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일암은 1,300 여 년 전 선덕여왕 13년(불기1671년, 서기 644년) 원효 대사께서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시고 현재의 관음전 자리에 원통암(圓通庵)이란 이름으로 창건하신 사찰입니다.
북방(선 불교)과 남방(경전 불교)의 불교를 합쳐 선교 합종을 이룩한 원효대사(617 ~ 686)는 요석공주와 3일간의 애정의 결과로 설총을 잉태시키고 파계했다는 허전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 만행에 나섰다가 깨개(들깨가 많은 포구, 현 임포마을)에 다다랐습니다. 바다의 비릿함도 없고, 겨울이면 아름다운 동백이 피고, 사시사철 숲이 울창하여 한겨울의 거센 바람도 막아줄 수 있는데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지나가셨다는 세존도가 바라보여 기도처로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샘이 없어 되돌아 나오다가 아쉬워 돌아보니 거북이 바다로 들어가는 형세임을 보고 바위마다 거북 등처럼 생긴 문양이 있던 것이 생각나 거북이 소변볼 만 한곳을 찾아보니 샘물이 있어 암자를 짓고 열심히 수행 정진하던 중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고 암자 이름을 원통암이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 후 고려 광종 9년(서기 950년) 윤필대사(潤筆大師)께서 원통암의 형세를 보시고 금오암(金鰲菴)이라 개명하셨고, 조선 숙종 41년(1715년)에 돌산 주민들이 논과 밭 등을 시주하여 인묵 대사께서 관음전 아래에 대웅전을 지으시고 금불상을 조성 봉안하시고, 해를 향하는 암자, 대일여래(비로자나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뜻의 향일암으로 개명하셨습니다. 1949년에 편찬된 여수지에 의하면 ‘백 년 전에 지금 이곳으로 옮겨 건축하고 기해년에 이름을 향일암(向日庵)으로 바꾸었다. 암자가 바위 끝에 붙어 있고 계단 앞은 벼랑인데, 동쪽으로 향하고 있어 일출을 바라볼 수 있어서 향일(向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라고 합니다.
헌종 13년(서기 1849년) 잠깐 책육암(策六庵)으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이 책육암에는 수행자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여섯 가지 경계심이 들어 있습니다. 책육이란 육근(六根), 즉 눈과 귀, 코, 입, 피부, 뇌의 옳지 못한 행위를 경계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또 거북신앙과도 연결이 됩니다. 거북은 네 다리와 목, 그리고 꼬리가 있습니다. 이를 합하면 여섯이 됩니다. 사람의 육근을 여기에 비유하여 거북이 위급할 때 이 여섯 가지를 모두 감추고 몸을 사리는 것처럼 우리도 조심해서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일제 강점시기 경봉 스님께서 이곳에서 주석하실 때 향일암 근처의 기암괴석들에 거북 등 무늬의 육각 문양이 있는 걸 보시고 영구암(靈龜庵)이라 하셨습니다. 1925년에는 최칠룡(崔七龍) 스님께서 산신각, 칠성각, 취성루, 익랑을 건립하였고, 1961년에는 박영주(朴永柱) 스님께서 전쟁으로 소실된 법당과 몇몇 전각을 중수 하였습니다. 또한 1970년 4월에는 박천수(朴千壽) 스님께서 취성루를 개수하셨고, 1984년에는 종견 큰스님께서 종각과 칠성각을 중창하였고, 1986년에는 대웅전, 1987년에는 삼성각, 1990년에는 용왕전, 1991년에는 관음전을 각각 중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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