海) 스님이 선원장을 맡았다. 1999년부터 2014년까지는 영진스님, 지환스님, 효광스님이 선원장을 맡았으며 그 이후로 지용(智勇)스님이 선원장을 맡고 있다. 그리고 현 종정예하이신 진제 대선사께서 1994년부터 지금까지 조실로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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