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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1교구 불국사 불국사 삼장보살도(보물 제1933호)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9
    불국사 삼장보살도(보물 제1933호)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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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불국사 삼장보살도는 1739년 밀기(密機), 채원(彩元), 서징(瑞澄) 등이 경주 거동사(巨洞寺) 오주암(五周庵)에서 제작하여 불영사에 봉안하였다는 분명한 화기를 남기고 있어 18세기 전반기 삼장보살도 도상 및 화풍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천장보살이 범협(梵夾)같은 지물을 들고 있다든가, 지지보살과 지장보살의 협시가 좌우 대칭을 이루며 무장형의 인물을 배치하였다든가 하는 점은 이 삼장보살도가『오종범음집(五種梵音集)』을 근거로 하여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보이고 있으며, 또한 팔공산 지역과 구미, 상주 일원의 경북 중북부 지역의 결합된 화풍을 담고 있다는 사실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더불어 삼존을 동일선상에 수평으로 나란히 앉힌 구도는 시각적으로 안정을 구가하며, 인물의 세부 묘사력도 섬세하고 정취하다. 명도는 낮고 채도가 높은 붉은색과 녹색, 황색, 육색 계통을 주조 색으로 사용하여 종교회화가 지향하는 숭고함과 장엄함을 잘 표출하였다. 물론 앞선 시기의 담백한 담채풍의 맑고 명랑한 색채감에 비해 좀 더 짙고 탁해진 느낌은 있지만, 이는 시대적 미의식과 작가의 취향 등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구사된 선묘는 주로 변화가 드문 일정한 선을 사용하였으나, 머뭇거림 없는 붓질도 유려하여 생동감이 넘친다. 강조색으로 사용된 백색은 색감이 또렷하게 돌출되어 평면적인 화면에 입체감을 부여한 점도 기법상 주목할 만하다. 이렇듯 이 삼장보살도는 모든 면에서 18세기 전반기 불화를 대표할 만한 작품이며, 이 시기 화풍 및 삼장보살도의 도상 등 불화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문화재청

  2.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1교구 불국사 불국사 당간지주(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6호)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9
    불국사 당간지주(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6호)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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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에서 의식이 있을 때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단다. 당을 매다는 긴 장대를 당간幢竿이라고 하며,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양쪽에 세운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나란히 서있는 2쌍의 당간지주 중 동쪽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때 세워진 것이지만, 서쪽 당간지주는 기둥 크기와 제작 수법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각기 다른 부재를 후대에 조합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국사 경내 입구 대석단 앞에 동서방향으로 2쌍이 나란히 서있다. 두 쌍의 당간지주 가운데 서편 당간지주는 좌우 기둥의 크기와 제작수법에 차이가 있어 각기 다른 부재를 후대에 조합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편 당간지주는 전반적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하다고 하겠으나 양 기둥의 하부가 절단된 것을 1924년도에 시멘트로 접합하였고 풍화가 진행되고 있다.

    원래의 위치에 남아있는 동편 당간지주는 그 자체만으로도 불국사와 관련하여 중요한 석조유물일 뿐 아니라, 전체적인 조형이나 장식적인 의장면에서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의 양식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서편 당간지주는 당간지주의 원래 용도가 단절된 조선시대에 이르러 괘불을 현괘하기 위한 용도로 다시 고안된 사례로 중요한 문화사적 의의를 지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양 기둥의 양식이나 제작연대가 다른 것을 조합하고 있어 조형성이 다소 떨어지는 측면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출처/ 문화재청

  3.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1교구 불국사 성림당 월산 대종사 (聖林堂 月山 大宗師) bea326d1e515bf680a117ee4363dcbfa_1714373343_65.jpg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9
    성림당 월산 대종사 (聖林堂 月山 大宗師)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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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wolsan.kr/
     

    1912. 5. 5. 함경남도 신흥군 원평면에서 경주 최씨 흥규의 아들로 태어남. 이름은 종렬鍾烈이라 함. 신라의 최고운 선생의 후예로 돈독한 불교가정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자라면서 문자 이전의 소식과 인간의 본래 모습에 대해 많은 질문을 가짐.  
    1943. 부친이 사망하신 후 석왕사 노승인 양안광스님 소개로 치악산 상원사 전금초스님을 찾아 당시 수행 승단의 현황을 알게 됐고, 망월사로 소개 서찰을 받게됨.
    1944. 해방 직전 망월사로 가서 춘성스님의 안내로 금오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아 득도함.
    1945. 해방 전후 덕숭산 만공스님 회상으로 찾아가 공양주 소임을 한 철 지냄. 당대의 선지식 만공스님으로부터 ‘이뭣고’화두를 받았고 이 화두를 열심히 챙김. 만공 금봉 금오 전강선사 밑에서 수선 안거를 한 뒤 3년간 운수행각 길에 나섬. 수덕사를 떠나 금오스님 보임처였던 전남 보길도 남문사에서 비룡스님(한암스님 제자)과 함께 용맹 수행함. 경북 청도 적천사 토굴에서 수행 정진. 10여년간 구도자로서 방향을 정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됨.
    1961. 전 주지 범행스님의 추천과 함께 팔공산 동화사 주지 피임, 속리산 법주사, 태백산 각화사, 설악산 신흥사, 오대산 월정사, 상원암, 문경 봉암사 등지에서 수행 정진함. 봉암사에서 향곡, 성철, 보문, 청담, 자운스님과 함께 수행함.
    1968. 경허, 만공, 한암, 보월, 금오선사로 이어지는 조계 선종의 법맥을 금오스님으로부터 인가 받음.
    1968. 9.7 총무원장에 취임.
    1968. 10. 8 오후 7시 15분에 은사 금오스님이 법주사 염화실에서 입적함.
    1969. 11. 23 대한불교 조계종 대처 비구 양측의 결의절차에 따른 합법종헌과 종단임을 대법원에서 판결 받음.
    1970. 2. 21 불교, 천주교, 성공회, 원불교, 유교 등이 모여 창립한 <한국종교협의회>에 초대 회장으로 취임됨.
    1973. 8. 불국사 주지 직무대행(수덕사 전월사 토굴로부터 오심)
    1974. 6. 23 불국사 주지에 임명, 불국사 중창불사 및 불국선원을 개원하여 관광사찰의 이미지에서 수행 도량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하심.
    1978. 제6대 총무원장에 취임.
    1986 6. 4 조계종 종정을 추천하는 기관인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에 취임.
    1987.    대통령과의 면담하는 자리에서 민주적 개헌 방향을 밝혀야 소요가 진정됨을 건의.
    1988.3 재가자들의 선 수행을 위해 경주시에 부인선원 개원 하셔서 100여 명의 결제대중이 항상정진 하게 하심. 이렇게 20여 년간 불국사에서 안거하며 덕숭문중의 큰 기둥으로 수행선풍을 진작하고 한국불교를 이끔.
     1997.세수 85세, 법랍 55세로 55년간을 오로지 선수행으로 일관하였음. 8월 5일 와석에서 잠시 일어나 제자 대중을 향하여 가고옴이 없는 본래사本來事를 간단한 게송과 미소점두로 보이시고 홀연히 열반에 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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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0교구 은해사 은해사 가람 배치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9
    은해사 가람 배치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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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극락보전(대웅전)
    2 보화루
    3 설선당
    4 단서각
    5 산신각
    6 심검당
    7 종각
    8 우향각
    9 지장전
    10 호연당
    11 도선당
    12 청풍당 (종무소, 원주실)
    13 후원(식당)
    14 성보박물관
    15 학예관실
    16 요사
    17 불이문
    18 조사전
    19 세면장
    20 오층석탑

  5.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0교구 은해사 은해사 역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9
    은해사 역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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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년 고찰 팔공산 은해사
    은해사는 조선 31본산, 경북 5대 본산,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의 자리를 지키는 경북지방의 대표적 사찰이다.
    그리고 교구 본사중 본존불로 아미타불을 모시는 미타도량으로도 유명하다. 신라 41대 헌덕왕 1년(809년)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이 해안사인데 이 해안사로부터 은해사의 역사가 시작된다. 현존하는 암자만도 여덟 개가 있고 말사 숫자가 50여 개에 이르고 한국 불교의 강백들을 양성, 교육하는 "종립 은해사 승가대학원"이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불,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으로 계신 것처럼 웅장한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은해사이다.
    또 은해사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 날 때면 그 광경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 하다고 해서 은해사라고도 한다. 신라의 진표율사는 한 길 은색 세계가 마치 바다처럼 겹겹이 펼쳐져 있다. (一道銀色世界 如海重重) 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은해사는 현재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1943년까지만 하더라도 은해사에는 건물이 35동 245칸에 이르러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했지만, 현재 은해사 본사 내에는 19개 건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은해사의 가람
    은해사는 조선시대 대부분의 산지가람처럼 단탑단금당식(單塔單金堂式)으로 가람배치가 되어있다.
    대웅전 앞에 있던 오층석탑은 최근 보존을 위해서 부도전으로 이전하였다. 대웅전 앞에는 보화루가 있고 보화루 좌우로 심검당과 설선당이 있으며 그 가운데 장방형의 정원이 있는 중정식 가람배치 구조이다. 중정은 장방형이지만 중간부분에 계단으로 축대를 만들어 놓아서 보화루로 들어오는 참배객이 볼 때
    정방형에 가깝게 보여서 대웅전이 더 웅장하게 다가오는 느낌을 준다.

    역사 속의 은해사 출신 스님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수와 불사를 거듭한 은해사는 한국을 빛낸 여러 고승을 배출하였다.
    신라시대에는 우리나라 불교의 새 장을 여신 화쟁국사 원효스님과 해동 화엄종의 초조이신 의상스님이 있고, 고려시대에는 현재 조계종의 종조이신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 삼국유사를 저술하신 보각국사 일연스님 등이 있다.(일연스님과 원효스님의 추모 다례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홍진국사가 머무른 뒤부터 선교양종의 총본산으로 사격이 고양되었고 화엄학의 대강백이신 영파성규 스님이 이곳을 중창한 뒤로는 화엄교학의 본산으로서 그 명성이 높았다. 최근에도 향곡, 운봉, 성철스님 등 수많은 선지식을 배출하였다. 현재에는 비구 선방 운부암, 기기암과 비구니 선방 백흥암 등에서 100여 분의 스님들이 수행하고 계신다. 또한 한국불교 최고의 경율론 삼장법사과정인 대한불교 조계종 은해사 승가대학원에서 10여 분의 석학들이 정진 수학중이시다.

    은해사 역사

    신라 41대 헌덕왕이 즉위한 809년에 해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이 해안사인데 이 해안사로부터 은해사의 역사가 시작된다.

    헌덕왕은 조카인 40대 애장왕을 폐위시키고 즉위했다. 당시 정쟁의 피바람 속에서 숨진 원혼을 달래며 왕의 참회를 돕고 나아가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위해서 창건한 사찰이 은해사의 시초가 되는 해안사이다.

    운부암에 가는 길 부근인 해안평이 그 해안사 절터이니 운부암을 가는 길에 한번 관심있게 살펴보기 바란다. 해안사 창건후 고려시대 1270년(원종 11년)에 홍진국사가 중창하였고, 1275년 충렬왕 때 원참스님이 중건하였다. 조선시대에도 1485년 성종 16년에 죽청스님과 의찬스님이 묘봉암을 중창하였으나 1545년 인종 원년에 큰 화재가 발생해 사찰이 전소되었다.

    이듬해 1546년 명종 원년에 나라에서 하사한 보조금으로 천교화상이 지금의 장소로 법당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다. 이 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하여 인종의 태실을 봉하고 은해사라고 이름을 짓게 되었다. 1563년 화재로 소실되고 이듬해에 묘진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589년 선조 22년에 법영대사가 법당을 현재의 자리에 크게 중창하고 사찰의 규모를 확장하는 일대 불사를 이루어 내었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있었지만 1651년 효종 2년에 각 전각들이 단청 불사를 시행한 기록으로 보아 왜란을 격으면서도 큰 피해는 입지 않은 듯 하다. 1712년 숙종 38년에는 은해사를 종친부에 귀속시켰고, 1714년에는 사찰 입구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소나무를 심었다. 지금의 은해사 앞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그때에 심어진 것으로, 3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들이다.

    1761년 천왕문을 세우고 1772년에는 자암스님이 대웅전 불상을 개금하였으며 도봉스님이 영산전과 시왕전의 불상을 개분했다. 영조는 왕자시절에 이 은해사를 잘 수호하라는 완문을 지어 보낸 일이 있었다. 이것은 영조 등극후에 어제완문이라 하여 이절을 수호하는데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하지만 1847년 헌종 13년에 은해사 창건이래 가장 큰불이 났다. 이때의 화재는 너무 가혹한 것이어서 극락전을 제외한 천여 칸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그러자 인종의 태실 수호사찰이며 영조의 어제수호 완문을 보관하고 있는 사찰인 은해사를 중창하고자 당시 영천 군수 김기철이 300궤미의 돈을 박봉에서 털어내 시주했으며, 대구감영과 서울 왕실의 시주가 계속 답지하였다.

    그리하여 수만냥의 재원을 확보하여 3년여간의 불사 끝에 헌종 15년 1849년에 중창불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 때 지어진 건물이 대웅전, 향실, 고간, 심검당, 설선당, 청풍료, 보화루, 옹호문, 안양전, 동별당, 만월당, 향적각, 공객주 등인데 이 중에서 대웅전과 보화루, 불광의 삼대 편액이 김정희의 글씨로 채워졌다.

    그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은해사는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1943년까지만 하더라도 은해사에는 건물이 35동 245칸에 이르러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했지만, 현재 은해사 본사 내에는 19개 건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은해사와 추사의 인연

    조선조 왕조와 정조시대에 은해사는 영파성규 대사가 주석하면서 화엄종지를 크게 드날리고 있었다.

    이 때 추사는 경상감사로 부임한 그 생부 김노경 공을 따라서 경상도 일원의 명승지를 여행하면서 이 은해사 일대도 들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헌종 13년의 대 화재 뒤 헌종 15년에 마무리 지은 불사때 지어진 건물 중에서 대웅전, 보화루, 불광의 삼대 편액이 김정희의 글씨라서 마치 화엄루각과 같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뒤 고종 16년(1879)에 영천군수 이학래가 다시 쓴 '은해사 연혁변'에서는 '문액의 은해사와 불당의 대웅전, 정각의 보화루가 모두 추사 김시랑의 글씨이고 노전을 일로향각이라 했는데 역시 추사의 예서체이다'라고 하고 있다.

    추사 선생은 안동 김씨와의 세도 다툼에 패하여 55세 되던 헌종 6년(1840) 9월 2일에 제주도로 유배되어 9년 세월을 보낸 다음 헌종 14년(1848) 방면되어 다음해 봄에 64세의 노인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유배중에 불교에 더욱 깊이 귀의하게 된 추사 선생은 영파대사의 옛터이며 또 자신의 진 외고조인 영조대왕의 어제 수호완문을 보장하고 있는 묵은 인연이 있음을 생각하고 현판과 문액을 기꺼이 써 주기로 작정하였던 것 같다.

    이렇듯 거듭되는 인연에 제주도 유배기간 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최고로 발휘한 추사의 글씨가 새로 지은 전각들의 편액을 장식함으로써 과연 화엄루각의 장엄을 이루게 되었다. 1851년 추사는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 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의 길에 오르게 된다. 불과 2년 남짓의 짧은 서울 생활 동안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되는 추사의 글씨가 다섯점이나 은해사에 전해지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은해사와 추사의 인연이 깊기 때문일 것이다.

    간송 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은 추사선생 글씨 중 “은해사”의 글씨를 이렇게 평했다.

    무르익을대로 익어 모두가 허술한 듯한데 어디에서도 빈틈을 찾을 수가 없다.
    둥글둥글 원만한 필획이건만 마치 철근을 구부려 놓은 듯한 힘이 있고
    뭉툭뭉툭 아무렇게나 붓을 대고 뗀 것 같은데 기수의 법칙에서 벗어난 곳이 없다.
    얼핏 결구에 무관심한 듯하지만 필획의 태세 변화와 공간배분이 그렇게 절묘할 수가 없다.

    문 위의 편액인 은해사, 불당의 대웅전, 종각의 보화루, 불광각, 노전의 일로향각 이 다섯점의 추사 글씨는 은해사의 자랑이자 소중한 문화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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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0교구 은해사 은해사 원효성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9
    은해사 원효성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9

    원효는 서기 617년 압량군 불지촌(현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지역)에서 담날(談捺)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효의 속가 성은 설씨이다. 설씨는 신라의 6두품에 해당하는 신분계급이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원효를 잉태할 때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그를 낳을 때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원효의 아명은 서당(誓幢)이라 하였다.

    서당은 ‘첫새벽’을 뜻하는데 그의 의미 그대로 비단 한국의 불교사상만이 아니라 철학사상 일반에 있어서도 큰 새벽을 연 밝은 별이었다. 원효는 사라수 라는 밤나무 아래서 태어났다고 삼국유사에 전해진다.
    이는 석가모니와 같은 출신배경이라 관심이 가져진다.

    출가
    원효는 15세 나이로 출가를 결심한다. 불지촌에서 성장한 15세 소년 서당이 무슨 생각과 계기로 출가를 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분명한 기록은 없다. 그 중 가장 신빙성이 있는 두 가지를 살펴보겠다.
    한가지는 출가 이전에 화랑으로 상정되어 전쟁에 출전했던 그가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고, 유한적 존재의 극한을 경험함으로써 죽음 저편의 무한을 추구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이 추측에 대한 근거는 미약하다. 진골의 신분이라야 가능하던 화랑이 되기에는 원효의 신분에 현실적으로 제약이 따랐을 것이다.
    또 다른 한가지는 불교의 신앙 속에서 골품의 신분적 차별을 초월하는 높은 경지를 체득하려 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그것이다. 당시 중앙 고위의 관직에는 나아가기 어려운 출신 신분상의 제약을 받고 있던 6두품 출신들이 대체로 종교나 학문적인 면으로 진출했음을 유의 해볼 때, 오히려 이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구도의 길
    원효는 진평왕대(579~631) 말기에 그의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7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이때는 통일 전야로 신라의 젊은이들의 활동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왕성했다.
    이들은 목숨을 던져 정의를 지키고, 꽃다운 이름과 아름다운 행동을 본받기를 기꺼이 했다.
    이와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원효 또한 누구보다도 가슴속에 큰 불덩이를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원효성사 관련 이미지
    경산시 자인면 북사리 소재 제석 입구에 서있는 것으로 이 지역 사람들은 이곳을 원효스님의 탄생지라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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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0교구 은해사 은해사 일연국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9
    은해사 일연국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9

    1206년 일연은 아버지 김언필과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김언필은 밝은 해를 보고 태어났다 하여 아기의 이름을 현명이라고 지었다 합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총명했던 일연은 스님을 무척좋아했고 따라 다녔습니다. 그후 승려가 될것을 결심한 현명은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절에 들어가게 되었는데요. 이 때 그의 나이는 13세였습니다.

    이 때부터 '현명' 이라는 이름 대신 '일연'이라는 법명을 사용한 그는 학문에 남달라서 배욱고 익혀 고종 13년(1227년) 승과에 응시하여 최고의 영예인 상상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종 22년 몽고의 3번째 침입으로 고려는 계속 어려움에 처했고 이 때 일연은 조국과 백성을 위하여 마음을 다 쏟아 기도하였습니다.

    또한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방방곡곡을 다니며 설법을 펼쳤습니다.
    사람들은 일연의 설법을 듣고 전쟁으로 인한 불안을 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고종은 이러한 일연의 애국심을 치하하여 '선사' 의 칭호를 내렸고 이어 고종46년(1259년)에는 '대선사'란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 후 원종 2년에는 왕명을 받아 서울 선월사의 주지가 되었고 당시 왕은 일연의 모습을 보지 않고서는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일연은 72세가 되던 해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읽은 후 마지막 결심을 하게 되었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설화나 민속, 민담등을 모아 <삼국유사>를엮었습니다. 한편 일연은 83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효심 또한 지극했다고도 합니다.

    일연국사 저서
    <어록(語錄)>, <게송잡서(偈頌雜書)>, <조동오위(曹洞五位)>, <조도(祖圖)>,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제승법수(諸乘法數)>, <조정사원(祖庭事苑)>

    일연국사

    428호 인각사보각국사탑및비(麟角寺普覺國師塔및碑)
    고려 충렬왕 15년(1289)에 입적한 보각국사 일연의 사리탑과 그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탑비이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저술하는 등 많은 업적을 이룬 승려인데, 노년에 인각사에서 늙으신 어머니를 지극히 봉양하였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아침에 해가 뜰 때 이 탑에서 광채가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일연스님 어머니의 묘를 비추었다고 한다.
    탑은 자연석으로 된 바닥돌 위에 8각의 아래받침돌을 놓았는데 윗면이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가운데받침돌 역시 8각으로, 동물을 조각하였으나 뚜렷하지 않다. 윗받침돌은 8각이지만 원형에 가깝고, 단조롭고 소박한 연꽃이 새겨져 있다. 탑몸도 8각으로 정면에는 ‘보각국사정조지탑’이란 탑이름이 있고, 뒷면에는 문모양의 조각이 있으며 남은 6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과, 연꽃 위에 서있는 보살상(菩薩像)을 새겼다.
    지붕의 두꺼운 추녀 밑은 위로 느리게 들려 있고, 낙수면은 급한 편이며 지붕선 끝부분에 꽃장식이 달려 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큼직하게 올려져 있다. 탑비는 국사의 제자인 법진에 의하여 세워졌다.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인 민지가 왕명을 받들어 지었으며, 글씨는 진나라까지 가서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만들었다. 지금은 비의 형체가 많이 훼손되었으나 다행히 비문은 오대산 월정사에 사본이 남아있다.
    비문에 의하면 비를 세운 시기가 충렬왕 21년(1295)이므로, 부도탑의 건립 역시 일연이 입적한 해인 1289년에서 1295년 사이의 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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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0교구 은해사 은해사 설총대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9
    은해사 설총대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9

    신라 경덕왕 때 학자, 자는 총지, 원효가 아버지였고, 요석공주가 어머니이다.
    6두품 출신인 듯 하고 관직은 한림에 이르렀다. 신라십현의 한사람이다.
    <증보문헌비고>에 경주설씨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출생시기는 태종무열왕대인 654 ~ 660년 사이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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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총은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았고, 경사(經史)에 박통하였으며 신라말로 구경(九經)을 읽고 후생을 가르쳐 유학의 종주가 되었다. 강수(强首)·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삼문장(新羅三文章)으로 꼽혔다.

    설총이 향찰(鄕札;이두)을 고안하였다는 <설총이두창제설(薛聰吏諸創製說)>은 잘못된 것으로, 향가 표기식 방법인 향찰은, 설총 이전인 568년(진흥왕 29) 북한산 비봉(碑峰)에 세운 진흥왕순수비문에 나타나 있고 또 향찰표기 작품인 《서동요(薯童謠)》 《혜성가(彗星歌)》가 진평왕 때, 《풍요(風謠)》가 선덕여왕 때 이미 있었다.

    설총은 향찰을 집대성, 정리하였는데, 육경(六經)을 읽고 새기는 방법을 발명하여 한문을 국어화하고 유학 등 한학의 연구를 발전시키는 데 공이 컸다. 또 신문왕 때의 국학(國學) 설립에 주동적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설총의 문적(文蹟)으로는 우화적 단편산문인 《화왕계(花王戒)》가 당시 신문왕을 풍간(諷諫)하였다는 일화로서 《삼국사기》 <설총열전>에 실려 있다. 고려 현종 때 홍유후(弘儒侯)의 시호를 추증받았다. 문묘 동무에 최치원과 함께 종향(從享)되었고,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에 배향되었다.

  9. 직지사 직지성보박물관 직지사 직지성보박물관 연혁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9
    직지사 직지성보박물관 연혁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9

    1989년 9월 직지사 본·말사의 주요 문화재를 연구 및 전시하기 위한 성보박물관 건립 추진
    1992년 8월 문화체육부에 직지사 청풍료를 유물관으로 개축하기 위한 공사 사업승인서 제출
    1993년 10월 문화체육부로부터 직지사 유물관 개축공사 승인
    1995년 7월 말사의 문화재 300여점을 본사로 옮김
    1995년 10월 18일 직지성보박물관 개관
    1996년 11월 22일 제1종 전문박물관으로 등록
    1999년 6월 전시시설 교체공사 후 재개관
    2000년 6월-8월 제1차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말사 유물조사
    2000년 10월 1일-11월 20일 <깨달음의 길을 간 얼굴들 - 한국고승진영전> 개최
    2001년 4월 상설전시 유물교체
    2001년 8월 직지성보박물관 홈페이지 개설
    2002년 4월 상설기획전 <불법의 수호신, 神衆>
    2003년 4월 상설기획전 <직지사 삼세후불탱 초본>
    2003년 9월 20일-10월 31일 제2회 특별전 <하늘꽃으로 내리는 깨달음의 소리 - 한국범종탁본전> 개최
    2004년 3월 2일-3월 31일 특별전 <하늘꽃으로 내리는 깨달음의 소리 - 한국의 범종 탁본전> 국립진주박물관 순회전시
    2004년 4월 상설기획전 <산신탱과 독성탱>
    2004년 4월 16일-5월 16일 특별전 <하늘꽃으로 내리는 깨달음의 소리 - 한국의 범종 탁본전> 국립대구박물관 순회전시
    2004년 7월 27일-9월 12일 특별전 <하늘꽃으로 내리는 깨달음의 소리 - 한국의 범종 탁본전> 국립춘천박물관 순회전시
    2004년 12월 1일-12월 26일 제3회 특별전 <경북의 금석문 탁본전> 개최
    2005년 3월 상설기획전 <직지사 조실 관응스님 기증유물 특별전>
    2005년 9월 상설기획전 <보물 제1330호 용문사 팔상탱 특별공개전>
    2006년 9월 상설기획전 <천도의식과 명부전>
    2007년 4월 상설기획전 <천불신앙과 천불전>
    2008년 상설기획전
    2008년 6월 5일-6월 25일 제4회 특별전 <돌에 새긴 선사 유목민의 삶과 꿈 - 몽골의 암각화ㆍ사슴돌ㆍ비문 탑본전> 개최, 직지성보박물관ㆍ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ㆍ몽골 과학아카데미 고고학연구소 공동 주최, 몽골 국립역사박물관에서 전시
    2008년 7월 8일-8월 10일 제4회 특별전 <돌에 새긴 선사 유목민의 삶과 꿈 - 몽골의 암각화ㆍ사슴돌ㆍ비문 탑본전> 개최, 직지성보박물관ㆍ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ㆍ몽골 과학아카데미 고고학연구소 공동 주최,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전시
    2009년 9월 - 2010년 상설기획전 <선사의 숨결 그리고 흔적>
    2011년 상설기획전 <붓끝에서 피어난 선사의 혼>
    2012년 상설기획전 <지옥의 염라대왕, 現王>
    2013년 상설기획전 <정토를 염원하다>
    2014년 상설기획전 <깨달음의 길을 가다>
    2015년 상설기획전 <신중神衆을 만나다>
    2016년 상설기획전 <직지사直指寺 천오백년, 흔적을 찾다>

  10.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8교구 직지사 직지사 창건 및 역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9
    직지사 창건 및 역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9

    한국불교(韓國佛敎) 1천 6백년의 역사(歷史)와 그 세월(歲月)을 같이 하다.

    서기 418년, 아도 화상에 의해 세워져 1천 6백년 가까운 세월동안 수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하고, 우리민족의 가슴속에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심어온 직지사는 아름다운 경내가 뭇 사찰중에서도 으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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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백산맥(小白山脈)의 준령(竣嶺)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그 서쪽 추풍령(秋風嶺)에서 잠시 머물러 관문(關門)을 이루었고,다시 서남쪽으로 웅장(雄壯)한 산세(山勢)를 유지하며 달려와 힘차게 솟아오른 황악산(黃岳山) 동남쪽 산자수명(山紫水明) 한 곳에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直指寺)가 자리해있다. 해발 1,111m에 달하는 황악산은 북쪽으로 충청도,서쪽으로 전라도, 동남쪽으로는 경상도에 연이은 삼도(三道)의 도계(道界)에 접하였으며, 이중심에 눌러 앉은 본사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慶尙北道) 김천시(金泉市) 대항면 (代項面) 운수리(雲水里) 216번지이다.

    황악산(黃岳山) 의 황자는 청(靑), 황(黃), 적(赤), 백(白), 흑(黑)의 5색(色) 중에서도 중앙색을 상징하는 글자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직지사는 해동(海東)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藍)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본사(本寺)로부터 김천까지는 12km이고, 다시 김천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230km, 부산까지는 218km로서 남한의 중앙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경부선(京釜線)을 비롯하여 태백산(太白山), 삼척(三陟)등 동해방면(東海方面)으로도 연결되는 한반도(韓半島) 교통의 요충지이며, 예로부터 길상지지(吉祥之地)로 전해져 내려오는 곳에 직지사는 정좌(定座)하고 있다.

    따라서 절의 위치가 산곡(山谷)이면서도 높지 아니하고,야지(野地)인듯 하면서도 산사(山寺)의 풍취(風趣) 가 항상 흘러 넘쳐서 4계절 내내 도량을 참배하는 신남신녀(信男信女)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잠시 황악산의 산세와 지형을 살펴보면, 최상봉인 비로봉(毘盧峰)에서는 경상, 충청, 전라의 3도를 한눈으로 굽어볼 수 있으며, 바로 아래에는 선유봉(仙遊峰)을 비롯하여 천룡봉(天龍峰)과 운수봉(雲水峰)이 있고, 조금 내려와서 절경대(絶景臺)가 있으며, 그 중턱에 운수암(雲水庵)이 있어 승경(勝景)을 이룬다. 운수봉(雲水峰)에서 다시 2km쯤 올라가면 백운봉(白雲峰)이 있고, 그 아래로 만경대(萬景臺)가 펼쳐진다. 다시 남서로 난 능선을 따라가면 망월봉(望月峰)과 함께 신선봉(神仙峰)을 만날 수 있으며, 그 위에 형제봉(兄弟峰)은 백운봉과 마주하여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 있다.

    황악산은 대체로 3대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능여계곡(能如溪谷), 내원계곡(內院溪谷), 운수계곡(雲水溪谷)이 그것이다. 능여계곡에는 그 옛날 능여 대사(能如大師)가 황악산 계곡의 원천(源泉)을 찾았다는 멱원대(覓源臺)를 비롯하여 많은 대(臺)와 소(沼)가 있고, 두 곳의 폭포와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능여천(能如泉)과 법수천(法水泉) 등의 약수가 있어 더욱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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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사(本寺)의 초창(草創)은 신라 눌지왕(訥祗王) 2년(418) 아도 화상(阿道和尙)에 의하여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개창(開創)되었다. 그 사명(寺名)을 직지(直指)라 함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또 일설에는 창건주(創建主) 아도 화상이 일선군(一善郡, 善山) 냉산(冷山)에 도리사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하였으므로 하여 직지사(直指寺)라 이름했다는 전설(傳說)도 있다. 또는 고려의 능여 화상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지(測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이는 모두 창건설화와 연관된 직지(直指)의 미화(美化)된 전설에서 유래되고 있지만, 실은 불교 본연의 직지인심(直指人心)을 상징하는 의미로 풀이 될 수 있다. 즉 창건 설화의 직지(直指)와 선가(禪家)의 직지(直指)가 둘이 아니라고 볼 때, 이는 곧 불교의 본질을 나타내는 이름이라 하겠으며, 또한 사명 (寺名)에 불교의 본지(本旨)를 이처럼 극명(克明)하게 나타내는 사찰도 흔치 않으리라 본다.

    아도 화상에 의하여 개창된 직지사는 신라시대에 2차에 걸친 중수가 있었다. 그 첫째는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645) 자장 법사(慈藏法師)에 의한 중수를 들 수 있고, 두번째는 경순왕(敬順王) 4년(930) 천묵 대사 (天默大師)에 의한 2차 중수가 그것이다.
    먼저 자장 법사의 중수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고, 오히려 경순왕대의 사실이 보다 자세히 전해진다. 아마 이때는 신라의 국운이 쇄진하여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投降)하기 불과 5년 전의 일이며,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변혁기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직지사 사적에 따르면 이러한 시기에 천묵 대사는 본사를 중수하고, 더 나아가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을 서사(書寫)하여 신라 조정(朝廷)에 헌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는 현존 유품(現存遺品)이 전해지지 않아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다음에 언급하게 될 금자대장경비(金字大藏經碑)가 이를 입증(立證)하고 있다. 다만 이제 지난날 직지사의 찬란하였던 사격(寺格)을 밝히면서 신라시대에 이미 금자대장경을 제작하였다는 이 놀라운 사실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대장경이라고 하면 해인사(海印寺)의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그 대표로 삼아 왔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서 이미 신라시대에, 그것도 금자대장경을 만들었다는 사적기의 내용은 진실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구나 이를 접한 경순왕은 어찰(御札)로써 점제(點題, 經名을 쓰는 것)하였다고 하였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에 대한 현품이 전래되지 않아 그간의 사정을 잘 알 수 없지만, 왕조(王朝)가 바뀐 고려시대 초기에 본사(本寺)에는 금자대장경이 봉안되었고, 또한 대장당비(大藏堂碑)가 건립되고 있다. 즉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직지사의 고승 능여 조사(能如祖師)의 도움으로 후백제(後百濟)와의 불리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직지사는 국가적 비호(庇護)를 받았으며, 이후 능여 조사(能如祖師)의 제자들 역시 대대로 본사를 중흥(中興)하더니 광종 원년(光宗元年, 950)에는 3월 1일부터 약 50일 간 법회(法會)를 개설(開設)하여 경찬회(慶讚會)를 성대히 베풀었다.

    그런데 이때의 경찬법회는 금자대장경을 다시 필사한 것에 대한 법회인지, 아니면 경순왕이 점제(點題)하였던 금자대장경을 경순왕의 투항 후 신라 조정으로부터 인수하고 대장당(大藏堂)을 건립한 낙성연(落成宴)인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더욱 짙다. 그것은 신라의 국운이 고려로 이양되는 과도기적 상황과 함께 태조 왕건의 불교신앙과 아울러 능여 조사로 인한 그간의 사정에서 짐작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보다 분명한 것은 금자대장당비(金字大藏堂碑)를 새겨 절을 북정(北亭)에 세웠다는 사적기의 내용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에 대한 물적 근거는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실려 있는 직지사 대장당기비(大藏堂記碑)의 탁본(拓本)이며, 이는 왕우군(王右軍)의 집자(集字)로서 유명하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직지사는 제 2대 정종 원년(定宗元年, 1339) 정종의 어태(御胎)를 절의 북봉(北峰)에 봉안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고, 이로 인하여 조선시대에도 줄곧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 중기에는 사명 대사(四溟大師)가 본사(本寺)에 출가(出家)하여 신묵 대사(信默大師)의 제자가 된 것이 유명하거니와, 이로 인하여 직지사는 배불(排佛)의 그늘 속에서도 사운(寺運)을 유지할 수 있었다.
    30세에 직지사 주지(主持)가 된 사명 대사는 이후 임진왜란(任辰倭亂)이 발발(勃發)하자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선봉(先鋒)에서 큰 공을 세웠음은 너무나 유명하다. 이렇게 구국(救國) 사명 대사의 공로로 인하여 직지사는 조선(朝鮮) 8대가람(八大伽藍)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300여 소속사암(寺庵)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리고 직지사의 사세가 가장 흥성했던 시기에는 현재 김천시내 법원이 있는곳을 비롯하여 구화사(九華寺)까지가 직지사의 사유지였으며,뿐만 아니라 상주 통로 우시장(牛市場) 근처의 다리이름이 직지교(直指橋)였고, 그 상류(上流)는 모두 직지사의 영유(領有)였다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직지사는 조선시대 말엽 국운의 쇠퇴와 함께 그 사운(寺運)을 같이 하여 한때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무엇보다 직지사는 일제시대(日帝時代)사찰령(寺刹令)이 제정되면서 한때 해인사(海印寺)의 말사(末寺)로 전락하기도 하였으나, 광복 이후 50년대에 본산제도(本山制度)가 재편성되면서 본산(本山)으로 승격되어 그 사세를 차츰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국내 25본산(本山) 가운데 하나로서 제8교구(第八敎區) 본사(本寺)이며 소속 말사(末寺) 54개 사찰에 이르고 있다. 관할 구역은 4개시(個市), 1개군(個郡)으로 김천, 구미, 상주, 문경시와 예천군이다. 또한 본사의 산림(山林)은 약 600정보(町步)에 달하며, 사찰 경내 면적만도 약 30,000평에 이른다. 그리고 본사에 소속된 말사 역시 수많은 성보문화재(聖寶文化財)와 고적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본사는 역대의 중건(重建), 중수(重修)를 거치면서 천 수백년 법등(法燈)을 이어 오다가 최근(最近) 반세기 동안 창사 이래(創寺以來) 최대의 불사를 일으키어 그 면모가 일신되었으니 이는 오로지 1958년 본사의 주지로 부임한 녹원 화상(綠園和尙)에 의한 중흥불사(中興佛事)의 공덕에 힘입은 바라 할 것이다.
    먼저 사찰 주변의 정화(淨化)를 위하여 사유대지(私有垈地) 10,088평과 전답 12,627평, 그리고 임야 3,740평을 매입하였다.
    이와 함께 사적기(事蹟記)에 따라 모든 불전(佛殿)과 당우(堂宇)를 중건,중수함은 물론 국제회의와 대법회를 위한 본사 최대의 건물인 만덕전(萬德殿)을 건립하는 한편 4기(基)의 신라시대 고탑(故塔)을 이건(移建)하였으니 이는 창건 이래 최대의 불사(佛事)이며 일대변혁(一大變革)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