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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룩스 불교 :: CYLOOKS 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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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문화연수원 템플스테이 한국문화연수원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8
    한국문화연수원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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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대한불교조계종 학림사 선맥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8
    선맥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8

    증조 석가모니

    1조 - 가섭 존자
    법이라는 본래 법은, 법도 없고 법이 아닌 것이 없음이니,
    어찌 한 법 가운데 법과 법 아닌 것이 있으랴.

    2조 – 아난존자
    본래 있음의 법을 전했더니,
    전한 뒤엔 없음의 법이라 하더라,
    제각기 깨달았으니, 깨달은 뒤엔 없음의 법도 없더라.

    3조 – 상나화수 존자
    법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며, 마음도 없고 법도 없도다.
    이 마음의 법을 말할 때에, 이 법은 마음의 법이 아니다.

    4조 – 우바국다 존자
    마음은 본래부터 마음이니, 본래 마음에는 법이 없도다.
    법도 있고 본래의 마음도 있으나,
    마음도 아니요 본래의 법도 아니다.

    5조 - 제다가 존자
    근본법과 그 마음을 통달하면,
    법도 없고 법 아닌 것도 없다네.
    깨달았다고 하면 깨닫지 않음과 같나니.
    마음의 법도 본래 없기 때문이라네.

    6조 - 미차가 존자
    마음은 실체가 없어 얻을 수 없나니,
    얻을 수 있다면 참된 법이 아니라네
    마음이 마음 아닌줄 깨달아 알면
    마음과 마음의 법을 알 수 있으리.

    7조 – 바수밀 존자
    마음은 허공 같아, 허공 같은 법을 보인다.
    허공의 묘한법을 알면, 옳고 그름도 법도 없다.

    8조 - 불타난제 존자
    허공이 안 밖이 없듯, 마음의 법도 그러하다.
    허공의 이치를 밝게 깨달으면, 참도 거짓도 아니다.

    9조 – 복타밀타 존자
    진리는 본래 이름이 없지만,
    이름에 의해 모습을 드러 내나니,
    진실된 이치를 깨달으면, 참도 거짓도 사라지고 없네.

    10조 – 협 존자
    진리는 본래 이름이 없지만, 이름에 의해 모습을 나타내나니
    진실한 법을 알아 들으면, 참도 아니요 거짓도 아니다.

    11조 – 부나야사 존자
    미혹과 깨달음은 숨음과 드러남,
    밝음과 어둠이 서로 떠나지 않는다.
    이제 숨음과 드러남의 법을 너에게 전하노니. 하나도 아니요 둘도 아니니라.

    12조 – 마명 존자
    들어나고 숨음이 한집안 소식이요, 밝고 어두움이 원래 둘이 아니로다.
    이제 네게 깨달은 법을 주노니, 갇지도 말고 버리지도 말라.

    13조 – 가비마라 존자
    드러남도 숨음도 아닌 법을, 진실의 경지라고 한다.
    숨고 드러남의 이치를 깨달으면, 지혜롭고 어리석음을 넘어서리.

    14조 – 용수존자
    숨고 드러나는 법을 밝히려고, 해탈의 이치를 말하네.
    법에는 마음도 얻을 수 없나니, 성냄도 기쁨도 본래 없는 것이라네.

    15조 – 가나제바 존자
    사람에게 법을 전하는 뜻은, 해탈의 이치를 설하기 위함일세.
    법에는 진실로 얻을 것이 없나니, 끝도 없고 시작도 없다네.

    16조 – 라후라다 존자
    법에는 진실로 증득할 것이 없어서, 취할 수 도 버릴 수도 없다네.
    법은 있고 없는 것이 아니니, 어찌 안 밖이 생기리.

    17조 – 승가난제 존자
    마음의 법이 원래 나는 것이 없으나, 인의 땅에 연을 따라 일어난다네
    인연과 종자가 서로 방해하지 않듯, 꽃과 열매도 그러하네

    18조 – 가야사다 존자
    종자가 있고 마음땅이 있으니, 인연이 싹을 나게 하도다.
    싹이 나건 안 나건, 인연의 법칙은 걸림이 없도다.

    19조 – 구마라다 존자
    성품에는 태어남이 없지만, 구하는 이를 위해 말하는 것이다.
    법에는 이미 얻을 것이 없거늘, 어찌 결정하고 못함을 걱정하리요.

    20조- 사야다 존자
    말 끝에 무생법에 맞으면, 법계의 성품과 같아지니리.
    이렇게 바로 알면, 사와 이를 통달하리라.

    21조 – 바수반두 존자
    거품도 허깨비도 걸림이 없거늘,
    어찌 알지 못하는가 법이 그 가운데 있는 줄 알면, 지금도 옛도 아니리라.

    22조 – 마노라 존자
    마음이 만 경계를 따라 움직이니, 움직이는 곳마다 모두 그윽하다.
    흐름에 따라 본 성품 깨달으면,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으리라.

    23조 – 학륵나 존자
    마음을 깨달을 때를 부사의하다 말 할 수 있나니.
    분명하되 얻을 수 없고, 얻을 때는 안다고 할 수 없다.

    24조 – 사자 존자
    깨달음을 말할 때, 지와 견이 모두가 마음이다.
    이 마음이 바로 지견이니, 지견은 언제나 지금 속에 있다.

    25조 – 바사사다 존자
    성인이 지견을 말씀하시니, 경계를 만날 적마다 그 아닌 것 없도다.
    내가 이제 참 성품을 깨달으니, 도도 없고 이치도 없도다.

    26조 – 불여밀다 존자
    참성품이 心地에 숨었으니.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도다.
    인연따라 중생을 교화하니. 방편을 지혜라 부른다.

    27조 – 반야다라 존자
    마음 땅이 숱한 종자를 내네, 일이 일어나면 다시 이치도 생기네.
    수행의 열매가 무르익어 깨달음이 원만해지니, 꽃이 피듯 한 세계가 열리네

    28조- 보리달마 존자
    내가 본래 이 땅에 온 것은, 법을 전해 어리석은 이를 제도하려는 것인데,
    한송이의 꽃에 다섯 꽃잎이, 열매는 자연히 이루어지리라.

    29조 – 혜가 존자
    본래부터 마음 땅이 있었기에, 그 땅에 씨를 심어 꽃이 피지만,
    종자도 있는 것이 아니며, 꽃도 나는 것이 아니다.

    30조 – 승찬 존자
    꽃은 땅을 의지해 심고, 땅에 심었던 꽃이 피지만,
    씨를 뿌려주지 않는다면, 꽃도 땅도 나지 않는다.

    31조 – 도신 존자
    꽃과 종자는나는 성품이 있나니, 땅에 의하여 꽃은 나고 또 난다.
    큰 인연과 믿음이 어울릴 때에 나지만, 이 남은 남이 없는 것이다.

    32조 – 홍인 존자
    유정이 와서 씨를 뿌리니, 인연의 땅에 열매 절로 열리네.
    무정은 이미 종자가 없으므로, 성품도 태어남도 없다.

    33조 – 혜능 존자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맑은 거울도 집이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찌 먼지가 일으키랴?
    지각 있는 존재의 씨앗이 뿌려져, 밭마다 열매를 맺게 되리라.
    지가 없이는 씨앗이 자랄 수 없고, 성 없는 생도 없다.

    용성진종대선사계서 환성지안조사에게 원사(遠嗣)를 결정하셨다는 근거자료
    ※ 발췌 : 제2집 /용산선사의 중반기 생애 (동국대 교수)

    ∥.대중교화기(大衆敎化期) / 4. 원사환성(遠嗣喚惺)

    52세 1915년 을묘년(乙卯年) ---- 환성지안(喚惺志安)에게 원사(遠嗣)를 결정한 해 용성에게 있어서 이 해는 한국불교의 새로운 법맥을재정립 하는 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1914년 논교외선종에서 지금까지의 법맥을 인정하여 왔으나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면이 있었던 것 같다.
    즉 선종의 법맥은 사자상승이 원칙이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오도송과 전법게송이 있어야 한다. 즉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지만 박사학위를 받으려면 학위논문과 심사에 합격하였다고 하는 심사결과보고서가 있어야 하는 것과도 같다. 그런데 환성지안 이후의 7대는 특별한 오도송이나 전법게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있다고 해도 견성을 충분히 인정할 만한 대오(大悟)의 오도송이라고 할 수 없는 문학작품정도의 게송에 불과한 것이다. 그는 1914년부터 이 문제를 가지고 많은 고민을 하였으며, 뜻 있는 선사들과 협의하였던 것 같다.

    환성지안 이후의 7대 중 남호신준(南湖辛準)의 경우만 하더라도 용성의 어록이나 글에서 한번도 언급된적이 없는 선사이다. 그리고 정말 정법안장을 받았다고 한다면 근세불교사에서 그의 이름이 크게 거명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많은 기록에 남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는 대단히 미약하다. 그의 행장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일부 자료에서 단편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봉암불조원류라고 하는 자료에 의하면,

    남호신준(南湖辛準) (1852~1928)은 1852년 임자(壬子) 12월 12일 전주(全州)에서 태어났다. 스님의 속성은 도강(度江) 김씨(金氏)이고 아버지의 이름은 광지(光智), 어머니는 전주(全州)이씨(李氏)이다. 스님은 14세 때인 고종 2년(1865, 乙丑)에 출가하여 금산(錦山) 보석사(寶石寺)의 초우선사(草愚禪師)를 의지하여 삭발하고 용은화상(龍隱和尙)으로부터 5계와 10계를 받았다. 스님의 나이 21세 때인 1872년(壬申) 7월 15일 범해율사(梵海律師)로부터 대소승계를 받았다. 나이 36세 때인 1888년 무자(戊子) 3월 13일에 입적했으며, 세수는 77세, 법랍은 63세였다. 라고 한다.

    그가 해인사에서 주석하면서 용성과 만나 전법하였을 것을 추정하는데 여기에 대한 자료는 거의 전무한 상태이다. 용성스님의 원사설에 대해 여러 가지로 논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필자도 용성선사연구에서는 명확한 자료가 부족하여 선맥을 소개하는 정도로 언급했으나 이제는 충분한 자료를 확보하였으므로 자세히 보완코자 한다.

    첫 번재 자료로는 용성대선사 사리탑비명 (龍城大禪師 舍利塔碑銘)이다.
    師 曹溪直下 第三十五代法孫 喚惺志安之後裔
    라고 한다.
    여기서 조계직하(曹溪直下)란 육조혜능(六祖惠能)을 뜻하므로 혜능으로부터 35대인 환성지안(喚惺志安)을 의미한다. 물론 혜능을 빼고 다음대인 남악회양(南岳懷讓)으로 부터라고 할 수도 있으나 혜능(惠能)을 포함하여 35대째가 환성지안이 되므로 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따라서 환성 이후의 7대는 빠진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용성이 환성지안에게 원사(遠嗣)하였다고 하는 충분한 자료이다.

    두 번째 자료로는 용성스님의 직계제자인 자운(慈雲)스님이 소장하였던 필사본의 불조원류해동보(佛祖源流海東譜)이다. 그 서문에 의하면,

    現今細考 朝鮮法脈 則 但太古禪師 麗末入支那 受臨濟正脈 淸珙和尙 法印
    相承以來 李朝佛法歷史 尤甚不明也 又喚惺之後 見性通宗七大泯矣 傳法
    偈文 無憑可考 但工文學産業者之名相爲憎故也 唯是欠哉
    臨濟正脈 三十一代孫 釋龍城

    이라고 한다. 여기서 그는 분명히 환성지안의 법을 이었으며, 그 이유로는 환성 이후의 6,7대는 견성하였다고 인정할 만한 오도송이나 전법게가 없다는 것이다. 설사 있다고 해도 문학작품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정법안장9正法眼藏)을 받은 명안종사(明眼宗師)라고 인정 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을 임제로부터 31대손이라고 하였다.즉 임제까지 포함하여 용성은 31대에 해당한다. 그리고 같은 자료의 게송부분에서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龍城震鍾 偈曰
    佛祖元不會 假說爲傳心
    雲門胡餠團 鎭州羅蔔長
    細考禪宗 師師相傳 法脈則傳法偈文 昭然相承 喚惺之後 無憑可考 名實俱虛
    汚穢禪宗 與諸禪師 會于如如居士之幹 討論這般事 意旨相合 體碧溪遠嗣龜
    谷之意 以喚惺爲嗣法師 後之兒孫 傳法偈文 代代詳記 相傳可也

    라고 한다.
    여기서 자신의 뜻과 원사(遠嗣)를 결정하게 된 과정에 대하여 분명히 밝히고 있다. 먼저 게문(偈文)을 읊은 후 선종의 법맥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이 옳은 일이나 환성 이후의 전법사(傳法師)들은 대부분 세속에 오염되고 전법게문(傳法偈文)이 구곡(龜谷)에게 원사(遠嗣)하였듯이 환성의 법을 원사하여 대대로 상전할 것을 결의 하였다고 한다. 앞으로도 법을 상전(相傳)할 때에는 반드시 전법게문으로 전해야 한다고 명기하고 있다. 이러한 일이 있었지 않았나 여겨진다. 이어서 다시 게문을 읊으면서,

    佛祖未曾傳 我亦無所得
    打破虛空骨 地霹靂地
    覺雲淨心 雨師間 不知幾代削去 震鐘喚性之間 七師削去矣 然但工文學 或專
    産業者 但從權道以 七師承脈耳

    라고 한다.
    여기서는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각운(覺雲)과 정심(淨心)의 오기인 듯 함)의 연대 차이는 얼마인지도 알지 못하지만, 여러 대를 뛰어넘어 법을 원사(遠嗣)했듯이 용성(龍城)과 환성(喚惺)의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으나 7대를 삭지(削去)하고 전법(傳法)한다고 하였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7대의 전법은 정법(正法)의 상승이 아니고 단순히 문학이나 산업자들이 대를 계승하는 것과 같이 단지 방편을 상승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 번째 자료로는 용성스님의 친필 서간이 있다. 지금까지는 이와 같은 원사를 상의하고 결의한 것이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었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1914 논교외선종(論敎外禪宗)이 발표되었으므로 용성의 만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 원사설의 년도에 대한 분명한 자료가 공개되므로 용성연구(龍城硏究)에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즉 〔용성스님이 경봉스님에게 보낸 친필 편지〕에 의하면,

    前文省略 ------ 本衲遠師喚煋 하이 喚惺則我師라 不必可記也
    世尊 二千九百四十二年 至月 二十三日
    喚惺法嗣 龍城書

    라고 한다.
    이때가 1915년 11월 23일 이므로 적어도 이전에 원사문제가 결정되었다고 보여진다. 만약 이 자료가 없었다고 한다면 원사설의 연대는 후대로 미루어졌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마성스님의 논문에 인용된 봉암불조원류에 의하면 7대를, 삽입한 것으로 되었는 것 같지만 자료를 직접확인 하지 못하였으며, 자료의 신빙성에도 의문점이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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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대한불교조계종 학림사 학림사 학산 대원 대종사 (鶴山 大元 大宗師 : 1942 ~ 학림사, 오등선원 조실)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8
    학림사 학산 대원 대종사 (鶴山 大元 大宗師 : 1942 ~ 학림사, 오등선원 조실)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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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산 대원 대종사 (鶴山 大元 大宗師 : 1942 ~ 학림사, 오등선원 조실)

    오도송(悟道頌)
    忽聞栢頭手放語 홀문백두수방어홀연히 잣나무 꼭대기에서 손 놓고 한 걸음 나아가라는 말을 듣고
    廓然銷覺疑團處 확연소각의단처
    확연히 의심 덩어리 녹아 깨달았네.
    明月獨老淸風新 명월독로청풍신
    밝은 달은 홀로 드러나고 맑은 바람은 새로운데
    凜凜闊步毘盧頂 늠름활보비로정
    늠름히 비로자나 이마 위를 활보함이로다.
    ▶고암스님이 인가하시며 학산(鶴山)이라는 법호와 전법게를 내리셨다.

     전법게(傳法偈)
    佛祖傳心法 불조전심법불조가 전한 심법은,
    不識又不會 불식우불회알지도 못하고 또한 알지도 못함이라.
    趙州茶一味 조주다일미조주의 차 맛이 일미이거니,
    南泉月正明 남천월정명남전의 달이 정히 밝도다.
     
    오도송(悟道頌)
    竈內火光蓋天地 조내화광개천지
    부엌 안에 한 무더기 불빛 천지를 덮고
    鼎中湯聲脫古今 정중탕성탈고금
    솥 안에서 끓는 한 소리 옛과 지금을 벗어났음이라
    拄杖三下是何法 주장삼하시하법
    주장자 세 번 치면서 무슨 법이냐 하니
    目前歷歷只底是 목전역력지저시
    눈앞에 역력해서 다만 이것이로다.
    ▶고행자때의 오도송으로 만옹(滿翁) 선사께서는 극찬하시며
    한암(閑庵)이라는 호를 내려주셨다.

    오도송(悟道頌)
    大喝一聲倒乾坤 대갈일성도건곤
    크게 한 소리에 하늘 땅이 무너지고
    日月星宿失光明 일월성숙실광명
    해와 달과 별이 빛을 잃었네
    遽然一步回頭看 거연일보회두간
    급히 한 걸음 나아가 머리를 돌이켜 보니
    露山溪水谷外流 노산계수곡외류
    산은 드러나고 시냇물은 곡 밖으로 흐름일세.
    ▶혼해(混海)스님이 인가하시며 태허(太虛)라는 법호와 전법게를 내리셨다.

    대원 스님은 1942년 3월 13일에 경북 상주시 서곡동에서 풍양조씨(豐壤趙氏) 가문에 4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릴 때 이름은 남희(南熙)라고 하였다. 1957년 16세 되던 해에 상주 남장사로 출가하였다.

    남장사에서 당대 선지식인 윤고암 스님을 은사(恩師)로, 하동산 스님을 계사로 득도수계하였으며 20세에 하동산 스님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수지(受持)하였다. 내전 이력을 보면 사집은 강고봉 스님에게, 사교는 통도사 성능스님, 호경 스님에게 수료하였고, 대교는 혼해 스님에게 수학하여 1966년경에 일대시교를 이수하였다.

    1966년에 남장사에서 혼해 스님을 모시고 선어록과 〔금강경〕 강의를 듣고 용맹정진 도중에 혼해스님이 “전백장(前百丈)은 불락인과(不落因果)라 하고 야호(野狐)몸에 떨어졌고 후백장(後百丈)은 불매인과(不昧因果)라 답(答)을 하여 야호 몸을 벗어나게 했는데 불락인과(不落因果)라 답한 것이 어찌해서 야호 몸에 떨어졌는고.” 물으니 망연하여 삼일이 지나가는 것조차 알지 못하다가 스님이 다시 큰소리로 “사자(獅子)는 뒤를 돌아보지 않느니라.” 하는 말에 홀연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 때 일게(一偈)를 지어 받쳤다.

    혼해 스님이 이를 보고 기뻐 말하기를, “대원 수좌는 강사하지 말고 선방으로 곧장 가서 열심히 참선토록 하라.” 하므로 그 길로 곧장 의정부 쌍룡사 전강 스님을 찾아 뵙고 경책을 받았다. 그 뒤 오대산 상원사, 도봉산 망월사, 대구 동화사, 문경 김룡사, 범어사, 해인사, 송광사, 도봉산 망월사, 현풍 도성암, 월내 관음사, 불국사, 법주사 복천암, 지리산 칠불암, 통도사 극락암, 쌍계사 금당선원 등 제방선원에서 안거(安居) 하면서 효봉, 동산, 고암, 경봉, 전강, 향곡, 성철, 구산, 월산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을 모시고 입승(立繩) 및 선덕(禪德) 소임을 맡아 공부를 경책 받으며 오로지 선수행으로만 일관했다.

    1973년 고암 상언 대종사께서 해인총림방장으로 머물 때에 저녁 정진을 마치고 방장실을 찾아 공부에 대하여 몇 말씀 여쭈니 “지금도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화두를 참구하고 있는가. 몇 년이나 참구하였는가.” 라는 물음에 “8년간 참구하였습니다”하니 고암 스님이 애석하다 하고 일러 말하기를, “백수상두(栢樹上頭)에서 수방진일보(手放進一步)하야사 시지종차(始只從此)로 출격대장부(出格大丈夫)라.”는 말에 홀연히 크게 깨우쳤다.

    이 때 박장대소하니 고암 상언 대종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슨 기특한 일이 있길래 그렇게 웃는가, 속히 일러라.” 하니 “진전삼보(進前三步) 기립차수(起立叉手)하고 일구불진도(一口不盡道)입니다.” 하니 “다시 말해보라” 함에 “설사 천언만구(千言萬句)를 다 이른다 해도 이 속에 있어서 상신실명(喪身失命)합니다.” 하고 문밖으로 나갔다 다시 들어와 앉았다. 다시 고암 스님이 마조원상 공안(公案)과 1700공안을 두루 묻기에 즉시 대답하였다. 이에 오도송(悟道頌) 일구(一句)를 가져오라 하시므로 즉시에 오도송을 지어 바쳤다.

    고암 스님이 이를 보고 흔연히 입실을 허락하고 학산(鶴山)이라는 법호(法號)와다음의 전법게(傳法偈)를 내리셨다.

    1986년도 서울 대각사에서 대중을 모아놓고 정식으로 전법의식(傳法儀式)을 거행하였다.

    고암 상언 대종사께서는 법장(法杖)과 불자(拂子) 및 가사와 발우(鉢盂)를 신표로 전하였다.
    용성진종(龍城震鐘) - 고암상언(古庵祥彦) - 한암대원(閑庵大元) 으로 이어지는 법맥이 꿈틀거리는 순간이었다.

    그 후에 88년에 고암 상언 대종사께서 입적하시자 고암 상언 대종사의 유지를 받들어 계룡산에 소실된 옛 제석사 터에 학림사를 다시 창건하고 1995년에는 오등선원(誤燈禪院)의 낙성식 때 조실로 추대되어 현재 스님들과 일반 시민들의 참선수행 지도에 여념이 없으시다.

  4. 대한불교조계종 학림사 학림사 고암 상언 대종사 (古庵 詳彦 大宗師 : 1899 ~1988 조계종 제3,4,6대 종정)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8
    학림사 고암 상언 대종사 (古庵 詳彦 大宗師 : 1899 ~1988 조계종 제3,4,6대 종정)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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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암 상언 대종사 (古庵 詳彦 大宗師 : 1899 ~1988 조계종 제3,4,6대 종정)

    오도송(悟道頌)
    禪定三昧 선정삼매선정삼매는
    壺中日月 호중일월단지 속의 일월이요
    凉風吹來 량풍취래시원한 바람부니
    胸中無事 흉중무사가슴 속에 일이 없다.
     
    오도송(悟道頌)
    回頭翻身開哲辟 회두번신개철벽머리를 돌이키고 몸을 뒤집어 철벽을 여니
    香水波花萬年春 향수파화만년춘향수 바다의 파도 꽃이 만년의 봄이로다.
    落東逆流越西天 낙동역유월서천낙동강이 거슬러 흘러 서쪽 하늘을 넘어가니
    萬古風月自戲弄 만고풍월자희롱만고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은 스스로 희롱함이로다
     
    전법게(傳法偈)
    佛祖元不會 불조원불회부처와 조사도 원래 알지 못하고
    掉頭吾不知 도두오불지머리를 흔들며 나도 알지 못하니
    雲門胡餠團 운문호병단운문의 호떡은 둥글고
    鎭州羅葡長 진주라포장진주의 무는 길기도 하네
     
    열반게(涅槃偈)
    伽倻山色方正濃 가야산색정농
    가야산에 단풍이 짙게 물들었으니
    始知從此天下秋 시지종차천하추
    비로소 천하가 가을인 줄 알았네.
    霜降葉落歸根同 상강엽락귀근동가을 찬 서리에 낙엽이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니
    菊笑望月照虛空 국소망월조허공국화꽃 활짝 핀 보름달이 허공에서 만상을 비추네
    큰스님께서는 1899년 10월5일에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산동하 어의동에서 파평윤씨가문(坡平尹氏家門)에 탄생하셨다.
    부친은 연담거사(蓮潭居士) 윤성장(尹性藏)이시고 모친은 하동정씨 만행심(萬行心)이셨다.

    어릴 때 이름을 지호(志豪)라 하였고, 동리의 학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워 마치셨다. 1917년 17세가 되시던 해에 가야산 해인사에 입산 출가, 당대의 선지식(善知識)이신 김제산화상(金齊山和尙)을 은사로 방한암율사(方漢岩律師)를 계사(戒師)로 득도수계(得度受戒)하여 상언(詳彦) 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일대시교(一代時敎)의 교학을 이수하신 후에 제방의 여러 선지식을 친견하며 수행정진 하셨다. 그 당시 오대산 방한암율사, 금강산 마하연 설석우화상, 덕숭산 정혜사 만공선사 등의 회하(會下)에서 수행정진 하셨으며 안도석왕사 내원선원에서 신혜월선사를 모시고 지내면서 크게 심요(心要)를 얻으셨다.
    이로부터 선기(禪機)를 드날리며 정진하시더니 지리산 용성선사를 친견하시고 선사의 “반야(般若)의 공리(空理)는 정안(正眼)으로 봄이라.”는 말씀에 깨침이 있어 거량(擧揚)하니 용성선사께서 “선재(善哉)라 만고풍월(萬古風月)이로다.” 하시고 고암당(古庵堂)이라는 법호를 내리셨다.
    1944년에는 종단으로부터 드디어 【대선사】의 법계(法階)를 품수(稟受)하셨으며 이어서 1952년에는 【대종사】의 법계를 품수하셨다.

    1967년에 대한불교 조계종 제3대 종정(宗正)에 추대 되셨으며, 1970년에는 해인총림방장을 겸임하시어 천하납자를 제접 하셨다.
    1972년 제4대 종정에 재임하셨고, 78년에는 제6대 종정에 다시 취임 하셨다.

    1976년 이후에는 큰스님의 연세가 팔순에 가까우심에도 불구하고 고명(高明)이 해외에 까지 미치니 미국가지와 구라파 각국의 초청을 받아 동서세계를 일주하시면서 중생교화에 앞장서며 타에 모범을 보이셨다.

    1988년 10월 25일, 큰스님이 세수 90을 넘기시면서 차차 기력이 쇠미(衰微)하시는 듯 하더니, 이 날은 문도(門徒)들을 돌아보시고 “조심해서 살거라 인과(因果)는 분명하니라,” 하심에 제자들이 임종게(臨終偈)를 청하니,

    송왈,

    伽倻山色이 方正濃하니
    始知從此 天下秋로다.
    露降 葉落歸根同이여
    菊笑 望月照虚空이라.
    伽耶山色 丹楓이 짙어졌으니
    바야흐로 지금이 가을이던가
    때가 되면 落葉이 뿌리로 돌아가지
    九月보름 밝은 달은 허공을 비치나니

    하시고, 미소지으시며 입적(入寂)하시었다.

  5. 대한불교조계종 학림사 학림사 용성 진종 대종사 (龍城 震鐘 大宗師 : 1864~1940)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8
    학림사 용성 진종 대종사 (龍城 震鐘 大宗師 : 1864~1940)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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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성 진종 대종사 (龍城 震鐘 大宗師 : 1864~1940)

    출가송(出家頌)
    不忘前世事 불망전세사전세사 잊지 아니하라고
    夢中佛授記 몽중불수기꿈가운데 부처님이 수기하셨도다.
    出嫁德密庵 출가덕밀암덕밀암에 출가하니
    其佛親見佛 기불친견불그 부처가 꿈에 본 부처더라.
     
    견도송(見道頌)
    五蘊山中尋牛客 오온산중심우객오온산중에 소를 찾는 나그네가
    獨座虛堂一輪孤 독좌허당일륜고텅 빈 집에 홀로 앉으니 하나의 둥근 달이라
    方圓長短誰是道 방원장단수시도방원장단을 누가 이르겠는고
    一團火炎燒大天 일단화염소대천한 덩어리의 불길이 대천세계를 태우는구나
     
    오도송(悟道頌)
    金烏千秋月 금오천추월금오산에 천년의 달이요
    洛東萬里波 낙동만리파낙동강에 만 리의 파도로다.
    魚舟下處去 어주하처거고기 잡는 배가 어느 곳으로 갔는고
    依舊宿蘆花 의구숙로화옛에 의지하여 갈대 꽃밭에서 잠잔다.
     
    열반송(涅槃頌)
    諸行之無常 제행지무상모든행이 떳떳함이 없고
    萬法之俱寂 만법지구적만법이 고요하도다
    匏花穿籬出 포화천리출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가니
    閑臥麻田上 한와마전상삼밭위에 한가로이 누웠도다.
    七七年間遊幻t海 칠칠년간유환해칠십칠 년 꿈같은 삶을 거닐다
    今朝脫骰汲初源 금조탈투급초원오늘에야 고향가네
    廊然空寂元無物 낭연공적원무물본시부터 없는 자리에
    何有菩提生死根 하유보제생사근보리생사가 어찌 있을손가.
    용성대종사께서는 1864년 5월 8일 전라도 남원군(현재 장수군) 하번암면 죽림리 에서 수원 백씨(白氏)로 탄생하였다. 7세에 한학을 익혔으며, 9세에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16세에 해인사에서 출가하였으며, 23세에 깨달음을 얻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맞아 선사는 산중 수행을 정리하고 1911년 48세 되던 해에 백제불교 초전법륜성지인 서울 서초동 우면산 대성사에 오신 이후, 종로구 봉익동에 민가를 구입해서 수리 개조하여 대각사(大覺寺)의 간판을 내걸로 불교중흥과 민족중흥을 발원하여 불교계의 혁신작업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1일에는 만해 한용운스님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중 불교대표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에 4번째 서명하였으며, 이로 인해 서대문 감옥에서 3년간 영어의 생활을 하였다.

    1921년 출옥과 더불어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한문으로되어 있던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였으며, 1922년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에 간 독립군들을 돕기 위해 만주 연길 명월촌과 봉년촌에 대규모의 대각교당(大覺敎堂)을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61세 되던 해에는 평소의 수행력에 의해 치아에서 치사리(齒舍利)가 나왔으며 62세에는 도봉산 망월사에서 만일참선결사회(萬日參禪結社會)를 조직하여 수행에도 전력을 하였다. 1926년에는 민족정신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시행하고 있던 왜색골교위 폐단을 지적하고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건백서(建白書)를 2차에 걸쳐서 제출하여 전통불교의 맥을 계승하기도 하였다.

    1927년 64세 때에는 대각교의식집(大覺敎儀式集)을 발간하면서 왕생가(往生歌), 권세가(勸世歌)등 창작국악조의 창작찬불가(創作讚佛歌)를 최초로 작시, 작곡하여 이 분야에서는 국내에서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대각사(大覺寺)에 일요학교를 설립하여 오르간을 손수 치기도 하였으며, 한문으로 된 불교의식을 한글화하여 불공, 제사 등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많은 노래들이 있었으나 현재는 2곡만이 악보까지 남아있으며, 그 외에는 가사만 전하고 있다. 대종사께서는 우리나라에서 찬불가의 창사자일뿐만 아니라, 국악조의 창작국악으로 된 창작찬불가를 남겼다는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같은해 함양에 화과원(華果院)을 만들어 사원경제의 자립을 부르짖는 선농불교(禪農佛敎)를 주창하기도 하였다.

    이후 30여가지의 경전을 번역하였으며, 30여가지의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1940년 2월 24일 대각사에서 입적하니 세수는 77세이고, 법랍은 61세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수한 전등(傳燈)68代 의 조사(祖師)인 동시에 근세 중흥율(中興律)의 6조(祖)이다.
    1941년에 만해 한용운스님이 찬(撰)한 비를 해인사에 건립하였으며, 1962년 3월 1일에는 국가공로상(國家功勞賞)이 추서 되었고, 그의 유업을 계승하기 위해 제자들을 1969년 9월 11일에 재단법인 대각회(大覺會)를 인가 받았다. 1990년 10월 9일에는 한글학회로부터 감사패를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銀冠文化勳章)을 추서 받았다.

  6. 대한불교조계종 학림사 학림사 용성문중 선맥의 해설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8
    학림사 용성문중 선맥의 해설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8

    선종은 달마대사가 중국에 오면서 그 초조로 하여 육조혜능(六祖惠能 638~713) 스님에 의하여 그 많은 도인이 배출대고 남악회양(南岳懷讓 677~ 744) 스님 밑으로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스님에 의하여 조사선(祖師禪) 이라는 중국적인 선이 그 빛을 발하게 된다. 혜능은 중국의 남쪽에 주석하면서 활동했기 때문에 북종의 신수와 상대적으로 남종선(南宗禪)이라 일컬어지게 된다. 또한 그 제자들에 의하여 더욱 확고하게 선종의 전통은 남종선으로 인식되게 된 것이다. 당시 신라는 많은 정치적인 유학생 파견과 함께 불교에서도 선진 불교학을 배우고자 당에 입문하게 되면서, 같이 선법의 유학도 이루어지게 된다.

    이에 당시 마조스님의 제자들에게서 선법을 익히고 배워온 스님들이 전법의 인가를 받고 신라에 귀국하여 선법을 펴게 되지만 당시의 신라는 참선에 대한 전통이 없는 때라 참선을 통한 도의 개념이 없어서, 유학 전법도승은 당대에는 빛을 보지 못하고 그 제자들에 의하여 점차 각기 한 방면의 문파를 형성하게 된다. 통일신라의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이르러 5교9산으로 형성되고 선이 급속하게 보급되게 되면서, 선사들은 고려 창건의 주역이 되기도 하고 또한 정신적 도덕적인 스승이 되었다.

    이들 선사들은 고려 창건의 주축이 되는 신라의 지방 호족들과 연계가 되면서 그들의 스승이 되고 그들의 후원에 힘입어 각기 지방에 선의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이 된 것이다. 고려가 통일하고 불교는 국교화 되고 9산의 문파는 점차로 다시 교종의 세력에 밀리면서 그 맥이 이어오다가 고려 중기에 사굴산문(獅堀山門)의 맥인 보조 지눌의 등장으로 많은 조계의 선종을 계승하고자 하는 선풍이 앙양되어 그 문하로 많은 선지식이 나오고, 또한 나라의 국사를 계속 배출하게 된다. 이에 선이 부흥이 되어 고려후기가지 조계의 남종선이 새롭게 고려의 기틀로 되고 또한 불교도의 중심이 된다.

    중국에서는 임제스님(臨濟義玄? ~866)의 등장으로 그 문하로 또한 많은 도인이 배출되고 활약함으로서 임제의 선맥이 선종의 주류가 되면서 남종선의 정맥으로 이어져 고려후기는 ‘임제종(臨濟宗)이라 하였으며, 또한 임제의 문손들이 당시에 중국에서 확고한 위치에 있었다. 임제종은 그 맥을 이어오다 황룡혜남(黃龍慧南1002~1069) 스님을 중심으로 한 황룡파와 양기방회(楊岐方會992~1049) 스님을 중심으로 한 양기파로 나뉘는데, 양기파 문손인 대혜종고(大慧宗杲1089~1163) 스님은 간화선(看話禪)을 주창하여, 임제종의 전통을 새롭게 세워 선종의 가풍을 드날리게 된다. 그의 문손이 많이 배출되면서 활약하고 대혜선사의어록은 고려에 유입되면서 고려중기 선을 부흥시킨 보조지눌(普照知訥1158~1210) 스님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고, 간화선이 임제종이라는 전통이 고려에도 세워져 가고 또한 거기에 많은 간화선을 통한 많은 도인이 출현하여 고려후기는 중국적인 임제선을 배우고자 유학하는 스님이 많아졌다.

    중국에서는 『선요(禪要)』를 지은 고봉원묘(高峰原妙1238~1295)와 같은 법 스승인 급암종신(及庵宗信 미상)스님 그리고 그 법손이 선지를 드날리고 있었다. 고려에서 조계종의 종통으로 삼고 있는 태고보우(太古普愚1301~1382) 스님은 고려에서 정진을 통하여 그 심요를 얻고 정진을 하다가, 원나라 당시 급암종신 밑에 석옥청공(石屋淸珙1271~1352) 선상에게로 가서 자신이 지은 『태고가(太古歌)』를 보여주고 인가를 받았으며, 2년간 모시면서 그 법을 이었다. 귀국하여 공민왕 때에 왕사와 국사가 되어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고 통합하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와 더불어 큰 선지를 드날린 스님은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 스님도 또한 고려에서 인도 스님인 지공화상(金陵寶誌 418~514) 과 인연을 맺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리고 중국으로 가서 석옥청공 스님과 함께 임제의 제 18대 손인 평산처림(平山處林1279~1352)선사에게 찾아가니 처림은 그에게 “누구를 만나고 왔는가?”를 물었다. “지공을 만났다”고 말하니, 다시 “지공이 무엇을 하던가?” 하고 물었다. 그가 “천검(天劍)을 쓰더라”, 고 답하니, 처림은 “천검은 그만두고, 그대의 일검(一劍)을 받아오너라” 했다. 이에 그가 좌구로 후려치니 처림은 선상(禪床)에 쓰러져 “이 도둑놈이 날 죽인다”고 외쳤다. 그가 처림을 일으키면서 “나의 칼은 죽이고 살림에 능합니다.”하니 처림이 크게웃고 법을 인가해 주었다. 그 후 다시 지공을 모시고 정진하다 고려로 귀국하여 보우스님의 뒤를 이어 왕사가 되고 선교를 관장하였다. 나옹의 법은 환암혼수(幻庵混脩 1320~1392)로 이어지고 다시 무학자초(無學自超 1327 ~1405)에 이어지고 그는 조선에서 왕사가 되어 그의 문도는 조선 초기에 불교계를 주도하게 된다.

    현재 조계종에서는 태고보우를 종조로 삼으면서 그의 문손이 환암혼수로서 법을 잇고 청허휴정(淸虛休靜1520~1604)으로 이어져 또한 편양언기(鞭羊彦機1581~1644)의 문손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으로 되어있다. 여기에서 환암혼수는 기록에 의하면 나옹의 법을 잇고 있으며, 태고의 문손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환암혼수의 비문은 태고에 대한 언급은 없고 나옹에 대한 내용만 보이는 점에서 상이한 점이 있지만, 나옹스님은 태고보우 스님보다 먼저 입적하여 비문이 더 늦게 세워지게 되는데, 여기에서 태고스님의 기록에 그 문손이라고 함에 따라서 양쪽의 스님에게 배워 익힌 사실로 여기고, 조선의 법맥을 세운 청허 휴정의 문손은 태고보우 스님을 세우게 된다.

    다른 한 가지는 태고 보우스님은 석옥청공의 법을 받고 거기에 주석하면서 배우고 있지만, 나옹스님은 먼저 지공스님을 만났고, 또한 평산처림에게서 법을 인가 받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간 지공스님을 모시고 정진하다가 귀국했다는 점에서, 나옹을 임제의 정통으로 세우지 않은 것으로 본다. 또한 중요한 점은 비록 나옹의 문도가 무학을 비롯하여 전반적인 불교의 흐름을 주도는 하고 있었지만, 그의 계승은 단절되어 졌으므로 결국 누구의 문도가 계승자로서 단절되지 않았는가에 따라서 환암혼수는 어느 문도인가가 관건이 되었으며, 이에 정황을 따라서 나옹스님보다는 태고스님을 환암혼수와 연계하여 그 법맥을 세우고 있는 듯하다.

    더 나아가서 고려 중기의 중흥조인 보조국사를 그 연원으로 하지 않은 것은 정통 임제 정맥을 강조하고자 하였던 듯하다. 즉 태고보우는 중국의 임제 정맥인 선사를 통해서 인가를 받았기 때문에 종조로서 그 확고한 입지를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세워진 선종의 법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급암종신 → 평산처림 → 나옹혜근 → 무학자초 → 함허득통.
    급암종신 → 석옥청공 → 환암혼수 → 구곡각운 → 벽계정심 →벽송지엄 → 부용영관 → 청허휴정.
    편양언기 → 풍담의심 → 월담설제 → 환성지안 ......

    환성지안(喚惺志安 1664~1729)을 정점으로 해서 또한 많은 문도가 배출되고 그 흐름을 달리하고 있다. 조선시대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스님이 되는 자격증인 도첩제 마저 폐지됨으로써 천민의 신분도 아닌 불법적인 신분으로ㄴ 천시를 받아왔다. 그러므로 절에서는 나라와 지방에 필요한 진상품을 올려야만 했으며, 양반과 관리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을 수 없었다. 스님 신분은 또한 언제라도 부역과 군대 복역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갖은 고초 중세서도 조선전기 명종 때 문정황후의 등장으로 허응당 보우 (虛應堂 普雨 1515~1565) 스님이 천거되고 다시 불교가 양종이 복구되어 임진란에 중추적 역할을 한 청허휴정과 송운유정(松雲惟政 1544~1610)이 등장할 수 있었으며, 청허휴정 아래로 많은 선사가 배출되어 또한 각기 많은 문손을 배출하게 된다. 당시에 편양언기 스님과 더불어 정관일선(靜觀一禪 1533~1608) 스님과 소요태능(逍遙太能1562~1649),그리고 송암유정과 함께 서산 사대파(四大派)를 형성하게 되며, 각기 문파는 많은 문도를 배출하게 된다.
    이렇게 조선불교의 중흥조 청허휴정과 그 문도는 불교교단을 이끌어 조선후기 선맥의 바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편양의 문손에 의하여 많은 선덕과 학장이 배출되면서, 선에서 뿐만 아니라 교학까지도 중흥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허응당 보우 스님을 등용했던 문정왕후가 섭정을 마치고 명종 왕의 실권이 회복되면서 실각하고 불교는 다시 산간의 교단으로 축소될 수밖에는 없었다. 승과의 부활에 따른 양종체제는 국가의 정식적인 승인 없이는 오래갈 수 없으므로 정치, 사회적인 면에서 불교의 힘은 발휘가 되지 못한 가운데 서산 문도의 선문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을 따라 말기에 다시 선을 부흥시킨 스님은 경허성우(鏡虛星牛1849~1912)스님으로 당시 상황은 개항기 이고 또한 일제의 점령기이기도 하며, 일본에 의한 계급철폐와 스님의 도성출입금지 철폐로 조금은 자유스러운 때였지만 경제적, 사회적인 압박과 현실은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경허스님은 도를 통하고 다시 결사와 더불어서 선을 진작시키고자 했고, 그의 문하에서 또한 도인들이 많이 배출되어 곳곳에서 그 법석을 펴고, 선원이 여러 곳에서 개설되어 참선의 전통이 크게 활성화 되었다. 경허스님은 만화보선(萬化普善) 스님에게서 학문을 배워 그 문하에서 강백을 했지만 도는 자신의 인연사에 따라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그의 법맥을 용암혜언(龍巖慧彦1783~1841) 스님을 잇는다고 하였다, 이는 청허의 12세손이 되고 환성지안의 7세손이 된다.

    청허휴정→ 편양언기→ 풍담의심→ 월담설제→ 환성지안→ 호암체정→ 청봉거안→ 율봉청고→ 금허법첨→ 용암혜언→ 경허성우

    지금의 경허 문손인 수덕사에서는 용암스님 밑으로 ‘영월봉률-만화보선-경허성우’로 이어지는 법맥을 상정하여 청허하에 13세 환성문하 9세로 되어 있으며, 그 문하로는 만공월면, 수월음관, 혜월혜명, 한암중원, 침운현주 등 스님들이 그 맥을 잇고 있다, 경허스님의 법을 선을 진작시킨 경허스님 역시 선과 교를 같이 겸한 대종장이었고, 위로 선교를 겸한 선사의 전통을 이었던 것이다.

    일제점령기에 선을 진작시키고, 대중포교의 문을 열어 재가자에게 최초로 참선을 가르쳐 서울에 선을 대중화한 스님으로 용성진종 대종사께서 계시는데, 스님은 일제 강점기에 만해 한용운(韓龍雲1879~1944)과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당시의 불교계는 일제의 종파가 유입되어, 권력과 연계되어 모두가 대처식육 하는 것이 보편화 되어 본사와 말사의 주지가 거의 모두가 대처승인 상황에서, 철저하게 불교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계율정신과 대각운동 그리고 선농일치의 정신을 실천했으며, 외국에서 들어온 종파들 보다 불교가 우위에 있음을 알리는 글을 쓰고, 또한 대중포교의 일선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시민선원을 개설하였고, 불자님들에 참선을 보급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러면서 후반기의 생애는 불교경전의 한글화 작업에 헌신했다.

    스님은 여러 번의 깨침과 함께 많은 선지식을 참방하여 선지를 인정받고 또한 중국에도 여러 선지식과 선문답을 통하여 조선의 선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일제의 혼란시기에 그는 결사를 이끌어 정진하고 선당을 개설하여 많은 납자들을 제접하였다.
    용성진종(龍城震鐘1864~1940) 스님은 처음에 신묘장구 주력을 통하여 힘을 얻고나서 다시 ‘無’자 화두를 통해서 심요를 얻어 확실히 깨우치게 된다. 현재 스님의 법계는 다음과 같다.

    청허휴정→ 편양언기→ 풍담의심→ 월담설제→ 환성지안→ 용성진종

    용성스님은 교류하고 있던 선지식들과 그리고 여여한 거사님들과 많은 의견을 교류하여 환성지안은 육조혜능으로부터 35세손이며, 자신을 환성아래의 원사하여 임제의 31대손으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경우는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은 대혜종고를 원사하여 스승으로 삼았고, 조선시대 벽계정심(碧溪正心 미상)의 경우도 고려 말의 구곡각운(龜谷覺雲미상)에게 원사하여 그 선 맥을 이어왔다.

    용성진종 대선사의 문하로 동산혜일(東山慧日 1890~1965) 스님과 동산스님 아래 현대의 고승인 퇴옹성철(退翁性徹1912~1993) 스님이 있다. 또한 세 번의 종정으로 살아있는 보살로서 추앙을 받으신 고암상언(古庵祥彦 1899~1988) 스님이 용성진종대선사를 친견하고는 “반야(般若)의 공리(空理)는 정안(正眼)으로 봄이라”는 말씀에 언하에 크게 깨치니, 용성스님이 묻기를 “조주무자(趙州無字) 십종병(十種病)에 걸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고 용성스님이 묻자 그는 즉각 “다만 칼날 위의 길을 갈 뿐입니다(但行劍上路)”라고 대답했다.
    “세존이 영산회상에서 가섭에게 연꽃을 들어 보인 뜻은 무엇인가?” “사자의 굴에는 다름 짐승이 있을 수 없습니다(獅子窟中無異獸)” “육조스님이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뜻은 무엇인가?” 일어나 삼배(三拜)한 후에 고암스님이 답하였다. “하늘은 높고 땅은 두텁습니다.(天高地厚) ” 그러고는 승인 용성진종 선사께 고암스님이 물었다.
    “스님의 가풍(家風)은 무엇입니까?” 용성선사는 주장자를 세 번내리치며 스님에게 반문하였다. “너의 가풍은 무엇이냐?”
    이 물음에 고암스님도 주장자를 세 번 내리쳤다. 이를 본 용성진종 대선사께서는 “만고(萬古)의 풍월(風月)을 아는 자 누구인가 고암(古庵)을 독대(獨對)하니 풍월이 만고로다”라고 칭찬하시고,‘고암(古庵)’이라는 당호와 함께
    佛祖元不會 부처와 조사도 원래 알지 못하고
    掉頭吾不知 머리를 흔들며 나도 또한 알지 못하니
    雲門胡餠團 운문의 호떡은 둥글고
    鎭州羅葡長 진주의 무는 길기도 하네.
    라고 전법게(傳法偈)를 내려 인가(印可)를 받고 법제자가 되었다.

    청허휴정 → 편양언기 → 풍담의심 → 월담설제 → 환성지안 → 용성진종 → 동산혜일 → 퇴옹성철
    청허휴정 → 평양언기 → 풍담의심 →월담설제 → 용성진종 → 고암상언 → 학산대원

    고암진종 대선사의 입실제자로는 당호는 ‘학산(鶴山)’이며 법호가 한암대원(閑庵大元1942~ )이다.1973년 고암진종 대선사께서 해인총림방장으로 머물 때에 저녁 정진을 마치고 방장실을 찾아 공부에 대하여 몇 말씀 여쭈니 “지금도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를 참구하고 있는가, 몇 년이나 참구하였는가.” 라는 물음에 “8년 간 참구하였습니다.”하니 고암진종 대선사님께서 애석하다 하고 일러 말씀하시기를 “잣나무 꼭대기 위에서 (柏樹上頭) 손을 놓고 한 걸음 나아갔을 때(手放進一步)에 당하여서 어떤 것이 너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겠는고?” 하는 말씀에 홀연히 크게 깨우쳤다. 이 때 박장대소하니 고암진종 대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슨 기특한 일이 있기에 그렇게 웃는가! 소히 일러라.” 하니 대원이 답하길 “한 입으로 다 말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고암진종 대선사께서 “아니다, 다시 말해보라.” 하니 삼배 올리고 기립 차수하여 말하기를 “설사 천언만구(千言萬口)를 다 이른다 해도 이 속에서 있어서 상신실명(喪身失命)을 면치 못합니다.” 하고 문밖으로 나갔다 다시 들어와 앉았다, 다시 고암진종스님이 마조원상 공안(公案)을 물으셨다.

    주장자로 원상을 그리더니 “여기에 들어가도 30봉이요 나가도 30봉이니 일러라.” 하니 스님이 깔고 앉았던 좌복을 머리에 이고 서서 “이것이 안에 있습니까? 밖에 있습니까?”하고 물으니 “아니야”하시면서 스님께서 주장자로 대원스님을 치려고 하시는 찰나에 좌복을 고암진종 대선사 머리 위에 던지고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잠시 후에 다시 들어와서 앉으니 고암스님께서 “눈 푸른 납자는 속이기 어렵도다!” 하시고 또 1700공안을 두루 묻기에 즉시 대답하였다. 이에 오도송(悟道頌) 일구(一句)를 가져오라 하시므로 즉시에 오도송을 지어 바쳤다.

    忽聞柏頭手放語 홀연히 잣나무 꼭대기에서 손을 놓고 한걸음 나아가라는 말을 듣고
    廓然鎖覺疑團處 확연히 의심 덩어리 녹아 무너졌네
    明月獨路淸風新 밝은 달은 홀로 드러나고 맑은 바람은 새로운데
    凜凜闊步毘盧頂 늠름히 비로자나 이마 위를 활보함이로다.

    고암진종 대선사께서 인가를 하시고 전법게를 내리시니

    佛祖傳心法 불조(佛祖)가 전한 심법(心法)은
    不識又不會 알지도 못하고 또한 알지도 못함이라.
    趙州茶一味 조주의 차 맛이 일미이거니
    南泉月正明 남전의 달이 정히 밝도다.

    청허휴정→ 편양언기→ 풍담의심→ 월담설제→ 환성지안→ 용성진종→ 고암상언→ 학산대원

    용성진종 대선사의 대각운동의 원찰인 대각사에서 열반하시기 전에 전법의식을 거침으로써 용성진종대선사 유지에 따라서 '환성지안(喚醒志安) - 용성(龍城) - 고암(古庵) - 학산(鶴山)'으로 이어지는 법맥이 되어 고암진종대선사께서는 임제스님의 32세손이 되며, 환성지안으로부터 2세손이고, 한암대원 스님은 임제스님으로부터 33세손이고 환성지안 스님으로부터 3세손이 되는 것이다.
    학산대원 큰스님은 현재 공주 학림사 오등선원에 주석하시면서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을 제접하고 있다.

  7. 대한불교조계종 학림사 학림사 소개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8
    학림사 소개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8

    참나를 찾는 정신문화의 수행도량 ‘학림사 오등선원’

    계룡산 학림사는 3.1운동 민족대표인 용성(龍城)스님의 의식개혁 정신문화 운동을 이어가는 곳입니다.
    용성스님의 법손인 조계종 원로의원 학산 대원 스님께서 일찍이 시민선원을 세워서 내·외국인과 종교를 초월하여 의식을 맑히는 정신문화를 전파하는 템플스테이 사찰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학림사 오등선원은 출가 스님들이 18시간 잠을 자지 않는 용맹정진을 이어가는 대한불교조계종의 대표적인 선원이며, 2017년부터 역사적인 3년 용맹정진 결사를 한 참선 수행 도량입니다. 지금 현재도 1년 용맹정진 진행 중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물질문명의 병폐와 인간성 상실의 시대에 전 국민, 전 인류가 의식을 맑히고 성숙시키는 정신문화가 확산되어야 맑고 향기로운 사회가 정착됩니다.
    참나를 찾는 수행도량 학림사에서 영원한 행복과 평안의 길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학림사 재창건의 계기

    사찰을 재창건하신 학산대원 선사(禪師)는 오랜 세월을 참선수행으로 일관해오다가 86년도에 우연히 어느 할아버지가 이 곳에 예전에 절이 있었는데 참으로 좋은 터라는 말을 듣고 이곳을 탐방하여보고 감탄하여 참으로 스님들이 수행정진할 수 있는 좋은 터라고 판단하고 이곳에 다시 절을 창건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수행(修行)으로만 일관하신 스님께서는 재정적으로나 그 밖에 여러 가지로 사정이 여의치 않아 어려운 처지에 놓여 아쉬움을 남기고 발걸음을 돌려 계룡산 갑사(岬寺)로 가시어 하룻밤 묵어가기고 생각하시고 갑사에 도착하셨는데 그날 저녁에 좌선정진하는 도중 비몽사몽간에 예사롭지 않은 노스님 한 분이 주장자를 짚고 나타나 다라오라고 하시어 기이하게 생각하고 노스님을 따라 나섰는데한참을 따라와서 노스님이 멈추어서 와보니 바로 그날 왔다가 아쉬움을 남기고 간 바로 그 자리였던 것이었다.

    노스님께서 주장자를 짚고 사방을 돌아보시고 하시는 말씀이 이 자리에 도량을 세워 수행정진 하면 많은 (道僧)이 배출된다고 하시면서 학산대원 스님의 마음을 간파하시고 말씀하시길 “스님이 뜻이 있으시면 반드시 소원을 이루게 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하셨다.
    그래서 학산대원 스님이 그 노스님께 묻기를 “스님께서는 누구시옵니까.” 하니 노스님께서 “이름을 알아 무엇하겠는가.” 하시면서 “나는 지장이라 하네.” 하시고는 홀연히 눈앞에서 사라지셨다.

    학산대원 스님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꿈같은 것이었으나 생시와 다름이 없이 생생하고 불보살의 현시(現示)로 예사롭지 않게 생각하여 다시 이곳 옛 제석사 터(지금의 학림사)로 돌오와 보시고서 사찰재창건의 마음을 굳히고 땅주인을 수소문하여 땅주인을 알게되었으나 재정적으로 여의치 않아 땅을 매입하지 못하고 사찰재창건의 시주자를 물색하였다. 그러던 중 당시 제방선원에서 공부할 때 대중공양을 위해 왔던 인연 있는 불자들을 만나게 되어 그 전후사정을 말씀하셨는데 수행정진도량을 재창건 한다는 스님의 말씀에 기꺼이 시주하기로 하여 땅을 매입한 것이 그 당시에 293평이었다. 그 후에 은법사(恩法師)이신 고암성언 대종사(大宗師)를 모시고 다시 이곳을 탐방하셨는데이곳을 보신 고암상언 대종사 스님께서 탄복하여 명당 중에 명당으로 이 터는 수행도량으로는 손색이 없다고 극찬을 하시면서 이 계룡산 일대에 선수행(禪修行) 도량이 없으니 이곳에 사찰과 선원(禪院)을 다시 창건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또한 지금은 열반하신 불국사와 법주사의 조실(祖室)을 역임 하셨던 월산 선사(禪師)께서도 당시에 이곳을 탐방하시고는 사찰을 재창건할 것과 아울러 선원을 개원(開院)할 것을 부촉 하시었다.

    그래서 1차적으로 학산대원 스님께서는 작은 토굴을 창건하고 은법사이신 고암상언 대종사(大宗師)를 모시고 부처님 점안식을 봉행하고 주석 하셨다.

    그 다음에 정식으로 1986년도에 사찰을 재창건하고 옛 제석사의 명칭을 개칭하여 “학림사”라 이름하고 점차적으로 가람을 갖추고 드디어 1995년에는 학림사내에 선원(禪院)을 건립하여 선원이름을 오등선원이라 명명하고 사부대중이 천 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학림사 오등선원의 개원식을 거행하고 아울러 학산대원 선사를 조실로 추대하였다. 또한 2001년 일반 시민들의 정신문화를 선도할 시민선원도 건립하여 일반 불자들도 정진할 수 있게 하였다.

    현재에는 학림사 경내가 약 1600여평(4.696평) 정도의 규모로서 충남지역 불교의 중요한 자리 매김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학림사(鶴林寺)는 1986년 8월 학산 대원(鶴山 大元) 대선사(大禪師)께서 창건(創建)하셨으며 오등시민선원(五燈市民禪院)은 2001년 11월 선(禪)을 대중화 생활화하기 위한 큰스님의 원력의 일환으로 개원(開院)하였다. 스님들을 위한 선원(禪院)으로는 1995년 완공한 오등선원(五燈禪院)이 있다.

    학림사와 오등시민선원의 도량경관은 계룡이 날개를 펴고 승천하는 듯한 뒷산과 좌측의 장군봉.임금봉의 위엄이 조화를 이룬다. 전면의 갑하산은 학이 나래를 펴고 학림사를 향하여 날아오는 듯하고 동남간에는 연화봉이 솟아서 제석천왕이 연꽃을 바치는 형국이며 남쪽에는 문필봉이 우백호를 형성하였다. 좌측의 청룡계곡에는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정량옥수가 흐르고 있고 밤중에는 별빛 총총한 무공해 청정지대로서 참선수행의 도량으로는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

    이 선원은 대전시 유성에서 부터는 차량으로 20여분, 공주시와도 20여분 가량 소요되는 거리에 있으며 충남대학교, 과학기술운, 한밭대학교, 목원대학교, 공주대학교, 대덕연구단지. 대전정부청사, 대전시청, 세종특별지치시,3군본부, 3군대학 등이 이 범위 안에 있어서 참선의 대중화 생활화에 최적지이다.

    오등시민선원(五燈市民禪院)은 연견평 약 200여평의 선원 안에 자체 숙식 및 휴식공간을 갖추고 있고 사무실 건물이 따로 있어서 시민들이 자유롭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으며 국립공원 계룡산 내에 위치하여 계룡산의 맑은 정기 속에 (心身) 단련에도 유익한 곳이다. 현대 대전,충남은 물론 전국의 시민들이 모여서 용맹정진을 하고 있다.

    학림사 창건시 설판 시주하신 이 선덕화 보살님께서 서울서 내려 오시면서 기념식수로 대추나무,호두나무 두그루의 묘목을 가져 오셔서 심었다. 세월이 흘러 80의 연세가 되어 와병 중 마지막으로 학림사를 참배하고 싶다고 하셔서 따님 두분이 부축으로학림사에 오셨다. 심으신 그 호두나무가 처음으로 호두가 세 개 달린걸 보시고 눈물을 글썽이시며 나는 늙었지만 “내가 심은 호두나무가 결실을 세 개나 거두었구나!”하시며 다시는 내려오지 못할텐데 기념으로 시를 지어 주십사 하시기에 호두나무 시를 짓게 되었다.

  8. 학림사 템플스테이 학림사 템플스테이 심조원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8
    학림사 템플스테이 심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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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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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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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학림사 템플스테이 학림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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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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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림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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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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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지장정사 템플스테이 지장정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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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장정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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