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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암은 물외암, 약사암과 함께 백학봉을 배경으로 건립된 암자이다.
이곳은 세 암자 중 가장 동쪽에 입지하며, 가장 깊고 큰 암굴을 지니고 있어 예부터 ‘靈泉窟’이라 불렸다.
‘靈泉窟’은 ‘淨土寺’로 불렸던 백양사와 함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유일한 암자이다.
기록에 따르면 ‘정토사 북쪽 바위 중턱에 작은 암자를 지었는데, 샘이 있다. 굴 북쪽 작은 틈에서 솟아나오는데, 비가 오나 가무나 한결같다.’고 하였다. 즉 암자는 굴 내에서 솟아나는 샘 앞쪽에 지어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 때 약사암과 물외암이 함께 존립했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한편 ‘靈泉’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옛날에 동굴 옆 샘에서 한 사람이 먹을 만큼의 쌀이 나왔는데, 하루는 어떤 손님이 와서 더 많이 나오라고 작대기로 쑤셨더니 그 후로는 쌀이 안나왔다.’고 한다. 또한 영천굴 안내판에는 홍락인과 관련된 명칭의 유래가 적혀 있다. 洪樂仁은 1767-1768년(영조 43-44년) 전라 관찰사를 지낸 인물로서, 호남 지역에 대 유행병이 돌자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이에 왕이 ‘靈地를 찾아 크게 기도를 올리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자, 백양사 바위에 ‘國際基’라 새기고 이 바위에서 솟는 물을 제단에 올렸으며, 이 물을 사람들에게 마시게 하니 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에 전라감사 홍락인은 報恩의 의미로 이곳에 암자를 짓고 ‘靈泉庵’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전설이 사실인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이 용천이 오래 전부터 ‘병을 낫게 하는 영험한 샘물’로 여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영천굴’은 조선전기에도 알려져 있어, 이미 오래 전부터 신령스러운 샘으로 이름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영천암 혹은 영천굴은 백암산을 유람하는 여러 문인들이 반드시 한번 쯤 거처간 곳으로서, 명승지로 명성이 높았던 곳이기도 하다.
영천암이 현재와 같이 정비된 것은 2013년이며, 목제 데크와 계단을 설치하여 2개 층으로 나누고 윗층은 기도처, 아래층은 약수터로 정비하였다. 암굴 깊이는 16.9m, 너비는 8.22m이다. 암굴 주변은 계단식으로 정비되어 있어 옛 유구의 흔적이나 유물은 찾기 어렵다. 그러나 약사암에서 이곳으로 이르는 등산로상에 소량의 유물이 산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약사암과 같이 암굴을 배후에 둔 작은 암자 건물을 두었거나 암굴 앞에 지붕을 설치하는 방식 등으로 시설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천암은 암굴과 샘을 배경으로 하여 작은 규모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전기 문헌에서부터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보다 앞선 고려후기에도 이름이 알려져 있었거나 암자로서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영천암과 약사암 전경
영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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