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봉사(鳴鳳寺)는 신라 헌강왕 원년(875) 두운 대사(杜雲大師) 가 개산하였고, 고려 태조 20년(937) 에 조응 대사(祖膺大師) 가 중수하였다. 절의 동북쪽에는 고려 태조의 명으로 세운 자적선사능운탑비(慈寂禪師凌雲塔碑) 가 있어 고려시대에 국가적 비호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이 비는 당대의 학자 최언위(崔彦僞) 가 비문을 지었는데 이두(吏讀)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 이후의 사적은 자세치 않고 조선 현종 3년(1662) 에 화재를 입어 당우가 소실되었으나 사승이 중창하였고, 동왕 9년(1668) 에 다시 소실되었으나 영조 11년(1735) 에 신익 대사(信益大師) 등이 화주가 되어 중창하였다. 특히 이때는 문종태실을 그리고 정조 9년(1785)에는 사도세자의 태실을 봉안하기도 하였으나, 그이후 환봉(還奉) 하였다.
또 순조 7년(1807) 행선 대사(幸善大師) 가 당우를 중수하였으나 1848년에 산사태로 인하여 법당과 전각, 요사등 500여 간이 일시에 다 매몰되었다가 이후 다시 일부 복원되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는 사세가 극도로 위축되어 큰절과 암자들이 거의 훼손되어 법화암과 내원암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마저 6.25사변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그후 1952년에는 당시 주시 변도천화상이 동료사(東寮舍) 1동을 복원하여 거처하다가 1955년에는 주지 서만준 화상이 법당 1동과 요사 1동을 건립하였고,
다시 1960년에는 명봉 일대의 주민이 힘을 모아 내원암 터에 법당과 요사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과 2동의 요사가 있다. 이들 가운데 대웅전은 정면 3간, 측면 2간이며, 팔작지붕, 다포형식으로 총 30평이다.
2동의 요사 가운데 하나는 ㄷ자형이며, 정면 6간, 측면 3간으로, 총 36평이다. 나머지 한 채는 정면 6간, 측면 4간의 맞배지붕이며, 총 34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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