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사 大院寺
대원사(大院寺)는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997번지 모악산(母岳山) 동쪽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절은 삼국통일 직전인 660년(백제 의자왕 20)에 대원(大原), 일승(一乘), 심정(心正) 등의 고승이 함께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이들은 고구려에서 백제로 귀화한 열반종의 개산조(開山祖) 보덕(普德)의 11제자들로서, 스승으로부터 열반종의 교리를 익힌 뒤 스승이 있는 고대산(孤大山, 혹은 高대山)에다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고대산은 곧 지금의 모악산 줄기인 듯하다. 그리고 당시의 절 이름은 대원사(大原寺)였다. 이 같은 내용은 『삼국유사』 권제3 「보장봉로 보덕이암(寶欌奉老 普德移唵)」조에 보인다.
그 뒤 고려시대인 1130년(인종 8)에 원명국사(圓明國師) 징엄(澄儼,1090~1141) 스님이 중창했는데. 이때를 절의 창건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어서 1374(공민왕 23)에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이 중창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1415년(태종 15)에 처음으로 중창된 듯하다. 이에 대한 정학한 기록은 없으나, 절에서 전하기로는 1948년의 대웅전 복원 불사당시 지붕의 기와 가운데 ‘영락을미년(永樂乙未年)’이라고 새겨진 막새기와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렇게 추정하고 있다. 절은 그 뒤 1597년(선조 30)의 정유재란 때 대부분 건물이 불타 없어졌으나, 1606년(선조 39) 진묵 일옥(震黙一玉, 1562~1633)스님이 다시 중창 하였다. 지묵 스님은 조선시대 중기의 유명한 고승으로서, 대원사는 이 때 대규모로 중창되면서 새로운 역사를 맞이하였다.
그 후 1733년(영조 9)에 동명 천조(東明千照) 스님이 중창하였다. 1886년(고종 23)에는 건봉사(乾鳳寺)에 있던 금곡 인오(錦谷仁旿) 스님과 함수산(咸水山) 스님이 중창불사를 이루었다. 스님은 대웅전을 중건하고 명부전을 수리하였으며, 칠성각을 새로 짓고 산내 암자인 내원암(內院唵)에 있던 염불당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1906년(광무 10) 절의 대중창주 진묵 대사의 진영을 봉안하였고, 1908년 칠성탱화를 새로 조성하였다. 또한 1918년 삼각산 화계사(華溪寺)에서 조성된 신중탱화를 옮겨 봉안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말에는 증산교(甑山敎)를 개창한 강일순(姜一淳, 1871~1909)이 이곳에 머무르며 도를 깨우쳤다고 한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1943년 영호 봉주(泳湖奉珠)스님이 요사를 새로 짓고, 1945년 명부전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이어서 1949년 덕운 재묵(德橒在黙) 스님이 대웅전을 중건하고 경내의 석축을 쌓았다. 그러나 1951년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염불당, 요사, 행랑 등 건물 3동이 불타 없어졌다.
전쟁 후 덕운 스님은 다시 중창불사를 발원하여 1959년에 요사를 새로 짓고 다음 해 칠성각을 중건하였으며, 1962년에 산신각을 지었다. 최근에는 1981년 봉운 운수(蓬橒運守) 스님이 다른 절터에 있던 오층석탑을 옮겨와 봉안하였고 「대원사 연혁비」를 세웠다. 그리고 1993년 칠성각을 헐고 그 자리에 요사를 지었으며, 이 해에 대웅전 뒤쪽에 지금 ‘글방’으로 부르는 건물을 지었다. 또한 1990년을 전후한 무렵에 장마로 산신각이 무너졌으므로 그보다 아래쪽에 산신각과 삼성각을 겸한 전각을 새로 지었다. 1997년에는 기존의 구 요사채를 헐고 대지를 정리한 이후 본래 위치보다 조금 뒤쪽에 심검당을 신축하였으며, 범종각도 새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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