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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개운사 요약정보 및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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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전화 02-926-4069
홈페이지 http://www.gaeunsa.org/
  주소 서울 성북구 개운사길 73
   서울 성북구 안암동5가 산4-11 개운사
   73 Gaeunsa-gil, Seongbuk-gu, Seoul
Tag 전통사찰

  • 상품 정보

    상세설명

    안암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개운사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한국 불교 개혁의 근원지이고, 현재는 김포에 위치하고 있지만 불교 교육의 근본도량인 중앙승가대학이 있던 곳이다. 이 절은 조선 초 태조 5년(1396)에 왕사(王師)인 무학대사가 동대문 밖 5리 정도되는 안암산 기슭, 현재 고려대학교 이공대학 부근에 절을 짓고 영도사(永導寺)라고 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후 정조 3년(1779) 5월에 정조의 후 궁 원빈(元嬪)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영도사 자리에 묘소를 정하고, 명인원(明仁圓)이 세워지자 인파당(人波堂) 축홍(竺洪)스님이 영도사를 동쪽으로 몇 리 떨어진 현재의 자리에 절을 옮겨 지었다고 하였으나 ''사기(寺記)''라는 문 헌에는 영조 6년(1730)에 영도사가 이전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영도사가 개운사로 이름을 바꾼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개운사는 20세기 이후에 한국 교육불사와 불교의 진보적인 운동을 주도해 왔다. 1926년 근대 불교의 대석학이었던 박한영 스님이 머물었고, 이절의 암자인 대원암에 탄허(呑虛)스님이 머물면서 역경(譯經) 사업에 종사 하였다. 이 절은 현재 조계종이지만 최근까지 태고종에서 관리하였으므로 1955년에 대처승 주최로 전국포교사대회(全國布敎師大會)를 개최 하기도 하였다. 1981년부터 중앙승가대학이 이곳을 교육도량으로 사용하면서 현대사 속에서의 개운사 전통을 꽃피우는 계기가 마련 되었다.조선말 고종 10년(1873)에 명부전을 세우고 나서 7년 후인 1880년에는 이벽송(李碧松)대사가 대웅전을 중건하고, 그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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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개·새소식

    소개글

    총 3 건

    대한불교조계종 개운사 소개
    1. 개운사 암자 대원암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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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 개혁가… 항일 운동가… 유불선 통달한 석학
      박한영스님 열반 61주기… 선운사서 재조명 학술세미나

      석전(石顚) 영호 스님은 속명인 박한영(1870∼1948)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우리 불교계의 대강백이자 선승이기 이전에 유불선에 통달한 석학으로 구한말 지식인 사회를 이끌었던 때문이다. 해방 후 조선불교 중앙총무원회 제1대 교정(종정)을 지냈고 1919년 한성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기도 한 항일운동가였다. 또 일제가 우리 불교를 일본화하려는 것에 맞서 불교 개혁을 주창하고 나선 운동가였다.

      석전 스님의 강맥은 운허 스님에게 전해지며 현 조계종 총무원장인 지관 스님을 비롯한 한국 불교의 학승 대부분으로 이어질 만큼 큰 줄기를 형성했다. 석전 스님이 재가 불자는 물론 당대의 문사들에게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1926년 서울 안암동 개운사 대원암에 개설한 불교전문강원에서 신석정, 서정주, 이광수, 조지훈, 김달진 등을 지도했다.

      특히 광주학생 항일운동으로 서울중앙고보와 고창고보에서 퇴학당하고 방황하던 미당을 중앙불교 전문학교 제자로 불러들였다. 이처럼 두 사람의 인연은 각별하다. 미당은 석전을 “내 뼈와 살을 데워준 스승”이라고 부르며 평생 그 은혜를 갚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석전이 남긴 한시 3000여수 중 육당 최남선이 420편을 골라 ‘석전시초’를 묶었고, 미당이 이 중 130여수를 직접 한글로 번역해 간직했던 원고가 2006년 공개되기도 했다. 당대 최고 엘리트였던 최남선은 “나는 누구에게도 물어볼 것이 없는데, 석전 선생에게는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다.

      ‘석전’이란 호도 추사 김정희가 선운사 백파 큰스님에게 우정의 표시로 내린 것. 추사의 문기(文氣)가 가득한 호의 주인은 백파 문중의 7대를 내려와서야 주인을 만난 셈이다. 이런 연유로 그가 승적을 뒀던 전북 고창 선운사에서 석전 스님의 열반 61주기를 맞아 그를 재조명하는 학술 세미나 ‘석전 영호 대종사의 생애와 사상’이 20일 열린다.

      석전은 한국 근대 불교의 태두이자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지식인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일반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선맥을 중시하는 한국불교의 풍토, 백파에서 비롯되는 선운사 문중의 세가 비교적 약했던 탓이다. ‘석전 박한영의 불교사상과 그 유신운동’(노권용 원광대 교수), ‘석전의 계율사상’(효탄 스님), ‘박한영의 항일운동’(오경후 한국불교선리연구원 선임연구원), ‘석전의 문학관’(김상일 동국대 교수)을 소개할 예정이다. 이 밖에 ‘석전의 선사상과 선종사적 배경 고찰’(김호귀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에 대한 연구가 있다. 한국불교 근세 3대 강백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석전은 유교의 경사자집과 노장 학설에도 밝았고 한시와 서법에도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받는다.

      최남선이 정리한 ‘석전시초(石顚詩초)’와 ‘석전문초(石顚文초) 등 9권의 책에 시, 논설, 수필 500여편도 남아 있다. 19일부터 11월 22일까지 선운사 경내 박물관에서 열리는 ‘석전 영호대종사 유묵(遺墨) 특별전’에는 스님의 글씨를 비롯해 가람 이병기 등 문인들과 주고받은 편지, 최남선이 석전 회갑에 쓴 축시, ‘석전시초’ 육필원고, 제자인 운기 스님에게 내린 전강게(傳講偈·문중의 제자로 인정한다는 글) 유묵 등 50여점이 전시된다.

      이외에도 선운사 측은 스님의 행장과 어록을 출간했고, 석전문학관 건립도 추진하고 있다.
      윤재웅 동국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석전과 문인들의 교류를 통해 그들의 상호텍스트성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렇게 볼 때 선운사는 오늘날 한국 불교는 물론 근대 문학의 큰 줄기가 비롯된 탯자리”라면서 “이번 세미나는 종교를 떠나 구한말 최고의 지성인을 불러내는 작업”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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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운사 암자 보타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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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타사 마애불 전경
       

      종목 : 시도유형문화재 89호
      명칭 : 보타사마애불 (普陀寺磨崖佛)
      분류 : 마애불(부동산)
      수량 : 1좌
      지정일 : 1993.04.03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안암동5가 7
      소유자 : 학교법인승가학원
      관리자 : 학교법인승가학원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개운사의 암자인 보타사 대웅전 뒤쪽 화강암 암벽에 조각된 고려시대의 마애불상이다. 이 불상은 1992년 서울문화사학회가 정기 답사 때 발굴한 것으로 높이 5m, 폭 4.3m의 거대한 보살상이다.

      머리에는 좌우 옆으로 뿔이 있는 관을 쓰고 있으며, 뿔 끝에는 복잡한 타원형의 장식이 늘어져 있다. 얼굴 생김새가 토실토실하며 어깨가 넓고 웅대한 형상을 하고 있다. 비교적 자연스럽고 미감이 풍부한 표정이며 옷은 양 어깨를 감싼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최근에 온 몸을 흰색으로 칠하여 백불(白佛)의 인상을 풍기는데, 입술은 붉은색, 눈과 눈썹, 윤곽은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마애불 어깨쪽의 좌우에 홈이 패여 있는 것으로 보아 불상을 보호하던 전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애불 오른쪽 아래에는 제작 당시에 새겨진 명문(銘文)이 남아있다.

      보타사는 개운사(開雲寺)에 속한 암자로서 개운사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보타사의 대웅전 뒤에 있는 커다란 바위면을 'ㄱ'자 형태로 깊게 파고 그 안에 보살상을 새겼는데 측면에서 보면, 벽면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위쪽에는 자연석의 보개(寶蓋)가 늘어진 형태로 되어 있다.

      현재 마애불 앞에는 대웅전이 있지만 이 마애불상이 새겨진 바위면 좌우에 구멍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애불을 중심으로 별도의 목조 전각(殿閣)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낮은 부조로 새겨진 이 마애불상은 몸전체에 호분(胡粉)이 칠해져 있어서 흔히 '백불(白佛)'이라고도 부른다. 이처럼 불상에 호분을 두껍게 칠한 백불의 예로는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서울 홍은동 보도각 마애보살좌상과 안성 굴암사 석조약사여래좌상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이 불상들은 갸름하면서 약간 살이 붙은 얼굴과 옷자락 사이로 주름들이 형식적으로 흘러내린 점등에서 양식적으로 거의 유사한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보타사 마애보살상이 새겨진 바위면은 보도각의 마애보살상 보다 더 굴곡져 있어 고개를 약간 숙인 얼굴이나 신체의 부드러운 선들이 바위 면을 그대로 이용한 듯하다.

      이 마애보살상은 5m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으로 두 다리를 포개어 결가부좌한 자세로 앉아 있다. 머리 위에는 원통형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데 관대(冠帶)의 좌우에 늘어진 복잡한 장식이나 목걸이와 팔찌, 그리고 얼굴의 이목구비에 칠해진 채색 등이 흰색의 호분과 함께 화려하면서 장식적인 느낌을 준다.

      보살의 대의(大衣)는 모두 호분으로 칠해져 쉽게 구분되지 않지만 양어깨에 가볍게 걸쳐져 있으며 특히 왼쪽 가슴을 가로지르는 스카프 형태의 천의가 밖으로 흘러나오도록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올려 엄지와 둘째손가락을 맞대었고 왼손은 무릎 밑으로 내려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이 불상은 크기가 매우 크면서 특히 벽면 자체의 굴곡이 마애불의 부드러움을 더해주는 것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지역에서 조성되었던 고려 후기 마애불상 중의 하나이다.

      마애불상의 왼쪽 편으로 '나무금강회상불보살(南無金剛會上佛菩薩)' 등이 새겨진 원패(願牌) 모양의 장식이 보인다. 원패는 원래 부처ㆍ보살의 이름을 적어 불단 위에 놓는 목제 장식물로 마애불상 옆에 새겨져 있는 점이 흥미롭다.

      원패는 시대마다 유행된 문양이 다른데 이 마애불의 원패처럼 연꽃 받침과 연잎이 장식된 직사각형 형태는 고려시대 사경(寫經)의 표지화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불상의 이름을 보타사마애보살좌상으로 표기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3. 개운사 연혁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13

      1396년(조선 태조5년) 무학대사가 영도사 창건(옛 이름)
      1870년(고종 7년) 화주 송담 수훈스님이 지장탱화, 시왕탱화, 사자탱화 조성 봉안 불사
      1873년(고종 10년) 명부전 중건 불사
      1883년(고종 20년) 화주 초은 선일,초암 기주가 불상 2구 개금, 1구 개분 1구 개채 영산전 후불탱화, 팔상도,감로탱화,신중탱화, 원불탱화 각 1점과 산신탱화2점 조성 봉안불사
      1885년(고종 22년) 덕해화상이 아산으로부터 1712년 제작된 범종1구 봉안 불사
      1911년 일제 사찰령 시행에 의거 봉은사 수반 말사로 지정, 김현암스님 제1대 주지로 부임
      1913년 제 2대 주지 이벽봉스님 부임, 왕가 소유 산림 4정 6반보 사찰 소유로 등록
      1915년 주지 안월송스님 대웅전 및 요사 개금 불사
      1921년 제5대 주지 이벽봉스님 부임, 큰방중창, 종각 불사
      1922년 안월송스님 시왕전 개금, 개분 불사
      1925년 주지 김동봉스님 사찰앞 석축 불사
      1926년 강원 설립
      1928년 금고 (쇠북) 1구 조성불사
      1929년 독성전 중건 불사
      1930년 후불, 제석, 독성탱화 조성봉안 불사
      1931년 경허스님 외4분 공덕비 불사
      1932년 노전(전각) 불사
      1934년 탁능허스님 신대법화, 박하담 스님 공덕비 불사
      1935년 덕해화상이 아산으로부터 가져온 범종을 일제에 의해 국방 헌납용으로 강탈당함
      1936년 신도 한봉계 기념비 불사
      1937년 박영원신도 기념비 불사, 임영해스님, 이벽송스님, 안월송스님 송덕비 불사
      1978년 조계종종정 이서웅스님 불신임으로 종정 채벽암스님 추대, 총무원장 윤월하스님 추대하면서 임시총무원 개원
      1981년 중앙승가대학 경내 개운회관 인수하면서 교사이전
      1992년 중앙승가대학 강의실, 도서관, 교수실, 연구실 등 지하1층 지상5층 정진관 완공
      1993년 4월 3일 보타사 마애좌상 서울시도 유형문화재 제89호로지정
      2006년 7월 6일 개운사 감로도 서울시도 유형문화재 제212호로지정, 개운사 신중도 서울시도 유형문화재 제213호로지정, 개운사 팔상도 서울시도 유형문화재 제214호로지정, 개운사 지장시왕도 서울시도 유형문화재 제215호로지정
      2006년 개운사 대웅전 단청 불사
      2006년 9월 14일 보타사금동관음보살좌상 서울시도 유형문화재 제216호로지정
      2008년 7월 범해주지스님 부임
      2009년 8월 4일 고려대학과 개운사 장학재단 설립
      2009년 11월 5일 개운사목아미타불상좌상복장일괄 서울시도 유형문화재 제291호 지정
      2010년 2월 22일 개운사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발원문 국가지정문화재(보물)지정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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