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천사(寒天寺)는 신라 문무왕 18 년(678) 에 의상 조사가 개산하였다. 그 이후의 사적은 전해지지 않아 잘 알 수 없으나 사중(寺中) 에 현전하는 탑상(塔像), 즉 석탑과 철불의 양식으로 보아 신라 말기에는 사세가 더욱 왕성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사전(寺傳)하는 <한대사법당신창상량문(寒大寺法堂新創上樑文)>(1803년) 또는 <한대사연화기(寒大寺緣化記)> (1875년) 등 현판기문에는 한결같이 이 절을 한대사(寒大寺)라 하였다. 그러다가 1900년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한천사(寒天寺) 로 바뀐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같은 사명의 변경은 여러 각도에서 고찰될 수도 있지만 몇 가지 전언이 있다.
먼저 <한대사법당상량문(寒大寺法堂上樑文)> 또는 <현판기문>에 따르면 의상 조사가 영주 부석사 창건 당시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덮기만 하면 매양 넘어지므로 이를 관하여 본 즉 소백산맥의 이곳, 말이 바람을 가르고 힘차게 달려가는 주마형국(走馬形局) 에 절을 세워 부석사의 바람을 잡아야 함을 알고서 한천사를 건립하였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그리고 1988년 가을 사내 조경공사 중 발견된 금동자물쇠 등은 매우 중요한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이들은 곧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제1141호 한천사출토금동(寒天寺出土金銅) 자물쇠 외 일괄(4점) 로 지정되었다(자물쇠 3점 ; 길이 30cm, 폭 13cm, 길이 18cm, 폭 4cm, 길이 18cm, 폭 5cm. 청동반자 1점 ; 지름 39cm, 구경 23cm, 두께 13cm). 그 외에도 파손된 용뉴(龍紐)(높이 11cm, 폭 15cm) 1점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고려시대의 귀중한 유품이다.
이로 인하여 고려시대의 왕성하였던 한천사의 사세를 짐작할 수 있으며, 이들 유품은 현재 본사 직지사 유물관에 보관되었다.
다만 현전기록으로는 조선 순조 3년(1803) 근천 대사(謹天大師)가 화주하여 법당을 중수하였고, 동왕 8년(1808) 에는 역시 근천 대사가 선당을 중건하였다. 그리고 1932년에는 주지 취운 대사((翠雲大師) 가 요사를 중건하였으며 1934년에는 주지 덕기 대사(德奇大師) 가 법당을 중건하였다.
현존 건물은 대웅전과 산신각, 그리고 2동의 요사가 있다. 약사유리광전은 정면 3간, 측면 2간의 팔작지붕, 총 6.5평이다.
산신각은 대웅전 서북쪽에 떨어져 있으며 정면 2간, 측면 2간으로 내부에는 독성상(30 X 25cm), 그리고 산신탱(134 X 120cm) 을 봉안하였다. 대웅전 앞에 위치한 삼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제5호) 은 신라 전형석탑 양식인 2중기단 위에 3층의 옥개석을 지니고 있으나 통일신라 말기 양식으로 짐작된다. 총 높이 360cm, 기단 폭 228cm이다.
철조여래좌상은 신라 말기에 유행한 철조불상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광배와 대좌가 결실되었으나 당당한 체구, 우아한 인상 등은 바로 신라불상의 말기적 요소를 잘 반영한 수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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