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사 아래 있는 오대산 사고(史庫)는 조선 후기 오대 사고의 하나인 외사고로 오대산 사고가 설치된 것은 1606년(선조 39년) 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1605년 10월 재인쇄된 실록의 초고본을 봉안할 장소로 오대산 상원사를 선정하였다가, 다시 월정사 부근에 사각(史閣)을 건립하여 초고본 실록을 보관하였다.
오대산 사고의 수호사찰인 월정사는 사고에서 너무 떨어져 있으므로 실제로 암자격인 영감사에서 수호하기 때문에 영감사를 일명 사고사라 하였다.
오대산 사고의 실록 봉안은 태조 대부터 명종대까지의 실록 초고본을 1606년 봉안한 뒤 1805년(순조5년) 에 '정조 실록'을 봉안하기 까지 59회 가량 행해졌다.
오대산 사고 실록을 수호하는 총섭은 월정사의 주지였다. 설치시 수호군(守護軍) 60명, 승군(僧軍) 20명이 수직(守直) 하였다.
1910년 국권을 잃은 뒤 오대산 사고의 서책은 이왕직(李王職) 도서관에서 관리하였다.
그 뒤 이 도서는 조선 총독부 취조국에서 강제로 접수하여 1913년 10월 동경제국대학 부속 도서관으로 옮겨 놓았다.
당시 도서를 운반했던 촌로에 따르면 실록을 마차에 싣고 진부로 옮겼다가 다시 강릉으로 옮긴 후 배로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실록은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어 버리고 마침 대출되었던 마흔 다섯 책만이 화를 면했다.
그리고 소잔본(燒殘本) 이십칠 책은 경성 제국대학에서 옮겨와 현재 서울 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적 제37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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