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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호압사 호압사 호암산문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7
호압사 호암산문-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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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호압사 호압사 가람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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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7
호압사 가람 배치도-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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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호압사 호압사 석약사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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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7
호압사 석약사불좌상-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7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8호로서 호압사 약사전 내에 있다.
이 석조불상의 육계는 낮고 나발의 머리칼은 촘촘하게 표현되었으며, 얼굴은 넓은 사각형으로 다소 양감이 표현되었다.
체구의 표현과 왼팔의 옷주름, 가슴의 띠매듭 등은 조선 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상체는 단정하며 두 손은 앞에 모아 약호(보주)를 얹었는데 이를 통해 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다.
약사여래(藥師如來, Bhaisajyaguru)는 중생의 질병 치료, 수명 연장, 재화 소멸, 의식(衣食) 만족을 이루어 주며, 중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여 깨달음을 얻게 하는 부처님(여래)을 말한다. -
대한불교조계종 호압사 호압사 역사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7
호압사 역사-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7
호압사가 창건된 데에는 두 가지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먼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금천조에는 지금의 시흥군의 현감을 지냈다고 하는 윤자(尹滋)의 이야기가 전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금천의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과 같고, 그런 중에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 까닭에 범바위(虎巖)라 부른다. 술사가 이를 보고 바위 북쪽에다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하였다....."라 하고 있다.
또 다른 전설로는 1394년(태조 3)을 전후해 조선의 도읍을 서울로 정하고 궁궐을 짓는 과정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즉 태조가 서울에 궁궐을 세울 때 전국의 장인을 모아 진행했는데, 여러 차례에 걸쳐 밤만 되면 무너져버려 노심초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어둠 속에서 괴물이 나타났는데 반은 호랑이고, 반은 형체조차 알 수 없는 이상한 동물이었다. 이 괴물은 눈으로 불길을 내뿜으며 건물을 들이받으려고 하였다. 이때 태조가 괴물에게 화살을 쏘라고 하였고, 화살은 빗발처럼 쏟아졌으나 괴물은 아랑곳없이 궁궐을 무너뜨리고 사라졌다.
태조가 침통한 마음으로 침실에 들었을 때 한 노인이 나타나 "한양은 비할 데 없이 좋은 도읍지로다"라며 멀리 보이는 한강 남쪽의 한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태조는 노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호랑이 머리를 한 산봉우리가 한양을 굽어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인에게 호랑이 모습을 한 산봉우리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노인은 "호랑이란 꼬리를 밟히면 꼼짝 못하는 짐승이니 저처럼 호랑이 형상을 한 산봉우리의 꼬리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입니다."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 다음날부터 이곳에 절을 짓고 호압사(虎壓寺)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위의 두 설화는 공통적으로 풍수지리설과 비보사찰설이 가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산의 모양을 호랑이로 본 것이며, 이를 누르기 위해 절을 창건했다는 이야기이다.
호압사의 창건기록으로는 호압사의 본사였던 봉은사에서 엮은 '봉은사 말사지'에서 볼 수 있는데 1407년인 조선태종7년에 창건하였다고 하며 또한 태종임금이 호압이란 현액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있습니다. 그러나 1394년(태조 3)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이라는 관청을 두고 궁궐을 짓는 공사를 시작했고, 이듬해에 궁궐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호압사는『봉은본말지(奉恩本末誌)』의 기록보다는 태조 2년이나 3년 무렵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호압사의 역사는 이후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세기에 전국 사찰의 위치와 연혁 등을 기록한 범우고(梵宇攷)나 가람고(伽藍攷)에도 호암사(虎巖寺) 또는 호갑사(虎岬寺)라 하여 간략하게 나올 뿐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그러다가 호압사는 1841년(헌종 7)에 이르러 중창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의민(義旻) 스님 쓴 「경기좌도시흥삼성산호압사법당현판문(京畿左道始興三聖山虎壓寺法堂懸板文)」에 의하면 이 해에 당우가 퇴락한 것을 당시 상궁 남씨(南氏)와 유씨(兪氏)의 도움을 받아 법당을 고쳐지었다는 것이다.
고려 말 ·조선 전기의 스님으로 속성은 박씨(朴氏), 호는 무학(無學)·계월헌(溪月軒)이다. 삼기(지금의 합천) 출생으로 18세에 소지선사(小止禪師)의 제자로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고,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서 불법을 배웠다. 진주(鎭州) 길상사(吉祥寺)·묘향산 금강굴(金剛窟) 등에서 수도하다가, 1353년(공민왕 2) 원(元)나라 연경(燕京)에 유학하여 그때 원에 와 있던 혜근(惠勤)과 지공(指空)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356년 귀국하여 1373년에 왕사(王師)가 된 혜근의 법을 이어받았는데, 1376년 혜근이 회암사(檜巖寺)에서 낙성회(落成會)를 연 때 수좌(首座)로 초청하였으나 사양했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어,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전불심인변지무애부종수교홍리보제도대선사(傳佛心印辯智無碍扶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묘엄존자(妙嚴尊者)의 호를 받고 회암사에서 지냈다.
이듬해 태조를 따라 계룡산과 한양(漢陽)을 오가며 지상(地相)을 보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데 찬성하였다. 1397년(태조 6) 왕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수탑(壽塔)을 세우고, 1402년(태종 2)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금강산 금장암(金藏庵)에 머물다가 입적하였다.
저서에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 《인공음(印空吟)》이 있다. -
대한불교조계종 약사사 역사속의 약사사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7
역사속의 약사사-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7
약사사가 있는 개화산은 조선시대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던 곳으로 주룡산으로 불리웠으며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內四山)인 백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은 물론 조산(祖山)인 관악산을 바라다 볼 수 있는 명소입니다. 설화에 따르면 신라 때 이 산에 주룡(駐龍) 선생이라는 도인이 살았는데 그는 매해 9월 9일이 되면 친구들과 함께 이 산 높은 곳에 올라가 술을 마시곤 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 행사를 9월 9일 주룡산에서 술마시기라는 의미로 '구일용산음(九日龍山飮)'이라 불렀다 합니다. 그러다가 주룡 선생은 이 곳에서 천수를 다하고 돌아갔는데 그 '구일용산음'하던 터에 이상한 꽃이 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터에 절을 짓고 개화사라 하니 개화사가 있는 산이라 해서 주룡산을 개화산이라고도 불렀다고 전해집니다. 조선후기 문신 송인명은 개화사에서 공부를 하였고, 1736년에 좌의정에 오르자 그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절을 크게고쳐지었던 것으로 전해져 오는데 이러한 사실은 영조때 최고의 시인이었던 이병연(李秉淵)이 송인명에게 보낸 시에 그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사천시초(槎川詩抄)
봄이 오면 행연(杏淵) 배에 오르지 마소
손님이 오면 어찌 꼭 소악루(小嶽樓)만 오르려 하나
책을 서너 번 다 읽은 곳이 있다면
개화사(開花寺)에서 등유(燈油)를 써야지.
조선 후기의 화가로 이름 높은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은 이 시를 보고 개화사(開花寺)란 제목으로 개화산과 절, 주변의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그리고 경교명승첩의 그림에도 개화산과 약사사가 비교적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양천팔교라 불리던 주룡산(개화산)의 개화사(약사사)는 겸재정선(당시 현감)의 시정을 불러 일으켜 많은 시화에 영감을 불어넣어준 곳이기도 합니다. -
대한불교조계종 약사사 약사사 3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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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7
약사사 3층 석탑-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7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9호
개화산 중턱에 있는 약사사에 자리한 석탑으로, 약사사 도량 한가운데 있는 정중탑(庭中塔)입니다. 탑의 받침대가 되는 기단(基壇)을 1층으로 두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입니다. 탑의 상륜부(相輪部)는 훼손되어 현재는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기단은 간략화되어 일반 석탑에서와 같은 기둥조각이 보이지 않으며, 탑신을 이루는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지붕돌은 밑면에 5단 내지 6단의 받침을 두었고, 윗면에는 완만한 경사가 흐르고 있습니다. 비교적 길쭉한 모습을 하고 있는 탑으로, 기단이 간략화되고 지붕돌의 밑면받침을 형식적으로 새겨두고 있어 불교미술이 다소 퇴화되던 고려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모양은 화려하지 않으나, 고려 중기이후 탑의 변천과정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자료가 되는 문화재입니다. -
대한불교조계종 약사사 약사사 감로당(甘露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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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7
약사사 감로당(甘露堂)-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7
감로당은 스님들이 생활하시는 공간인 요사채(寮舍寨)와 신도들의 기도접수 및 신행상담을 할 수 있는 종무소가 함께 있는 공간입니다.
정면6칸, 측면4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마당을 향한 전면에는 툇마루를 가설하였습니다.
편액으로 쓰여진 ‘감로당(甘露堂)’과 ‘개화산 약사사(開花山藥師寺)’는 석정(石鼎)스님의 필치(筆致)이며, 측면과 후면의 벽면에는 십우도, 5조 홍인대사와과 6조 혜능대사의 이야기를 비롯해 백락천과 도림선사의 이야기 등 다양한 벽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
대한불교조계종 약사사 약사사 대웅전(大雄殿)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7
약사사 대웅전(大雄殿)-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7
약사사 대웅전은 1988년에 중건되었습니다. 정면5칸, 측면 2칸 규모로, 다포계 팔각지붕에 청기와를 이고 있습니다. 전면에는 꽃과 나무 그리고 그 사이에 여러 가지 동물들을 돋을새김한 다채로운 사분합문(四分閤門)이 설치되어 있으며, 측변과 후면은 팔상성도와 나한도를 벽화로 모셨습니다. 화려한 금단청으로 장엄하였으며 특히 좌우측 기둥에는 용문양 단청이 생동감 있습니다.
대웅전 안쪽 상단에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0호인 석불 약사여래 부처님을 중심으로 하여 중앙 석가모니불, 좌우로 약사여래불,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님을 모셨고, 배면에는 빼곡히 소불을 모셨습니다. 법당의 좌우측면에는 신중탱(神衆幀)과 감로탱(甘露幀)이 모셔져 있는데, 신중탱은 1989년에, 그리고 감로탱은 1990년에 각각 봉안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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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약사사 약사사 삼성각(三聖閣)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7
약사사 삼성각(三聖閣)-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7
삼성각은 칠성여래, 나반존자, 산왕대신(산신) 세분의 성인을 모신 전각(殿閣)입니다.
칠성여래
민간에서 ‘칠성님, 칠성신, 수명장수신, 칠원성군(七元星君)’ 등으로 모시던 북두칠성(北斗七星)을 불교적으로 수용함에서 비롯합니다. 칠성여래께서 들고 계시는 금륜(金輪)은 ‘금강의 법륜’으로 청정무구한 진리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나반존자
한국 불교 고유의 신앙 대상입니다. 홀로 도를 성취하셨다하여 ‘독성(獨聖), 독성님, 독성수(獨聖修) 또는 독성존자(獨聖尊者)’라고도 불립니다.
산왕대신
국토의 7할이 산간지형인 한국에서 산신에 대한 예경은 오래되고 깊은 신앙의 형태입니다. 농경민에게는 물이나 비를 내리는 강우신(降雨神)이나 풍산신(豊山神)의 성격을 띠고, 유목민에게는 대체로 사냥감을 풍부하게 내리는 은혜자이면서도 노여움을 내는 존재이며, 인간에게는 아이를 가져다주는 신이자 그 생명을 악귀들로부터 보호하는 수호신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
대한불교조계종 약사사 약사사 석불입상 (藥師寺 石佛立像) 서울시유형문화유산 제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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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7
약사사 석불입상 (藥師寺 石佛立像) 서울시유형문화유산 제40호-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7
대웅전 내부에 봉안된 약사사 석불입상은 머리에 둥근 돌로 된 갓을 쓰고 계십니다. 갓 밑에 남아있는 글에 의지하여 조성된 시기를 조선 초기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와 비슷한 유형의 불상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석불은 통칭하여 미륵불로 보는 관습도 있었고, 일반적으로 갓을 쓰고 있는 부처님은 미륵불로 불리고 있어, 『개화산약사암중건기』의 일장미륵(一丈彌勒)과 같은 대상으로 보기도 합니다. 조선 순조 때부터 약사불을 모시면서 개화사가 약사암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과 관련하여 약사불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상이라고 하는 이도 있으나 합당하지 않아 보입니다. 한편 무덤을 지키는 석인상으로 격하하는 견해도 있으나 타당하지 않습니다.
얼굴의 윤곽과 옷주름의 표현은 투박한 편이며, 두 손으로 가슴에 12 꽃잎 연꽃 한송이를 들고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둥글고 친근한 모습의 고려말기의 석불
높이 132m인 개화산은 원래 이름은 주룡산이었다. 주룡 선생이 돌아간 후 기이한 꽃 한 송이가 피어 사람들이 개화산(開化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높이 3.3m, 어깨폭 0.9m, 보관(寶冠)의 직경 1m 규모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석불은 개화산 약사사 경내에 위치한다. 본래 석불의 형태는 기단을 마련하지 않고 아래쪽은 지하에 매몰되어 있다. 그러나 석불 이전 당시에 기단석을 새로 만들어 석불을 올려놓았다. 두부(頭部)에는 원형의 석조보관을 놓았다. 보관의 밑부분에는 상당수에 달하는 명문(銘文)이 있으나 판독이 불가능한 실정이다. 석불의 두 볼은 풍만한 편이며 코와 볼이 약간 손상된 흔적이 있다. 하지만 그런대로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특히 두툼한 두 눈과 엷은 미소를 머금은 엄숙한 입술 등에서 인상적인 조형기법이 두드러진다. 이와 동시에 약사사 3층 석탑과 거의 같은 고려 시대 말기에 건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약사사 석불은 금동삼존불상의 중심에 높게 자리하여 당당히 사찰의 본존불로서 맡은 역할을 해내고 있다. 그러나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을 제대로 갖추지 않아 마치 무덤을 지키는 석인상(石人像), 혹은 민간신앙의 대상인 장승과 같은 형태를 보인다.
얼굴은 몸체에 비해 크게 표현되어 있는 대신에 어깨가 좁고 위축되어 있어 목과 거의 붙어 있다. 얼굴 표현에서도 마찬가지로 약간 튀어나온 왕방울만한 눈과 삼각형의 코, 그리고 일자형(一字形)의 입술 등에서 기괴하면서도 투박하고 거친 듯한 조각기법이 나타나 있다. 또한 어두운 돌에서 잘 드러나지 않은 이목구비를 조금 더 뚜렷하게 보이도록 최근에 조각을 더한 흔적이 있다. 법의는 양어깨를 덮고 있는 통견(通肩)으로 걸쳤으며 가슴 위로는 X자로 여미어 입은 내의(內衣)가 표현되었다. 옷 주름은 형식적으로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지만 팔목 안쪽으로 소맷부리가 보인다. 손목이 많이 드러나 있는 두 손은 가슴 앞으로 모아 연꽃 한 송이를 쥐고 있다.
약사사 석불은 일반적으로 불상의 형태에서 매우 벗어나 있지만 법당 안에 본존불로 봉안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토속적인 경향이 강한 것으로 조선 시대 민간신앙에 의해 조성된 불상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