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암 獅子庵
사자암(獅子庵)은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609-1번지 미륵산(彌勒山)에 자리한다. 미륵산은 일명 용화산(龍華山)이라고도 한다. 사자암은 백제시대의 고찰로서 사적 제150호로 지정된 미륵사지(彌勒寺址)의 주산(主山)인 미륵산 장군봉의 동남쪽 계곡 해발 320m의 8부 능선 상에 위치한다. 미륵사 방향에서 사자암을 찾는 사람들은 미륵산을 거의 다 올라 절을 향해 꺾어 내려가노라면 절 입구 다 와서 양쪽에 바위가 있고 그 사이로 좁은 공간이 나있는 석문(石門)을 지나야만 했는데 이 석문은 예로부터 사자암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이 사자암은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사자사(師子寺)’명 명문와당이 발견되어 『삼국유사』 「무왕」조에 기록된 것과 같이 지명 법사(知命法師)가 거주한 사자사(師子寺)임이 확인되었다. 『삼국유사』 「무왕」조의 기록은 익산 미륵사의 창건 연기설화를 기록한 것이다.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혼인해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오른 무왕(武王)이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 법사를 찾아가던 중 용화산 아래 연못에서 출현한 미륵삼존을 뵙는 인연으로 미륵사를 창건하게 된다. 미륵사 창건 과정에서 지명 법사는 신통력을 발휘하여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허물어 못을 메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볼 때 사자사의 창건은 백제시대 미륵사의 창건보다 앞선 시기임을 알 수 있다. 「지명법사와 사자암 · 미륵사」 참고
그 뒤의 연혁에 대해서는 문헌자료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단지 발굴조사에서 백제시대의 기와편들과 함께 통일신라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끊임없이 법등을 이어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자사(師子寺)가 언제 지금의 사자암(獅子庵)으로 바뀌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지치이년(至治二年)」명의 명문와당과 함께 「사자사」에 관련된 기록을 참고해 볼 수 있다. 지치 2년은 고려 충숙왕 9년(1322)에 해당하므로 고려시대까지는 사자사로 불렸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사자암(獅子庵)이 용화산 위에 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사자암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조선시대 후기에 필사된 읍지를 기초로 하여 일제강점기에 영인(影印) 편찬된 『익산군지』에 ‘사자암(獅子菴)은 용화산 정상에 자리한다. 승도(僧徒)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기준(箕準)의 스승 지명 법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기준이 살던 때는 불교가 아직 우리나라에 전파되지 않았을 무렵이므로 그 말은 허황되다 할 것이다. 좌우 암벽에 들고 끊은 흔적이 있는데, 이것은 창건 당시 터를 잡기 위해 바위를 들었던 자리다. 이곳에 올라보면 시야가 탁 트여있어 경승지로 손꼽는다.’는 내용이 있어 조선 후기 이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871년과 1875년에 각각 편찬된 『호남읍지』에도 ‘사자암은 미륵산 기음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항일군(抗日軍)의 근거지가 되어 일본군에 의해 폐허화되었으며, 그 무렵 미륵산에는 사자암을 중심으로 죽사(竹寺)․수백암(水栢庵)·만방암(萬房庵)·운혈사(雲穴寺)·명적암(明寂庵)·천정암(天定庵)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최근에는 혜초 스님이 1998년 삼성각과 공양방을 해체하고 요사·객실을 새로 지었으며 1999년 10월부터 법광 주지스님이 주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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