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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한불교보문종 보문사 보문사 만불전(萬佛殿)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1
    보문사 만불전(萬佛殿)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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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불전은 동원정사 5층에 조성된 당우이다.

    동원정사는 1977년 은영스님이 지었는데, 1996년 서울특별시 도시계획사업으로 현재의 위치에 다시 준공되었다. 이때 ‘1인 1원불(願佛) 모시기 운동’의 하나로 만불전을 조성하게 되었다.

    안에는 삼존불(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봉안하였고, 불단 뒤로는 만분의 불상이 자리한다. 서울 안 사찰 중에는 이곳처럼 만불이 조성된 경우가 드물어 만불전의 의미는 더욱 깊다고 하겠다.

  2. 대한불교보문종 보문사 보문사 극락전(極樂殿)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1
    보문사 극락전(極樂殿)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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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은영스님 조성하신 극락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안에는 아미타불과 후불탱화가 봉안되어있다.

    ‘극락전 위패‘ 봉안 전각으로, 보문사에 일정기간동안 위패를 봉안하고 참배할 수 있도록 조성된 전각이다.

  3. 대한불교보문종 보문사 보문사 시왕전(十王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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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6-11
    보문사 시왕전(十王殿)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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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왕전은 사람이 죽은 뒤에 죄와 복을 다스리는 열 분의 대왕님을 모신 당우이다.

    1970년에 조성된 시왕전에는 지장보살상과 청동 부조(浮彫)로 모신 지장탱, 시왕탱이 좌우벽면을 감싸고 있다. 각 시왕도 하단에는 지옥장면도 도설화 되있어 권선징악(勸善懲惡)과 연기법을 그림으로 법문하고 있다. 법당 출입구쪽에는 부조로 금강역사(인왕상) 사자(使者)가 조성되어 명부(冥府)세계를 표현하였다.

    시왕사상은 본래 인도의 토속신앙이었던 염라대왕이 중국의시왕신앙과 융화되어 이루어진 것인데 시왕탱화는 바로 그 시왕을 불화의 형식으로 그린 것이다.

  4. 대한불교보문종 보문사 보문사 관음전(觀音殿)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1
    보문사 관음전(觀音殿)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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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락보전 위쪽 언덕에 위치한 관음전에는 여인의 인자하고 정숙한 모습의 관세음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후불탱화인 관음탱화에는 관세음보살님으로 좌측에 남순동자 우측에 해상용왕이 관세음보살을 좌우보처로 보좌하고 있다.

    관음탱화는 서울시 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극락보전의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와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그 그림의 섬세 수려함이 정말 아름답다.

  5. 대한불교보문종 보문사 보문사 선불장(選佛場)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1
    보문사 선불장(選佛場)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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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년 조성된 선불장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상하2층 205평의 건물이다.

    선불장이란 장래의 부처가 될 수행자들이 모여 공부하는 곳으로써 “부처를 선발하는 자리“란 뜻으로 주로 강당이나 요사로 사용된다.

    보문사 선불장은 건축당시에는 아래층에는 ‘보문강원(普門講院)’을 윗층에는 수선안거를 위한 ‘선방(禪房)’으로 사용하였다. 건축당시 보문사 대중은 200여명에 달했는데 이 곳 선불장에서 아침, 저녁 발우공양을 했으며 조석예불 후에는 전 대중이 참선정진을 했던 이름 그대로 선불장이었다. 특히, 절 안의 대소사(大小事)나 대중공사 등을 행했던 큰방 역할을 하던 곳이다. 지금의 선불장은 1층은 종단 유지법인인 재단법인 사무국과 보문종 총무원, 보문사 종무소가 위치하고 있고, 2층 법당은 대중 법회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법당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주존(主尊)으로 모시고 신중탱화와 칠성탱화를 봉안하여 인등 을 밝히고 있다.

  6. 대한불교보문종 보문사 보문사 묘승전(妙勝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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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6-11
    보문사 묘승전(妙勝殿)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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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승전은 팔작지붕으로 정면 4칸, 옆면 2칸의 건물이다.

    근대의 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지금의 묘승전은 법준스님이 중건하였다. 안에는 1867년에 조성된 지장탱화(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0호)가 봉안되어 있고, 비교적 상세한 화기(畵紀)도 함께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보문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묘승전의 지장탱화는 구도에서 매우 독특한 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화면 중앙에 커다란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지장삼존을 묘사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커다란 원 좌우에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그리고 위, 아래 두 줄로 시왕을 나누어 배치하였고, 위와 아래 네 곳에는 석류를 비록한 지물을 지닌 동자, 동녀를 각각 배치하였으며, 아래쪽에는 판관, 녹사, 우두와 마두, 나찰, 사자 등이 역시 위, 아래 두 줄로 대칭을 이루며 서있다.

    색상은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으나, 인상적인 것은 화면 중앙에 지장삼존불을 감싸고 있는 전신광의 역할을 하는 커다란 원 안에 칠해진 금니이다.

    이 탱화는 조선후기 지장탱화 가운데서 구도의 특이함이나 시왕의 복색 등 여러 면에서 특색이 있는 작품으로 주목된다. 또한 1916년에 조성된 신중탱화 그 외에 현왕탱화, 그리고 근대의 화승(畫僧)인 금어(金魚) 만봉(萬奉)스님이 그리신 아미타 후불탱화, 감굴탱화가 봉안되어있다.

  7. 대한불교보문종 보문사 보문사 보암당 은영큰스님 공덕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1
    보문사 보암당 은영큰스님 공덕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1

    보문사하면 은영스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보문사뿐 아니라 역대 비구니계에 큰스님이다.

    일제 강점기에 절이 황폐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광복과 함께 주지로 취임하면서 30여 년간을 불사의 중흥에 전심하여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은영스님은 석굴암을 비롯한 많은 건축물을 새롭게 짓고, 보문종이라는 독립된 종단을 설립함으로써 비구니스님들만의 고유한 수행 풍토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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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대한불교보문종 보문사 보문사 석굴암 조성일지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1
    보문사 석굴암 조성일지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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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적 1,000평
    건평 65평


    조성에 소요된 재료 및 석공, 노무자 동원수

    석재(화강암) 2,400톤
    철재 25톤
    이중 돔용 시멘트 10,000포

    기타 공구 및 목재

    석조각사 및 석공 연 45,000명
    노무자 동원수 연 52,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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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성일정
    착공연원일 1970.8.1
    기공식 1971.2.26
    1차 상량식 1971.7.8
    본존 안치 1971.9.30
    2차 상량식 1971.11.11
    제불 점안식 1972.2.15
    준공식 1972.6.16

    총감독 및 본존불 조각 한봉덕
    원형조각 제작 박재소 전국광
    도면정리 한상일 이영철 이미자
    석공 총감독 김왈옥
    조각공 이상전 박홍식 신극열 김운기 박정규 나기동
    가공(보조석공) 김지수 정봉규 최이오 김조안 김중겸 박찬수 김양섭 김봉식
    조립공 고재현 박순관 나기남
    석재 운반 책임 심양섭
    인양 책임 전경일

  9. 대한불교보문종 보문사 보문사 석굴암 본존불과 제자들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1
    보문사 석굴암 본존불과 제자들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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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가모니불
    석굴암은 연화장계 만다라, 즉 태장계 만다라를 표현한 것이다. 만다라는 원래 일정한 지면을 구획하여 평탄하게 단을 만들어 부처님과 보살을 모시고 예배, 공양하던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석굴의 석불전을 의미한다.
    만다라에는 연화장계 만다라와 금강계 만다라 두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 연화장계 만다라로 표현한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신인 비로자나 부처님의 정토, 즉 공덕이 무량하고 광대 장엄한 이상 세계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본존불의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항마촉지인’ 이란 석가모니가 성도할 때 마귀를 항복시키고서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순간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수인이 아니더라도 좌우보처로 문수, 보현보살이 추앙하고 있으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십대 큰 제자들이 병풍처럼 함께 모셔져 있어 본존불이 석가모니불임을 알 수 있으며, 매일 참배하는 이들이 수행과 정진의 힘을 놓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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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석천왕
    제석은 인드라 즉 뇌신(雷神)을 뜻한다.
    수미산 지리학에 의하면 수미산 꼭대기에 도리천이라는 하늘이 있는데 이 하늘은 33성으로 나뉘어져 있고 그 가운데 가장 중앙의 성인 선견성(善見城)의 주신이 바로 제석천왕이다.
    이 천왕은 나머지 32천을 통어하며, 분노와 질투에 찬 아수라를 징벌하여 세상을 잘 통치할 뿐 아니라 제천들과 더불어 부처님께 법을 권청해서 세상에 선법이 베풀어지게 하고, 불법에 귀의하는 이들을 잘 보호하여 준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성도하시고 나서 자신의 깨달음이 사바세계의 사람들에게는 너무 어려워 이해할 이가 아무도 없음을 슬퍼하여 열반에 드시려 하였다. 그때 제석천왕이 홀연히 나타나 세상에는 근기가 성숙한 사람들이 있어서 석존의 깨달음을 금방 이해하고 깨달음을 얻을 이가 많다고 세 번을 간청 드려 석존께서는 열반을 미루고 녹야원 가서 다섯 비구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기로 하신 유명한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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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수보살
    불교의 대승보살로서 문수사리라 음역하며 묘수, 묘덕, 묘길상이라 번역한다.
    즉 문수나 만수는 묘(妙)의 뜻이고 사리나 실리는 길상의 뜻이다.
    이 보살은 보현보살과 같이 석가모니 부처님, 즉 비로자나 부처님의 교화를 돕기 위하여 일시적인 시현으로 보살의 위치에 있다고 한다. 이미 오래 전 세상에서 성불해서 용존상불이라고도 하며 또는 대신불, 신선불이라고도 한다. 또 미래에 성불해서는 보견여래라 부른다.
    또는 현재 북방의 상희세계에 계신 환희장마니보적여래라고 이름 하는데 이 부처님의 명호를 들으면 네 가지 중죄가 없어진다고 한다. 중국의 상서성 오대산에는 만보살과 함께 있는데 그 산이 이 문수보살의 정토라 한다. 이 보살은 흔히 사자를 타고 있는 상을 하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입상으로 연화대 위에 서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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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난존자
    아난존자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원래는 아난타라고 불렀는데 줄여서 아난이라 한다.
    아난존자는 부처님의 사촌 동생으로 가비라성의 석가 종족이며 부처님이 성도하시던 때 출생했다고 한다.
    8세에 출가하였으며, 세간의 많은 유혹이 있었으나 지조가 굳어 수행을 잘 하였다고 한다. 아난은 당시 어렸어도 총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착실하게 수행을 하여 여러 제자들 중에서 뽑혀 부처님의 친근한 시자가 되었다.
    또한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경전 결집에서 가섭과 더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기억이 총명하고 지혜가 명철하였으므로 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다문제일이라 부처님께 직접 명명을 받았다. 또 부처님의 이모인 마하파자파티와 여인들을 출가시켜 승단에 가입하게 하는 데에도 아난의 공이 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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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훌라존자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자로 계실 때 출가하여 도를 성취하고자 했으나 이 아이가 태어나 출가의 길에 장애됨을 탄식하여 이름을 라훌라라고 지었다고 한다.
    라훌라는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뒤에 출가하여 제자가 되었는데 아라한이 된 이후로 자신의 모든 행적을 아무도 모르게 행하여 부처님으로부터 밀행제일이라 명명되었다. 밀행이란 면밀한 행으로서 불법 수행에만 힘쓰는 행업을 말한다.
    라훌라의 출가는 승단에 비구가 아닌 십 세 미만의 사미가 출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아난존자와 비슷한 나이였으므로 부처님을 아버지로 둔 존자의 고심과 수행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을지 새삼 존자의 위업에 고개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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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바리존자
    우바리존자는 왕궁의 이발사 출신으로 왕족의 자제들이 머리를 깎고 출가하는데 자신 같은 천민도 출가하면 똑같은 사문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자신이 머리를 깎아주던 왕족보다 먼저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어 선배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우바리 존자는 계율을 지키고 잘 아는 데 누구보다 뛰어났으므로 부처님이 계율을 지킴에 있어 우바리보다 뛰어난 사문은 없으므로 지계제일이라 명명 받은 십대제자 중에 한 분이다.
    부처님의 재세시에나 열반하신 후에나 계율을 지킴에 존자를 따를 이가 없어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뒤에 제1차 경전 결집 때 계율을 결집하는 큰일을 해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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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율존자
    아나율존자는 정반왕의 셋째 동생인 감로반왕의 아들로 부처님과는 사촌이 된다.
    많은 왕족들과 한꺼번에 출가하여 수행하다가 하루는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시는데 꾸벅꾸벅 졸다가 부처님께 심하게 꾸중을 듣고는 결심한 바가 있어 그날부터 잠을 자지 않았는데 밤낮으로 눈을 뜨고 있다가 마침내는 실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실명한 후로도 정진을 쉬지 않아 아라한과를 얻어 삼천대천세계를 자신의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훤하게 보게 되어 부처님께서 천안제일 아나율이라고 명명하셨다고 한다. 실명한 후에도 자신의 옷을 스스로 꿰매는 것을 보고는 부처님께서 대신 꿰매주시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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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전연존자
    가전연존자는 남인도 사람으로 무참외도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무참외도들은 ‘죄와 복은 자재천이 주는 것이므로 사람에게는 죄와 복이 따로 없다. 만일 사람이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마음에 부끄럽지 않으면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 며 참회 없는 행위를 거침없이 하는 무리중의 일원이었다. 이러한 외도생활에 몰두해 있다가 어느 날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는 바로 출가하여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한다.
    부처님께 귀의한 뒤로는 누가 되었든지 툭하면 부처님께 찾아와 논쟁을 벌였는데, 그런 외도들과 논쟁해서 한 번도 진 적이 없을 정도로 논리가 뛰어나게 정연해서 부처님께서 “가전연이 논의가 제일이다” 라고 명명하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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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일면관세음보살
    십일면 관세음보살은 머리 위에 열하나의 얼굴이 있는 관세음으로서 통설에 의해면 전후좌우의 10면은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인 10지를 나타내고 맨 위의 얼굴은 불과를 나타낸 것으로 11품류의 무명을 끊고 불과를 얻게 되는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런데 십일면 관세음보살은 준제, 준제불모 또는 칠구지 불모로 불리기도 하며 연화부의 제존의 생모로서 광대무변한 덕을 구비하신 분이라 전한다. 원래 관세음보살은 구원겁 전에 관세음부처님에게서 발심해서 여약삼매(如約三昧)를 얻고 이근원통(耳根圓通)을 성취하신 분이다. 이러한 관음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는데 6관음 또는 7관음으로도 표현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11관음을 표현함은 보문시현의 의미를 불상에 표현한 것이다.
    십일면이 다 머리 위에 있게 된 것은 자비심이며 지혜와 깨달음의 영장으로서의 머리를 암시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십일면 중 앞3면은 자비상, 오른쪽 3얼굴은 분노의 상, 왼쪽 3얼굴은 이익의 상, 정상의 1얼굴은 여래상, 정면은 불소불노의 상으로서 선악이 둘이 아닌 것을 보인 것이라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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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루나존자
    부루나의 아버지는 카필라성 정반왕의 국사였다고 한다.
    부루나는 뛰어난 지혜가 있어 베다에 정통하였고 모든 학문에 박식하였으며 바라문의 전통에 따라 출가하여 20세가 되던 해에 통달하지 않은 학문이 없었다. 그는 교만해져서 성질이 난폭하였고, 늘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이라고 말해 왔다. 부루나의 소문을 들으신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는 무엇이든지 안다고 말하지 않는다. 진실로 다 아는 사람은 태양이 온 세상을 밝히듯 한다. 그러나 조금 아는 것이 있다고 해서 스스로 교만해져 남들을 업신여기는 것은 장님이 등불을 든 것과 같아 남의 앞은 밝혀주나 제 갈 길은 모른다.”
    이러한 소리를 들은 부루나는 부끄러움을 느껴 부처님께 참회하고 귀의하여 비구가 되었다. 원래 아는 것이 많았으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깨달아 법을 설하는데 걸림이 없었다. 후에 남은 생 동안 사람들의 성품이 거칠다고 알려진 소냐국에 불법을 전하였으며 그가 포교한 사람이 9만 9천명에 이르렀다. 부처님으로부터 ‘법명여래’라는 이름으로 미래에 부처님이 될 것을 수기 받았으며, 수많은 제자 중에 설법제일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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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보리존자
    부처님께서 생모인 마야부인을 위해 도리천에 설법하러 올라가셨다가 돌아오실 때 많은 사람들이 서로 먼저 뵙기 위해 모여 들었다.
    그때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을 맞이하러 가려고 일어서다가 문득 “내가 지금 맞이하려는 세존의 형상은 어떤 것인가? 마음의 작용을 수반하는 감각기관인 눈이나 귀, 코, 혀, 몸, 의미를 가리키는 것일까? 아니면 세존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피나 살, 뼈를 말하는 것일까? 세존의 형상은 눈이나 귀, 뼈나 피 등을 의지해서 있다. 그러한 것들이 모두 조화함으로써 세존이 있다. 서로 의지해 있으면서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성립시키는 것은 바로 공이다. 오오,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실로 참다운 법에 귀의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수보리는 공의 무상한 이치를 깨달아 진실로 세존을 맞이하는 사람이 되었고, 목련존자와 더불어 신통제일로 칭송 받던 연화색 비구니가 칠보를 갖추어 놓고 제일 앞에서 부처님께 “돌아오셨습니까, 세존이시여!”하고 인사를 드리자 부처님께서는 “나를 처음으로 맞이한 사람은 그대가 아니라 수보리이니라. 그는 모든 법이 ‘공’하다는 진리를 관하여 나의 법신을 최초로 본 사람이니라. 실로 부처를 숭배하고자 한다면 법신을 숭배해야 할 것이다.”라고 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수보리는 다른 제자들에 비해 비교적 늦게 부처님께 귀의하였으나 열심히 정진해서 부처님의 최초의 법신을 본 제자가 되었고, 부처님께서 공의 이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이라는 의미에서 ‘해공제일’이라는 칭호를 명명하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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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섭존자
    가섭존자는 마하카사파 장자의 외아들로 태어나 왕족이나 다름없는 세상의 부귀와 명예를 누리고 살았다.
    어느 날 부모님들의 결혼하라는 성화를 이기지 못해 황금으로 미인상을 만들어 똑같은 여인이 있다면 결혼하겠다고 했는데 부모님이 너무나 닮은 여인을 찾아내 결혼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결혼했을 뿐 출가하여 도를 닦고자 하는 뜻이 통하여, 한 방에서 지냈지만 함께 잠자리에 들지 않는 생활을 12년간이나 계속하다가 부모님들이 세상을 떠나자 부인과 함께 출가하였다.
    가섭존자는 부드럽고 편안하고 안락한 것을 일부러 멀리하는 두타행을 닦아 부처님께서는 “나의 성문 제자 가운데 두타행에 있어서는 가섭이 제일이니 그대는 미래세에 광명여래로서 성불하게 되리라.”고 사부대중 앞에서 미래불로 수기하셨다. 하루는 파사익왕이 부처님께 진귀한 연꽃을 공양하였는데 부처님께서는 그 꽃을 받아 드신 채 바라만 보시고 아무 말도 없으셨다. 대중이 어리둥절해 있었는데 가섭존자만이 빙그레 웃자 그때 부처님께서는 “나의 정법안장과 열반묘심을 가섭 그대에게 전해 주노라”라고 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수행이 미숙한 비구들이 미숙한 견해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가섭존자는 정법이 왜곡되고 악법이 다투어 일어날 것을 걱정하여 장로 비구 오백 명과 함께 필발라굴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모으는 제1차 경전결집을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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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건련존자
    목건련존자는 중인도 왕사성 근방의 구리촌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사리불존자와 함께 산자야에게서 수행하다가 녹야원 5비구중의 한 사람인 아설시를 만나 설법을 듣고 사리불과 함께 늦게 불법에 귀의하였다.
    “성문제자 목건련이여! 그대는 비구 250계를 지킴에 있어 단단하기가 돌과도 같았다. 그러나 법화경을 듣고 나서는 방편인 250계를 버려서 정직하게 궁극의 법을 익혔다. 이제 그대에게는 ‘다라마발전단향불’이라는 명호로 부처가 됨을 증명하였노라” 하셨을 정도로 수행을 해서 부처님의 제자들 중에 신통력이 뛰어난 제자가 되었다.
    어느 날 목건련존자가 삼매에 들어 있는데, 어디선가 “콜리타! 난 너무 배가 고프다”하는 소리가 들려서 관하여 보니 어머니가 배가 고픈 귀신인 아귀가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얼른 밥을 빌어다 어머니에게 드렸더니 그 밥이 불길로 변해 버렸고, 그 불을 끄려고 물을 붓자 더 큰불로 변하였다. 부처님께 여쭈어 보았더니 “그대 어머니 청제부인은 인색하고 탐욕스러운 잘못을 저질렀기에 아귀도에 떨어졌다. 스스로 지은 죄를 스스로 받는다고 하는 자업자득의 도리는 그대 혼자의 힘으로 어찌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대가 어머니를 부르는 효행이 천지를 감동시킨다고 해도 구제할 수 없다. 다만 스님들이 백일동안의 정진을 끝내고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수행을 점검하는 하안거 해제일인 우란분재일에 밥과 다섯 가지 과일 등으로 청정한 계를 지키고 수행하는 시방의 승가에게 공양한다면 그 공덕은 광대하여 위로 7대에 이르는 부모의 고통을 벗어나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유래로 음력 7월15일 하안거 해제일에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우란분회(백중)가 널리 행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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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리불존자
    사리불존자는 마갈타왕국 왕사성 북쪽 나라촌에서 태어났다.
    절친한 친구인 목건련 존자와 함께 외도 산자야에게 함께 수행 중이었는데, 어느 날 라자그리하에서 앗사지라고 하는 한 탁발승이 작법에 의거해서 비굴하지도 잘난 체하지도 않고 단정하며 위의를 갖춘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을까, 궁금해서 탁발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당신은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으며 그 스승은 무엇을 주장하고 무엇을 설합니까?”
    “나의 스승은 샤캬족에서 출가한 위대한 수행자 고타마 싯타르타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고통인데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고집멸도 사제를 바로 알아야 하며 수행방법으로는 팔정도와 육바라밀을 닦아야한다고 설해 주십니다.” 순간 사리불존자의 가슴속에 ‘아! 이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찾아 다녔던 법이다’ 라는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스쳐 그동안의 회의와 불안과 고뇌의 고통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가슴속에 차오르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목련과 제자 250명을 설득하여 함께 출가하였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시고 설법하신지 42년 되던 해에 법화경을 설하셨는데 두 번째인 방편품에 ‘부처가 이 세상에 출현한 궁극적인 목적은 만인에게 갖추어져 있는 부처의 성품을 열어서 보여주고 깨닫게 하여 성불의 경지에 들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오직 지혜제일인 사리불존자만이 이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으므로 부처님께서는 “나의 성문 제자 중에 지혜제일인 사리불은 미래세에 희광여래라는 이름의 부처가 되리라”하고 수기해 주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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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현보살
    문수보살과 함께 석가모니부처님의 협시보살이다.
    문수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왼쪽에서 부처님의 지덕(智德)과 체덕(體德)을 맡아 모시고 있고, 보현보살은 부처의 오른쪽에서 이덕(理德)과 행덕(行德)을 맡아 모시고 있다.
    또 문수보살과 같이 일체보살의 상수가 되고 언제나 부처님이 중생 제도하시는 일을 돕는다. 뿐만 아니라 중생들의 목숨을 연장해주는 미덕을 가졌으므로 보현연명보살이라고도 하고 연명보살이라고도 한다. 주로 깨달음과 중생구제를 향한 실천행의 의지, 즉 행원을 상징하는 보살로 십행원이 있다. 대개 흰 코끼리를 탄 좌상을 하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연화대에 선 입상으로 표현했다.
    이미 과거에 성불해서 일곱 부처님의 스승이 되었으나 이 사바세계에 권보살(權菩薩)로 나타나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든 교화를 돕는 보살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보현보살 십행원
    모든 부처님께 예경하며공덕을 찬탄하며널리 공덕을 닦으며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업을 참회하며, 다른 사람의 공덕을 함께 기뻐하며부처님과 선지식(善知識)께 설법해 주시기를 청하며부처님, 선지식께 세상에 오래 머물기를 청하며부처님이 닦으신 모든 행을 따라 배우며항상 중생을 수순(隨順)하며모든 공덕을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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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범천왕
    대범천왕은 수미산 지리학에 의하면 색계 초선천의 화려하고 장엄한 고루 거각에 있으면서 우리가 사는 이 사바세계를 통치하는 왕이라고 한다.
    색계라는 하늘은 우리 인간의 욕심으로 이루어진 욕의 세상을 떠나서 한층 우수하게 승화된 세계이다. 이 세계는 인간적인 욕심은 전혀 없으나 색 즉, 형식만은 있다고 한다. 색계는 4종으로 나뉘어 있는데 초선천, 이선천, 삼선천, 사선천이라 한다. 이 중의 처음 하늘인 초선천을 주재하는 이가 바로 대범천이다.
    세계가 공겁에 이루었다가 다시 생길 때에 이 범천의 위력에 의하여 천지 만물이 창조되므로 우주 만물의 창조신으로서 제석천왕과 더불어 부처님과 제자들을 보호하고 수호하는 임무를 자청하는 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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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천왕
    수미산의 북방을 수호하며 사천왕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신이다.
    고대 인도 신화에서는 암흑계를 다스리는 악령의 수장이나 바다와 강의 신으로도 등장하고, 마하바라타에는 재산과 보물을 관장라는 쿠베라(Kuvera)라는 신으로도 나온다. 쿠베라는 창조주 브라마의 손자로, 2만년을 고행한 끝에 북방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히말라야의 카일라스산에서 나찰과 야차 등을 거느리고 살아 야차의 왕 또는 나찰의 왕으로도 불린다.
    수미산 북방 수정타에 머무르면서 불국토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킨다. 『법화의소』 에 따르면 항상 부처가 계신 곳을 수호하며 불법을 빠짐없이 듣는다 해서 다문천(多聞天)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많은 재물을 베풀어서 시재천(施財天)이라고도 부른다. 『금광명최승왕경』 에는 항상 제악을 소멸시키고 여의주로 신통력을 발휘하여 중생이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겠다는 서원을 세웠다는 내용이 전한다.
    사찰에서는 사천왕문에 모시며 더러는 불보살의 후불탱화에도 등장한다. 다른 천왕들처럼 갑옷을 입었으나 환하게 웃는 얼굴에 비파를 연주하고 있다. 신라시대에는 진귀한 보물이 가득찬 보탑을 들고 있었다. 탱화로 표현될 때는 왼쪽에는 자신의 아내인 길상천녀, 오른쪽에는 선이사동자를 협시로 거느리고 주변에는 나찰과 야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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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장천왕
    남방 증장천왕은 수미산 중턱의 남쪽에 있는 ‘유리’ 라는 지방을 관장하는 천왕이다.
    증장천왕은 그 권속으로 쿰반다(Kumbhanda)와 프레타(Preta)를 부리며 쿰반다는 배가 매우 부른 모습으로 표현되어 욕심이 매우 많은 아귀라고 하며 ‘비사사’ 처럼 사람의 정기를 빨아먹는 귀신이라고 한다. 프레타는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부리는 아귀를 의미한다.
    『다라니집경』에 ‘왼손을 펴서 칼을 잡고 오른손에는 창을 잡는다’ 고 하며 『일자불정륜경』에는 ‘오른손을 허리에 대고 왼손에 창을 잡는다’ 고 하고 『약사여래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 에는 ‘칼을 잡는다’ 고 한다.
    증장천왕은 자기나 남의 선한 근원을 증장하게 하므로 이러한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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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목천왕
    광목천왕은 수미산의 제4층 서방 백은수에 주처(住處)가 있는 천왕이다.
    범어로는 ‘비루팍쉬(virupaksha)’라고 하며, 그 뜻은 이상한 눈 추한 눈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추목(醜目), 악안(惡眼)이라고도 하며 눈과 몸의 다른 부분에 여러 가지 빛이 있어서 추목이라 번역하지만 반드시 추하다는 뜻은 아니다.
    광목천왕은 고대 인도에서 시바 신의 화신으로서 세 개의 눈을 가진데서 유래하며 그 권속으로 여러 종류의 용과 부단나(富單那) 등이 있다. 부단나란 냄새나는 귀신인 아귀를 말하며 때로는 열병을 앓게 하는 귀신이라고도 한다. 용은 하늘에서 구름, 비, 천둥 등을 부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라니집경』에는 ‘왼손에는 칼 또는 창을 오른손에 붉은 밧줄을 들거나 손가락을 새끼처럼 꼬아든다’고 하며, 『일자불정륜경』에는 ‘왼손에 창을 오른손에 금강저를 든다’고 하고 『약사여래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 에는 ‘밧줄을 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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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국천왕
    동방 지국천왕의 범어 이름은 ‘드리다라쉬트(Dhritarashtra)’이다.
    동방의 수호신으로 수미산 제4층에서 거주하는데 그 궁전을 현상전이라고도 한다. 지국천왕은 원래 지국 건파왕인데 국토를 지키고 중생을 안락하게 하며 동방에서 참된 도리를 파괴하고 선한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을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 그 권속으로 간다르바, 비사사라는 귀신을 부리는데, ‘간바르바’라는 귀신은 향기를 먹고 사는 귀신이며 ‘비사사’라는 귀신은 사람의 정기를 뺏는 탐정귀(貪精鬼)이다.
    『다라니집경』에 의하면, 동방지국천왕은 ‘왼손에 팔을 내려 칼을 잡고 오른손을 구부려 보주(寶株)를 쥔다’고 하고 『일자불정륜경』에 의하면, ‘왼손에는 창, 오른손은 손바닥을 올려드는 형상’이라고 하며, 『약사여래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 중 ‘염소의궤공양법’에는 ‘비파(琵琶)를 든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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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역사
    석굴암 정문 4천왕 좌우 곁에 있는 입상의 역사는 연화장계 만다라의 수호신이다.
    흔히 금강저를 들고 무엇을 위하는 듯이 서 있으나 여기의 두 역사는 금강저를 드는 대신 연화거인의 결인을 하고 태장계 만다라(비로자나부처님의 정토)를 지켜보는 모습을 하고 있다.
    *좌측 금강역사
    이 역사는 밀적금강 이라한다. 부처님의 비밀한 사적(事迹)을 알고 5백야차신을 거느리면서 천불의 법을 수호한다. 또 눈으로 중생을 본다 해서 길상목이라고도 하며 신통의 불꽃이 은밀하게 중생 앞에 나타난다.
    *우측 금강역사
    이 역사는 나라연금강이라 한다. 인왕존은 이 역사의 다른 이름이며 나라연은 견고라 번역한다. 그의 힘은 코끼리 힘의 100만 배나 된다는 천상역사 같이 뛰어나고 또 부처님의 여러 가지 묘색상의 불가괴함을 보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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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보탑
    석가여래의 교설에 대한 여실성을 실증하는 것이 다보탑이다.
    다보여래는 동방보정세계의 교주로서 다보여래가 보살로서 수행하실 때에 “내가 성불하여 열반한 뒤에 동방세계에서 법화경을 교설하는 곳은 어디를 막론하고 나의 보탑이 용출하여 그 설법을 증명하리라” 라고 하셨다. 그래서 영산회상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교설하실 때에도 그 탑이 솟아나와 부처님 설법의 여실함을 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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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우보살
    화엄경 53 선지식 중 천신, 지신
    53선지식 중 천신, 지신 등을 상징하는 보살로 머리에는 관을 쓰고 얼굴은 오른쪽으로 향했으며 귀에는 귀걸이, 목에는 영락을 걸고 있다. 오른손엔 보패를 세워 들었으며 왼손은 손바닥을 밑으로 하여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또 왼발은 좌대 밖으로 나오게 반가부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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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우보살
    화엄경 53 선지식 중 바수밀녀 등
    화엄경 53선지식 중 바수밀녀, 우파제, 또는 석종녀 등 여인을 상징하는 보살들로 머리에는 여관을 쓰고 왼손은 무릎위에 세워 턱을 괴었으며 오른손으로는 좌대를 짚은 여상이다.
    왼쪽은 얼굴을 갸우뚱 기울었으며 오른발을 꿇고 왼발은 세워 앉은 자세에 귀에는 귀걸이, 목에는 영락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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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우보살
    화엄경 53 선지식 중 동자사
    동자사(童子師)와 같은 선우를 상징하는 보살로 머리에는 관을 쓰고 정면을 바라보며 전가부좌한 상태이다. 왼손은 명주를 받쳐 들었으며 오른손은 결인하여 수직으로 무릎위에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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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취보살
    화엄경의 십회향보살들을 대표하여 정취보살을 조성하였다.
    보살관의 정면에 입불상을 정제하였고, 귀에는 귀걸이, 목에는 영락을 걸었다. 왼손 손바닥은 위로 하여 무릎 위에 놓았고 오른손은 팔꿈치를 평행으로 결인형의 손목만을 위로 향해 들었다. 얼굴은 우향이며 가부좌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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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우보살
    화엄경 53 선지식 중 바라문
    화엄경 53선지식 중에서 바라문, 외도의 스승 등 선우를 상징하는 보살로 머리에는 관 대신 수건을 쓰고, 수행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왼손에는 보패를 들고 가슴에 대었으며 오른손과 무릎은 수행의(修行衣)를 덮여 보이지 않는다. 얼굴은 왼쪽을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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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우보살
    화엄경 53선지식 중 비구 비구니
    비구, 비구니의 선우를 상징하는 보살로 정면을 향했으며 관을 쓰지 않은 비구, 비구니의 모습이다. 명주를 받쳐 든 왼손은 무릎위에 놓였으며 오른손은 결인형으로 가슴에 대었는데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하여 전가부좌한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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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륵보살
    ‘불망념 지장엄장 해탈’의 법문을 교설하시는 미륵보살님의 모습으로 머리에는 보살관을 썼으며 정면에 입상의 여래상을 정대하고 정면을 향해 전가좌부한 모습이다.
    오른손은 수직으로 아래로 향하여 무릎위에 놓았고 왼손은 가슴 높이에서 명주를 받쳐 들고 있다. 귀에는 귀걸이 목에는 영락을 걸고 있다.
    『미륵상생경 - 관미륵보살 상생도솔천경』 에 의하면 미륵보살은 인도의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받으며 수도하였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은 뒤 도솔천에 올라가 현재 천인들을 위해서 설법하고 있다고 하는데 도솔천은 지족(知足)이라고 번역되는 하늘로서 지나친 욕심이나 번뇌 망상으로 인해 방황이 없는 세계요,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무리들이 모여 사는 하늘나라이다. 이 미륵보살은 석가모니불 입멸 후 56억 7천만년이 되는 때 사바세계에 태어나 화림원(華林園)안의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여 3회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구제하게 되는데 이는 불교의 대승적 자비사상의 근본이며, 석가모니불께서 장차 성불할 것을 증명하신 미래불 이자 당래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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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우보살
    화엄경 53 선지식 중 장자, 거사, 왕 등
    장자, 거사, 선인, 왕 등 선우를 상징하는 보살로 머리에는 관을 썼으며 귀에는 귀걸이 목에는 영락을 걸고 오른쪽으로 얼굴을 돌린 자세를 하고 있다.
    왼손엔 금강저를 왼쪽 무릎에 닿을 듯이 받쳐 들었으며, 오른손은 결인형으로 팔꿈치를 오른쪽으로 무릎위에 세워 들었는데 마치 오른쪽 귀를 잡으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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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가탑
    석가모니 부처님 재세시에 법륜인 화엄과 법회가 설해지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보여래의 다보탑이 출현한 것처럼 석가탑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부를 나투는 것이다.
    큰비구 1,25명을 비롯한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등 사부대중이 모여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부처님이 법화경과 화엄경을 설하는 것이 모든 여래가 그랬던 것처럼 여법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석가탑이 출현함으로써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여여한 여래의 살림살이를 여법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10. 대한불교보문종 보문사 보문사 석굴암 만든이들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1
    보문사 석굴암 만든이들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1

    긍탄스님
    비구니의 영원한 어머니 긍탄스님


    서울 성북구 보문동에 위치한 탑골승방 보문사를 총본산으로 하고 있는 대한불교 보문종은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비구니스님들로만 구성된 종단이다. 보문종에서는 현재 설월당 긍탄스님을 창종주로 모시고 있는데, 일찍이 현실자각과 의식있는 비구니들을 양성하여 그들을 중심으로 불교중흥에 앞장설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마련 하고자 했던 긍탄스님의 원력이 비구니 종단의 창종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스님은 7세의 어린나이로 출가해 한 평생 생활 그 자체로써 정진수행의 면모를 보여주어 지금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스님의 유업을 받들어 오늘도 여법한 비구니 종단으로서 사회사업에 앞장서고 있는 보문종은 현재 40여 개 말사에 200여명의 비구니 스님과 5만 여명의 신도를 확보 하고 있다. 교세로 볼 때 그리 크다고 할 수 있는 종단은 아니나, 종도간의 우애와 화합이 가장 잘되고 있는 종단으로 손꼽는데 누구도 주저 하지 않는다.

    한평생 고고한 삶

    최초로 비구니 승단의 위상을 정립한 후 세납 96세의 일기로 고고한 삶의 여정을 마친 긍탄스님은 1885년 4월15일 서울 성동구 왕십리에서 부친 경주 이씨 춘근과 모친 순흥 안씨 3남매중 고명딸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이 돌아가시자 1891년 8월 모친에 의해 세장(世長)스님을 은사로 보문사에서 출가하게 되니, 나이 겨우 7세였다. 그 후 모친께서도 강원도 철원 보개산 석개암으로 출가해 『금강경』 과 『관음경』을 하루 한편씩 독송하는 한편 문수 지장, 관음주력과 여러 곳의 선방에서 화두 정진에 몰두해 당대의 고승 한암스님으로 부터 칭송을 받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따라서 모친의 본분사가 스님의 수행에 많은 지침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이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모친의 영향에 힘입은 스님은 18세 되던 해인 1902년 금강산 장안사 주지 벽하스님께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03년 동학사에서 사집과 수료 후 1910년 만화스님께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동학사에서 경학을 마친 스님은 1912년 보문사 주지로 부임해 33년간 재직하는 동안 정(定)과 혜(慧)를 닦는데 소홀함이 없었다. 스님은 평소 다음과 같은 『초발심자경문』 의 경구를 인용하며 후학을 경책했다.
    3일동안 닦은 마음 천년의 보배요, 백 년 동안 탐한 욕심은 하루아침의 티끌이라.

    三日修心 千載寶 白年貪物 一朝塵 (삼일수심 천재보 백년탐물 일조진)
    스님은 또 “중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후학들을 향한 스님의 이러한 채찍질은 다름 아닌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오대산 상원사 한암스님 회상에서 거듭 세 철을 나는 것을 시작으로 범어사 대성암, 화엄사 구충암, 수덕사 견성암, 서울 정릉 대원사 등지와 칠불암, 수정암, 윤필암, 부도암 등 전국 각지의 선방에서 안거 수행을 멈추지 않아 당시 칭찬을 아끼는 이가 없었다.
    파거불행노인불수 (坡車不行老人不修)

    당시 스님의 도반이 한국불교계 최초의 비구니 선풍을 일으킨 묘리 법희 스님과 뒤를 이어 비구니 선풍을 진작시킨 만성스님 등이었다는 사실은 스님의 구도열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도 후학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하나의 일화는 오늘날 비구 스님들 못지 않는 수행 면모로 비구니 선풍을 진작시킬 수 있었던 본보기가 되고 있다.

    6·25 당시 보문사에서 묘리 법희스님과 함께 수행정진에 몰두하고 있던 어느 날, 인민군의 습격을 받았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사건이었던지라 대중은 황급히 몸을 감추었고, 경내는 긴장감이 감돌던 터였다. 그러나 두 스님은 추호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선삼매에 들어간 두 비구니스님들의 얼굴은 오히려 차분히 가라 앉아 있었다. 이를 바라보던 인민군들은 감탄해 마지 않다가 조용히 경내를 떠났다. 적도 감화시킬 수 있는 금강과 같은 수행력, 그것이 두 비구니 스님이 후학에게 남겨준 납자의 참모습이었다.

    70세에 이르러서는 피부병을 얻게 되었는데, 스님의 구도정진의 틈새를 피부병이라고 치고 들어 올 수 없는 없었다. 『금강경』과 「츰부다라니」 를 독송한 지 3년만에 완쾌를 보이는 위신력을 시현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만년에 이르러서는 ‘수레가 부숴 지면 갈 수가 없듯이 노년에 이르면 수행하기가 어렵다. (坡車不行老人不修)’ 며 젊었을 때 부지런히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제자들을 일깨워 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정혜겸수와 불교의식의 전수

    노스님은 비구스님에 버금갈 만큼 뛰어 났으며, 얼굴이 광채를 발하여 거기서 풍기는 기품만 보고서도 신도들의 환희심은 대단했다. 독특한 수행기풍으로 비구들의 의식을 일깨우며 한국불교의 한 축을 형성했던 스님에 대한 손상좌 법준스님의 회고담이다. 법준스님이 회상하는 노스님은 한마디로 비구스님 못지 않는 장대한 기품을 자랑했다. 그러나 남달리 자상한 성품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법준스님은 부언한다.

    스님이 보문사 주지로 재직 중이던 어느 날 맏상좌인 은영스님이 탁발을 나간 후 늦은 저녁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은 일이 있었다. 상좌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스님은 저녁도 잊은 채 걱정이 태산이었다. 비구니라 할지라도 여자의 몸이라서 항시 조심할 수밖에 없었던 터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이 있은 후 은영스님은 “은사스님이 저토록 걱정하시니 내 어찌 탁발을 나갈 수 있겠느냐”며 그로부터 탁발행각을 그만 두게 되었다. 무릇 『부모은중경』 에 자식을 멀리 보내고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연상하게 하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스님은 또 정혜겸수는 물론 몸소 실천불교에 앞장 선 이면에 전통 불교의식에도 남다른 점이 있었다. 나이 11세 때 이미 범패, 바라, 나비 등 불교의식 절차에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일가견을 이루었다고 하니,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탄인도(坦引導)스님’이었다.
    대한불교 보문종의 탄생

    오늘날 비구니 승단의 총림으로서 그 위상을 정립한 보문사의 사격(寺格)은 사실상 스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데 종도들은 이의를 달지 않는다. 1912년 보문사 주지로 부임하던 시절 당시 절은 말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절에서 잡일을 해오던 ‘청운’이라는 자가 자기 절의 땅문서를 훔쳐 그걸 판돈까지 다 써버린 일이 발생한 직후 였던지라, 가람을 다시 일으키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스님은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도 없는 처지 였다. 그 길로 탁발에 나선 것도 업연이라 생각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치하에서 일본 식량공급지로 전락하였고 인심이 흉흉하여 불안한 시기 였다. 때문에 양 어깨에 바랑자국이 나고 발꿈치가 불어 트도록 탁발을 다녀야 겨우 한 되박 정도의 시주밖에 얻을 수 없었다. 그렇게 3년 동안 탁발한 결실로 겨우 절논 아홉 마지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보문사 중창의 시작이었다. 1917년에 『화엄경』 을 인간(印刊)하여 대웅전에 봉안 했으며, 만세루(지금은 소실됨) 수축과 관음전 신축, 대웅전 보수와 대종주조 등 호구책도 어려운 시기에 지금의 보문사의 기초를 닦아 놓았던 것이다.

    보문사에서 비구니 수행가풍을 떨치며 30여 년간 가람수호에 진력해 오던 스님은 비구니들의 보다 더 응집된 수행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급기야 세계적으로 유일한 비구니 승단의 결집이 이뤄지고, 하나의 여법한 종단으로서 그 면모를 일신하니 ‘대한불교 보문종’의 창종이다. 1972년 4월 20일의 일이었다. 스님이 초대종정으로 추대되었고, 오늘날까지 비구니 승단의 정신적 지주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평생을 비구니의 위상을 정립하고자 혼신을 다했던 스님은 1980년 8월 27일 허상을 거두고 홀연히 열반에 들었다. 세수 96세요 법랍89세였다. 문도들이 스님을 기리고자 유물전을 마련했으나, 애석 하게도 1백일 탈상 후 전기누전으로 전소 되고 말았다. 기이 한 것은 유물전에 모셔진 불상이나 탱화 등은 전혀 불길이 닿지 않은 채 오로지 스님의 유물만 뜬구름 없어지듯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손상좌 법준 스님은 “노스님께서는 평소 상을 내는 것을 싫어하셨는데, 아마도 상에 얽매이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고자 몸소 자신의 물건만을 가져가신 것이 아닌가” 라고 말씀하셨다 한다.

    은영스님
    고해에 우뚝 선 원력보살 은영스님 - 보문사 중창 사회복지 원력의 상징


    보암당(寶菴堂) 은영(恩榮)스님은 세계적으로 유일한 비구니 종단 ‘대한불교 보문종’의 창종 주역이요, 비구니계의 무한한 능력 발휘의 상징인 대비구니이다. 정법을 위하여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 자부심과 참다운 신심으로 생활불교의 이상실현에 앞장섰던 금세기 대표적인 원력비구니로서, 단지 비구니이기 때문에 받은 숱한 서러움을 사찰 중건 불사의 원력과 사회복지사업의 의지로 키워내 오늘날 법륜상전의 묘력이 되고 있는 은영스님은 그대로 한 송이 연꽃이 되어 지금도 뭇 중생들의 귀의처가 되고 있다.
    스님은 1910년 정월 15일 충남 대덕군 북면 미호리에서 부친 송헌대와 모친 박상품화 사이의 넷째딸로 태어났다. 아이가 걸작으로 생겼다 하여 걸례(傑禮)라 이름 했다가 부처님의 은혜를 영광스럽게 하고 삼보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영광된 자리를 마련할 사람이라는 뜻에서 ‘은영’이라고 불렀다.

    1918년 어머니를 따라 계룡산 동학사로 출가하니, 나이 아홉 살이었다. 동학사는 오래 전부터 비구니 스님들의 학문도량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에 스님이 이 절에 왔을 때에도 50여 명의 학인들은 대은(大隱)스님의 강의를 듣고 있었다.
    보문사 출신으로 수년 전부터 이곳에 와서 대교과를 이수하고 있던 긍탄스님을 만나게 되는 인연을 접하게 된 것도 여기서다. 긍탄스님은 일곱 살에 입산하여 수행도덕이 풍만하고 덕행이 원만하여 많은 대중으로부터 공경을 받고 있던 터였다. 스님은 긍탄스님을 은사로 정하고 비구니로서의 행습을 익히기 위한 청규생활에 들어갔다. 출가 이듬해인 1919년에는 만호강백과 대은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긍탄스님과의 인연

    다시 1년 후인 1920년에 이미 주지로 가 있던 긍탄스님을 따라 서울 보문사로 올라왔다. 보문사로 올라와 보니 절에서 일하던 ‘청운’이라는 자가 사찰 소유의 전답을 다 팔아 챙겨 달아난 후였다. 결국 동냥중이 되어버린 은사스님과 함께 이집 저집을 다니며 탁발로 연명하다시피 하였으며, 밥장사와 나물장사까지 할 수 밖에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각고의 고생 끝에 모은 돈과 당시 보문사 근처에 살던 지혜룡, 지운양 부자의 시주금 등에 힘입어 요사채를 신축하고 기울어져가는 대웅전을 중창할 수 있었다. 나이 겨우 19세 때의 일이었다. 법당 중수와 더불어 사중의 고민거리였던 지금의 선불장 뒤에 위치하고 있던 산내묘소 이전문제 등을 해결하고 하니 천하가 통일된 것만 같았다. 그러다보니 떠나갔던 대중이 다시 모여들어 40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당시 개화물결을 타고 변화되어 가는 사회현상을 바라보던 스님은 마침내 1936년에 보문사에 불교강원을 개설하고, 전북 전주 정혜사 영명스님을 초대 강사로 초빙했다. 이 강원개설은 비구니 대강백 수옥스님을 비롯해 대저술가 안진호스님과 이종익 박사, 이섭 교수, 황영진 선생 등이 차례로 강사직을 역임하며 수많은 비구니 학인들을 배출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보문종의 전 종정 일조 스님과 혜안 스님이 보문사로 온 시기도 이즈음이다. 이에 앞서 스님은 1935년 나이 26세 때 서울 원통사에서 백용성 화상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시자원(施慈園) 설립
    보문사에 불교강원을 개설한 스님은 1941년 사집과를 졸업한 후 삼각산 청룡암의 주지로 부임했다. 1943년에는 대교과를 졸업하고 그해 보문사에서 대덕법계위에 당호를 ‘보암(寶菴)’이라 하였다. 1945년에 이르러 급기야 보문사 주지로 취임하면서 오늘날 보문종의 기초를 쌓는 서원 다섯 가지를 세우게 된다.

    첫째, 대지를 매입하여 절 주변 환경을 정리하는 것이요.
    둘째, 절 경계를 이루는 담장을 쌓아 시비의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요.
    셋째, 구도의 정신을 바로 세우기 위한 건축불사를 통해 도량을 청정하게 장엄하는 일이요.
    넷째, 도제양성을 통해 불교의 생명을 잇는 것이요.
    다섯째, 복지사업을 통해 명실 공히 대자대비행을 실천하는 일이다.

    이 서원은 머지않아 이루어지게 된다. 스님은 우선적으로 삼성각 대지 3천여 평을 매입하여 앞서 잃었던 절 땅을 다시 확보했다. 또한 사찰경계를 낱낱이 측량하고 이후 13년에 걸쳐 붉은 벽돌로 6척 높이의 담장을 성처럼 쌓아 올렸다. 담을 쌓고 보니 도량이 가을 하늘처럼 드러났고, 시비의 염려는 저녁 연기처럼 사라졌다. ‘억척 비구니’로 불리 우게 된 까닭이었다.

    이렇듯 서원이 하나씩 이루어지면서 보문사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스님은 새로운 경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은사인 긍탄스님과 함께 불교전통음악인 범패를 배워 부처님의 덕을 찬탄하고 바라, 승무 등 불공의식을 여법히 전수, 계승하고자 함이었다. 탑골승방 보문사가 ‘재받이 스님들이 모인 장소’라는 별칭을 갖게 된 것도 여기서 연유한다. 봉원사, 백련사, 안정사 등 태고종 사찰에 비견 할 만큼 스님의 불교전통 전승의지는 불교의식을 대중화하고 특수화하여 보문사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물론이었다. 특히 스님은 옛 곡조가 든 우리말 법문인 ‘화청’을 잘하여 교단 내에서 이름을 드날리기도 하였다.

    그러한 와중에도 스님은 계속해서 대중을 위한 선방식 법회장소인 선불장을 완공했다. 천연수 개발과 상하 2층 지하 1층의 건물을 불연석으로 지었으며, 특히 지하실의 오밀조밀한 설계는 당시 건축계에 일대 혁명을 일으켜 일본과 중국 불교계에서도 설계도를 가져갈 정도였다. 1958년의 일이다.

    스님의 원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법보전을 지어 장경을 배치하고, 1962년 산령각 신축, 1969년 범종각 신축 및 대종주조, 1970년 극락전, 호지문, 시왕전, 보광전 등을 건립했다. 그러나 당시 조계종은 총무원이 비구, 대처승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순수한 사찰들까지도 모진 바람을 맞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보문사도 그러한 사찰중의 하나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비구, 대처 싸움에 휘말릴 것을 우려하여 독립적인 권리능력을 인정 받고 누구한테도 침해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재단법인 보문원’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1971년, 스님의 나이 62세 때였다.

    재단법인 보문원 이사장에 취임한 스님은 법인 첫 사업으로 시자원을 건립하여 한의원 시설 등 스님들의 노후대책과 외로운 노인들을 위한 경로사업의 길을 열었다. 보문종이 사회복지사업의 물꼬를 트면서 대중회향의 전범을 보이는 계기가 여기서 출발하게 된 것이었다.
    석굴암 세워 생활불교 구현

    호국충효, 남북통일, 국태민안 등을 기원한다는 명목으로 경주 석굴암을 보문사 도량에 그대로 재현시킨 ‘보문사 석굴암’은 스님의 원력의 총체로 일컬어지는 건축물이다. 소요된 석채 2천 4백 톤, 철재 25톤, 시멘트 1만포, 연인원 7만여 명이 동원된 이 건축불사는 보문종의 최대 불사로 손꼽힌다. 1970년 8월에 착공되어 1972년 6월에 준공을 한 건물이다.

    당시 불교관련 대석학들은 이 석굴암을 두고 찬사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병도 교수는 “가히 동양문화의 중흥을 위한 방향제시”라고 찬탄했으며, 김원룡 박사와 이선근 박사는 “한국 석불사업의 금자탑이자 조국통일의 심벌”이라고 칭송했다. 또 이기영 박사는 “생활불교의 이상을 재현하였다”고 평가했다.

    스님은 계속해서 1972년 4월 20일에 세계적으로 유일한 비구니 종단 ‘대한불교 보문종’을 창종, 등록하여 초대 종정에 은사인 긍탄스님을 추대하고 총무원장에는 자신이 취임하기에 이른다. 1977년에는 보문사 정문 앞에 지금의 은영유치원과 독서실이 있는 동원정사를 건립하고, 1979년에는 생애 마지막 불사가 된 석가여래 진신사리 묘보탑인 9층 석탑을 조성하면서 스님의 원력불사는 일단락되었다.

    보문사는 이로써 1만여 평의 대지 위에 큰법당, 노전, 삼성각, 산령각, 범종각, 극락전, 호지문, 시왕전, 보광전, 시자원, 석굴암, 관음전, 법보원, 9층석탑 등이 질서정연하게 그 위용을 드러냄으로써 보문시현하고 원력홍심한 관음보살의 대원력을 실천하는 도량이 되었다.
    보암의 덕은 이렇듯 구천에 높이 빛나고 은영의 혜(惠)는 사해에 드날렸음인데 무상이라 무아라, 일생 동안 한국불교를 위한 원력비구니인 은영스님은 애달프게도 1981년 음력 9월 11일 보문사에서 홀연히 사바의 연을 접고 만다. 세수 72세요 법랍 63세였다.
    은영스님 수시법어(隨時法語) - “바로 알고 바로 살라”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법에 의하여 만들어져 있다. 스님들이 없었다면 절이 없을 것이요, 죄인이 없다면 교도소가 없고 선한 일을 한 사람이 없다면 천당도 있을 수 없다. 남자가 있으니 여자가 있고 스승이 있으니 제자가 있고 국토가 있으니 인민이 있다. 의사는 환자를 의지하여 존재하고 자식은 부모를 의지하여 존재하고 나무는 땅을 의지하여 존재하니 이 세상 어떠한 것도 고립독존(孤立獨存)하는 것이 없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인연이 무엇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있느냐, 이것은 오직 한 마음이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몸이 움직여 갖가지 선악의 업이 지어진다. 그러므로 불도를 믿는 사람은 마땅히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 바른 마음으로 먹고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은 당연히 바른 과보를 받게 되고 비뚜러진 마음을 먹고 비뚜러진 생활을 하는 사람은 비뚜러진 과보를 받게 된다. 길을 낼 때 이 길을 바르게 내느냐 비뚜러지게 내느냐 하는 것은 설계사의 마음에 달려 있듯이 세상 모든 것은 사람의 설계에 의하여 만들어지게 된다.

    사람의 행동은 눈, 귀, 코, 혀, 몸, 뜻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의하여 나타난다. 눈으로 빛을 보고 청, 황, 적, 백을 가리는 마음, 귀로 소리를 듣고 강하고 부드러운 것을 가리는 마음, 코로 냄새 맡고 좋고 나쁨을 가리는 마음, 혀로 맛보고 짜고 싱거운 것을 가리는 마음, 몸으로 부딪쳐 보고 차고 더움을 가리는 마음, 뜻으로 헤아려 보고 분별 시비하는 마음, 이들 마음에 의하여 인생의 행로가 개척된다. 눈을 둥글둥글 원만하게 쓰는 사람은 보는 세계에 시비가 없고, 귀를 뾰족뾰족 광대하게 쓰는 사람은 곡직(曲直)의 세계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사람에게 여섯 개의 고리가 있으니 그 고리에 틈이 생기면 잠가놓은 쇳대가 흔적없이 빠져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게 된다고 하였다.

    눈도 둥글둥글, 귀도 둥글둥글, 코도 둥글둥글, 입도 둥글둥글, 몸도 둥글둥글, 생각도 둥글둥글 연잎처럼 맑고 깨끗하게 쓴다면 그 사람의 가는 길은 평탄하고 넓을 것이다. 8정도란 다른게 아니다. 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바르게 써서 스스로 인연의 올가미에 매이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나아가는 것이다.

    한봉덕 화백
    석굴암을 조성한 한봉덕 화백


    한화백은 1970년 7월 어느 날 오후 화실에서 낮잠을 자는데 큰 용 두 마리가 서로 엉기면서 입에서 불을 내뿜는 꿈을 꾸다가 놀라서 깼다고 한다. 잠시 후 봉원사 불화명장 만봉스님이 들려서 보문사 주지 은영스님이 봉원사에 조성한 석불을 보고 보문사에도 석불을 조성하고 싶다고 적당한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해서 들렸다고 하며 같이 가보자고 해서 보문사를 방문했다고 한다.

    은영스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은영스님이 “해봅시다!” 하는 약속도 아닌 한마디만 듣고 절을 나서서 집으로 돌아오다 뒤를 문득 돌아보니 일주문에 용두마리가 꿈에서 본 그대로 용트림을 하고 있어서 커다란 인연인가보다 싶어서 바로 경주 석굴암을 방문해서 본존불을 마음에도 새기고 스케치도하고 했다고 한다. 처음엔 본존불만 조성하려고 했으나 한화백이 경주 석굴암을 몇 번인가 다녀오면서 석굴암 전체를 조성하고픈 욕심이 생겨 은영스님을 졸라 지금의 석굴암이 완공되었다고 한다.
    한화백은 조성 후기 심정을 “석공 김대성이 석굴암을 조성하게 된 것은 부모에 대한 효성처럼 보이기만 하나 실은 호국안민의 뜻과 커다란 신심 때문이었음을 여긴다” 며 거대한 불사에 적은 자금과 날마다 노심초사하며 지낸 삼년여년의 시간은 자신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라고 적고 있다.

    한화백의 석굴암조성 인연 공덕으로 아미타회상에 왕생하셨으리라 믿으며 지금의 석굴암이 모든 불자들의 귀의처가 된 그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1923년 평북 영변출생
    조선일보사 주최 현대 작가 초대전 창립의원 및 공모전 심사위원 5회
    신상회 창립대표 간사 및 공모전 심사위원 7회
    서울에서 개인전 7회*국제 현대작가전 2회 출품 (동경 국립 미술관)
    동경 올림픽전 출품 (공보부 주관)
    사단법인 한국 청소년 미술 협회이사장
    봉원사 석불조성
    1997년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