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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회동 Gahoedong Catholic Church요약정보 및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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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서울대교구
지역/지구 제4 종로지구
대표전화 02-763-1570
   주임신부 02-763-1129, 수녀원 02-763-1423
팩스 02-762-7758
  주임신부 윤종국 마르코 신부 Rev. Mark Youn Jong Kuk
설립일 1949.09.17
홈페이지 https://gahoe.or.kr/
  주소 서울 종로구 북촌로 57
   서울 종로구 가회동 30-3 천주교 가회동성당
   57 Bukchon-ro, Jongno-gu, Seoul
Tag 가회동성당, 가회동천주교회
  • 상품 정보

    상세설명

    가회동이 정식으로 본당이된 것은 1949년이고, 이후 1954년에 성전이 완공되었다. 하지만 성전이 낡아 2011년부터 옛 성전을 허물고 현재의 새 성전을 짓게 되었다.2013년 11월 21일 준공되었고, 준공 3일 후인 24일(그리스도왕대축일)에 입주하여 입주미사를 봉헌하였다. 현재의 새 성전은 과거의 역사를 되살리고자 2014년 4월 20일 부활대축일에 서울교구장 염수정 추기경님에 의하여 축성되었다.

    2010년 2월 송차선신부가 가회동본당에 발령을 받아 부임 후 옛 성당의 안전진단 검사를 검토한 결과 안전에 상당한 우려가있다고 판단하였다. 주임신부는 재건축을 시작하기 전에 타당성 조사와 지역의 특성(LOCATION),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면밀히 검토하여 가회동성당이 역사 안에서 지니는 중요성을 밝혀내었다.

    조선에 입국한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신부, 주문모 신부는 1795년 4월 5일 부활대축일에 이곳 가회동지역(북촌심처)에 위치한 최인길(마티아)의 집에서 한국천주교회 역사상 최초의 미사를 집전하였고, 이후 이곳 가회동 본당 관할 내에 주로 거처하며 6년간 사목하셨다. 그러므로 가회동은 가히 한국 천주교의 첫 본당이요, 한국 천주교회의 모(母) 교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791년 유교식 조상 제사를 거부한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지만(신해박해), 1795년 주문모 신부의 체포를 막기 위해 윤유일(바오로), 지황(사바), 최인길(마티아)가 순교한 것으로써 한국 천주교에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고 할 것이다.

    새롭게 지어지는 가회동본당은 관할 안에서 조선 땅에서 첫 미사가 봉헌되었고, 이로서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역이며, 마지막 황실에서 모두 세례를 받으므로 해서 신앙이 승리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선교본당으로서의 역할을 담아낼 수 있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특성인 북촌한옥마을의 문화적 위치를 반영하여 '단아하게 한복을 차려 입은 선비하고 벽안의 외국인 신부님하고 어깨동무하는 형상으로 가자.'는 것을 설계의 기본으로 하였다. 또한 북촌한옥마을에 어울릴 수 있도록 단순하고 소박하게 디자인하였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양복 입고 갓 쓴 꼴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양복은 양복대로 갓은 갓대로, 다시 말하면 한옥과 서양건축을 그대로 살리고 디자인 요소를 교감 시키자는 것이었다. 어깨동무를 하는 것은 교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동서양의 디자인 요소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충돌이 일어날 수 있으니 그러한 충돌을 막고 교감 시킬 수 있는 디자인으로 가자는 것이 기본 컨셉이었다. 그러므로 해서 한옥의 아름다움을 살리고 그의 부족한 기능성을 서양건축으로 보완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수녀회 : 올리베따노성베네딕도수녀회
    주보 :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복자 주문모 야고보, 복자 강완숙 골롬바, 복자 최인길 마티아
    주일전례:06:00, 11:00(교중), 18:00(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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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촌 한옥마을에 위치한 선교본당

    가회동성당이 위치한 북촌일대는 최초의 선교사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밀입국하여 1795년 4월5일 부활대축일에 최인길(崔仁吉, 마티아)의 집에서 조선 땅에서의 ‘첫 미사’를 집전한 지역이다. 본당 관할구역은 주문모 신부가 강완숙(姜完淑, 골롬바)의 집에 숨어 지내면서 사목활동을 펼쳤던 지역으로서 한국 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으면서 명동 본당의 공소였던 가회동 구역(광화문 네거리에서 동으로 종로3가, 권농동을 돌아 북으로 삼청동에 걸치는 북촌 19동)에 새로운 본당 설립의 계획이 세워진다. 당시 이 구역을 맡고 있던 임병팔(林秉八) 회장을 중심으로 우선 방 하나를 얻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자체 모임을 갖다가, 현재의 본당 터에 살고 있던 전길헌(全吉憲, 마리아)이 1949년 4월 자신이 살고 있던 터 292.3평(목조와즙 및 양철집 85.5평과 목조초가 23.25평)을 증여함으로써 첫 본당 부지가 확보되었다. 이어서 동년 6월에 명동 본당의 장금구(莊金龜, 요한금구) 주임신부를 모시고 첫 미사를 봉헌한 후, 교구의 결정에 따라 동년 9월 하순에 본당 설립을 보게 되었다. 당시 본당의 신자 수는 40여명으로 전 가족이 신자인 가정은 5세대이고 외짝교우 세대를 합쳐 30세대 정도에 불과하였다.

    초대 본당신부로 임명된 윤형중(尹亨重, 마태오) 신부는 거처가 없어 명동에서 통근을 하며 미사 집전과 본당 운영을 하였으며, 뒤이어 복자수도회의 방유룡(方有龍, 레오) 신부가 주임신부를 겸임하던 중 한 달 만에 6.25사변이 발발하여 본당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성당으로 사용하였던 한옥은 전쟁 중에 인민일보 사옥으로 사용되었고 인민군이 철수한 다음에는 재사용이 불가능 할 정도로 초토화된 상태였다. 이 때 황해도 사리원에서 남하한 박우철(朴遇哲, 바오로) 신부가 제3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였으며, 당시 보좌신부였던 백민관(테오도로)신부가 미8군을 통하여 주한미군민간원조단(AFAK)의 원조를 받아 성당 신축공사를 시작하였다. 연건평 134평의 3층 시멘트블록 건물의 성당을 준공하고 1954년 12월 3일 성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본당 주보성인 대축일에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대주교의 집전으로 축성미사를 봉헌하였다.

    성당 신축으로 안정된 신앙생활을 하게 된 신자들은 이후 주일학교를 개설하고 레지오, 복사단, 학생회를 설립해 나갔다. 1963년제6대 김철규(金哲珪, 바르나바)신부는 국유지 26.4평을 추가 매입하여 본당 부지를 확장하였다. 제7대 조인환(曺仁煥,베드로) 신부 재임기인 1966년에 사제관 신축을 발의하여 제8대 최익철(崔益喆, 베네딕도) 신부 재임기인 1968년 6월8일에 철근 콘크리트 슬라브식 4층 건물(연건평 179평)의 사제관을 준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1969년에는 유치원을 개원하고,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대자리에 본당 묘지(5만평)를 마련하였다. 제9대 최석우(崔奭祐, 안드레아) 신부 재임기인 1970년에는 성당의 지붕을 교체하고 외벽에 화강암을 붙이는 대대적인 수리를 하였으며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에서 정식으로 수녀원 분원을 설치하였다.

    이후 본당에서는 내실에 주력하여 신심 및 전교활동을 강화함과 아울러 신심활동 단체들을 확대시켜 나갔으며 제12대 임응승(林應承,요한) 신부 재임 시에는 성모회가 조직되었고 청년회가 설립되었으며 1982년에는 성당 외벽 보강공사와 사제관 내부 보수공사를 실시하였다. 제13대 김형식(金亨植, 베드로) 신부 재임기인 1984년에는 원아들이 감소하여 유치원을 폐쇄하였으며 사제관 내부 구조 변경공사를 완료한 후 부산 성베네딕도 수녀회에서 분원을 설치하였다. 이후 재임기간 동안에 연령회, <정의의거울> 꾸리아와 반석장학회가 설립되었다. 제14대 박순원(朴蕣遠, 이냐시오) 신부는 노인들의 여가 선용과 신앙지도를 겸한 프로그램으로 한솔노인대학을 설립하였으며 무의탁 독거 노인들을 위해 골롬바의 집을 구입하여 양로사업을 시작하였다. 제15대 소원석(邵元碩, 가브리엘)신부는 레지오를 재정비하였으며, 성당 진입로의 부지 29.25평을 매입하여 현재의 성당 부지를 확정하면서 매입한 터에 사무실/교육관(지하1층 포함 71평)의 신축을 착수하였다. 1999년 4월 제16대 이문주(李文柱, 프란치스코) 신부가 부임하여 사무실 겸 교육관 건물을 준공하였고 11월에 본당 설립 5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신앙의 활성화 방안으로 성서백주간을 시작하였으며, 성목요회를 조직하여 매주 교우들 간의 사귐, 섬김, 나눔을 도모하기 위해 나눔의 잔치를 시작하였다. 제17대 최승정(崔昇晶, 베네딕도) 신부는 2006년 4월에 성당 전체 구조물의 안전을 우려하여 본당 건물의 정밀안전진단 용역을 실시하였고 안전 문제가 심각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진동에 의한 붕괴의 위험으로 매일 2차례의 삼종 타종을 중단시켰고 성당 재건축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2010년 2월 제18대 송차선(宋次善, 세례자요한) 신부는 성당의 안전 문제로 인한 재건축의 소임을 받고 부임하였다. 신자들도 재건축을 위해 화합과 일치를 도모하며 한마음으로 묵주기도를 봉헌하고 성경읽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2013년 11월21일 준공된 새 성전은 한국천주교회의 첫 미사가 봉헌되었으며 사도직 교회의 시작이 된 사적지로서의 위상을 반영하면서 북촌한옥마을에 위치한 선교 본당으로서의 역할에 부합하는 성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949년 9월 명동성당에서 분리했을 당시의 관할구역은 가회동, 계동, 원서동, 재동, 삼청동, 팔판동, 화동, 소격동, 사간동, 송현동, 운니동, 안국동, 경운동, 관훈동, 견지동과 와룡동 일부, 익선동 일부, 낙원동 일부, 수송동 일부 지역 등 19개 동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2011년 7월 1일 교구의 관할구역 재조정에 따라서 경복궁 옆길인 삼청로를 지나 종로1길이 종로와 맞닿는 지점과 창덕궁 앞길인 돈화문로11길에서 삼일대로30길로 꺾어져 인사동4길, 인사동5길을 거쳐 삼봉로에서 종로7길로 꺾어져 제일은행 본점 옆으로 이어져 종로와 맞닿은 지점을 이은 지역이 관할구역으로, 가회동, 계동, 원서동, 재동, 삼청동, 팔판동, 화동, 소격동, 사간동, 송현동, 운니동, 안국동, 경운동, 관훈동, 견지동, 중학동, 수송동, 청진동, 종로1가 전체(19개동)와 익선동 일부, 인사동 일부, 공평동 일부, 낙원동 일부를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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