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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정보
상세설명
사적 271호로 지정된 경희궁은 조선후기의 이궁이었다. 1617년(광해군 9)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년(광해군 15)에 완성되었다. 경희궁이 들어서기 전 이곳에는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이 있었는데, 이곳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 터를 몰수하고 왕궁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경희궁의 처음 명칭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같은 발음이라 하여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바뀌었다.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궐(西闕)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하여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이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후 대원군이 중건하기 전까지는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이 되었고, 서궐인 이곳 경희궁이 이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이곳 경희궁을 이궁으로 사용하였는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이 경복궁이 중건하면서 경희궁에 있던 건물의 상당수를 옮겨갔으며, 특히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경희궁은 본격적인 수난을 맞이하였다. 1910년 일본인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숭정전 등 경희궁에 남아있던 중요한 전각들이 대부분 헐려 나갔고, 그 면적도 절반 정도로 축소되었다. 이로 인하여 경희궁은 궁궐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서울시에서는 1987년부터 경희궁지에 대한 발굴을 거쳐 숭정전 등 정전지역을 복원하여 2002년부터 시민들에게 공개하기 시작하였다.
관람시간 : 오전 9시 ~ 오후 6시 (입장마감 : 오후 5 : 30)
휴관일 : 1월 1일 , 매주 월요일
* 경희궁 관람 시에는 커피류, 음료수, 과자 등 음식물 반입을 삼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관람요금 : 무료
경희궁 해설안내
금요일(오후 2시, 3시), 토요일(오후 1시, 2시, 3시) (한국의재발견 우리궁궐지킴이, 02-723-4206, www.rekor.or.kr)
일요일(오후 1시, 2시, 3시) (우리문화숨결 궁궐길라잡이, 02-735-5733, www.palaceguide.or.kr)
1 서울역사박물관, 2 경교장, 3 경희궁, 4 공평도시유적전시관, 5 군기시유적전시실, 6 돈의문역사관, 7 동대문역사관·동대문운동장기념관, 8 백인제가옥, 9 청계천박물관, 10 한양도성박물관, 11 서울생활사박물관, 12 딜쿠샤, 13 서울우리소리박물관
소개·새소식
소개글
총 7 건
경희궁 소개-
- 경희궁 역사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7-25
조선후기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집이 있던 곳으로 광해군 때 왕궁을 지어 경덕궁이라 부르다 1760년에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고, 280여년 동안 동궐인 창덕궁, 창경궁과 더불어 서궐의 위치에서 양대 궁궐의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궐(西闕)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하여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입니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후 대원군이 중건하기 전까지는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이 되었고, 서궐인 이곳 경희궁이 이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이곳 경희궁을 이궁으로 사용하였는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고종 때에는 숭정전, 회상전, 흥정당, 흥정당 등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은 경복궁 중건을 위해 훼철되어 경복궁으로 옮겨졌습니다.
경희궁과 경운궁을 잇는 홍교, 1902년경숭정전의 옛모습(현재의 동국대학교 정각원)
일제강점기
경희궁은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면서 경복궁과 더불어 총독부 소유로 넘어갔습니다. 1907년 일제는 경희궁 안에 통감부 중학교를 세웠으며, 지형도 높은 곳을 깎아 낮은 곳을 메우는 등 크게 변형시켰습니다. 이후 숭정전, 회상전, 흥정당, 흥화문, 황학정 등 얼마 되지 않은 건물들마저 다른 곳으로 팔려가거나 이전되고,또 경희궁 부지 2만 5천여 평을 떼어내어 전매국 관시를 지음에 따라 경희궁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다만 한 때 이곳에 경희궁이라는 궁궐이 있었다는 의미인 '경희궁터'로 인식되었을 뿐이었습니다.
통감부중학교를 짓기위해 헐리는 경희궁 , 1907년경
사적 지정
1980년 9월 경희궁터가 사적 제 271호로 지정된 이후, 1985년 6월 건설부 고시 제258호로 공원지정이 되었고, 서울시립박물관 · 미술관을 이곳에 짓기로 결정함에 따라 서울시에서는 1986년 현대건설로부터 경희궁터를 교환 방식으로 취득하였습니다. 그리고 경희궁 복원 및 박물관 · 미술관 건립 공사에 앞서 여러 차례에 걸쳐 경희궁터의 유구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복원 가능한 건물과 박물관의 위치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경희궁지의 옛모습 (1972년 항공사진)
시굴성격의 경희궁터 발굴조사
서울시에서는「경희궁지 복원과 시민사적공원 조성계획」에 따라 1985년과 1987년 두 차례에 걸쳐 경희궁터 유구발굴 조사를 진행하였습니다. 두 차례의 유구발굴 조사는 단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담당하였습니다. 1차 유구발굴 조사는 1985년 8월 7일부터 11월 20일 사이에 진행되었는데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위한 시굴'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아직까지 옛 서울고 건물들이 남아 있는 상태여서 이를 제외한 지역을 대상으로 유구발굴 조사를 진행하였습니다. 발굴조사를 통해 숭정전의 상하 월대 중 하월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장대석 일부와 어계(御階), 동쪽 행랑의 초석2점, 서쪽 회랑 아래쪽의 암거(暗渠) 배수구, 숭정문터의 적심석 6기와 숭정문의 계석지(階石址)등 여러 유구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발굴과정에서 기와 조각과 자기 조각 등 1,000여 점의 유물을 출토하였습니다. 1차 조사에서는 숭정전 일대의 복원 가능성을 확인한 점이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차 유구발굴 조사는 1986년 6월 홍익대학교 부설 환경개발연구원에서 수행한「경희궁 근린공원조성 기본계획」에 따라 1986년 12월 29일부터 1987년 6월 30일 사이에 진행하였습니다. 1차 발굴지역을 제외한 경희궁터 전역을 대상으로 조사하여, 2개의 건물지, 담당지, 배수지를 확인하였습니다. 두 차례의 유구발굴 조사를 통해 확보한 유물들은 대부분 조선시대 것으로 17세기에 해당하는 유물이 많았습니다.
숭정전, 자정전, 태령전터 발굴조사
숭정전과 숭정문, 동서남북 회랑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발굴조사는 1985년부터 7차례 실시하였습니다.
1985년과 1987년에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단국대 박물관에서 수행하였으며, 이후 1988년부터 1994년까지 5차례의 발굴조사는 명지대학교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에서 담당하였습니다.
한국건축문화연구소에서는 1988년 12월~1989년 5월 사이에「숭정전 건립부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단국대 박물관의 조사 때 발굴하였던 월대석을 노출하였고, 당시까지 계단으로 사용하고 있던 어계는 숭정전 건물과는 축을 달리하고 있음을 밝혀냈습니다. 또한 애초의 추정과 달리 숭정전은 옛 서울고의 신관 건물이 아니라 식당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동 연구소에서는 1989년 10월~12월 사이에 숭정전의 동서 월량과 상하 월대의 유구를 발굴하기 위해 '경희궁 숭정전 발굴조사'를 행하여, 상하 월대의 일부분과 동서 월량의 주칸 및 칸 사이를 알려주는 초석을 발견하였고, 월랑이 복랑(複廊)으로 되어 있으며 숭정전으로부터의 거리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1990년 3월~5월에는, 이전 발굴 때 철거되지 않아 발굴하지 못했던 강당 건물이 철거되었기 때문에 숭정문과 그 주위의 기단, 동쪽과 남쪽의 월랑 위치를 확인할 목적으로 '숭정문지 및 남회랑지 발굴조사'를 진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숭정문 앞 하월대의 최하단 및 2단을 구성하는 1열의 장대석들과 계단터 동쪽 모서리에서 동쪽으로 향해 있는 화계를 발굴하였습니다.
1991년 11월~1992년 8월에는「자정문지 및 북회랑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숭정전의 서북쪽 회랑 터 아래로 장대석으로 잘 조영된 암거(暗渠)배수구가 지나고 있음을 확인하였고, 이 외 적심석 몇 개를 발굴하였습니다.
1993년 11월~1994년 2월에는 YMCA건물과 유류고가 철거됨에 따라 숭정전의 서쪽과 북쪽의 회랑 터를 발굴하기 위해 '자정전지 및 숭정전 서북회랑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발굴 결과 숭정전 북쪽 회랑 터에서 초석 4기를 비롯하여 적심 5기 등 화방벽으로 구획된 건물 터를 확인하였습니다.
또한 건물 터 좌우에서 초석 7기를 비롯하여 바닥에 전돌이 깔린 양호한 상태의 천랑(穿廊)터를 발굴하였습니다.
자정전 터에 대한 발굴조사는 한국건축문화연구소에서 1991년 11월~12월, 1993년 11월~1994년 2월과 1995년 7월~1996년 1월에 걸쳐 세 차례 진행하였습니다. 1차 조사에서는 자정문 터 아래로 암거 배수구가 지나고 있다는 사실과 자정문의 서쪽 기단이 잘 남아 있다는 점을 확인하였습니다.
2차 조사에서 자정전이 있었음을 확인해주는 기단의 장대석을 일부 발굴하였습니다. 3차 조사에서는 자정전의 앞마당에 해당하는 부분과 서쪽 부분, 그리고 자정전 북쪽에 해당하는 옛 서울고 소운동장을 발굴하였으나 큰 소득은 없었습니다. 다만 숭정전 서쪽 회랑으로부터 약 11m 떨어진 곳에서 회랑 터로 추정되는 1칸의 구들자리를 발굴하였습니다.
태령전 터에 대한 발굴조사 역시 한국건축문화연구소에서 1996년 10월~1997년 4월 사이에 실시하였습니다. 10개의 줄구덩이를 파서 유구의 상태를 확인하고자 하였으나 태령전의 위치와 규모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배수로와 적심 3기, 적심석 등을 발굴한 것과, 옛 서울고의 신관과 화장실을 세우면서 설치했던 콘크리트 옹벽에 묻혀 있던 영렬천(靈洌泉)을 발굴한 것이 나름의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희궁 복원사업
이같은 발굴 결과와 문헌 고증을 거쳐 경희궁내 각 전각을 복원하는 사업이 진행되었습니다. 1987년에는 흥화문을, 1991년에는 숭정전을, 자정전과 회랑은 1998년에, 태령전과 그 일곽은 2000년에 각각 경희궁내에 복원하였습니다.
다만 흥화문은 원 위치에 구세군회관이 위치한 관계로 원위치에 옮길 수가 없어 서쪽으로 100여m 이동하여 복원하였습니다. -
- 경희궁 전각 흥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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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24-07-25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금천교 동쪽, 즉 현재의 구세군 빌딩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흥화문을 떼어갔었습니다. 광복 이후 박문사가 폐지되고 그 자리에는 영빈관에 이어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그 정문으로 남아있었습니다.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경희궁터로 옮겨 왔는데 원래의 자리에는 이미 구세군빌딩이 세워져 있어서, 현재의 위치에 이전하여 복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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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희궁 전각 금천교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7-25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들어서면 궁내의 전각에 들어서기 전에 흐르던 금천에 놓여진 돌다리입니다. 난간의 돌짐승들이나 홍예 사이에 새겨진 도깨비 얼굴은 대궐 바깥의 나쁜 기운이 궐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상징성을 띠는 것입니다. 1619년(광해군 11)에 건립되었던 것을 일제가 매몰시켰지만, 서울시에서는 2001년 발굴을 통하여 발견된 옛 석조물을 바탕으로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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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희궁 전각 숭정전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7-25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으로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진 곳입니다. 특히 경종, 정조, 헌종 등 세 임금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숭정전은 경희궁 창건공사 초기인 1618년(광해군 10)경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로 건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건물을 일본인 사찰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경희궁지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위치에 발굴된 기단석 등을 이용하여 복원한 것입니다. 숭정전 내부 당가에 용상을 설치하였는데, 그 뒤로 곡병과 일월오봉병을 두었다. 우물천정에는 마주보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을 새겨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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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희궁 전각 자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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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24-07-25
자정전은 경희궁의 편전으로서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입니다. 숙종이 승하한 후에는 빈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하였습니다. 1617~20년(광해군 9~12) 사이에 건립되었으나, 일제가 훼손하였습니다. 서울시에서는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자리에 <서궐도안>에 현재의 건물을 복원하였습니다. 자정전 서쪽에는 발굴을 통하여 행랑의 바닥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돌이 발견되었기에 발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여 복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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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희궁 전각 태령전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7-25
태령전은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곳입니다. 본래는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는 않았던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조의 어진이 새로 그려지자 1744년(영조 20)에 이 곳을 중수하여 어진을 봉안하였고, 영조가 승하한 후에는 혼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흔적조차 거의 남아있지 않던 태령전을 서울시에서는 <서궐도안>에 따라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복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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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희궁 전각 서암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7-25
태령전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 암천(巖泉)으로 불리는 바위 속의 샘이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습니다. 본래는 왕암(王巖)으로 불리었는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 지역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습니다. 1708년(숙종34)에 이름을 서암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瑞巖'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게 하였습니다. 현재 서암을 새겨 두었던 사방석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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