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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한불교조계종 용문사 용문사 전각 보광명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1
    용문사 전각 보광명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1

    보광명전 내부 중앙에는 높은 수미단 위에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불은 지권인을 결한 본존인 진리의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서방 극락정토의 주존불인 아미타불(阿彌陀佛)과 동방유리광세계의 주존불인 약사불(藥師佛)을 함께 모셨다. 보광명전에 봉안된 세 부처님 중 아미타불상에서는 1515년에 중수한 발원문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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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대한불교조계종 용문사 용문사 전각 명부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1
    용문사 전각 명부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1

    이 건물은 대장전의 동쪽에 있으며, 남서향을 하고 있다. 용문사의 배치축과 일정한 배치관계는 없이 지형의영향으로 대장전에서 적당히 떨어진 위치에 놓인 것으로 보인다.「 속용문사적기續龍門事蹟記」에 의하면 1649년에 보광전의 동쪽에 지장전을 짓고, 1682년에 다시 시왕전을 지었다고 하는데 그 위치는 적혀 있지 않다. 다만 실적(實籍)과 신경대사(神鏡大師)가 판불과 함께 시왕상十王像을 조성하는데 힘을 썼다는 기록이 있어 현존하는 명부전이 1682년에 지은 시왕전임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명부전은 조성 이후 이렇다 할 중수기록이 없다. 현재 명부전 내부에걸려 있는 <용문사명부전개채여단확기>(1884)를 통해서 조선말의 현황은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개채(改綵)와 단확은 단순히 지장 및 시왕상의 색을 다시 칠하고 건물에 단청공사를 다시 한 것뿐만이 아니라 건물의 흙벽을 다시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벽을 헐고 미장공사를 다시 하는 수준의 보수공사였다. 한식 건축의 특성상 미장 공사를 한다는 것은 흙벽의 뼈대역할을 하는 깃과 외를 손보는 공사이므로 벽선 등의 수장재까지 손보는 공사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에 보수공사는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다.

    명부전은 존상의 개수가 많기 때문에 측면과 후면에 문을 설치하는 예가 드문데 만약 문을 설치하게 되면 기둥에 장부구멍이 생긴다. 그러나 이 건물의 경우 측면과 후면의 기둥에서 장부구멍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계획 당시부터 지장삼존과 명부 시왕을 봉안하기 위한 건물로 볼 수 있으며, 조상시기와 건물의 결구 수법 등을 비교해 볼 때에도 상을 조정했을 당시에 세워진 건물로 생각된다.

    현재 명부전은 전면과 후면의 공포양식에 큰 차이를 보이는데, 전면의 공포는 조선 말기의 공포인 반면에 후면은 쇠서의 곡서의 곡선이 완만한 주삼포식(柱三包式)의 공포로 전면에 비해 세련된 조형미를 가지고 있어 조성시기를 17세기 후반까지 올려볼 수 있다. 특히 측면에 고주가 직접 종보를 받치는 수법은 측면의 고주가 대들보를 받치고 있는 대장전의 가구수법보다 선행하는 수법으로 17세기 후반에 중창되어 가구법의 기본형식을 그대로 유지한 채 현전하는 것으로 보인다.(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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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대한불교조계종 용문사 용문사 전각 응진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1
    용문사 전각 응진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1

    대장전 서편 위쪽에 위치한 응진전은 16나한상을 모신 전각으로 십육전(十六殿)이라고도 한다.「 속용문사적기續龍門事蹟記」에 의하면, 이 전각은 17세기 중엽 학문(學文)에 의해 건립되었다. 응진전은 1785년에는 자하루와 함께 중창되었고, 1884년에는 명부전과 함께 보수되었다. 이에 관한 기록은 <예천용문산창기사응진전상량문醴泉龍門山寺昌基寺應眞殿上樑文>(1785)과 <용문사십육전개채여단확기>(1884)에서 찾을 수 있다.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어칸에 분합문(分閤門)으로만 출입이 가능하다. 건물 내부의 삼면에는 많은 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를 위해 측면에 문을 내지 않고 들창을 설치 한 것으로 생각된다. 들창은 채광과 환기를 위한 것이다. 수서와 앙서가 한 쌍을 이루고, 연봉과 봉두로 장식된 전형적인 주삼포(柱三包) 건물로 기둥 사이의 공포대에는 화반이 놓였
    으며 뒤뿌리가 짧은 부연을 달았다. 투박한 익공의 초가지 표현이나 나지막한 천정, 소규모 평면에 맞는 가구 처리 등에서 19세기 후반 혹은 이보다 늦은 시기에 중수 과정이 있었음을 알수있다.(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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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대한불교조계종 용문사 용문사 전각 영남제일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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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1
    용문사 전각 영남제일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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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1

    漢武玉堂塵已沒 한무옥당진이몰
    石崇金谷水空流 석숭금곡수공류
    光陰乍曉仍還夕 광음사효잉환석
    草木?春卽到秋 초목재춘즉도추
    處世若無毫末善 처세약무호말선
    死將何物答冥侯 사장하물답명후

    한무제의 궁궐은 이미 티끌이 되었고
    석숭의 별장에도 쓸쓸히 물만 흐르네
    세월은 빨라 새벽이다 싶으면 이내 곧 저녁이 되고
    초목은 겨우 봄인 듯했는 데 어느덧 가을이 되고마니
    세상을 살면서 털끝만한 선행도 못하면
    죽어서 염라대왕에게 무엇으로 대답하리.

    처음엔 띠가 들쑥날쑥 자라난 것일거라 말했는데 불이 나서 다 타고 보니 원래 땅바닥이 고르지 않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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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대한불교조계종 용문사 용문사 전각 진영당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1
    용문사 전각 진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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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1

    대장전과 명부전 사이에 자리한 진영당은 과거 용문사에 주석 했던 선사들의 진영을 봉안하는 곳이다. 현재 이전각에 <진영당眞影堂>이란 편액이 걸려 있지만 본래 기능을 상실하고 사찰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편액 외에 건물 전면 고주에는 일제강점기에 작성한 진영당에 관한 현판이 있다. 이 현판 기록에 따르면이 전각은 조사전(祖師殿)인 동시에 시왕전의 노전이었다.
     
    1681년에 희인(希仁)대사가 신암자(新庵子)를 이건한 뒤 1893년에 혜옹강백이 중수하고 1934년에 주지 이광하(李晃夏)가 중수한 후 이 어 1935년 다시 중수하였다. 이 외에 진영당으로 추정되는 건물로「속용문사적기續龍門事蹟記」에 적힌 1649~1670년에 건립된 삽삼전이 있다. 삽삼은 삼십삼명의 조사, 즉 조사전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삽삼전을 지은 행변과 신암자를 이건한 희인이 일치하지 않고 조성시기도 맞지 않는다. 용도가 비슷한 건물이 한사찰 안에 여러 채가 있었는지는 좀더 검토가 필요하다.

    진영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건물로 향 우측 전면 2칸은 통칸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향 좌측의 전면 4칸은 앞쪽에 툇마루를 두고 있는 홑처마 납도리 집이다. 현재의 평면으로 추정해 보면, 후면의 퇴칸은 감(龕)이었을 것이며, 그 앞의 실(室)과 툇마루는 예를 올렸던 사당형 공간이었을 것이다. 현재 건물에서 보이는 선자연(扇子椽)구성수법은 조선중기까지 지속적으로 쓰이던 수법으로, 1681년에 지어진 후 큰 변화 없이 오늘날까지 유지되었다고 생각된다.(洪)

    一三. 祖師殿 一名十王殿爐殿 朝鮮肅宗王七年辛酉 希仁大師新庵子移建 距今丙子二百五十五年 朝鮮高宗王三十 年癸亥 慧翁 講伯重修 距今丙子四十三年 昭和九年甲戌 住持李晃夏重修 距今三年 昭和十年乙亥秋住持○○○重修 距今二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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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대한불교조계종 용문사 용문사 전각 자운루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1
    용문사 전각 자운루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1

    자운루는 대장전에 대응하는 문루(門樓)이며, 보광명전과 대응하는 해운루와 나란하게 서 있다.「 속용문사적기續龍門事蹟記」에는 81년에 만세루(萬世樓)가 지어졌다고 하는데, 이 만세루가 지금의 자운루이다.
    용문사와 같이 경사가 심한 지형에 자리잡은 사찰에서는 건축물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문루이다. 경사면에 위치한 지운루는 앞쪽에서 보면 중층이고, 뒤쪽은 단층인

    지계형(地階形)건축이다. 누의 역할은 사찰마다 약간 차이를 보이는데 주로 휴식과 수행의 공간으로 사용되거나 출입문의 역할을 하는 등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다. 자운루는 평면형의 구조나 대장전 쪽을 제외한 좌측과 정면에 개폐가 가능한 벽체가 설치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수행과 휴식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현재 자운루의 전면창호는 창틀 가운데 사이기둥이 있는 영쌍창이고, 창방의 폭은 수장폭(修粧幅)이다.측면은 3칸으로 가운데 내주(內住)를 관통하는 뜬창방이 있고, 측면 가구와 이를 인접하는 가구들을 연결하는 충량(衝樑) 역할의 부재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특징은 현전하는 누 건축에서 연대가 앞서는 누에서 보이는 수법으로 비교적 17세기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진주를 이주하여 평면의 중간에 세움으로써 대들보의 길이를 줄이는 수법을 사용했다. 익공은 초익으로 전형적인 사찰익공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진입형식은 누하진입(樓下進入)이 아니라 우각부진입(隅角部進入)방식의 문루이다.
    자운루에서는 1785년에 작성된〈예천용문산창기사만세루상량문醴泉龍門山昌基寺萬世樓上樑文〉(이하 <만세루상량문>)과1872년에 작성된〈예천소백산용문사자운루상량문 醴泉小白山龍門寺慈雲樓上樑文〉(이하 <자운루상량문>), 〈용문사자운루중건상량시방함록 龍門寺慈雲樓重建上樑時芳啣錄〉(이하 <방함록>) 등이 나왔다. <방함록>에는 두운선사의 초창과, 1681년, 1785년 그리고 1872년 중건을 간략히적어 놓았다. 두운선사의 초창은 신빙성이 떨어지나 1681년 중창은「속용문사적기」의 만세루 건립과 일치한다. 또한 1785년 <만세루상량문>과 1872년 <방함록>을 비교해 보면, 누의 규모가 27칸이었다가 12칸이 줄어 15칸으로 축소되었는데, 이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현 자운루 규모와 같다. 1872년 <자운루상량문>에서는 이변화된 양상을 “포작과 난간, 지도리와 문지방, 점계등은 새로운 제도로 바꾸어 빛나게 되었으며, 원칙과 기준, 넓고 좁고 높 고 낮음은 옛 모습을 유지하되 일부만 변하였네” 라 서술하였다.(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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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대한불교조계종 용문사 용문사 전각 원통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1
    용문사 전각 원통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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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1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사찰의 주된 전각일 때 붙이는 이름이다. 사찰 내의 1개 전각일 때는 관음전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중국에서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강조하여 대비전이라고도 한다. 관세음보살은 다른 부처나 보살과 달리 현세적인 이익을 주는 보살로, 모습이 다양하고 중생이 원하면 어느 곳에나 나타난다. 성관음(聖觀音)·천수천안관음(手千眼觀音)·마두관음(馬頭觀音)·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준제관음(准提觀音)·불공견

    삭관음의 칠관음이 대표적이다. 이 전각에는 관세음보살상이 단독으로 모셔진다. 협시로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있으나 이들은 대부분 후불탱화에 나타난다. 관세음보살상은 봉오리 상태의 연꽃을 왼손에 들고, 오른손에는 감로병을 들고 있다. 불상 뒤에는 대부분 관음탱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것으로는 보물 제916호로 지정된 법주사원통보전과 낙산사원통보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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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대한불교조계종 용문사 용문사 전각 해운루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1
    용문사 전각 해운루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1

    조망과 휴식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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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대한불교조계종 용문사 용문사 전각 범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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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1
    용문사 전각 범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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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1

    범종을 달아 놓은 전각을 말한다. 당호는 절에 따라 범종루·종각·종루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단층일 경우 각(閣)이라 하고 중층일 경우 루(樓)라고 한다. 규모가 큰 사찰에서는 중층으로 세워 법전사물(法殿四物)을 함께 두기도 한다. 전각의 외양은 대개 기둥과 목책이 있는 사각의 단층 건물이거나, 2층 누각이다. 보통 불이문(不二門)을 지나 사찰 경내에 들어서면 법당 앞에 있거나 일주문 왼쪽에 있는데, 중층 누각의 경우는 다르다. 경상북도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경우

    는 해탈문인 안양루 아래에 있고, 청도 운문사(雲門)의 경우는 누각 밑이 바로 사찰 진입로이다. 전라북도 완주 송광사(松光寺)의 경우는 평면이 십자형이다. 영암 불갑사(佛甲寺)의 범종루는 6각의 중층 누각으로, 1층에 목책을 두르고 범종을 안치했으며 난간을 두른 2층 다락은 비워두었다. 고창 선운사(禪雲寺)에서는 천왕문 2층에 범종과 법고를 함께 둔다. 범종각에 범종과 함께 두는 법전사물은 법고(法鼓雲板)·목어(木魚)이다. 법고는 바닥에 두고 운판과 목어는 보나 도리에 매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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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대한불교조계종 용문사 용문사 전각 산신각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1
    용문사 전각 산신각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1

    산신을 모시는 전각이다. 사찰에 따라서는 산령각(山靈閣)이라고도 부른다. 또 삼성각(三聖閣)을 두어 칠성신·독성(獨星)과 함께 모시는 경우도 흔하다. 본래 산신은 도교에서 유래한 신으로,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 많이 믿던 토착신이다. 특히 산지가 70%나 되는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에 이르기까지 산신신앙이 널리 유행하였다. 이 산신이 불교에 수용되면서 호법신중(護法神衆)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불교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므로 산신도 비교적 일찍 불교에 수용되었을 것을 여겨지나, 산신각이 세워진 것은 조선중기 이후부터이다. 대개 전각의 뒤쪽에 세우며, 크기는 정면1칸, 측면 1칸이 보통이다. 산신각 내에는 산신을 그린 탱화를 모시는데 대개 흰수염, 대머리, 긴 눈썹이 휘날리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손에는 하얀 깃털부채나 파초선·불로초 등을 들고 있고 주로 봉래산·영주산·방장산 등의 삼신산을 배경으로 한다.

    한라산이나 속리산·계룡산·지리산 등지의 사찰에는 드물게 여자 산신을 모시는 경우도 있다. 여자 산신은 트레머리에 댕기를 두르고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다. 호랑이에 걸터앉거나 기대고 있는 모습이며, 손에는 대개 불로초를 들고 있다. 이밖에 복건(福巾)이나 유건(儒巾)·정자관(程子冠)을 쓰고 지팡이를 든 유교적 산신도 있고, 삭발한 스님이 《묘법연화경》과 같은 불경을 들고 있는 불교식 산신도 흔하다. 이 경우 의상은 가사와 비슷하나 적녹색이 주류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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