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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성지란?
성지란 종교의 발상지이며, 종교상의 유적이 있는 곳을 말합니다.
원불교에서는 대표적인 5대성지로 영산, 익산, 변산, 만덕산, 성주 성지가 있으며, 그외에 교단적 가치가 있는 사적과 유물이 있습니다.
원불교 교조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탄생-구도-대각을 이뤄낸 곳입니다.
이곳에서는 9인 제자와 함께 저축조합, 방언공사, 법인성사 등 교단 발판이 마련됐으며, 원불교의 첫걸음에 해당하는 성지라는 상징이 있습니다.'영산' 근원성지
성지가 위치한 백수라는 지명은 백에서 일을 떼어버린 아흔아홉의 묏부리를 뜻한다고 합니다. 지명이 말해주듯 백수는 구수산의 많은 산봉우리가 어우러져 이루어진 해안 산간 지역입니다. 바닷물이 깊숙이 내륙까지 들어오던 시절에는 구수산 삼면이 물에 잠겨 섬 모양을 이루었다 하며, 간척 사업이 이루어지기 전만 하여도 내륙 10여Km까지 배가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길용리는 법성포에서 뱃길로 약 4km 서해의 바닷물이 와탄천을 따라 은선암과 매바위(안암) 밑을 굽이쳐 길용리로 돌아드는데 이 물줄기가 선진포를 거슬러 위로 십여 리 올라갑니다. 와탄천은 멀리 대마의 태청산, 묘량면의 정암산 골짜기에서 흐르는 무장천과 영광읍의 수퇴산에서 흐르는 도편천이 합류하여 덕호리를 거쳐 법성 앞바다에 이르는 하천으로 영광에서 제일 큰 하천입니다. 옛날 길용리 사람들은 구수산에서 땔나무를 하거나 숯을 구워 와탄천을 내왕하는 조수를 따라 뱃길로 법성포에 내다 팔고 생필품 등을 구입해 오기도 하였습니다. 육로가 불편한 당시로는 와탄천은 길용리 사람들에게는 생활의 젖줄이었고 문물의 통로였습니다.
길용리는 산기슭에 자리 잡은 여러 마을로 이루어집니다. 옛날 사찰이 있었다는 데서 연유한 수도암, 무운암 그리고 입석골, 지금은 길룡저수지가 되어 버린 마계촌, 귀룡 모양의 바위가 있다는 용암 마을을 비롯하여 잠실, 구호동, 영촌, 범현동 등의 아홉 마을이 있습니다. 구호동은 아홉 호랑이 노루목의 노루를 보고 달려드는 형국이라고 붙여진 이름이고 범현동은 돛대 모양이라 하여 범현동이라 하였습니다.
길용리는 생활이 빈궁하고 문화적 혜택이 뒤진 곳이기는 하나 기승한 지세로 인하여 큰 인물이 날 것이라는 전설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영광은 또한 백제에 불교가 전래될 때 동진의 마라난타가 해로를 타고 법성에 입항하여 불갑사를 세웠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구수산에는 팔만구암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팔만이란 실제의 숫자라기보다는 많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는 죽사가 있을 따름이고 전골, 수두암, 무운암, 사리암, 기야암 등의 절 이름이 전해지고 있고 당간 지주를 비롯하여 기와 파편, 주춧돌 등 옛날의 절터임을 말해 주는 흔적들이 여러 곳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이처럼 영광의 길용리는 갖가지 전설과 깊은 불연과 신령한 빛이 어려 있는 땅입니다.
원기 59년(1974) 3월 30일 중앙교의회 의결에 의해 영산성지 사업회가 발족되어 영산성지의 장엄 및 각종 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영산성지에 산재하고 있는 사적으로는 영촌마을에 있는 탄생가, 대종사 대각 이전 가장 많이 사셨던 구호동 집터, 산신령을 만나려고 기도드렸던 마당바위, 한나절이나 서서 입정에 들었던 선진포, 대각을 이룬 노루목 대각지, 최초의 법어를 설한 돛드래미 이씨제각, 최초 교당인 구간도실터, 9인 제자들의 정성이 깃든 구인 기도봉 등의 사적지가 있으며 현재 원불교 중앙총부 영산사무소와 원불교영산대학, 영산성지고등학교 등이 있습니다.
성지의 자료는 전치균교무의 [원불교 성지 변천 과정]이라는 자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탄생가
대각터
소개·새소식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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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산성지순례길 안내도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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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산성지 소태산 대종사 노루목 대각터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17
명칭 : 소태산 대종사 노루목 대각터
번호 : 성적 제1호
소재지 : 전남 영광군 백수읍 성지로 1218-54
지정일 : 원기 85년(2000) 7월 6일
노루목은 구수산 노루봉(일명 중앙봉) 아래에 위치한 노루의 목장항獐項에 해당하는 나지막한 고개를 말합니다.
소태산 대종사가 23세 되던 해 여름 장맛비로 귀영바위 집이 무너지자 이곳에 있던 빈 오두막으로 이사를 해 2년 남짓 지내게 되는데 바로 이 노루목 집이 소태산 대종사가 대각을 이룬 집입니다.
소태산 대종사가 이주할 당시에는 겨우 집 모양만 갖춘 3간 오두막으로 오랫동안 개초를 하지 않아서 지붕 위에 잡초가 자라고 가랑비만 내려도 방 안에 비가 스몄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곳으로 이사를 한 후 입정돈망入定頓忘에 드는 일이 많아졌는데, 법성포 장에 가기 위해 선진포 나루에 갔다가 온종일 입정에 든 때강변입정상江邊入定相도 이 때였습니다.
온 몸에는 종기가 나고 부스럼이 생겨 만신창이었고 배에는 물동이를 올려놓은 것처럼 거대한 적이 생기기도 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나병에 걸렸다 하여 가까이 오기를 꺼렸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 원년(1916) 4월 28일 이른 새벽에 문득 정신이 맑아지고 전에 없던 이상한 영기가 와 닿음을 느끼고 마침내 ‘만유가 한 체성이요 만법이 한 근원으로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이루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원불교에서는 소태산 대종사의 대각한 이 날을 원불교의 기원으로 삼고 이 터를 원불교의 기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지만 노루목 집은 더이상 사람이 살기가 어려웠으므로 소태산 대종사는 대각 이후 구호동 집과 범현동 이씨 제각 그리고 강변 주점 등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원기 3년(1918) 겨울에 이르러 구간도실이 완공되면서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현재 노루목 대각터에는 소태산 대종사의 대각을 기념하는 대각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강암 송성용의 글씨로 ‘萬古日月(만고일월)’을 새겼으며 뒷면에는 이 터를 기리는 내용을 새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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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산성지 삼밭재 마당바위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17
명칭 : 삼밭재 마당바위
번호 : 성적 제2호
소재지 : 전남 영광군 백수읍 길용리 산 54-1
지정일 : 원기 85년(2000) 7월 6일
소태산 대종사가 11세부터 15세까지 5년간 매일 같이 산신령을 만나기 위해 기도를 올렸던 기도터입니다.
배를 짜는 대마가 많이 자라 마전령麻田嶺이라고 하기도 하고 산삼이 났다는 전설이 있어서 삼령蔘嶺 즉 삼밭재라 부르기도 합니다.
오랜 옛날 이 곳에는 개미절(일명 가야암)이 있었다고 하여 개미절터라고도 불리는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작은 샘물이 있고 넓직한 마당바위가 있어 기도터로는 안성맞춤입니다.
소태산 대종사는 11세 때 집안의 시향제時享祭에 참석했다가 산신령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산신령을 만나고자 눈이 오나 비가 오나 5년간을 하루도 빠짐없이 이곳에 올라 기도 정성을 다했습니다.
소태산 대종사 재세 시 삼밭재에 선방을 지으려 하였으나 형편이 어려워 신축하지 못했습니다.
원기 67년(1982) 원불교 대학생연합회가 ‘대종사 11세부터 15세까지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시다’라는 기념 표지석을 설치하였으며, 원기 72년(1987) 부산 진교당 김법용 교도의 희사로 삼령정(샘터)을 정비하였습니다.
원기 75년(1990) 종로교당 김만주화의 특지로 샘터 옆에 목조 3칸 맞배지붕 17평의 기도실을 신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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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산성지 소태산 대종사 구호동 집터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17
명칭 : 소태산 대종사 구호동 집터
번호 : 성적 제3호
소재지 : 전남 영광군 백수읍 길용리 278
지정일 : 원기 85년(2000) 7월 6일
소태산 대종사가 15세 되던 해 노루목에서 삼밭재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구호동에 4칸 겹집을 지어 이사를 하고 부모의 뜻에 따라 십타원 양하운 대사모와 결혼하여 신혼살림을 차린 곳입니다.
소태산 대종사는 결혼 후에도 삼밭재를 오르내리며 기도 생활을 이어가다가 16세 되던 해 처갓집에 새해 인사를 갔다가 조웅전과 박태부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스승을 찾아 6년간 구사고행求師苦行을 시작했습니다.
19세(1909년) 되던 해 이곳에서 장녀(박길선)를 낳았으며 20세(1910년) 되던 해 이곳에서 부친이 열반에 들었습니다.
구호동 집은 소태산 대종사가 큰 깨달음을 얻은 뒤 제자들과 함께 저축조합을 결성하고 그 자본금으로 간척사업을 시작하면서 매각을 하여 사업비용으로 충당했습니다.
구호동 집은 한국 전쟁의 와중에 소실되어 터만 남아있던 것을 원기 89년(2004) 4월 교단에서 매입하여 관리해오다가 원불교 100주년 성업봉찬회가 현재의 모습으로 말끔하게 정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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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산성지 소태산 대종사 선진포 입정터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5-17
명칭 : 소태산 대종사 선진포 입정터
번호 : 성적 제4호
소재지 : 전남 영광군 백수읍 장산로 353
지정일 : 원기 85년(2000) 7월 6일
영산출장소에서 와탄천을 따라 약 1Km쯤 가면 바위 옆에 큰 정자나무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선진포 나루터입니다.
지금은 옛 나루의 모습은 찾아볼 길 없지만 소태산 대종사가 법성장에 가기 위해 이곳에서 배를 기다리며 서 있다가 온종일 입정入定에 든 곳입니다.
당시 법성은 물자가 풍부하고 내왕이 편리해 길용리 주민들이 자주 왕래하였는데 10리나 되는 산길 대신 이곳 선진포를 주로 이용했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지주들이 쌀을 운반하기 위해 이곳을 많이 이용했다고 하는데 당시만 해도 일본인 소유의 창고 4동과 나룻배를 운영하는 선주의 집과 주막 등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모두 도로로 편입됐습니다.
소태산 대종사가 이곳에서 입정한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불법연구회창건사에는 “어느 때는 법성포 시장을 가신다하고 집에서 출발하시어 얼마되지 않는 선진포 부근에 문득 서서 종일을 동動하지 아니하시더니, 시장에 다녀오는 사람들이 보고 와서 그 말씀을 본댁에 전하는지라 일반 가족은 모두 경황하여 곧 가서 모셔 왔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원기 71년(1986) 원불교 대학생연합회가 소태산 대종사의 입정터임을 알리는 ‘선진포 입정터’ 비를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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