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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팔관회
고려 태조 왕건(王建)도 신라의 전례를 답습하여 매년 11월에 팔관회를 시설하였다.
이 법회가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일률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나, 성대한 국가적 행사로 거행되었다.
고려 팔관회도 신라나 후삼국의 영향을 받아 호국사상이라든가 미륵신앙 등의 고대적 종교 제례(宗敎祭禮) 형식이 가미되었다.
고려의 팔관회는 궐내와 사찰에서 베풀어졌는데 사찰의 경우는 대개 법왕사(法王寺)에서 행하여졌다. 팔관회가 법왕사에서 행하여진 것은 팔관회법회의 중요성과 아울러 법왕사 의 지위에 연유한 것이다. 즉, 고려 태조 왕건이 즉위하여 제일 먼저 창건한 사찰이 법왕사 였으며, 그는 또 국가를 진호하고 호국하는 길은 팔관회를 잘 모시는 것이라고 훈요십조에 못박았던 것이다.
그 외에도 고려에서 팔관회를 중히 여긴 것은 지리풍수도참 내지 오행사상에 기원하는데, 동방은 목위(木位)요, 목위의 색은 청이며, 이것을 수로 돌리면 8이 된다고 하였다.
이 "8수의 사상"은 이미 있었던 팔관회의 8이라는 수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이러한 8수사상은 인종때 묘청(妙淸)이 팔성당(八聖堂)을 설치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의 8성은 국내 명산을 뽑아 8산이라 하고 그 8산에 살고 있는 선불(仙佛)이 나라를 비보(裨補) 하여 준다고 강조한 팔관회의 방계적인 발전을 보인 것이다.
한편 팔관회는 비록 국가를 위한 법회의식이긴 하였지만 국가의 경제를 피폐하게 하여 한 동안 중지되기도 하였다.
팔관회의 거행을 위한 행정적 조치도 마련되어 있었는데, 즉 팔관보(八關寶)가 그것이다. 팔관보는 《고려사백관지(高麗史百官志)》·《제사 도감각색(諸司都監各色)》에 보이는데 팔관회 운용에 관한 재정을 담당하는 관직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팔관보와 아울러 팔관회에 관한 관직 또는 관아로서 팔관사(八關司)를 두었다. 이처럼 고려의 팔관회는 국가비보를 위한 호국법회였다.
신라팔관회
팔관회란 불교의 계율인 팔계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불사의식(佛事儀式)이다.
즉, 근본 5계인 불살생(不殺生) · 불투도(不偸盜) · 불사음(不邪淫) · 불망어(不妄語) · 불음주(不飮酒)에다 부좌 고대광상(不坐高大廣床) · 부착화만영락 · 불습가무희악(不習歌舞戱樂)을 지켜 행하려는 종 교적인 의식이며, 윤리적 덕목으로 삼아야 할 것을 매월 7일 · 15일에 포살(布薩) · 설경(說經) 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인 행사가 신라에서는 중국의 양무제(재위 502-549)때에 이룩된 무차대회(無遮大會)의 형식을 넘어서 전몰자의 위령제로 변용되게 되었다.
신라 팔관회의 시원은 백고좌법회와 같이 고구려의 승려 혜량이 신라에 귀화한 진흥왕 12년 부터 비롯된다.
즉, 진흥왕은 전몰장병을 위하여 팔관법회를 외사(外寺)에 베풀어 7일 동안이나 행하였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제4 진흥왕조에 보인다.
신라는 영토를 확장하기 위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항상 침공하였다. 이때 무수한 신라 장병들 이 전몰하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 전몰장병의 추모를 위하여 팔관회 의식이 호국적이 고 군사적인 행사로 변용된 것이다.
더욱이 자장(慈藏)이 선덕왕 12년에 귀국하여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기를 간청하였는데, 그 탑은 국방적이고 호국을 상징하는 탑이었다. 이 탑이 이룩된 이후 팔관법회를 황룡사에서 개설하여 이웃 9개국이 신라에 조공을 바칠 것을 널리 알렸으며, 이 탑으로 말미암아 신라는 영원히 안위할 것을 선포하였다.
이처럼 신라의 팔관법회는 불교적인 팔계수행을 덕목으로 삼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국가 수호와 전몰 장병을 위한 위령제 형식이 가미된 것이었다. 또한 신라 팔관회는 10월에 개최 · 실시되었는데, 이것은 고대의 한국에서 10월을 중히 여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민족 고유의 무 속적(巫俗的)인 일면도 저버리지 않고 불교와 호국, 장병 위령을 위한 것이 복합적으로 습용(襲用)된 신라 의식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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