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회신학대학교 > 서울특별시 Seoul, 02

본문 바로가기
싸이룩스 기독교 :: CYLOOKS CHURCH

장로회신학대학교

02-450-0700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로5길 25-1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353 장로회신학대학교

25-1, Gwangjang-ro 5-gil, Gwangjin-gu, Seoul

대학교

  스크랩     0건

 Facebook   Instagram   YouTube   유투브 보기 

조회 50,799회   2021-08-10

장로회신학대학교(Presbyterian University and Theological Seminary)는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에 입각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직할하에서 성경적 신학에 기초하고 장로회신조와 헌법에 기준하여 교회의 지도자와 교역자 양성을 위한 고등교육을 실시함을 목적으로 한다.


교육이념 :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와 하나님나라의 구현

교육목적 : 하나님나라의 시민육성, 교회, 사회 및 국가에 봉사할 지도자와 교역자 양성

교육목표 : 경건의 훈련, 학문의 연마, 복음의 실천


b5a22b12d0fd9a357c1d992c5edfa55e_1628566241_51.jpg
b5a22b12d0fd9a357c1d992c5edfa55e_1628566241_11.jpg
b5a22b12d0fd9a357c1d992c5edfa55e_1628566241_96.jpg
b5a22b12d0fd9a357c1d992c5edfa55e_1628566242_39.jpg
b5a22b12d0fd9a357c1d992c5edfa55e_1628566242_8.jpg
b5a22b12d0fd9a357c1d992c5edfa55e_1628566243_29.jpg
b5a22b12d0fd9a357c1d992c5edfa55e_1628566243_66.jpg
 



1901~1925년

1901년에 선교사 마포삼열(Samuel A. Moffett)이 장대현교회 시무 장로 김종섭(金宗燮)과 방기창(邦基昌)에게 신학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신학교가 두명의학생으로개교되었다. 이것은 한 해 미국 장로교 선교부 평양공의회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장로교 공의회는 신학교육위원회(Committee on Theological Education)를 선정했다. 그 이듬해(1902)에 위원회는 신학교육을 위한 5개년 교과과정을 제안했고, 이 제안이 1년 동안 임시로 받아들여졌다. 이 임시교과과정을 갖고서 평양공의회는 6명의 학생들을 3개월 동안(1년 과정으로) 가르쳤다. 이때 가르친 선생은 마포삼열, 배위량(W. M. Baird), 소안론(S. L. Swallen), 이길함(G. Lee), 편하설(C.F. Bernheisel)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1903년 가을 신학교육위원회가 3개년 예비과정 및 5개년 본과과정으로 교과과정을 정리하여 장로회연합공의회에 보고했다. 이 교과과정이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학생들은 매년 3개월 동안 교실에서 수업받고 나머지 9개월은 현장사역과 교회목회 그리고 사경회 인도를 해야 했다. 이 9개월 동안 학생들은 자습으로 신학을 배우고 독서과제를 읽었고, 여기에 대한 시험을 치렀다.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의 사경회에서 신앙각성운동이 일어났고, 4월에 신학교에서도 일어났다. 신학생들도 성령을 체험했다. 1907년 6월 20일 일곱 명의 첫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그들은 길선주(40세)·양전백(38세)·서경조(58세)·한석진(41세)·송인서(40세)·방기창(58세)·이기풍(40세)이었다.

첫 졸업생들이 목사안수를 받는 ‘조선 예수교 장로회 독노회’가 그해 9월 17일에 성립하였다. 신학교의 공식 이름을 부르게 되었는데 ‘조선장로회신학교’라 하였다. 또한 이제까지는 평양공의회가 신학교를 관리해왔는데, 이제부터는 전국 선교부연합공의회가 직접 신학교의 운영을 주관하게 되었다. 연합공의회가 이사회를 조직하였다.

1908년 5월에 평양 하수구리 100번지에 학교 교사(校舍)의 정초식을 하였고, 이어서 건물을 지었다. 2층 한옥이었다. 상층에는 기도실과 교사실 그리고 4,5학년 강의실이 있었고, 하층에는 1,2,3학년 강의실과 물건을 넣어두는 저장고가 있었다. 그리고 기숙사가 여러 동 있었는데, 4개 선교부가 각각 건축을 담당하였다. 그래서 호주 장로회, 미국 남장로회와 북 장로회, 그리고 캐나다 장로회가 각각 기숙사를 지었다. 교사건축과 기숙사(2동) 건축을 위하여 미국 시카고에서 사는 매코믹 여사가 재정지원을 하였다.

1919년 3월에 일어난 3·1만세운동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4명(양전백·유여대·김병조·길선주)이 본교 졸업생이었다. 졸업생 강규찬·김선두·김창건 등도 이 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다. 이승훈은 재학생으로서 이 운동에 참가하여 옥고를 치렀다.

늘어나는 학생들을 수용하고 새로운 현대시설이 필요하다고 요청됨에 따라, 1921년 9월 21일 옛 교사(校舍)를 헐고 새 교사를 짓기 시작했다. 1922년 5월 12일에 머릿돌을 놓았고, 9월 27일에 헌당식을 하였다. 새로 지은 교사의 시설이 매우 만족스러웠고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붉은 벽돌 3층 건물이었고, 평양 최초의 강철 창문틀을 넣었고, 지붕은 돌로 다듬어서 금관 형태로 만들었다. 건물 내부에는 교실 다섯 개, 교수연구실 여섯 개, 교장실, 넓은 예배당, 독서실, 도서관, 친교실, 그리고 등사실이 있었고, 지하실에는 학생들의 복지를 위한 샤워장이 있었다.

기숙사 시설도 점차 훌륭한 현대 시설로 보완되었다. 일곱 동의 기숙사가 있었는데, 전기와 수도시설이 구비되었고, 주방시설과 식탁이 설치되었다.


1925~1938년

1925년 10월 30일 제 1대 교장인 마포삼열이 사임했다. 제 2대 교장 라부열의 취임과 더불어 본교는 더욱 내실 있게 발전해 갔다. 도서관 장서구입의 확충, 목사계속교육을 위한 ‘연구과’, ‘종교교육과’, ‘별신학과’를 개설하였다.

1925년부터 본교 졸업생이자 한국인 교수들이 강의하기 시작했다. 그해 가을학기에 남궁혁(제 15회 춘기 졸업생) 교수가 한국인 최초의 조교수로 강의를 시작하였다. 지난 해 가을부터 김선두 목사가 출강하였다. 1926년 가을학기부터 이성휘 교수가 임시 교수로 강의하다가, 1929년 6월 정식 조교수가 되었다. 박형룡 교수가 1928년 봄학기에 임시 교수로 취임했으며, 1937년 9월 7일 정교수가 되었다.

학생들의 강의 시간표는 한 주간에 18-19시간으로 짜여있었다. 교회봉사를 위해 토요일 오후와 월요일 오전을 비워두는 것 외에, 강의가 날마다 진행되었다. 어학과목은 성경을 원어(헬라어, 히브리어)로 읽고 또 신학원서(영어)를 읽을 수 있도록 훈련하였다. 한 주간에 음악 수업이 2시간이었고, 오르간 연습을 날마다 해야 했다. 성악수업도 강조되었다. 장차 목회자가 되어 매주일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며 찬송을 불러야 하는 학생들에게 음악수업이 필수적이었다.

학제가 1920년에 1년 1학기제에서 봄·가을 2학기제로 개편되었고, 수업연한도 5년에서 3년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1931년의 요람에 따르면, 그동안 학제가 1년 2학기제에서 3학기제로 변경되었다. 제 1학기(봄학기)는 4월 1일에 제일 가까운 목요일에 개학하여 6월 15일에 제일 가까운 수요일에 방학했다. 제 2학기(가을학기)는 9월 세 번째 주일 후 목요일에 개학하여 12월 20일에 제일 가까운 수요일에 방학했다. 제 3학기(겨울학기)는 1월 1일 이후 첫 번째 목요일에 개학하여 3월 15일에 제일 가까운 수요일에 졸업식과 동시에 마쳤다.


1938~1945년

1938년 2월에 교단의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이 소식이 본교의 학생들에게 재빨리 전해졌고, 이에 학생들이 크게 격분하였다. 9월 9일에 열린 장로교회 제 27회 총회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이겨내지 못하고 굴복했다. 신사참배 결의 직후, 총대 일동은 평양의 신사에 가서 참배했다.

결국, 9월 29일로 예정되었던 본교의 가을학기 개학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휴교상태에서 통신을 통해 수업이 진행되었다. 이런 식으로 진행된 강의가 졸업식으로 이어졌다. 이듬해(1939) 4월 13일 오전 10시 학교 대강당에서 제 34회 졸업식이 개최되었다. 교장 라부열이 사회하였고 교수 남궁혁이 ‘진(眞) 종교의 본질’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54명의 졸업생에게 졸업증서가 수여되었다.

학교의 무기한 휴교 상황에서 교단의 교역자양성 교육이 중단되자, 총회는 어떠한 경우에서도 교역자양성을 포기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학교의 문을 다시 여는 방안을 모색했다. 1939년 3월 총회 신학교육부가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소집되었다. 그 해 9월에 열린 장로교회 제 28회 총회는 “신학교를 새로 설립하기로 결의하고 학교설립인가원을 조선총독부에 내도록” 했다. 소위 (후)평양신학교가 1940년 2월 9일에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4월 11일에 개교하였다. 채필근 목사가 제 3대 교장이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절기마다 평양 신사에서 참배해야 했고 예배시간에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고 동방요배를 해야만 했다. 1943년부터 학생들이 자주 전시체제의 근로봉사에 동원되었는데, 예컨대 비행장 활주로 닦는 일, 포탄 만드는 일, 소금을 긁는 일(광량만)에 동원되었다.


1945~1950년

8·15 해방 직후 북한에서 평양 장로회신학교가 재건되었다. 이때부터 공산당 정권의 탄압을 단호히 막아내며 버티던 제 4대 교장 김인준 목사가 결국 1947년 1월 17일 당국에 연행되었고, 이성휘목사가 제 5대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해 4월 신학교의 재학생은 164명이었다. 1950년 3월 새 학기 이전에 장로회신학교와 성화신학교(감리교)가 강제로 통합되었고, 학교이름을 ‘조선 기독신학교’라 지었다. 그러다가 그 해 7월 5일 처음이자 마지막 졸업식을 거행하고서 교문이 닫혔다.

한편, 남한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5회 총회가 1948년 6월 서울 남산에서 개교한 장로회신학교를 평양에서의 신학교육을 계승한 학교로 인준했고, 제6대 교장에 박형룡 박사가 취임하다. 한국전쟁(6.25전쟁)이 일어났고, 1951년 3월 장로회신학교가 부산진 교회에서 개강했다. 이 학교는 서울(남산) 장로회신학교의 피난처 교사(校舍)였다. 교장 박형룡 목사를 비롯하여 여러 교수들이(한경직 등) 전쟁의 참화 속에서 신학공부를 계속하려는 학생들을 위해 열심히 가르쳤다. 학생들의 일상생활은 매우 핍절했다. 잠잘 곳도 없었고 제대로 얻어먹지도 못한 채 신학수업을 받았다.


1951~1960년

1951년 7월에 장로회신학교 제 4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졸업생이 66명이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6회 총회는 교명을 ‘총회신학교’로 결의하고, 제7대 교장에 감부열(A. A. Campbell)박사를 인준했다. 그런데, 이 무렵에 장로교회는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에 대한 참회와 신학적 논쟁으로 말미암아 분규에 휘말렸다. 교단이 분열이 일어났는데 1950년대 중반까지 장로교회가 셋으로 분열되었다. 고려신학교 측, 장로회신학교 측, 조선신학교 측. 교단분열은 신학교의 분열로 직결되었다. 교단분열에 대하여 심각한 반성을 하면서 다시 하나 되는 방안을 모색하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실이 없었다. 1959년 제 44회 장로교회 총회는 또 다시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되었다. 이번 교단분열의 실질적인 이유는 소위 ‘3천 만환 사건’에 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1960~현재

장로교회 ‘통합측’ 교단은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 353번지에 대지를 구입하여 교사를 짓고 옛 이름 그대로 ‘장로회신학교’로 출발하였다(‘합동측’은 서울 사당동에 교사를 마련하고 ‘총회신학교’로 출발하였다).

‘장로회신학교’로 다시 출발한 본 대학교는 1961년 문교부로부터 대학인가를 받았으며, 1966년 대학원 설립, 1973년에는 ‘장로회신학대학’으로 개명하였고, 1976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와 공동으로 목회학 박사과정을 실시하였으며, 1992년에 이 과정을 중지하고 그 대신 시카고에 있는 맥코믹(McCormick) 신학교와 공동으로 이 과정을 개설하였다. 본 대학교가 1993년에 종합대학교로 승격되어서 ‘장로회신학대학교’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고, 1994년에는 교육부로부터 세계선교대학원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계속해서 교역대학원, 교육대학원, 교회음악대학원의 설립인가를 받았다. 2001년에는 목회전문대학원의 설립인가를 2018년에는 기독교와사회대학원의 설립인가를 받았다.

본 대학교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 총회에 속한 신학교육기관으로서 장로회 신조와 헌법을 기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와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위하여 헌신하려는 교역자를 양성함을 그 목적으로 ‘경건과 학문’의 훈련을 지속하고 있다.

2021. 06. 05. 제28대 이사장에 리종빈 목사가 취임하다.

2021. 06. 03. 김운용 박사가 총장 서리를 맡다.

2020. 10. 01. 김운용 박사가 총장직무대행을 맡다.

2020. 01. 04. 제27대 이사장에 장경덕 목사가 취임하다.

2018. 03. 06. 여학생관을 리모델링 건축하여'김순호기념 여학생관'으로 명명하여 준공식을 갖다.

이미지

2018. 03. 01. 특수대학원'기독교와사회대학원'을 신설하다.

2018. 02. 28. 특수대학원'세계선교대학원'을 폐지하다.

2017. 06. 05. 제26대 이사장에 신정 목사가 취임하다.

2016. 10. 01. 제21대 총장에 임성빈 박사가 취임하다.

2016. 01. 01. 제25대 이사장에 김지철 목사가 취임하다.

2014. 03. 01. 본 대학교 영문 교명을 Presbyterian College and Theological Seminary에서 Presbyterian University and Theological Seminary로 변경하다.

2013. 10. 01. 샤턱관 대지 위에 영성생활관(Hall of Spiritual Life)을 건축하고 준공식을 갖다.

이미지

2013. 03. 30. 제24대 이사장에 손대호 목사가 취임하다.

2012. 10. 01. 제20대 총장에 김명용 박사가 취임하다.

2012. 09. 01. 김명용 박사가 총장서리를 맡다.

2012. 01. 01. 제23대 이사장에 이승영 목사가 취임하다.

2009. 10. 01. 제19대 총장에 장영일 박사가 취임하다.

2009. 05. 12 깔뱅 탄생 500주년을 맞아 깔뱅 흉상을 본 대학교 교정에 건립하다.

2009. 03. 30 제22대 이사장에 강신원 목사가 취임하다.

2009. 02. 23 장영일 박사가 총장 서리를 맡다.

2008. 10. 01 이광순 박사가 총장 직무대리를 맡다.

2008. 01. 07. 서울 광진구 광장동 376번지의 대지 334m²를 여학생 교육관으로 매입하다.

2007. 06. 14. 제21대 이사장 나겸일 목사가 취임하다.

2006. 05. 09. 설립자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묘소를 본 대학교 교정으로 이장하고 예식 및 반신상 제막식을 갖다

2005. 06. 02. 제20대 이사장 이만규 목사가 취임하다.


추천0 비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