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이황과 두향테마공원 > 충청북도 Chungcheongbuk-do, 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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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이황과 두향테마공원

충북 단양군 단성면 월악로 3823

충북 단양군 단성면 장회리 17-9 장회나루휴게소

3823, Worak-ro, Danseong-myeon, Danyang-gun, Chungcheongbuk-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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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8

퇴계 이황 두향이 사랑이야기 공원
"저 매화분에 물을 주어라"


퇴계 선생은 매화를 끔직히도 사랑했다. 평소에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 매선(梅仙)으로 의인화하여 부르면서 인격체로 대접할 정도로 매화를 사랑하였던 퇴계는 생전에 우리 역사상 단 한권 밖에 없는 ‘매화시첩(梅花詩帖)’이란 시집도 편집하였다.
그래서 매화를 노래한 詩가 1백수가 넘는다. 이렇게 놀랄 만큼 큰 집념으로 매화를 사랑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매화의 선비적인 고고한 품성을 받든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또 다른 한 가지 이유는 바로 단양군수 시절에 만났던 나이어린 관기 두향 때문이기도 하다.
퇴계선생이 단양군수로 부임한 것은 48세 때고 두향은 18세였다.
 
두향은 나이는 어리지만 시문과 가야금에 능했고 특히 매화와 난초를 좋아하여 품성마저 아름답고 재기가 넘쳤으며 매화를 분에 심어서 기르는 재주도 있었다.
두향은 퇴계선생의 고매한 인품에 매료되어 흠모하며 사모의 정을 떨칠 수가 없었고, 처신이 고고하고 깨끗한 퇴계선생 역시 두향의 총명과 재능을 인정하여 서로 시와 음율을 논하고 산수를 거닐며 잠시나마 인생의 여유를 가지게 되지만, 부인 허 씨와 사별 한 후 또 후취 권 씨와 둘째 아들까지 잇달아 잃게 되었던 퇴계선생의 빈 가슴에 한 떨기 설중매와 같았던 두향이기에 차갑게만 대할 수 없었기로 날이 갈수록 은근하게 깊어지고만 사랑은 겨우 10개월 만에 끝나게 되었다.
갑자기 퇴계선생이 경상도 풍기군수로 옮겨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두향으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듯 한 변고가 아닐 수 없었다.
짧은 인연 뒤에 찾아온 갑작스런 이별은 두향이에겐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다.
 
이별을 앞둔 마지막 날 밤, 밤은 깊었으나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퇴계선생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울 뿐이다.” 며 두향의 치마폭에 붓을 들어 死別己呑聲 生別常惻惻)“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다.” 라고 썼다.
 두향이 말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그리고는 시 한 수를 썼다.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 들고 슬피 울재 어느 듯 술 다 하고 님 마저 가는 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이날 밤의 이별은 결국 너무나 긴 이별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1570년 퇴계선생이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1年 동안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
퇴계선생을 떠나보낸 뒤 두향은 부화(富華)한 시중잡배와 어울리는 것은 존경하고 사랑했던 어른에게 누가 된다고 생각하여 지방관에게 간곡한 청을 올려 관기에서 빠져 나와 퇴계선생과 자주 갔던 남한강가 강선대에 움막을 치고 평생 선생을 그리며 살았다.

퇴계선생이 단양을 떠날 때 그의 짐 속엔 두향이가 건네 준 수석(壽石) 2개와 매화분(梅花盆) 하나가 있었다.
이때부터 퇴계는 평생을 이 매화를 가까이 두고 사랑을 쏟았다.
두향을 보듯 매화를 곁에 두고 애지중지했다. 선생이 병환이 깊어 행색이 몹시 초췌하게 되자 매화에게 그 모습을 보이기 민망 스럽다는 생각으로 매화 화분을 다른 방으로 옮기게 했다.

퇴계선생은 그 뒤 여러 관직을 역임했고, 말년엔 안동에 서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은거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 퇴계의 마지막 한 마디는 “매화에 물을 주거라.” 다.
이 한마디는 선생께서 매화 같은 두향을 잊지 않은 채 언제나 가슴 가득 담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퇴계선생의 부음을 들은 두향은 4일을 걸어서 안동을 찾았다. 한 사람이 죽어서야 드디어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었다.
이별 후 살아서 한 번도 만나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가슴속 깊이 품고 사모하며 살았던 두 사람 이었다.
다시 단양으로 돌아온 두향은 결국 남한강에 몸을 던져 선생에 대한 고절(高節)한 절개를 지켰다.
퇴계선생을 향한 두향의 사랑은 목숨과도 바꿀 절박하고 준엄한 사랑이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매화향기 만큼이나 그윽했지만 그 애절함에는 가슴이 시리고 저리지 않을 수 없다.

그윽 하면서도 간절한 사랑의 메시지로 두향이 퇴계 선생에게 건네 주었던 매화는 퇴계선생 사후 도산서원 뜰에 심어져 자라다 오래전에 고사 하였지만 대를 잇고 이어 지금은 그 손자 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다고 전해진다.

두향 무덤
두향은 조선중기 단양 두항마을 태생으로 특히 거문고에 능하고 매화를 좋아했으며, 단양군수를 지낸 퇴계 이황선생을 사모하여 수절종신하였다.
퇴계 선생을 그리워하다 죽은 후 마을 사람들은 유언에 따라 두향의 초당이 있던 강선대 옆에 무덤을 마련해 주었다.
세월이 흘러 수몰로 무덤이 물에 잠기게 되자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묘비석은 1988년 4월 단성향토문화연구회에서 건립하였던 것을 단양군의 지원을 받아 2012년 10월 단양문화보존회에서 다시 세워 넋을 기리고 있다.

강선대
단양의 서쪽에 위치한 말목산 아래에 있는 큰 바위로 주변이 워낙 아름답고 좋아서 신선이 내려오는 곳이라는 의미이며, 높이는 약 15m로 층대를 이루고 그 위에 백여 명이 낮아서 놀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하단부가 물에 잠겨 있을 때가 많지만 담수량이 줄어들면 넓은 바위가 드러난다.
특히 이곳은 퇴계 이황선생이 단양군수로 재임 중에 기녀 두향과 더불어 노닐고 시를 읊고 풍류와 인생을 논하였다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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