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시 성산면 보현길 396 보현산(普賢山)에 자리한 보현사(普賢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月精寺)의 말사로서 보현사는 대관령과 선자령 바로 아래에 자리하여 산세가 높은 만큼 주변 경관이 뛰어나고, 대웅전·영산전·지장전·삼성각.금강루 등의 전각들이 법식에 맞게 자연과 잘 어울려 있어 산사의 그윽한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다.
강릉IC에서 나와 오른쪽 성산(城山) 방향으로 2㎞ 가량 직진하면 성산면 삼거리가 나온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대관령 방면의 옛길을 따라 가면 된다.
고속도로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서 지나치기 쉬우므로 주의해야 한다.
대관령 옛길을 따라 가다 보광리로 가는 갈림길에서 오른쪽 계곡을 끼고 4㎞가량 들어가면 보광초등학교(지금은 폐교됨)가 보이는 다리가 보이고 이 다리를 지나면 이 곳이 보광리 입구이다.
마치 영화 속에서 한적한 시골마을 찾아가는 장면을 연상하는 길들이 이어진다.
보광리 입구에서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완만한 산길을 5㎞ 정도 올라가면 보현사 입구를 알리는 석물들과 부도밭이 나타난다. 이제 약 300m가량만 더 나아가면 아름다운 사찰, 보현사가 나타난다.
보현사의 창건기에 대하여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보현보살이 창건하셨다는 설화가 전하는 보현사는 650년(진덕여왕 4년)에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의해 창건되었다.
또한 889년(진선여왕3년) 낭원대사(朗圓大師)에 의해 지장선원(地藏禪院)이란 이름으로 크게 중창되면서 보현사가 제대로 된 사찰의 모습을 갖추고 번창하게 되었다.
낭원대사(朗圓大師)는 사굴산문의 개산조(開山祖)이신 범일국사(梵日國師)의 법맥을 이은 큰 스님이다. 범일국사가 889년에 입적하자 부도와 비석을 세우고 민규 알찬의 지원 아래 보현사에 주석하게 되었다.
보현사에는 대웅보전(강원도 문화재자료 제 37호), 삼성각, 영산전이 예부터 전해오고 있으며 대웅보전 내에 모셔진 아미타삼존불상은 조선후기에 조성된 원만상으로 불교신도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친근한 상을 갖추고 계셔서 많은 참배객이 이어지고 있다.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은 조선 초기의 건축 양식으로, 영동 지방에서는 가장 오래된 절이라고 한다.
또한 지장전, 금강루, 동정각, 보현당, 수선당, 지장선원(템플스테이), 목우당, 오관당 등의 전각들이 있다.
소장 문화재로는 940년에 세워진 낭원대사탑(보물 제191호), 낭원대사탑비(보물 제192호), 보현사 십육나한도(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71호), 목조보살좌상(보현보살-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73호)와 보현사 대웅전(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7호, 조선 후기) 등이 있다.
이 외에 대웅보전 안에는 석조아미타삼존불상(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67호)이 봉안되어 있고, 1822년(도광 2년) 영산회상도 후불탱화와 1799년(가경 4년 기미) 지장시왕탱화, 그리고 나한전에는 1851년(함풍 원년)에 조성한 아미타후불탱화가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3점 모두 1988년과 1991년에 도난당하였다.
그 외 경파당대선사진영, 화곡당대사진영이 있다. 또한 조선 후기·말기의 석종형 부도 20기가 있으며, "乾隆五十九年甲寅 八月日江陵普賢寺 大鐘記(건륭오십구년갑인 팔월일강릉보현사 대종기)"라고 기록된 동종(1794년)이 강릉 시내 관음사(포교당)에 있다.
보현사 역사
보현사(普賢寺)는 650년(신라 진덕여왕 4년)에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보현사의 창건에 관하여는 재미난 설화가 따로 전해지고 있다.
신라시대에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천축국(天竺國)에서 돌로 된 배를 타고 오셔서 강릉의 동남쪽 남항진(南項津) 해변에 당도하여 문수사(文殊寺)를 세웠다고 한다. 문수사는 현재 강릉의 한송사(寒松寺)지로 알려진 곳이다.
절이 완공되자 보현보살은 말하였다. "한 절에 두 보살이 함께 있을 필요가 없으니, 나는 활을 쏘아 화살이 떨어지는 곳을 새 절터로 삼아 떠나겠다." 이에 보현보살이 신력으로 활시위를 당기자 화살은 멀리 날아가 현재의 보현사 위치에 떨어졌으므로 이 곳에 절을 창건하고 머물렀으니 이곳이 보현사라는 것이다.
이 설화는 『동문선(東文選)』제71권에 실린 이곡(李穀)의 「동유기(東遊記)」에서 사람들이 문수와 보현이 땅 속에서 솟아나온 것이라 한 기록과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 있다.
역사 속에서 보현사는 지금은 폐사지가 된 굴산사(堀山寺)와 더불어 10세기 이후 강원도 강릉 지역에서 손꼽히는 선종 사찰이었다.
사찰과 관련된 문헌이나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낭원대사탑(보물 제191호)과 낭원대사탑비(보물 제192호)의 기록를 통해 당시의 융성했던 사세(寺勢)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낭원대사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굴산문(闍崛山門)의 개산조(開山祖) 범일국사(梵日國師)의 법맥을 이었다.
낭원대사탑비의 내용을 살펴보면 낭원대사의 중창불사 이전에 이미 보현사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913년에 낭원대사가 크게 중창하고, 지장선원을 열어 전국의 학승들을 가르치다가 930년에 96세로 보현사에서 입적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낭원대사가 보현사를 크게 중창하고 참선도량을 이룩하여 보현사를 사굴산문의 대표적인 사찰로 탈바꿈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세운 ‘낭원대사탑비’에는 ‘보현산 지장선원’으로 나오고, 후대의 기록인 ‘범우고(梵宇攷)‘에는 ’보현산 지장사(地藏寺)‘로 나오는데 ’보현사‘가 뒤를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동국여지지(東國輿址誌)‘에 ’지장사(地藏寺)‘ 또는 ’지장암(地藏庵)‘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모두 지금의 보현사이다.
‘낭원대사탑비’의 내용을 살펴보면 명주(溟州)지방 호족과 선종의 사회상 및 고려 태조 당시의 정치적 관계를 파악할 수 있으니 중요한 사료이다. 명주는 지금의 강릉시 주문진읍·성산면·왕산면·구정면·강동면·옥계면·사천면·연곡면 등 1개읍 7개면 65개 동리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강릉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미타계좌목(彌陀契座目)‘에 의하면, 조선시대 보현사에서는 승속·남녀·반상이 모두 동참할 수 있는 향도조직(香徒組織)이 결성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타계좌목에는 조선 숙종 7년(1681)과 45년(1719), 순조 19년(1819)과 28년(1828), 헌종 13년(1847)에 각기 서문과 계칙 등이 작성되어 있다.
이는 보현사가 1681년 이후에 계속하여 향촌사회 및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사격(寺格)을 보여주고 있으니 ‘조선후기사찰로서 보현사의 위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관음사에는 ‘건륭오십구년갑인(乾隆五十九年甲寅) / 팔월일강릉보현사(八月日江陵普賢寺) / 대종기(大鐘記)’ 라고 주조된 범종이 있는데, 건륭 59년은 1794년(정조 18)을 말한다. 이처럼 ‘미타계좌목’뿐만 아니라 이 범종을 통해서도 보현사가 조선시대의 억불정책 아래에서도 진리의 등불을 꺼트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005년 강원문화재연구소에서 사찰 동측의 식당 및 선원 예정 부지를 발굴 조사한 결과 10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해무리굽 청자편과 금동풍탁 11점, 그리고 조선시대의 분청사기와 백자편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그리고 사찰 입구에는 조선 후기에 건립된 부도 20기도 있다. 이로써 과거 보현사의 규모는 지금보다 훨씬 더 컸다고 추정된다.
보현사의 역사와 관련된 다른 문헌은 빈약하지만, 「보현사중수기」라는 현판이 절에 전하고 있어 약간의 역사는 알 수 있다. 여기에 따르면 1825년(순조 25)에 대대적 중수가 있었으나 그 뒤 얼마 안 있어 가람 전체가 쇠락되어 1855년(철종 6)에 다시 중건을 하였다고 한다. 이 때 성훈 화곡(聖訓華谷)스님이 화주가 되었는데, 강릉 부사를 지낸 유후조(柳厚祚, 1798~1876)의 지원과 신도 최대기(崔大紀)의 시주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기록이 있다.
구한말에는 민용호(閔龍鎬) 의병장이 보현산성(대공산성)에서 진을 치고 활동하기도 했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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