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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관음종 개산조 태허 (太虛 1905~1979) 조사스님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6
개산조 태허 (太虛 1905~1979) 조사스님-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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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개산조 태허(太虛 1905~1979)조사스님
조사스님 생애
법명은 홍선(泓宣)이며 태허(太虛0는 법호이다. 전주 이씨로 속명은 이용이(李龍㶊)이다. 1905년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서 아버지 선준(善俊)과 어머니 묘행심(妙行心)을 연(緣)으로 출생하셨다. 어려부서부터 정의감과 기개가 있어 주위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고 자랐으며, 1928년 경성예비고 등전문학교(京城豫備高等專門學校)를 졸업 할 때까지는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별세한 후 세간의 학문으로는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에 전국 의 사찰을 돌며 참배하다가, 26세 때인 1930년 선암사(仙巖寺)에사 발심, 경운(擎雲)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이때부터 4년간 불경을 배웠으나 그것만으로는 미진하다는 생각에 1935년부터 소요산 백운암(白雲庵)에 들어가 1천일동안 안거 정진을 했다.
그 후 중국 산시성(山西省)으로 구법을 떠나 여러 명찰을 순례하며 고승들의 가르침을 받았고, 1940년 원불(願佛)인 철불상을 모시고 귀국하여 서울 종로구 숭인동 낙산(駱山)밑에 묘각사(妙覺 寺)를 창건하고 포교에 들어갔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경북 상주 모동면으로 자리를 옮겨 백화암(白華庵)을 창건하고, 선정(禪定)을 익히면서도 「법화경(法 華經)」을 사경하면서 구도의 길을 걸었다.
6년 동안 상주에 머무르며 공부에 전념한 스님은 그 후 서울로 돌아와 하루도 빠짐없이 탑골공원에 나가 일없이 그곳을 찾는 사람들 에게 설법 했다. 1957년에는 법화계통(法華系統)을 규합하여 일승불교현정회(一乘佛敎顯正會)를 창립하고 회장에 취임했으며, 1965년 12월 8일에는 대한불교관음조의 전신인 대한불교불입종(大韓佛敎佛入宗)을 창종했다. 이듬해 초대 종정이 된 스님은 제자들 을 가르치며 포교에 전력하여 종단을 크게 발전시켰다.
또 1970년에는 한일불교 친선회(韓日佛敎 親善會) 고문으로 추대됐고, 1971년에는 정부로부터 보국훈장(保國勳章)을 받았고, 전일본 불교회(全日本佛敎會)의 초청으로 일본 불교계를 시찰했다.
청소년 포교의 중요성을 느낀 스님은 1973년 마하연불교학생회를 창립했고, 불교잡지 「범성(梵聲)」을 창간했다. 1975년 한중불 교회(韓中佛敎會) 고문, 1976년 국가총력안보협의회(國家總力安保協議會) 불교대표로 추진됐으며, 같은 해 묘각사 대웅전을 중창 했다. 또한 고희(古稀)의 나이에도 「법화경」홍보에도 힘을 써 백일기도중에도 「법화경」을 사경하여 법보(法寶)로 모시기도 했다. 이렇게 온 국민에게 법화사상(法華思想)의 포교와 불입종의 발전에 힘쓰던 스님은 1979년 6월 24일 세수 74세, 법랍 50세로 묘각사에서 입적했다.
5일간의 종단장(宗團葬)이 끝난 후 다비를 하니 1백28과의 사리가 수습되어 스님의 법력을 나타냈고, 이는 묘각사 경내 사리탑에 봉안됐다.
스님의 가르침은 대한불교관음종에서 법맥을 잇고 있다. 저서로는 「成佛圖」「人生탈출」「법화문종선집」「믿음의 생활신조」 「피안의 등대」「해동천태법화맥소고」등이 있다. -
대한불교관음종 경운원기 (擎雲元奇 1852~1936) 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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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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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경운원기 (擎雲元奇 1852~1936) 선사-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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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경운원기(擎雲元奇 1852~1936)선사
개산조 태허홍선(太虛弘宣) 조사스님의 법맥(法脈)을 찾아 은법사(恩法師)이신 경운원기 선사의 행장을 되돌아보는 것은 관음종의 법맥을 바로 아는 것이라 하겠다.
행장
1852년 1월 3일 경남 웅천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金氏), 석옹(石翁)이라는 호도 사용했 다. 모친은 구씨(具氏)였다. 17세에 구례 연곡사에서 환월(幻月)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사미계는 해룡(海龍)스님에게, 비구계는 화산(華山)스님에게 받았다. 순천 선암사 대승강당 (大乘講堂)에서 경붕(景鵬)스님에게 교학을 배웠으며 30세 되던 해에 강석(講席)을 승계했다. 그 후 후학 양성에 전력을 다해 근세 대강백(大講伯)으로 명성을 떨쳤다. 스님의 강의를 듣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학승들이 선암사 대승암으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경운스님은 순천에 포교당을 건립한데 이어, 1910년에는 경성에 중앙포교당이 설립되자 교화 사업에 뛰어들었다. 세속으로 들어가 중생들을 제도하는 입전수수(入廛垂手)의 삶을 몸소 보 였다. 1911년 1월 15일 만해, 석전스님 등이 일제에 맞서 조선불교임제종(朝鮮佛敎臨濟宗)을 만들 때 임시관장으로 추대될 만큼 존경을 받았다. 당시 임제종은 순천 송광사에서 총회를 열 고 임시 종무소를 설치했다.
스님은 1917년 조선불교선교양종교무원(朝鮮佛敎禪敎兩宗敎務院)창립 당시 교정(敎正)으로 추대 됐다. 이 같은 사실들은 스님이 일제강점기 조선불교의 정신적 중심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경운스님은 말년에 “병들고 늙어지면 아무 소용이 없는 물건이 되니, 젊어서 공부 하여 중생을 건지라”는 내용의 글을 남겼다.
또한 정묘년(丁卯年, 1972년) 9월 20일(음력)에 쓴 편지에서 스님은 제자에게 이렇게 당부하고 있다.
“내가 모여 바다를 이루고, 티끌이 모여 산을 이루며, 털이 모여 머리를 형성하듯, 우리 부처님은 덕을 쌓아 부처가 될 것이니 털끝 하나도 소홀히 하지 말라” 작은 일을 소중히 여기고, 언제나 방심말고 수행정진하여 정각의 경지에 오를 것을 당부 하는 내용이다.
스님은 글씨 또한 명필로 소문이 나서 전국적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일찍이 29세 때에 명성황후의 뜻으로 양산 통도사에서 금자 법화경을 사경하기도 하였다.
통도사에서 사경할 때 족제비 꼬리털로 정필(淨筆) 2자루를 만들어 3개월 동안 일자 일배(一字一禮)로 전 14축을 완자(完字)하였다. 또한 46세 되던 해에 선암사 비로암에서 5년동안(1897-1901) 일행삼배(一行三拜)의 금강신(金剛信)으로 80화엄경 전부를 20여권에 나누어서 사경하였다.
경운스님의 명성이 전국적으로 알려져 전국31본산의 주지스님들이 직접 선암사 대승암에 와서 스님의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평생 후학을 기르는데 헌신하던 경운스님은 1936년 11월 11일 오전 11시 순천 선암사 대승암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85세, 법랍 68세. 현재 선암사에는 스님의 비와 진영, 그리고 화엄경사경 등 많은 유품이 전해진다. -
대한불교관음종 대각국사 의천 (大覺國師 義天 1055~1101)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6
대각국사 의천 (大覺國師 義天 1055~1101)-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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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대각국사 의천을 종조로 묘법연화경을 소의경전으로 의지하는 본 종단은 선암사 경운선사를 은사로 득도하신 태허조사스님께서 창종하시어 산문을 여셨다.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1055~1101)은 고려 교장(敎藏: 2005년 교육부는 일제시대 잘못 오역된 속장경(續藏經)을 교장으로 정식 교과서를 교정함)을 간행하시고 묘법연화경을 한국에 뿌리 내리게 하신 대한불교관음종의 종조(宗祖)이시다. 훗날 종조 대각국사의 뿌리는 전라남도 순천 선암사(仙庵寺)의 경운원기(擎雲元奇)(1852~1936) 선사께 이어지고 관음종 개산조 태허홍선(太虛弘宣) 조사스님께로 그 법맥(法脈)이 이어진다.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1055~1101)
대각국사 의천의 탄생과 출가
호는 우세(祐世), 이름은 후(煦), 자는 의천(義天), 문종(고려11대 왕)의 넷째 아들로 선종의 동생이시다.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이다. 1055(문종9)년 9월 28일 탄생. 대각국사는 그의 시호다.
부왕은 네 왕자를 불러놓고 “누가 능히 출가하여 복전(福田)의 이익을 짓겠는냐”고 물었다. 이에 국사는 출가를 결심하여 1065년(문종19) 5월 14일 당시 왕사였던 난원 (爛圓: 훗날 景德王師)에 의해 내전에서 머리를 깎게 하고, 개경의 영통사(靈通寺)에서 살게 되었다. 난원은 화엄종에 속한 66세의 노승이었고, 국사는 이해 10월 불일사 계단(戒壇)에서 계를 받았고, 난원은 그 다음해 입적했다.
국사는 어린나이였지만 학문을 쉬지 않았고 13세인 1065년(문종21)때 왕은 우세(祐世)라는 호를 하사하고 승통(僧統)직을 내렸다. 19세에 세자를 대신해서 교장(敎藏)의 수집발원의 글을 지었다.
국사가 20세 이전에 이미 교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수집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불교학에 대한 남다른 안목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23세 때부터 강의를 했는데 이로부터 입적할 때까지 24년 동안 한번도 폐한 적이 없었다
구법 행적 (화엄과 천태사상 수학)
국사는 34살 되던 1084년(선종1) 정월에 내전에 들어가 송나라로 가서 구법 할 뜻을 간곡히 아뢰었으나 허락 받지 못했다.
둘째형인 선종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 의논했지만 모두 반대했다. 이에 국사는 중신들 앞에서 현장의 서역구법과 의상의 입당구법의 예를 들면서 눈물로 호소했지만, 왕자의 입송(入宋)이 요나라를 자극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염려하는 중신들의 동의를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국사의 구도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듬해 4월 8일 밤 왕과 태후에게 편지만 남긴 채 제자 수개(壽介)등과 함께 정주(貞州:오늘의 김포)에서 상선을 타고 송나라로 향했다. 국사는 5월 초 판교진에 도착했고. 7월에는 송의 서울 변경(汴京)에 이르렀다.
송제(宋帝) 철종(哲宗)은 국사를 따뜻이 맞아 주었고, 여러 가지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송에 체류하던 14개월의 짧은 기간에 변경(汴京)과 항주(杭州)를 오가면서 고승 50여 명을 만나 불법을 묻거나 교류했다. 국사가 직접 만났거나 서신으로 교유했던 송나라의 승려 중에 소속 종파의 확인이 가능한 경우만을 분류해 보면 아래와 같다.
<종본선사의 국사 찬양게송>
이 세상 그 누가 만 리의 높은 파도 타고, 불법 위해 몸 잊고 선재를 본받았던가?
생각건대 염부제에서는 참으로 희유한 일, 마치 우담발화꽃이 불 속에서 핀 것 같네.
14개월 동안 송나라 구법을 통해 고려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고 「화엄대부사의론(華嚴大不思議論)」등 제종(諸宗; 여러 종파)의 교장 3천여 권을 3,000여 권의 불전을 구해 고려로 귀국하였다.
국사의 고려 교장(敎藏: 2005년 교육부는 일제시대 잘못 오역된 속장경(續藏經)을 교장으로 정식 교과서를 교정함) 간행의 빛나는 업적
1090년(선종7) 요나라, 송나라, 일본 등에서 4천여 권의 장소를 수집하고 국내의 고서를 모아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이들 경서를 간행하고, 그 목록으로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摠錄)」3권을 편집했는데, 각 권의 안쪽에 해동유본 현행록(海東有本 現行錄)이라 했다. 교장도감에서는 이 목록에 의해 모두 1,010부 4,740권의 장소를 간행했는데, 이것을 고려 교장(高麗 敎藏)이라 한다.
그 뒤 선암사(仙岩寺)와 홍원사(洪圓寺)를 거쳐 해인사에 머물고 있다가 숙종이 즉위하여 간청하자 다시 흥왕사에 돌아와 강의를 했다.
1097년(숙종2) 2월 태후의 발원으로 국청사(國淸寺)가 낙성되자 그 해 5월 그가 제1세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강의했다.
그의 강의를 들으려고 모여드는 학자가 무려 1천 명을 넘었다. 이로서 고려에 묘법연화경과 천태사상이 그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저술
「대세자집교장발원소(代世子集敎藏發願疏)」 「신집원종문류(新集圓宗文類)」「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摠錄)」
「간정성유식론단과(刊定成唯識論單科)」 「팔사경직석(八師經直釋)」 「소재경직석(消災經直釋)」
「기일본국제법사구집교장소(寄日本國諸法師求集敎藏疏)」,「신편제종교장총록서(新編諸宗敎藏總錄序)」,
「대선왕제종교장조인소(代宣王諸宗敎藏彫印疏)」등 10여 부 300여 권이 된다고 한다.
현존하는 것은「신편제종교장총록」과「대각국사 문집」「신집원종문류」「석원사림」등이 있고, 「간정성유식론단과」의 서문이 있다. -
대한불교관음종 대한불교관음종 종단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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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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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대한불교관음종 종단로고-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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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심볼마크
대한불교관음종의 이미지를 대표적으로 표현한 상징으로, 크게는 외부의 법륜과 내부의 ‘학족(鶴足)옴’의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서 설명 할 수 있습니다.
외부-둥근법륜
둥근 법륜 위에 새긴 ‘나무 삳달마 푼다리카 수드라’
관음종 개산조 태허(太虛) 조사스님께서 종단의 소의경전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에 귀의합니다’라는 뜻의 산스크리트 원어인 ‘나무 삳달마 푼다리카 수드라’를 둥근 법륜 위에 새기신 의미를 형상화한 것으로 묘법연화경에 대한 의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부-’학족(鶴足)옴’
학의 발을 형상화한 것으로 인욕과 정진 그리고 선정에 대한 창종 이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근대 한국불교계에 큰 고승이셨던 관음종 개산조 태허(太虛) 조사스님께서 후학들에게 게을리 하지 않고 정진 할 것을 강조하시며 ‘학족(鶴足) 옴’의 의미를 늘 새기고 수행할 것을 당부하셨다. 우주의 소리인 ‘옴’과 ‘학족(鶴足)’에 담겨있는 학(鶴)의 의미를 조사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한 다리로 가장 오래 서있는 새 학(鶴)의 모습에서 우리 수행자들은 세 가지를 꼭 배워야 한다.
하나는 참기 오려운 것을 참아내는 인욕(忍辱)이고 그 두번째는 끊임없이 수행하는 정진(正眞)이며, 세 번째는 고요히 생각하는 선정(禪定)의 가르침이다.”
*심볼의 황금색은 함께 정진하고 나아가는 미래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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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관음종 대한불교관음종 조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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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6
대한불교관음종 조직도-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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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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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진각종 대한불교진각종 신행단체 및 산하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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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대한불교진각종 신행단체 및 산하기관-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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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총금강회
총금강회는 굳은 단결과 신심으로 심인정법의 구현으로 구국제민과 복혜쌍수의 윤원대도를 성취케 하신 종조 회당대종사님의 창교이념을 받들어 진각종의 종지를 봉행하고 정법을 수호 실천하며 삼보를 호지하여 이 나라 불교를 중흥시키 는데 선봉자가 되어 이 역사적 과업과 불자로서의 사명을 다하고자 서원합니다.
총금강회 서울특별시 성북구 하월곡동 22
서울지부 서울특별시 성북구 하월곡동 22
대구지부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 156-1 진각문학회관 6층
부산지부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 2동 841-2
대전지부 대전광역시 중구 선화 1동 238-1
경주지부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99
포항지부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대흥동 664
청년회
청년회는 대한불교 진각종 교리를 신봉하는 청년회원들로 하여금 삼밀관행 및 육행실천을 바탕으로 불자로써의 참된 수련을 쌓는 동시에 수련 활동을 통한 교리연찬과 전국회원들 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나아가 본 종단의 교화사업에 적극 기여함으로써 생활 속에 진리를 구현하여 사회정화를 실현함에 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전국청년회 서울특별시 성북구 하월곡동 22 선우관
서울청년회 서울특별시 성북구 하월곡동 22 선우관
대구청년회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 3동 584-1
부산청년회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 2동 841-2
대전청년회 대전광역시 중구 선화 1동 238-1
경주청년회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99
포항청년회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대흥동 664
안강청년회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양월 5리 1262-15
서울학생회
회당학회
본 학회는 회원들의 공동체적 연대를 통하여 회당사상과 불교 및 밀교의 교리, 수행, 의식체계에 대하여 조사, 연구, 발표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음의 사업을 전개한다.
회당학회 서울특별시 성북구 하월곡동 22
회당사상을 체계화하기 위한 연구
밀교연구
불교연구
심포지엄 및 학술발표회 개최
학술지 "회당학보" 발간
학술활동 뒷받침을 위한 재정 확보 및 관리
회당정신의 실천 보급
관련단체와의 교류
이상의 사항에 부대되는 사업 -
대한불교진각종 대한불교진각종 종단연혁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6
대한불교진각종 종단연혁-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6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종교이다.
부처님은 2,600여 년 전 인도의 북동쪽 석가족이 다스리던 조그만 부족국가인 카필라밧투에서 태자로 태어났다.
29세에 출가한 그는 6년만의 수행 끝에 35세가 되던 해 자신이 원하던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님을 우리말로 ‘깨달은 사람’ ‘진리에 눈뜬 사람’이라고 하는 뜻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룬 이후 45년 동안 자신의 진리를 많은 사람에게 전하였다. 그 법은 제자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초기불교(初期佛敎), 부파불교(部派佛敎),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시대를 겪으면서 발전하였다.
7C 중엽부터 인도사회에서 인도교로 부흥과 대승불교의 형식화가 만연되자 민중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밀교(密敎)가 등장하였다. 이 때부터 불교의 신앙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비밀의 교의와 의례를 스승이 제자에게 은밀하게 전달하여 간직하는 비밀스러운 신앙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을 중점적으로 전해주는 경전이 바로 대일경(大日經)과 금강정경(金剛頂經)이다. 이 경전들은 이 세상 속 어느 곳이나 항상 부처님이 계신다고 하는 진리의 부처님인 법신불 생각하고 기도한다면 바로 현재의 몸으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밀교는 신라시대부터 전해져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한국불교 신앙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밀교는 병을 고치고, 외적을 물리치는 등 현세이익적인 신앙관에 두드러졌다.
이와 같은 초기의 단계를 거쳐 법맥이 강조되는 시기에 오면 대일경과 금강정경 등 경전의 전래가 이어지고 종파가 형성되었다. 그 후 극난극복과 민생의 안녕이라고 하는 통치이념과 일치되어 많은 도량이 개설되었다. 여기에 13C 초부터 원나라로부터 전해지기 시작한 티베트의 밀교는 육자진언을 강조하는 육자진언신앙법이 형성되었다.
14C 말에 건국한 조선은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그 결과 고려시대 많은 영향을 미쳤던 밀교는 국가의 인위적인 통합으로 본연의 모습이 상실되어 종지와 종풍이 훼손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후 한국의 밀교는 이름도 없이 전해지다가 진각종의 창종으로 인해 다시 세간에 중흥되었다.
진각성존 회당 손규상(1902-1963) 대종사는 1947년 달성군 성서면 농림촌에서 육자진언(六字眞言)을 통해 불법의 도리를 깨달았다. 대종사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현상들이 모두 법신부처님이고 여기에 우리들의 동작 하나하나가 부처님의 동작이라고 생각하고 활동한다면 우리가 직접 부처님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고 설하였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이 곧 법신불과 같음을 뜻하는 것으로 법신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전수받을 수 있다는 사상체계이다.
한국의 밀교를 중흥한 진각종의 역사는 첫째 참회원과 심인불교의 시대, 둘째 교법의 정립시대, 셋째 창종정신의 계승시대, 넷째 도약의 시대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참회원과 심인불교의 시대
이 시대는 진각성존 회당 대종사가 대각을 이룬 1947년 5월에서 심인불교건국참회원으로 교명을 정한 1951년 7월에 이르는 시기이다.
1947년 5월 대각을 이룬 대종사는 최초의 교화도량을 경북 영일군 기계면 이송정에 마련하여 진각종의 서막을 열었다. 이때 도량의 명칭을 참회원(懺悔園)이라 하였다. 그 후 1948년 8월 교명이 교화단체 참회원으로 정해졌다가 다시 1951년 심인불교건국참회원(心印佛敎建國懺悔園)으로 하였다.
이와 같이 개종 초기 종단의 방향은 도량의 도심건설과 참회와 실천의 심인불교운동을 전개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는 지금까지의 한국불교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도였다. 기복적인 불교에서 마음을 닦는 깨달음의 불교로 방향을 제시하면서 그 근원이 자신의 참회에 있음을 제시한 것이다.
이런 대종사의 불교관은 새로운 불교관으로 당시 불교계가 처한 현실에 대해 입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새불교 운동이었다. 그것은 기존 불교의 장·단점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뒤 그 경계를 넘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불교계의 민주적이고 자유가 보편화된 종교로 진일보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교법의 정립시대
이 시대는 1951년 7월 이후 진각성존 회당 대종사가 열반한 1963년 10월에 이르는 시기로 종단의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이 두드러진 시대였다.
안으로는 1953년 8월 종단의 체제 완성을 위해 대한불교진각종보살회 헌법이 제정되었고, 그 해 12월 대종사의 유법에 따라 종명을 ‘진각종'으로 명명하였다. 여기에 1954년 1월 대한불교진각종보살회 유지재단을 설립하여 법적인 토대가 완성되었다.
밖으로는 1955년 4월 대구에 심인중, 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힘쓰는 한편 1958년 방콕에서 개최된 제5차 세계불교도 우의회에 참가하는 등 한국불교의 세계화에 힘썼다.
이와 같이 대종사는 종단 초기의 내실을 기하고 밖으로의 활동을 전개하면서 전국적으로 심인당을 설립하고 교화에 전념하다가 1963년 10월 16일 대중들에게 ‘옛날에는 의발(衣鉢)이요 이제는 심인법(心印法)이라'는 법을 부촉하고는 62세로 영원한 법신의 품으로 돌아갔다.
창종정신의 계승시대
이 시대는 1963년 10월 진각성존 회당 대종사 열반 이후 30년이 지난 1993년 10월에 이르는 시기이다. 대종사 열반 후 새로운 집행부를 구성한 종단은 진각성존의 정신을 계승하는 사업을 다각적으로 행하였다.
먼저 종단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사업을 살펴보면 먼저 종단의 근간이 되는 종헌종법이 1964년 3월 26일 제정되었고, 종단의 상징인 금강륜상은 1964년 7월 15일 제정되었다. 그리고 대종사의 유계였던 총인원의 서울 이전도 1966년 1월 지금의 통리원 자리로 옮겨졌다. 이 당시 종단 내의 제도도 많이 보완되었다. 총인원 내에 기로원(耆老院)이 부설된 것은 1969년 5월이다. 이것은 1986년 9월 대구로 신축 이전되었다.
이 시기 심인당 역시 전국적으로 많은 수가 개설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특이한 것은 1990년 11월 미국 L.A에 해외 포교원인 불광심인당을 헌공하여 진각종 국제포교의 서막을 시작하여 진각종의 위상을 높였다.
다음으로 대종사의 유지를 받들어 교육과 사회적 실천면에서도 많은 활동이 행해졌다. 1976년 서울 진선 여자중고등학교의 개교를 시작으로 종단의 스승 교육기관인 강원이 1982년 중앙교육원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진각대학으로 개편하여 1989년 제1회 입학식을 거행되었다. 어린이 교육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대종사 때부터 강조해온 어린이 포교의 일환으로 종단 최초인 유치원이 1984년 3월 탑주심인당에서 개원하였다.
이 밖에도 종단 내 학술단체인 회당학회가 1992년 창립되어 대종사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하기에 이르렀고, 1993년 3월 종조열반 30주년 기념으로 청정국토가꾸기운동을 전국적으로 거행하여 종조의 정신을 계승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도약의시대
이 시대는 1993년 10월 진각성존 회당 대종사 열반 30주년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기이다. 대종사 열반 후 30년 동안 내적 성장에 주력한 종단은 이후 교세확장과 함께 진각종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데 주력하였다.
내적 성숙에 관한 활동으로는 먼저 1996년 12월 17일 종헌종법이 전면 개정되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종단의 법령을 마련하였다. 외적으로는 오래된 심인당의 개축과 함께 해외 심인당의 개설도 계속되었다. 1997년 5월 중국 흑룡강성 해동심인당의 헌공과, 1999년 10월 미국 워싱톤에 법광심인당의 개설, 그리고 캐나다 토론토에 성불심인당 개설은 진각종의 세계화에 초석이 되었다.
교육사업도 꾸준히 지속되었다. 1996년 1월 종립대학인 위덕대학교의 헌공불사가 봉행되었고 이어 3월 개교 및 제1회 입학식이 봉행되어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는 교육체계가 이루어졌다.
종단의 사회활동도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1998년 3월 사회복지법인인 진각복지회가 설립되어 복지시설 수탁운영, 자원봉사센터 및 지부조직의 구축운영 등 초기사업에 성공하여 부처님의 자비정신을 구현하였다. 그 외에도 종단의 국제포교를 담당하는 국제불교연구소의 북한과의 교류와 2000년 7월 사단법인 비로자나 청소년 협회의 각종 문화사업과 수련사업도 청소년 포교에 발전을 가져왔다.
종단의 교법체계를 위한 학술적 성과도 크게 돋보였다. 교육원을 비롯하여 회당학회 그리고 종립대학의 연결로 회당사상과 밀교에 대한 연구 그리고 법어록의 정리와 진각의범의 정리 등 종조와 교법에 대한 연구가 진척된 시기이다. 이런 연구를 바탕으로 2002년부터 시작한 세계 각국과의 밀교관련 학술연구 및 밀교의식시연법회를 총인원에서 개최하여 종단의 사상적 연원을 탐구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
대한불교진각종 대한불교진각종 진각성존회당대종사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6
대한불교진각종 진각성존회당대종사-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6
말법시대末法時代의 성인,
회당悔堂 손규상孫珪祥 대종사大宗師
진각성존(眞覺聖尊) 회당(悔堂) 대종사(大宗師)는 근현대 한국불교계에서 새불교운동을 일으킨 인물 중의 한 분이다. 회당대종사께서는 새불교운동의 터전으로 진각종이라는 불교종단을 세우고 불교정신으로 사회정화운동을 펼치셨다.
진각성존 회당대종사께서 일으킨 새불교운동은 바로 진각밀교운동이다. 진각밀교는 밀교정신을 날줄로 하고, 회당대종사의 자증교설과 직접 체험하고 재해석한 종조정신을 씨줄로 한다. 그 때문에 진각밀교는 전래의 불교형태, 특히 외형적 양식에서 신선한 충격을 줄 만큼 혁신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밀교(韓國密敎)의 중흥조(中興祖)요, 진각종(眞覺宗) 입교개종조(立敎開宗祖)인 회당대종사께서는 1902년 5월 10일 밝아오는 20세기의 여명(黎明)과 함께 동해(東海)의 정토(淨土)인 울릉도에서 법신불(法身佛)의 대 화현(化現)으로 탄생(誕生)하셨다.
출중(出衆)한 용모(容貌)와 지용(知勇)을 겸비(兼備)한 회당대종사께서는 어려서부터 주위의 신망(信望)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일찍이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제(諸) 전적(典籍)들을 섭렵(涉獵)하여 10세 때 "마음 하나 천만을 당적하고 흰 바탕에 단청을 그린다(心一當千萬 質白畵丹靑)"라는 성구(聖句)를 지어 장차 성인(聖人)으로서의 진면목(眞面目)을 짐짓 세상에 드러내 보이셨다.
회당대종사께서는 불연(佛緣)이 무르익어 전국(全國)의 명산대찰(名山大刹)과 일본 등지 동방(東方)의 밀교(密敎) 사적(史蹟)들을 두루 살피시고 1946년 가을부터 누겁(累劫)의 인연지(因緣地)인 경상북도 달성군 성서면 농림촌(현재 대구광역시 달서구)에 도량(道場)을 개설하시어 숙야(宿夜)로 정진(精進)하시다가 1947년 5월 16일 마침내 동천(東天)에 솟는 여명을 보시고 심신(心身)이 상연(爽然)함을 느끼시며 육자진언(六字眞言)의 대지(大智)를 얻어 대각(大覺)을 성취(成就)하시었다. 이어 6월 14일 육자심인(六字心印)의 대각(大覺)을 성취한 첫 법문(法門)으로 진각종단(眞覺宗團)의 개종(開宗)을 선포(宣布)하신 후 대구 남산동에 금강도량(金剛道場)인 희락심인당(喜樂心印堂)을 세우시고 서울의 호국성전(護國聖殿) 밀각심인당(密覺心印堂)을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坊坊曲曲)에 심인성전(心印聖殿)을 세우시니 교세(敎勢)는 전화(戰火)에 아랑곳없이 욱일승천(旭日昇天)의 세(勢)로 발전(發展)하였다.
회당대종사께서는 법신불(法身佛)의 대(大) 지덕(知德)과 권지방편(權知方便)으로 새로운 시대(時代)를 다스릴 이원진리(二元眞理)와 심인진리(心印眞理)의 정법(正法) 광명(光明)을 밝히시며, 오직 중생구제(衆生救濟)와 국가진호(國家鎭護)를 위해 진력(盡力)하시다가 문득 세연(世緣)이 다하여 1963년 10월 16일 대구 침산동 불승(佛乘) 도량(道場)에 이르러 "옛날에는 의발(衣鉢)을 전했고 이제는 심인법(心印法)을 전한다."는 열반송(涅槃頌)을 남기시고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드시었다. 세수(世壽) 62세요, 개종(開宗) 17년이었다.
회당대종사께서 심인법(心印法)을 위시한 약불(藥不), 서남(西南)의 비밀(秘密)스런 법(法)을 제자들에게 부촉(咐囑)하시고 법신(法身)의 만다라(曼茶羅) 궁전(宮殿)으로 새 인연(因緣)을 맺으시니 모든 진언행자(眞言行子)와 후학(後學)들은 생활불교(生活佛敎), 밀교중흥(密敎中興), 현세정화(現世淨化), 심인현현(心印顯現)의 창교이념(創敎理念)을 받들어 오늘도 그 높은 법력(法力)과 위덕(威德)을 길이 추존(追尊)하면서 영원(永遠) 무궁(無窮)한 신행(信行)의 귀명처(歸命處)로 따르고 있다. -
대한불교진각종 대한불교진각종 종지, 종요, 종풍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6
대한불교진각종 종지, 종요, 종풍-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6
종지
진각종은 시방삼세에 하나로 계시는 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을 교주(敎主)로 하고 부처와 종조의 정전심인(正傳心印)인 옴마니반메훔[六字心印]을 신행의 본존(本尊)으로 받들어 육자관행(六字觀行)으로 즉신성불(卽身成佛)하고 현세정화(現世淨化)함을 종지(宗旨)로 한다.
종요
진각종은 불법의 심수(心髓)인 밀교정신을 본지로 하고 밀교의 법맥을 심인(心印)으로 전수한 회당대종사의 자증교설(自證敎說)을 종지로 삼아서 교법을 세우고 종문을 열어서 시대에 맞는 교화이념과 방편을 펴는 불교종단이다.
종풍
진각성존 회당 대종사의 무진서원에 귀명하여 육자진언을 신행의 본존으로 받들고 사교이상(事敎二相)을 겸비하여 즉신성불의 바른 길을 여는 밀교의 가르침을 전하며 현세정화를 실천하는 승속동행의 종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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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진각종 대한불교진각종 개종 이념과 배경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6
대한불교진각종 개종 이념과 배경-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6
진각종의 개종이념은 밀교중흥, 생활불교, 현세정화, 심인구현이다.
밀교중흥
한반도에 밀교가 전래된 것은 신라 선덕여왕 4(635)년이다. 그후 조선 초기까지 크게 흥황하며 민중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우리의 문화유산 속에는 이렇게 융성한 밀교문화가 배어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접어들어서 숭유배불정책의 회오리 속에 점차 쇠하게 됐다. 이후 진각성존 회당대종조께서 불교의 흥왕을 위해서는 생활불교, 실천불교인 밀교를 중흥시켜야 한다고 판단하시며 밀교종단으로서의 진각종을 개종하셨다.
생활불교
불교는 자기반성과 자기비판으로 정도를 걸어가게 하는 실제적 가르침이다. 정도는 상구보리(上求普提), 하화중생(下化衆生)으로 형상화되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이 생활화되면 하화중생하는 것이고, 생활자체가 불교가 되는 것이 상구보리이다. 진각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로 이를 구현한다.
현세정화
불교는 원래 이 세간과 떨어진 가르침이 아니므로, 세간이 더러우면 이를 정화하는 것이 그 본지이고, 특히 밀교에서 이에 앞장서야 한다. 진각종은 현세정화를 성불의 바탕으로 삼는다.
심인구현
불심인(佛心印)은 말이나 글로써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심인은 대지혜의 종자이며, 삼매왕(三昧王)이다. 이 심인의 구현없이 <밀교중흥, 생활불교, 현세정화>의 성취 또한 멀 수 밖에 없다.
개종배경
오늘날 인류는 급속한 과학문명의 발달로 물질적 풍요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적 풍요 속에서 탐심(貪心), 진심(嗔心), 치심(癡心)의 치성으로 인한 정신적 빈곤현상이 날로 심각해지고 살도음(殺盜淫)의 범죄자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인류의 미래가 위협받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때에는 물질과 정신을 함께 발전시켜야 만족한 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역사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진각종은 정신문화를 선도할 방편으로 우주의 보편적 진리이며 인간의 구체적 생활실천법인 불교를 시대에 맞는 새로운 실천불교로 계승 발전시키고자 한다. 그래서 온 우주에 충만하여 법계에 상주불변하는 우주진리[법신불]의 비밀한 경지를 내 마음에서 체험으로 증득하여 즉신성불코자 하는 밀교의 교리를 바탕으로 1947년 6월 14일 개종됐다.
이에 따라 진각종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가진다.
① 산중, 은둔불교에 대해 - 재가중심의 불교
② 형식적 의례중심의 불교에 대해 - 실천 위주의 불교
③ 형식적 계율중심의 불교에 대해 - 깨달음 중심의 불교
④ 불상중심의 장엄불교에 대해 - 무상진리(無相眞理) 중심의 불교
⑤ 내세 극락, 현세 기복불교에 대해 - 현세정화의 불교
⑥ 사찰 안의 불교에 대해 - 시시불공(時時佛供) 처처불공(處處佛供)의 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