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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석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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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충민사길 52-21

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 1830 석천사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9교구 화엄사 말사

주지 : 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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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이다.
1195년(고려 명종 25) 지눌(知訥)이 창건하였다.
절 이름은 근처 큰 바위 밑에서 나오는 석천(石泉)이라는 샘에서 유래한다.
1601년(조선 선조 34) 옥형(玉炯)과 자운(慈雲)이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옥형과 자운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도운 승장(僧將)들로서, 자운은 충무공이 지휘하던 배에 올라 공을 세웠고 옥형은 군량미를 조달했다고 한다.
이순신이 전사하자 자운은 백미 6백 석으로 노량에서 수륙재를 지냈고 여수충민사(麗水忠愍嗣)에서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한편 옥형은 충민사 곁에 초당을 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다 입적했다고 한다.
자운과 옥형이 이 절을 창건했다는 설은 이 때 지은 초당을 근거로 하는데, 당시에는 이미 이 절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의승당·종각·석천사(石泉舍)·요사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내부에 삼세불상과 동종이 있으며, 삼세후불·칠성·신중·지장보살 등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1985년에 주지 진만(眞晩)이 중창하였다. 종각은 1983년, 요사는 1995년 새로 지은 것이다.
한편 의승당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의승(義僧)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1990년대 들어 진옥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불사를 많이 일으켰으며, 사회복지 사업에도 힘을 기울여 여수 시내에 문수복지관을 세우고 노인놀이마당과 물리치료실·청소년 기능교실·어린이집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절 근처에 있는 충민사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충무공 사당으로 사적 제381호로 지정되었다.

석천사는 현재 대웅전과 3동의 요사채 그리고 종각 등으로 구성된 아담한 암자이다.
그러나 400여 년 전부터 이 지역에서 항상 시민들과 함께 역할을 해왔으며 현재에도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신도 수는 약 3000 여 세대이며, 월요법회, 화요법회, 수요법회, 기초교리법회, 초하루법회 등 경전을 중심으로 법회를 하고 있으며, 어린이 법회는 시작을 하여 진행 중이다.
그리고 복지사업은 (복지법인)노인전문요양시설 하얀연꽃 , 여수시 노인복지관, 시니어 클럽, 문수종합사회복지관, 방과 후 공부방, 자활후견기관, 연꽃 어린이집, 옹달샘 어린이집 등이 있으며, 또한 환경운동연합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여수불교의 역사

석천사는 임진왜란 (1592 ~ 1598) 이 끝난 이듬해인 1599년에 지어졌으니 약 411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록을 갖고 있지 못하여 구체적이고 세세한 사실을 알 수 없으나 다행히도 창건 당시와 이후 300여 년간을 좌수영과 함께한 기록들이 단편적으로 있어서 대략의 역사를 엮는데는 어렵지 않다.
여수 불교의 유입은 여수 바다 건너 동쪽편 남해에는 한국불교의 공식 전래(372年 고구려) 보다 수십 년 앞선 가야의 김수로왕과 허 왕후에 의해 전래된 남해 보리암을 지척에 두고 있어서 좀더 오랜 역사를 가진 것 같지만 기록이나 유적이 없으며, 향일암의 연기설화도 역사로서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서 기록에 의한 여수 불교의 공식유입은 흥국사 사적기( 1691년 편찬)의 기록에 의지하는 것이 합당한 것 같다.

사적기에는 송광사에서 수선결사를 한 불일보조국사께서 송광사에 법석을 펼치기 전 대구 팔공산 거조암 결사 시절 결사터를 찾다가 현재 금오도 (남면)에 머물게 됐고 이어서 금오도의 뱃길인 돌산 군내 은적암을 창건 하셨고, 이어 1195년 (고려 명종 25년) 흥국사를 창건하신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흥국사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다시 송광사로 법석을 옮겼으며 흥국사는 암자 정도로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1560년경 보조의 법손인 법수(法修)대사에 의해 조그맣게 중창되면서 임란을 맞이했고, 임란 때엔 이 충무공과 함께 전라좌도의 구례, 광주, 곡성, 고흥, 남해, 순천, 여수 등지에서 1593년에 30여명의 스님네들이 흥국사에 집결하여 임란에 참전하면서 불교의 여수 유입이 구체화 되었다.
임란 전체의 전투참전을 통해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건지고자 했던 의지와 원력이 담긴 호국의 불교가 시작 되였다 하겠다.
임란이 끝난 후에는 전후 복구사업과 일본의 재침을 막기 위한 노력으로 돌아가신 고혼들을 위해 종교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 수륙 고혼 천도재를 300여 년 동안 지냈으며 현재도 계속 이어내려가고 있다.
또한 재침을 막기 위해서는 승군 300여명을 계속 유지 시켰으며, 흥국사를 중심으로 석천사, 한산사, 향일암, 은적암, 용문사, 만흥사 등지에서 최고 많을 때엔 627명의 승려가 운집해서 국가의 방어와 호국에 대한 기원 그리고 수행과 불법을 펴는데 주력해왔다.

석천사의 역사

석천사도 이러한 여수불교 역사속의 한 부분이다.
임란 당시 참전했던 300여명의 의승 수군들 중에 승군 대장역을 하셨던 옥형, 자운의 두 분 스님이 계셨는데 자운스님은 화엄사가 출가 본사로 서산대사와 부휴선사와도 교분이 두터웠으며, 당시 선. 교양 승과 가운데 교과의 최고인 화엄대선의 과거에 합격한 뛰어난 학승 이였다.
임란 발생과 함게 조카 상좌인 벽암각성(뒤에 승군팔도총섭으로 남한산성을 구축한 분)과 함께 해전에 참전했으며, 옥형스님의 기록은 거의 없어 알 수 없으나 자운스님과는 속가의 형제분이라는 불가의 전언이나 또한 석천사에서 옥형과 자운스님의 영정을 모시고 3월 중순 정일에 제사지낸 연유 등을 보면 매우 가까운 분이였음에 틀림없는 것 같다.
이 장군이 관음포에서 돌아가시고 시신이 아산으로 옮겨간 후 전우로서 같이했던 지방의 의병들은 몸과 마음을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하였는데 이때 이 지방의 향교 교리인 박대복 선생 또한 의병으로 참전했다가 공이 돌아가신 후 본인이 혼자라도 제향을 드리고 싶어 평소 장군이 재세시에 자주 오르내리시면서 石泉의 석간수를 마시던 인연 있는 곳에 공의 사당을 모시고 제사지냈는데, 옥형 스님 역시 충무공을 잊지 못하고 사당 곁에 당우를 짓고 80평생을 사당에 제향 올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석천사에서 생을 마감한 것 같다.

옥형스님의 꿈에 충무공이 나타나면 바다에 변고가 있어서 공이 돌아가셨어도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지극했으면 그렇겠느냐고 기록되여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종교에 가까울 정도로 공과 병사, 승려, 백성들이 한마음 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후에도 300여년 (1896년까지) 동안 석천사 주지가 충민사 수호승장으로 소임을 살면서 석천사와 충민사는 유림과 불교도 모두가 서로 구분하지 않고 살았던 모범이다.
승유배불 정책을 중앙에서 펼칠 때도 이곳은 모든 관, 민, 유, 불이 모두 합심했던 화합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현재에도 일반 시민들은 충민사라는 이름을 모두 알지만 충민사가 절인 것으로 알고 있고, 석천사는 대부분 모르지만 석천사, 충민사가 같은 절인 것으로 알고 있는 것도 충민사 사당을 수호한 사람들이 300여 년 동안 스님 이였으며, 유림 또한 유불을 가리지 않고 전쟁 때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한마음이 됐던 진실의 마음을 놓치지 않고 살았던 모습들을 느낄 수 있다.


석천사의 근대내력

전라좌수영이 해체되고 (1896) 다시 한일합병이 되면서 일체치하로 들어가자 일본 제국주의는 이충무공과 조선수군, 그리고 의병의 활동근거를 없애기 위해 흥국사 승군도 그쯤에서 해체되고, 수륙재도 중단됐으며 충민사 제향도 드리지 못하게 해서 절에 오는 신도로 가장해서 새벽에 몰래 제사를 지냈으며, 석천사에 모셔졌던 옥형. 자운스님의 영정마저도 경찰서장이 압수해서 가져가고 난 뒤, 해방이 되며 아직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와중에 석천사 역시 충민사와 함께 쇠락하기 시작했으며 충민사 역시 1601년에 국가 현액 사당으로 충무공을 모시는 첫번째 사당 이였기 때문에 총독부에서 사당을 없애기 위해 토지 매입을 시도했으나 유림들과 스님들이 공동명의를 함으로써 겨우 유지할 수 있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으며, 1978년도 박정희 정권시절 이충무공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을 때 충민사를 성역화 한다는 지방의 생각들과 맞물려 충민사를 성역화 하면서 중요한 역사인 석천사와 충민사는 화합의 호국호민임을 알지 못하고 석천사를 제외시키고 충민사만 성역화하면서 역사적 사실의 왜곡과 사적을 많이 훼손해 버렸다.
이를테면 사당의 신축은 옛 모습을 알 수 없게 했고, 300년 동안 석천사 주지가 유림들과 재향을 행했던 요사도 없앴으며, 대웅전 앞에 관리실을 짓는 등 많은 손실이 있었다.
그러면서 석천사 일주문도 없어졌으며, 요사채도 원 위치에 있지 못하고 형상변경이 됐고, 대웅전도 25여 년 전에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에는 새로이 지은 법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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