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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한불교조계종 연화사 연화사 회기마루 작은도서관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17
    연화사 회기마루 작은도서관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17

    1동네 1작은도서관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연화사 법당 내 회기마루 작은도서관은 동대문구에서 책을 만나는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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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대한불교조계종 석굴암 석굴암 천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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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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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석굴암 천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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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4-17

    지정번호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50
    지정일 : 2013. 12. 26.

    크지 않은 작은 규모(49×55cm)에 간략한 내용의 신중도로서 人法堂에 봉안했던 불화로 판단된다. 등장 존상 및 화기 중의‘天部會幀’이라는 내용으로 보아 제석범천도 불화 중 위태천 중심의 天龍圖임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위태천은 여덟의 무장한 모습의 팔부중을 거느리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 불화에서는 두 천부중 만을 나타내고 있으며, 위태천의 자세 또한 立像이 아닌 坐像으로서 法床 위에 반가 자세로 걸터 앉아 왼발을 내려딛고 있는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작은 규모일지라도 필선이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며, 색채 또한 적․녹색 위주로 조화로움을 볼 수 있으며, 활기찬 각 존상의 신체 비례 역시 6等身대로 세련미를 보인다.
    1745년 화승‘海淸’이 그린 이 불화는 화기의 훼손으로 봉안 사찰을 잘 알 수 없으나 조성시기가 분명하고‘齋主’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재를 지내기 위해 조성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천룡도로서, 18세기 중반 불화의 양식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3. 대한불교조계종 천축사 천축사 창건설화 및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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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4-17
    천축사 창건설화 및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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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4-17

    도봉산을 품어 안은 천사 도량에서 근심은 바람되어 맴돌다 사라진다.
    천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 교구로 조계사에 속해 있으며, 북한산국립공원의 도봉산 선인봉 남쪽에 있다. 678년에 의상(義湘 수도하면서 현재의 자리에 옥천암(玉泉庵이라는 암자를 세웠고, 고려 명종 때 영국사(寧國時가 들어섰다. 1398년 조선 태조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렸다 하여 절을 새롭게 고치고 천축사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1474년 왕명으로 중창하였고, 조선 명종 때 문정왕후(文王后가 화류용상(種體을 절에 바치고 불당 안에 부처를 모시는 불좌(座를 만들었다. 그 뒤 여러 번 다시 고쳐 지었으며, 법당 안에는 석가삼존상과 지장보살상을 비롯해 삼세불화 · 지장탱화 · 신중탱화가 모셔 두었다. 대웅전 · 원통전 · 독성각 · 산신각 · 요사채 · 무문관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맑고 깨끗한 석간수가 유명하고 백년 묵은 보리수나무가 샘물 위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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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축사는 서울의 명산 도봉산 동쪽에 자리한 천년고찰로, 서울의 관음 영험기도도량으로 알려진 유명한 곳이다.

    천축사의 지형은 깍아지른 듯한 만장봉(萬峰를 배경으로 소나무 · 단풍나무 · 유목(木) 등이 울창한 수림을 이루고 있어 마치 닭이 계란을 품은 포근한 정경을 연출하며, 계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자연스런 가람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눈에 보기 좋은 기도처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천축사로 모르는 길은 서울 시민들이 즐겨 찾는 평탄한 코스로 여름이면 울창한 수풀과 푸르른 수림이 산을 찾는 이들을 반기며, 가을이면 단풍나무들이 절경을 이룬다.
    또 겨울이면 서울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설경이 암벽 곳곳에 펼쳐져, 정말 이곳이 지공이 말한 천축국의 영축산을 본딴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천(天)의 난(蘭若)가 꽃을 피운 영험기도도량, 천축사(天竺寺)


    천축사는 서울시 도봉구 만장봉 동쪽 기슭에 자리한 사찰로, 이 절을 천축사( 寺)라고 이름한 것은 고려 때 인도승려 지공(指空) 이 나옹화상(SA)에게 이곳의 경관이 천축국의 영축산과 비슷하다고 한데서 유래되었다.
    천축사의 연혁은 신라 677년(문무왕 13에 의상대사가 의상대에서 수도할 때, 제자를 시켜 암자를 짓게 하고, 옥천암(玉泉庵)이라 한 것에서 출발하였으며, 그 뒤 고려 명종 때에 근처 영국사(寧國寺)의 부속암자로 맥을 이었다.
    이후 조선시대인 138년(태조 7)에 함흥에서 돌아오던 태조가 옛날 이곳에서 백일기도하던 것을 상기하며 절을 중창하고 천축사라는 사액을 내렸다고 한다. 또 1474년(성종 5)에 성종의 왕명으로 천축사가 중창되었고, 명종 때에는 문정왕후(文定王后가 화류용상을 하사하며 불좌를 만들었다고 한다.

    1812년(순조 12)에는 경학(學)스님이 절을 중창하였으며, 1815년(순조 16)에는 신도 김연화( 두락을 절에 희사하며 절의 사세가 넓어졌다. 이후 1986년에는 상공(相公) 김홍근(金根), 판서(判書) 김보근, 참판(參判) 이장호 등이 불량을 희사하여, 19세기 말 천축사는 수많은 신도들에 의해 중수 · 중창되었다. 1853년에 주지 순(順이 칠성탱, 독성탱, 산신탱을 조성하고, 1885년에 화주 성암응부(星應夫)가 민왕후 및 상궁 박씨등의 시주를 얻어 후불탱, 신중탱, 지장탱를 조성하였다. 하지만 현재는 삼신불탱과 신중탱만이 전해진다. 근대에는 1911년에 화주 보허축전 (寶庫 이 관음탱을 봉안하고, 1931년에 주지 김용태(金泰)가 천축사로 모르는 길을 확장하였으며, 이후 수많은 신도들이 천축사 도량에 불사하였으며, 1964년에 무문관을 신축하여 년 수행결사의 장으로 만든 것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가람으로 조성되었다. 현공(玄公)스님이 2006년부터 대웅전를 비롯하여 독성각 · 산신각, 요사채를 중수하고, 공양간을 신축하여 옛 천축사 가람을 복원한 것이다.

    근래 도봉산의 관음기도도량으로 알려지며, 수많은 신도들이 절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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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대한불교조계종 천축사 천축사 비로자나 삼신괘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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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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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천축사 비로자나 삼신괘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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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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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삼신불을 그린 구성과 약식 등이 19세기 서울, 경기지방 괘불 야식을 잘 계승하고 있으며 금어인 하운당 유경의 독특한 부로하 양식 규명과 19세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5. 대한불교조계종 천축사 천축사 비로자나 삼신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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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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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천축사 비로자나 삼신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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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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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19세기 서울 경기 지방의 대표적 화승인 경선당 응석이 주관하고 대선사 하은 예가(1828~1898)가 증명한 불화로 독특한 도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명성황후를 위해 상궁들이 시주하여 제작하였다는 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의미도 니고 있다.

  6. 대한불교조계종 원통사 원통사 상공암 각자(相公岩 刻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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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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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원통사 상공암 각자(相公岩 刻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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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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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원통사 산신각 아래 거북바위 윗면에는 상공암(相公岩)이라고 쓴 큰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다. 세로로 새겨져 있는 바위글씨는 먼저 75X230cm 크기의 직사각형 선을 자연 바위면에 그린 후 그 안에 큰 글씨로 새겨 놓았다. 이 글씨는 ‘원통사 약사전 아래 거북바위에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마치던 날 천상의 상공(정승)이 되어 옥황상제를 배알하는 꿈을 꾸었다’는 것을 새겼다고 하나 누구에 의해서 언제 새겨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원통사는 도봉산 소귀바위와 보문산장 바로 아래 위치한 사찰로 주변에는 두꺼비, 학, 독수리, 거북 등 108종류의 형상을 갖춘 바위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7. 대한불교조계종 학도암 학도암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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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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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학도암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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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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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1624년(인조2년) 무공화상 불암산 중턱에 학도암 창건
    1791년(순조1년) 취근선사의 마애사리탑 조성(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62호)
    1819년(순조19년) 10월 청신녀 월영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마애부도 조성(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62호)
    1870년(고종 7년) 명성황후의 시주로 마애관음보살좌상 조성(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4호)
    1878년(고종15년) 벽운화상 중창
    1878년(고종15년) 한씨 일가의 시주로 경선화상이 마애관음보살좌상 보수
    1989년 전통사찰 제77호로 지정

  8. 대한불교조계종 학도암 학도암 마애관세음보살 좌상의 문화재적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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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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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학도암 마애관세음보살 좌상의 문화재적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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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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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조선시대 최고의 수려한 아름다움을 간직

    마애관음보살좌상은 학도암 뒤쪽으로 커다란 바위 면에 13.4미터에 이르는 크기로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에 조성된 마애불은 열점을 넘지 않는다. 핍박 받았던 조선 불교의 어려웠던 상황을 알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왕실의 후원으로 조성된 관세음보살 좌상은 마애불이지만 회화적 아름다움을 간직한 빼어난 수작이다. 양각의 융기된 선묘로 새겨진 이 관음보살상은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좌상으로 화불이 있는 보관 장식이나 칠보문, 옷 주름 표현 등에서 불화의 도상을 그대로 바위에 옮겨 놓은 것처럼 보인다. 특히 보관 양쪽으로 뻗어나온 관대에 구슬처럼 달린 마름모 모양의 사슬 장식이 양어깨 위에 늘어져 있는 점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 관음보살상의 얼굴은 가늘고 긴 눈과 뭉툭한 코, 작은 입술 등으로 인해 새침한 인상을 준다. 짧은 목에 표현된 형식적인 삼도는 가슴 아래쪽으로 내려가 있다. 양쪽 어깨에는 대의를 걸치고 있으며 안쪽의 내의(內衣)는 가슴 위에 수평으로 입고 그 위에 띠 매듭을 표현하였다. 두 손은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으며, 오른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사뿐히 얹어놓고 왼손은 가슴 앞으로 올려서 들고 있다.

    이 보살상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가슴 가운데에 있는 작은 사각형의 홈인데 복장 감실의 흔적으로 짐작된다. 복장이란 불상을 조성할 때 불상 내부에 부처를 상징하는 사리와 불경 등을 넣는 것으로 부조상인 마애불에 그러한 예가 남아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이와 같이 마애불의 가슴부분에 구멍이 있는 예는 전라북도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에서 볼 수 있다.

    마애불 왼쪽 벽면에 새겨진 명문에는 불화의 화기와 같이 증명비구 혜묵을 비롯하여 축문을 염불한 통주, 마애불을 조각한 금어의 이름이 보이는데 마애불의 조각가를 불화가인 금어와 동일하게 여긴 점이 흥미롭다. 50여 글자가 되는 명문에 의하면, 1870년에 명성황후가 불심으로 발원하여 조성했다는 내용과 함께 1878년에 학도암을 중창하면서 한씨 일가의 시주로 장선화상 등이 마애불상을 보수했다고 되어 있다. 이 마애관음보살상은 조선 말기의 불상이지만 왕실에서 후원하여 조성된 만큼 조선 말기까지 계속 이어지는 불교조각의 전통을 볼 수 있으며 조성 명문이 남아 있어서 자료적인 가치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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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대한불교조계종 학도암 고종과 명성황후의 사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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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고종과 명성황후의 사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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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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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조선 고종3년(1866년) 민치록의 여식 민자영은 16세에 왕비로 간택을 받아 가례(결혼)를 올렸으나, 고종(15세)은 이미 후궁 영보당 귀인 이씨를 총애하고 있었다. 가례를 올린 첫 날 남편 고종은 왕비의 처소엔 들지 않고 귀인 이씨의 처소에 들었다. 황후가 되었으나 첫날밤에 다른 여인에게 간 것이다. 더군다나 1868년 4월 귀인 이씨가 고종의 첫 아들인 완화군을 낳자, 더욱 총애했으며 명성황후와 대소신료들을 앞에두고 완화군을 안고 왕실이 튼튼해졌다며 크게 기뻐 하였다. 임금을 비롯한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던 나이 18세에 불과한 어린 황후에게 한 궁녀가 부처님을 조성하면 그 가피로 원하는 바를 얻을수 있다며 권선하였다. 명성황후는 고종의 사랑을 얻고 왕자를 낳아 왕통 잇기를 발원하며 가장 기운이 좋은 명당터인 불암산 학도암 큰 바위에 관세음보살을 조성하는 불사를 연다. 당시 최고의 불모였던 장엽을 금어로 임명하고 경복궁을 복원하던 왕실 석공 김흥연 이운철 원승천 박천 황원석에게 명해 관세음보살을 조성하게 한다. 조성을 시작하자 관세음보살의 가피로 인해 명성황후는 차츰 고종의 사랑을 얻게 되었고 조성 완료(1870년)후 몇년 되지 않아 후에 순종이 되는 왕자 이척을 낳게 되는데 이후부터 학도암 관세음보살좌상은 첫째 사랑을 얻고, 둘째 자녀를 얻으며, 셋째 자녀가 성공하는 세가지 가피를 주는 것으로 유명해 지게 된다. 후일 고종은 명성황후 시해 후 1년 뒤 덕수궁에서 홍릉까지 전화를 연결해 매일 아침 명성황후의 무덤에 답변없는 안부 전화를 걸었다. ‘양인들이 만든 이 전어기(전화기의 옛말)라는 것은 멀리있는 사람의 소식도 전해준다 하더니 하늘까지는 닿지 않는가 보오.’라며 슬퍼하였다. 사랑 얻길 기원하며 학도암 관세음보살좌상을 조성하였는데 그 사랑은 죽음 이후까지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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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대한불교조계종 호압사 호압사 약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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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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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호압사 약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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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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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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