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의 거리에서 외길을 따라 고당리 방면으로 가다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난계 선생이 태어난 가옥이 있다.
630여년 전, 난계 박연 선생이 태어난 곳이고 관직에서 물러나 타계하기까지 머물렀던 가옥이기도 하다.
난계박연선생은
려 우왕4년(1378년)에 이곳에서 출생하여 세조2년(1456)에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으로 돌아와 살다가 세조4년 (1458년)3월 23일 8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난계생가를 찾아가는 발길은 자못 기대가 된다. 국악의 거성이면서 여러 고위 관직을 두루 거치며 한 시대를 풍미 했던 인물이 낳고 자란 곳이며 말년을 보낸 곳이라 하니 더욱 그렇다.
그러나 막상 난계생가에 도착하니 “이렇게 소탈 할 수가?” 의문이 들 정도로 생가의 구조는 소박했다.
아무리 자식의 흉사로 낙향한 인물이기로서니 예문관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3대왕을 섬긴 선비의 집이라 생각하고 들어선 발길은 실망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난계의 관록에 비해 소박해도 너무 소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계박연선생은 고려 우왕4년(1378년)에 이곳에서 출생하여 세조2년(1456)에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으로 돌아와 살다가 세조4년(1458)3월23일 81세를 일기로 타계 했다.
난계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는 삼남 계우가 단종복위 사건에 연루되어서이고, 난계 또한 화를 당할 뻔 했으나, 세 임금에 봉직한 공으로 벼슬만 파면되어 낙향한 것에서 연유된다.
난계가 낙향할 때 필마(匹馬)에 하인 한 사람을 거느린 쓸쓸한 행장에 피리하나가전부였다.
이때 난계는 배를타고 강을 건너며 피리를 불었다 한다. “박연의 피리 소리에 가던 배도 멈추고 그 피리소리를 듣는 이가 모두 쓸쓸한 느낌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는 일화는 한 시대를 풍미 했던 걸출한 인물의 비애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이야기일 것이며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음악과 함께한 국악의 거성 난계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말년에 닥친 불운 속에서 비피하고 바람막이할 집 한 채면 그만인 것을” 낙심천만이었을 난계의 심정을 그의 생가는 전하고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집 구경을 하다 멈춰선 발길. 장독대 앞이다. 올망졸망한 장독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데 집의 규모와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싶다.
난계생가의 장독대만이 이곳이 고위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국악의 거성 난계의 생가임을 말해주는 듯 하다.
우리의 전통건축은 지붕의 모양에 따라서 맞배지붕, 팔작지붕, 우진각지붕, 모임지붕으로 나누며 재료에 따라서 기와지붕, 초가지붕, 너와지붕 등으로 나누어진다.
난계생가는 이 중 우진각지붕에 기와를 얺고 있다. 우진각지붕은 용마루와 추녀마루만 있고 내림마루는 없으며 전후(前後) 면은 사다리꼴이며 양쪽측면은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용마루가 짧고 내림마루가 길게 늘어진 모습이 특이하다. 생가의 구조는 정면3칸 측면3칸으로 측면 1칸은 퇴칸 구조이며 정면2칸만큼 우물마루를 내었다.
나머지 한 칸은 부엌 칸으로 부엌과 곡식창고가 함께 있는 공간이다.
난계생가의 부속채는 1동으로 외양간, 광과 방1칸인 초가지붕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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