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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손선지 베드로와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의 고향
조선시대에는 임천현에 속했는데 임천현은 이웃 부여현, 석성현, 홍산현과 함께 종6품 현령이 다스렸던 고을이다. 지석리(支石里)는 일명 괴인돌이라고 불렀는데 물론 이는 고인돌을 이른다. 고인돌의 한자 명칭은 지석묘(支石墓)이며 청동기 시대의 무덤이다.
현재 충화면사무소에서 서쪽 1.7km 지점 팔충사 경내에 고인돌 3기가 남아 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마을 이름을 한자로 지석(支石), 또는 석촌(石村)이라고 부르다가 1914년부터 지석리라 불렀다.
이 고인돌에 대한 전설도 있다. 백제시대의 삼충신이 나라를 지키려 사비성으로 갈 때 이 바위를 하나씩 가져다 놓고 충성을 맹세했다고 하여 일명 표충암(表忠岩)이라고도 불렀는 것이다.
이 작은 마을에서 박해시대 천주교를 용감하게 증언하다가 순교한 두 분이 태어났으니 바로 성 손선지 베드로와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다.
1백여 년 박해사에서 가장 혹독했던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두 성인은 관가에 끌려가 팔이 부러지고 살이 터져 나가는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았고, 형장에서도 오히려 축복의 순간을 맞는 기쁨에 용약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두 성인전주 숲정이에서 참수 치명했으며 유해는 지금 천호 성지에 묻혀 있다.
두 분 모두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두 분의 약전을 살펴본다.
성 손선지 베드로(1820-1866)
성 손선지 베드로(Petrus)는 충청도 임천 지방의 고인돌(지석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남달리 신앙과 품행이 뛰어났다. 어른이 되자 샤스탕(Chastan)신부는 그를 전교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결혼하여 슬하에 두 자녀를 두었던 그는 인자한 가장으로서 자녀 교육에 힘쓰며 사소한 일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아 모범적인 신자 가정을 이루었다. 그가 거처하던 집은 마을의 공소였기 때문에 더욱 세심한 주의와 노력으로 언제나 신자들을 위하여 봉사하며 살았다. 그가 47세가 되던 1866년 추수기에 접어들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좀 완화되는 듯하다가 얼마 후 더욱 혹심한 박해로 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의 공소 예절에서 그는 신자들을 보고 “곡식이 익으면 바람결에 날리어 땅에 떨어지는 법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가올 박해에 나 같은 사람도 당신 곳간에 가두시려는 모양이군요.” 하며 자기는 순교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무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피신하라고 당부하였다. 그해 12월 3일 저녁 그는 가족과 함께 기도를 하고 있는데 집 밖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자, 즉시 상황을 알아차리고서 재빨리 가족들에게 피하라고 말한 뒤에 자신이 교우임을 자백하여 순순히 체포되었다. 포졸들은 그를 구진포리 주막까지 데리고 가 먼저 이곳에 붙잡아 온 다른 신자들과 함께 밤을 지내게 하였다.
그 사이 손 베드로의 어머니는 마을 원님을 찾아가 아들을 좀 구해달라고 애걸하였다. 또 손 베드로의 아들이 감영에 수시로 드나들며 아버지의 구명운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아들의 효심에는 감동하였으나 크게 꾸짖고는 “나에게는 큰 유혹이 된다. 내 말을 듣는 순간부터 그런 짓을 다시는 하지 말고,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감영에 오지 말라”고 하면서 일을 중지시켰다.
다음날 그는 전주 감사 앞으로 압송되었다. 그가 전교회장이라는 것을 알고 고문과 주리를 잔인하게 가하다 못해 그의 팔까지 부러뜨렸다. 그가 처형장으로 나설 때 남아서 기다리는 다른 신자에게 자기 옷을 주면서 “나는 이제 죽으러 가오. 이 옷은 더 이상 내게 소용이 없으니 이 옷을 입으시오”라고 말하였다. 이윽고 사형장에 도착한 그는 하늘을 향해 ‘예수 마리아’를 부르고 기도했는데, 희광이가 칼로 그의 어깨를 내려치자 그는 머리를 쳐들고 “장난하지 마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는 전주 숲정이에서 1866년 12월 13일에 순교하였고, 이때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1801-1866)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는 충청도 어느 양반집의 자제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많이 하여 원님까지 지냈으며, 학식과 교양과 인격을 겸비한 사람으로서 영세한 후부터는 모든 관직을 마다하고 오로지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박해로 인하여 마을을 떠난 그는 전라도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다가 만년에야 전주의 대성 지방 신리골에 정착하게 되었다. 신리골에 살면서 그는 신자들에게나 비신자들에게나 차별 없이 상대했고, 또 교리를 밝혀 소상하게 가르쳐 주었을 뿐 아니라 예의범절도 잘 가르쳐 주었음으로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으며 살았다. 그런데 전라도 일대에도 박해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게 되자, 그는 심부름꾼으로 오사영을 전주로 보내어 정세를 알아보게 하였다. 오사영은 비신자인데다가 고을의 관직에 있는 자였으므로 전주 포청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었고, 또 자원하여 신자들을 도와 성심껏 협조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떠난 지 이틀이 지나도 아무런 전갈이 없자 정 바르톨로메오는 조금은 안심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수상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12월 3일 저녁 포졸들이 두 패로 나눠서 한 무리는 성지동 마을로 들어가 조화서 베드로와 그의 아들 조윤호 요셉 그리고 이명서 베드로를 체포하고, 다른 한 무리는 대성 마을로 침입하였다. 그래서 그는 다른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근처 주막으로 끌려가 성지동에서 체포된 다른 세 명과 만나게 되었다. 다음날 일곱 사람은 지방 감사의 집까지 압송되어 갔는데, 그들 모두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 차 있었다. 감사 집에 도착해서는 즉시 창고에 갇혀 있다가 얼마 후 불려나와 고문을 받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정 바르톨로메오가 유혹에 넘어가 배교할 듯 했었는데, 조화서 베드로가 격려하여 다시 생각을 돌리고 마음을 잡아 평온한 마음으로 순교에 임할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정 바르톨로메오는 순간적이나마 마음이 약해졌음을 참회하면서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용감한 마음으로 온갖 고문을 잘 이겨냈다. 그는 전주 숲정이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치명했다. 이때가 1866년 12월 13일이요, 그의 나이는 66세였다.
이 성지가 조성된 것은 1984년 두 순교자가 성인 반열에 오른 후였다. 당시 지석리에는 손선지 성인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는데, 시성식 이후 가난한 생활 가운데서도 손선지 성인의 시성 기념비라도 세워 달라고 홍산 성당에 밭을 기증했다. 그래서 순교사적지를 관리하고 있는 홍산 성당은 두 성인의 생가터를 정확히 확인할 수 없자 동네 땅 일부를 매입해 1988년 12월 13일 현 위치에 두 성인의 출생 기념비와 50여명 정도가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야외제대와 기념비, 안내표지석를 세웠다. 2014년에는 두 성인의 출생 기념비를 새로 세우고 성지 표지석과 약간의 주차공간을 마련하는 등 주변 조경공사를 마무리해 새롭게 단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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