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복사 興福寺
흥복사(興福寺)는 김제시 흥사동 256번지 승가산(僧伽山)에 자리 잡고 있다. 절은 평지가람이지만 주변과 경내의 울창한 수림(樹林)은 산사의 조용함에 비기는 시원함이 있다. 경내에는 잔디가 깔려 있어 흔히 생각하는 전통사찰과는 색다른 모습이다. 절은 650년(백제 의자왕 10) 고구려에서 온 보덕(普德) 스님이 창건했는데 당시의 절 이름은 승가사(僧伽寺)였다고 한다. 이 무렵 이 지역에는 도교(道敎)가 성행하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당시 고구려가 중국으로부터 도교를 도입해 한창 숭상하던 때였으므로 그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은 곧이어 불교 도량으로서의 기반을 닦아 많은 수행자들이 모여 법등을 밝혔다고 전한다.
창건 이후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은 전혀 전하지 않는다. 여러 차례의 중창이 있었겠지만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1597년(선조 30)의 정유재란으로 절은 폐허가 되었고, 1625년(인조 3) 김제에 살던 흥복(興福)이라는 사람이 중건하면서 다시 법등을 잇게 되었다. 흥복은 재가처사(在家處士)로서 깊은 신심을 지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부처님의 감응을 받아 절터에 극락전을 짓고 아미타불 도량으로 삼았다. 절 이름도 자신의 이름을 따서 흥복사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절은 개인의 원찰로 중창되었다.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조선 후기의 명필가였던 이삼만(李三晩 1770~1845)이 쓴 현판이 절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꾸준히 법등이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자취는 관음전 옆에 있는 석조미륵상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김제군지』에, ‘흥복사는 (읍의) 북쪽 1리에 있으며, 백산면 흥복리에 자리한다.’는 기록이 있어 17세기에 중건된 이후 지금까지 계속해서 법등이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김제군지』는 1884년 무렵에 작성된 읍지를 토대로 하여 일제강점기인 1910~1945년 사이에 편찬되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1943년 법운(法雲) 스님이 극락전과 관음전 등을 중수하면서 사세가 확장되었다. 그리고 1946년 관음전에 후불탱화를 봉안하였다. 1954년 불교정화운동 때는 흥복사가 임시로 조계종의 전북종무원으로 지정되어 약 1년간 교단의 행정본부가 되기도 하였다. 1961년 전 총무원장 월주(月珠) 스님이 금산사와 흥복사의 주지를 겸임하면서 전라북도 지역 불교정화 운동의 핵심도량이 되었다. 이어서 1965년 전강(田岡) 스님을 강사로 하여 선원(禪院)을 개설하는 등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1969년 도영 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이래 1979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중창불사가 이어져 절의 면모가 일신되었다. 산을 깎아 높은 위치에 대웅전과 삼성각을 신축하였고, 옛터에는 미륵전, 사천왕상 그리고 각 법당에 11폭의 탱화를 조성하는 등 크고 작은 불사가 이어졌다. 중창이 마무리된 후 1980년 사적비를 세웠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가람의 모습은 본래의 터에서 산 쪽으로 올라간 곳에 대웅전, 삼성각이 들어섰고, 옛터에는 미륵전, 사천왕문, 요사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관음전과 정혜원을 보수하였으며 각 법당에 11폭의 탱화를 봉안하였다.
최근에는 1994년 절의 중수에 공이 컸던 시주자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시주공덕비를 세웠다. 1996년 시멘트 요사를 헐고 새롭게 지금의 요사를 확장 신축하였으며 별도의 식당 건물도 지었다. 머지않아 절에는 관음전이 새로 들어설 예정이다. 이밖에도 흥복사는 조경 사업을 통해 주위의 환경과 어울리는 조화로운 가람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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