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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6교구 마곡사 마곡사 명부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8
    마곡사 명부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8

    업장 소멸 명부전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죽음을 말하니 무섭다구요.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자연의 이치는 생(生)을 간직한 모든 이에게 평등합니다. 죽음 역시 그렇지요.
    당신은 업보와 윤회에 대해 얼마나 확신하고 있습니까. 믿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리 확신하지는 못할 겁니다.
    명부전은 죽음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면서 그 동안의 업장을 참회하고 소멸하는 기도 처입니다.

    지장보살님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모든 중생들까지 다 구제할 것을 서원하신 보살님이십니다.
    그러하기에 지장보살님께 기도하면 과거와 현재의 모든 업보와 죄를 소멸할 수 있습니다. 지장보살님을 모시고 있는 명부전은 특히 군왕대의 좋은 기운이 모인 곳으로, 참회 정진에 특히 좋은 정진 터입니다.
    마곡사의 명부전은 1939년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는 전각입니다. 건물에는 지장보살님을 중앙 불단에 모시고 있으며 좌우에 ‘ㄷ’자형의 불단을 만들어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님을 모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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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6교구 마곡사 마곡사 해탈문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8
    마곡사 해탈문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8

    法界로 들어가는 해탈문
    해탈문은 마곡사의 정문입니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 자료 제66호로 지정되었으며 태화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문을 지나면 속세를 벗어나 부처님의 세계 즉 법계(法界) 에 들어가게 되며 ‘해탈을 하겠다’는 원력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두 번째 문인 마곡사 천왕문이 박공지붕집인 데 비해 해탈문은 추녀 밑에 처마의 하중을 받고 장식도 겸해 나무쪽을 짜 맞춘 도구를 여러 개 배치한 겹처마 팔작지붕집입니다.

    건물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모두 판장 벽으로 막았습니다. 공포(拱包)는 3제공 형식으로, 제공 조두형(鳥頭形) 돋을새김을 하고 있으며 제공에는 연꽃을 조각하였습니다. 정면의 중앙 칸을 개방하여 통로로 사용하고 있으며 양편에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과 보현(普賢) 및 문수동자상(文殊童子像)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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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6교구 마곡사 마곡사 천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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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4-28
    마곡사 천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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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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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8

    호법신장 나투신 천왕문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6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태화산 남쪽 기슭에 있는 마곡사의 두 번째 문으로,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곡사의 첫 번째 관문인 해탈문은 겹처마 팔작지붕집이지만 천왕 문은 1출목 익공식(翼工式) 공포(拱包)를 짜 올리고 전후면 공포 사이에는 화반(花盤)을 하나씩 설치한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된 박공지붕집입니다.

    중앙 칸에는 동서남북의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장인 사천왕상 (四天王像)을 조성해 안치했습니다.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며 내부에 걸린 편액(篇額)에는 “1910년 6월에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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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6교구 마곡사 마곡사 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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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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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8
    마곡사 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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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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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8

    나라의 기근 막는 오층석탑

    대광보전 앞에 위치한 오층석탑은 보물 제799호로, 일명 다보탑 또는 금탑이라고도 부릅니다.

    탑의 2층 네 면에는 소박한 솜씨로 ‘사방불’이 양각되어 있으며 상륜부에는 청동제인 풍마 등이 조 성되어 있습니다. 라마식 보탑과 유사한 점으로 보아 원나라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방불이란 동서남북의 방위개념으로 모든 방향을 포괄하는 상징 이기도 하므로 사방불은 모든 공간에 부처님이 영원히 거주한다는 불신상주의 전형적인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불에서 과거불과 미래불이라는 삼세불로의 확대는 시간을 횡으로 가르고 다시 공간적으로 투영되어 사방(四方), 팔방(八方), 시방(十方)에 현재불이 등장함으로서 현재의 다방불, 천불, 삼 천불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상적 경향은 모든 중생이 본래 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이미 깨달은 상태에 있다는 내재불 사상으로 발전했습니다. 오층석탑에는 나라의 기근을 3일간 막을 수 있다는 전설도 전해 내 려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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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6교구 마곡사 마곡사 마곡사 현판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8
    마곡사 마곡사 현판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8

    마곡사 현판은 근대 서화가인 해강(海剛) 김규진(金圭鎭. 1868~1933) 의 글씨이다.

    모든 서법에 자유로왔으며 특히 대필서(代筆書)가 당대 에 독보적이었다고 한다. 현판 양족을 초화와 화훼로 꾸미고 초서로 썼다. 김규진의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海岡)이며, 그 외 백운거사(白雲居士) 취옹(醉翁) 만이천봉주인(萬二千奉主人) 등 10여 개가 있다. 평남 중화 출생. 8세부터 장인 이소남(李小南) 에게 글씨를 배우고 18세 때 청(淸)나라에 유학하여 서화(書畵)의 명적(名蹟)을 연구하였다.

    전서(專書), 예서(隸書), 해서(骸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에 모두 묘경(妙境)을 이루었고, 산수화 화조화 (花鳥畵)를 잘 그렸으며 특히 난죽(蘭竹)은 절묘하였다. 그는 사군자(四君子)도 즐겨 그렸고 글씨는 대자(大字)를 특히 잘 썼다. 영친왕이은(英親王李垠)에게 서법(書法)을 가르쳤다. 한국 최초로 사진술을 도입하고 어전(御前)사진사가 되었다. 한편, 안중식(安仲植) 조석진(趙錫眞)과 함께 서화협회를 창설하여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경향 각지에서 화전을 개최하여 서화 예술의 계몽에도 진력하였다. 저서에 <해강난죽보><육체필론><서법진결><금강유람가> 작품으로는 글씨에 <기법보살><천하기절><금수강산><대웅전><백마장강><촉석루><가야산해인사><보신각><희정당대조전><태극전> 그림에 <외금강만물상도><소상대죽도><대부귀길상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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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6교구 마곡사 마곡사 대광보전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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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4-28
    마곡사 대광보전 현판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8

    시문서화 사절로 꼽히던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의 글씨이다.

    글씨체는 약간 흘림체로 힘이 있고 유려하다.
    본관 진주(晋州). 자 광지(光之). 호 첨재(添齋)·표옹(豹翁)·노죽(路竹)·산향재(山響齋)·표암(豹菴). 시호 헌정(憲靖).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8세 때 시를 짓고, 13~14세 때는 글씨에 뛰어난 솜씨를 보여, 소년기에 쓴 글씨조차도 병풍을 만드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아버지의 사랑과 교육을 받았으며, 매형이었던 임정(任珽)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처남 유경종 외에도 허필(許佖) ·이수봉(李壽鳳) 등

    과 절친하게 지냈으며, 이익·강희언 등과도 교유하였다. 당대의 유명한 화가였던 김홍도·신위 등도 그의 제자들이다. 벼슬에 뜻이 없어 젊은 시절에는 주로 작품활동에만 전념하였다. 32세 때 가난 때문에 안산(安山)으로 이주한 뒤에도 오랫동안 학문과 서화에만 전념하였다. 처음 벼슬을 한 것은 61세로, 영조의 배려에 힘입어 관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64세 때 기구과(耆耉科), 66세 때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영릉참봉·사포별제(司圃別提)·병조참의·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72세 때 북경사행(北京使行), 76세 때 금강산 유람을 하고, 기행문과 실경사생 등을 남겼다. 시·서·화의 삼절로 불렀으며, 식견과 안목이 뛰어난 사대부 화가였다. 그 자신은 그림제작과 화평(畵評)활동을 주로 하였는데, 이를 통해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이밖에도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서양화법을 수용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평생 동안 추구한 그의 서화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습기(習氣)도 속기(俗氣)도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다. 산수·화훼가 그림의 주소재였으며, 만년에는 묵죽으로 이름을 날렸다. 작품으로는 《첨재화보(添齋畵譜)》 《벽오청서도》 《표현연화첩》 《송도기행첩》 《삼청도》 《난죽도》 《피금정도》 《임왕서첩(臨王書帖)》 등이 있으며, 54세 때 쓴 《표옹자지(豹翁自誌)》에 있는 자화상을 비롯하여 7~8폭의 초상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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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6교구 마곡사 마곡사 심검당 현판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8
    마곡사 심검당 현판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8

    심검당 현판은 정조 연간에 청백한 관리로 이름난 송하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의 글씨이다.

    청빈한 그의 인품을 보여주듯 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느낌으로 '심검'이라는 의미와 상통하는 글씨체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치행(穉行), 호는 송하옹(松下翁). 할아버지는 판결사 조하기(曺夏奇)이며, 아버지는 개성부유수 조명교(曺命敎)이다.
    문음(門蔭)과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1766년(영조 42) 처음 벼슬길에 나간 뒤 1781년(정조 5) 선공감주부가 되었으며, 1784년 예조정랑을 역임하였다. 이어서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거쳐 보덕(輔德)이 되어 책례도감상례(冊禮都監相禮)를 겸하였다.

    그 뒤 안악군수·광주목사(廣州牧使) 등 3현·2군·1목의 수령을 역임하고 돌아와 1791년 호조참의가 되었으며, 1797년에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그림과 글씨에 능하였는데, 풀·대나무 등의 묵화를 잘 그렸다.
    글씨는 초서·예서를 잘 써서 일찍이 서사관(書寫官)을 역임하였으며, 위로는 대신들로부터 아래로 조례(皁隷)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그의 글을 얻으려 하였다.
    작품으로는 「유점사풍악당대사비(楡岾寺楓嶽堂大師碑)」·「이보혁무신기공비(李普赫戊申紀功碑)」·「용흥잠저고정기(龍興潛邸古井)」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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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6교구 마곡사 마곡사 영산전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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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4-28
    마곡사 영산전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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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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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8

    영산전 현판은 세조가 1465년에서 1487년 사이에 마곡사에 들러 쓴 현판이라고 '마곡사 사적입안'에 기록되어 있으며 실제 현판에는 '세조어필 '이라고 쓰여져 있다.

    재위 1455년(세조 1)∼1468년(세조 14).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유(李瑈). 자는 수지(粹之). 세종의 둘째 아들이고 문종의 아우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이다. 왕비는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尹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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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6교구 마곡사 마곡사와 백범 김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8
    마곡사와 백범 김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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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곡사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다 간 백범당이라는 건물이 있고 그 옆으로는 김구 선생이 해방 후 1946년 여러 동지들과 이곳을 찾아와 기념식수를 한 향나무가 아직도 파랗게 자라고 있다.

    백범선생은 마곡사를 떠난 지 근 50년 만에 돌아와 대광보전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 : 돌아와 세상을 보니 모든 일이 꿈만 같구나)라는 원각경에 나오는 문구를 보고 감개무량하여 이 향나무를 심었다 한다.

    백범 선생은 동학교도에서 승려, 독립군, 상해 임시정부 초대 주석에 이르기까지 투쟁과 투옥 그리고 망명으로 점철된 삶이었지만 언제나 해방된 조국, 하나 된 조국의 뚜렷한 목표가 변하지 않았다.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은 선생의 고절한 생을 흠모하는 것이다.
    백범 선생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1896년 일본군 중좌를 살해하고 살인범으로 낙인찍혀 인천교도소에서 사형수로 복역 중 그곳을 탈옥하여 1898년 마곡사에서 은신하다가 하은당이라 불리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하였다.

    백범일지에는 그의 출가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사제(師弟) 호덕삼(扈德三)이 머리털을 깎는 칼(削刀을 가지고 왔다. 냇가로 나가 삭발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내 상투가 모래 위로 뚝 떨어졌다.이미 결심을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
    출가 당시의 착잡했던 심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지금도 마곡사에는 김구 선생이 삭발했던 바위가 있고 지금은 마곡사와 공주 시청이 이곳 삭발바위와 마곡천을 잇는 다리를 놓아 백범교라 부르고 그곳에서 마곡천 절경을 굽어보는 마곡사 또 다른 명소가 되었다. 또한 마곡사 생태농장에서 군왕대로 이어지는 <백범 솔바람 명상 길>을 두어 마곡사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1시간가량 산보하기 좋다.

    백범 선생이 지냈던 백범당에는 백범선생의 진영(眞影)과 1946년 마곡사를 방문했을 때 마을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는데 백범 선생 뒤로는 왼쪽에는 완장을 찬 좌익이 서있고 오른 쪽에는 넥타이를 맨 우익이 서있다. 이렇듯 백범선생은 사상 보다는 하나 된 조국을 더 원하였다.
    사진 옆에는 백범선생이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던 친필 휘호가 있는데 그것은 서산대사의 선시로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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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덮인 들판을 밟고 갈 적에
    어지러이 거어선 아니되겠지
    오늘 내가 걸었던 길을
    뒷사람이 그대로 따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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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6교구 마곡사 마곡사 역사 e7c3b4e14d8bb4fd070d1b186178b364_1714288696_28.jpg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8
    마곡사 역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8

    충청남도(忠淸南道) 공주시(公州市) 사곡면(寺谷面) 운암리(雲岩里)의 태화산(泰華山) 동쪽 산허리에 자리 잡은 마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6교구본사(本寺)입니다.
    ‘春마곡’이란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봄볕에 생기가 움트는 마곡사의 태화산은 나무와 봄꽃들의 아름다움이 빼어 납니다.
    마곡사 사적입안(事蹟立案)의 기록에 따르면 '마곡사는 640년(백제(百濟) 무왕(武王) 41년)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고려 명종(明宗) 때인 1172년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수하고 범일(梵日) 대사가 재건하였다고 합니다.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다시 중수하고 각순 (覺淳) 대사가 보수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세조가 이 절에 들러 ‘영산전(靈山殿)’이란 사액(賜額)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신라의 고승 자장 율사가 창건할 당시만 하더라도 30여 칸에 이르는 대사찰이었으나 현재 마곡사는 대웅보전(보물 제801호)을 비롯한 대광보전(大光寶殿:보물 제802호), 영산전(보물 제800호), 사천왕문, 해탈문(解脫門) 등의 전각들이 가람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도량의 성보(聖寶)로는 5층 석탑(보물 제799호)과 범종(梵鐘:지방유형문화재 제62호), 괘불(掛佛) 1폭, 목패(木牌), 세조가 타던 연(輦), 청동 향로(지방유형문화재 제20호)가 있으며 감지금니묘볍연화경(紺紙金泥妙法蓮華經) 제6권(보물 제270호) 과 감지은니묘법연화경 제1권(보물 제269호)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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