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중 오전 9시~ 오후 5시 30분
주말 및 공휴일 오전 8시~오후 5시 30분
매표마감 5시 30분, 퇴장시간 6시 30분. 연중무휴. 반려동물 입장 불가
809년(헌덕왕 1)에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로서, 처음에는 해안사라 하였다. 이 절은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의
발원으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이차돈이 순교한 이듬해인 528년(법흥왕 15)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과 기윤부인이 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574년(진흥왕 35)에는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이 이 절을 중창하고 승려들을 득도하게 하였으며, 왕의 부인은 비구니가 된 뒤 이 절에다 비로자나불상과
아미타불상을 봉안하였다. 또한, 670년(문무왕 10)에는 이 절의 강당인 무설전을 짓고 신림ㆍ표훈 등 의상의 제자들을 머물게
하였다고 전하다. 이들 기사는 신라 불교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다소의 모순이 있지만, 현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의
복장기에서 이 불상들이 681년(신문왕 1) 4월 8일에 낙성되었다고 하였으므로 당시의 불국사가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대웅전과
무설전을 갖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국사가 대찰이 된 것은 김대성에 의해서였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절은 75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774년(혜공왕 10)
12월에 그가 목숨을 마칠 때까지 완공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뒤 국가에서 완성시켰 다. 따라서, 이 절은 김대성 개인의
원찰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원찰로 건립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준공당시 이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 등 5개의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밖에도 그 위치를 알 수 없는 건물의 이름이 45종이나 나열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큰 건물로는
오백성중전ㆍ천불전 등이 있고, 이 두개의 건물만큼 크지는 않아도 중요한 건물로는 시왕전ㆍ십륙응진전ㆍ문수전 등이 있다
또한
승방이라고 생각되는 동당ㆍ서당ㆍ동별실ㆍ서별실ㆍ청풍료ㆍ명월료ㆍ객실ㆍ영빈료 등이 있었으며, 그밖에 누ㆍ각ㆍ문ㆍ고ㆍ욕실 등이 그 중에
포함되어 있다. 김대성이 중창한 뒤 임진왜란 전까지 이 절은 9차례의 중창 및 중수를 거쳤다. 887년(진성여왕 1)과
1024년(현종 15)에는 규모 미상의 중수를 하였고, 1172년(명종 2)에는 비로전과 극락전의 기와를 갈았으며,
1312년(충선왕 4)에도 규모 미상의 중수를 하였다. 1436년 (세종 18)에는 대웅전과 관음전과 자하문을 중수하였고,
1470년(성종 1)에는 관음전을, 1490년에는 대웅전과 각 절을 중수하였으며, 1514년(중종 9)에는 극락전의 벽화를,
1564년(명종 19)에는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1593년(선조 26) 5월 왜구가 침입하여 백성들과 물건을 노략질할 때 좌병사는
활과 칼 등을 이 절의 지장전 벽 사이에 옮겨다 감추었고, 왜병 수십명이 이 절에 와서 불상과 건물과 석조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감탄하다가 무기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여덟 사람을 밟아죽이고 절을 불태워버렸다. 그때, 난을 피하여 장수사에 와
있었던 담화가 문도를 이끌고 불국사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미 대웅전ㆍ극락전ㆍ자하문 기타 2천여칸이 모두 불타버린 뒤였고,
금동불상과 옥으로 만든 물건과 석교와 탑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때 타버린 목조건물들은 20년이 지난 뒤부터 점차
복구되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의 경우, 해안이 1612년(광해군 4) 경루와 범종각과 남행랑 등을 복구하였고
1630년(인조 8)에는 태호가 자하문을 중수하였으며, 1648년에는 해정이 무설전을 복구하였다.
대웅전은
1659년(효종 10) 천심이 경주부윤의 시주를 얻어 중건하였다. 이밖에 안양문ㆍ극락전ㆍ비로전ㆍ관음전ㆍ나한전ㆍ시왕전ㆍ조사전만이
이때 중건되었을뿐 나머지는 복원되지 못하였다. 그뒤 또다시 퇴락되어가 던 이 절은 대통령 박정희의 발원으로 중창되었다. 이때의
대복원공사를 위하여 1969년에는 문화재위원들의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1970년 2월에 공사를 착공하여 준공하였다. 당시까지
유지로만 남아 있던 무설전ㆍ 관음전ㆍ비로전ㆍ경루ㆍ회랑 등은 이때 복원하였고 대웅전ㆍ극락전ㆍ범영루ㆍ자하문 등을 새롭게 단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The Bulguksa was built in 528, the year after Buddhism was officially
accepted by the Silla Dynasty in the reign of King Beopheung. In order
fulfil the wishes of his mother, Lady Yeongje and his wife, Queen Gi
Yun, he built a temple with the names Beopryusa or Bulguksa. Later, in
574, the temple was rebuilt by the Lady Jiso who was the mother of King
Jinheung, and it is recorded that statues of Vairocana Buddha and Amita
buddha were added at this time.
In 670, the Museoljeon was
constructed and in 681 statue of Sakuamuni Buddha. In 751, Minister Kim
Daesung started rebuilding. However, he died in 774 before completing
the reconstruction. The government took over and completed Bulguksa as a
great temple(according to Samguk yusa, a book on 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s). The grounds of the temple were divided into five
sections: the Daeungjeon, Geungnakjeon, Birojeon, Gwaneumjeon, and
Jijangjeon areas. In addition, there were about 100 Other buildings and
facilities. The entire complex went through several remodeling until
eventually most of it was burned to ashes by Japanese pirate invaders.
In 1612, the right and left walkways, a bell tower, and the southern
quarter were rebuilt. By the middle of 1700 the east and west quarters,
the central quarter, and the original layout was nearly restored. From
1963 to 1973, the Mooseoljeon, Gwaneumjeon, Birojeon, and walkways and
corridors were rebuilt and the Daeungjeon, Beomyeongru, Jahamun and
stone platforms were restored to their present appearence. In 1995,
Bulguksa was designated a world cultural heritage site along with
Seokguram by UNESCO. Bulguksa has about 1,400 year of history and it has
been an important Buddhist seminary in Korea. Many venerable monks such
as Euisang, Shinrim, Pyohun, Daehyun, Haeweon, Buseol, Damhwa, Haean,
Taeho, Haejong, Taein, and Weolsan in this temple as head monks.
新罗佛教被公认为国教的第二年,
即公元528年, 佛国寺由法兴王的母亲迎帝夫人和王妃己尹夫人所创建,最初寺名为法流寺。公元574年, 真兴王的母亲只召夫人重建该寺,
并安放了毗卢舍那佛和阿弥陀佛佛像。公元670年创建了无说殿,公元681年完成了大雄殿的释迦牟尼佛佛像。
公元750年左右由宰相金大城再次着手重建,直到公元774年由国家出资才告修建完工,由此形成了大伽蓝。寺院的布局以大雄殿为中心,大致分为极乐殿、毗卢殿、
观音殿、 地藏殿等5个部分。据传说,寺院除此以外还包括多达100余所的附属建筑。
但因为倭寇的人侵,绝大部分建筑被烧毁殆尽,唯有金铜佛像和石造物幸免于难。1612年左右佛国寺开始复原经楼、梵钟阁、南行廊等建筑.直至1700年代中叶,总算恢复了伽蓝的原貌。由于佛国寺日渐衰退,寺院逐渐失去了原来的风貌。因此,从1969年到1973年间又在旧址上重建了无说殿、观音殿、毗卢殿、经楼、回廊等建筑,并重修了大雄殿、泛影楼、紫霞冂、石坛等。1995年佛国寺与石窟庵同时被指定为世界文化遗产。具有1400多年历史的佛国寺曾有义湘、神琳
表训、大贤、海儷、浮雪、昙华、海眼、泰湖、海净、太仁、月山等历代高僧居此弘扬佛法,以至成了韩国佛教的重点道场。
仏国寺は新羅で仏教が公認された翌年の528年に、法興王の母・迎帝夫人と王妃・己尹夫人により、
法流寺と言う名で創建された。その後、574年に真興王の母・只召夫人によって最初の増改築工事が行われて、
毘盧遮那仏と阿弥陀仏の二体を安置したと言う記録が残っている。また、670年には無説殿が建てられ、681年には大雄殿の釈迦牟尼仏を完成した。751年には宰相金大城によって二回目の増改築工事が開始されたが彼が774年に死去した後、国家の手で大伽藍を構えることに至った。
伽藍褪置は大きく分けて大雄般、極楽殿、毘盧殿、観音殿、地蔵般で五つの区域から成り、本堂をはじめ百余りの付属建物や施設があったと言う。しかし、1593年壬辰倭乱(文禄の役)の時、大部分が戦火に遭って焼失した。兵禍を免れたのは金鋼仏と石造物だけであった。1612に年には左右の経楼、鐘閣、
南の行廊などが復旧された。1700年代の中ごろまでに再建され、ようやく伽藍らしさを取り戻すに至った。その後、朝鮮政府が排仏政策をとったために仏国寺は衰退し、昔日の偉容を失った。仏国寺が今日のような姿になったのは、1969年から1973年にかけての復元大普請の成果である。そして1995年、石窟庵とともにユネスコの世界文化遺産に指定された。1400年余りの長い歴史をもつ仏国寺は、義湘をはじめ、神琳、表訓、大賢、海円、浮雲、雲華、海眼、泰湖、海浄、太仁、月山ら禅教の高僧大徳が掛塔して韓国仏教の根本道場としての面目を施した。
가람배치 및 당우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옮겨놓은 것이다. 불국을
향한 신라인의 염원은 세가지 양상으로 이곳에 나타나 있다. 하나는 <법화경> 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무량수경>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이며, 또 다른 하나는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이다. 이 셋은 각각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전체의 구성을 통하여 그 특징적인 표현을 이루어놓았다.
석단과
석교 불국사의 경내는 석단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다. 이 석단은 그 아래와 위의 세계가 전혀 다른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석단의 위는 부처님의 나라인 불국이고, 그 밑은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한 범부 의 세계를 나타낸다. 석단의 멋은 소박하게
쌓아올린 거대한 돌의 자연미에 있고, 대척적으로 병렬된 2단의 석주에 있다. 크고 작은 돌을 함께 섞어 개체의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고, 굵고 굳센 돌기둥과 돌띠로 둘러 견고한 통 일과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석단은 불국세계의 높이를 상징함과 동시에 그 세계의
반석 같은 굳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두 모퉁이 위에는 경루와 종루를 만들어서 한없이 높은 하늘을 향하여 번져가는
묘음의 위력 을 나타내었다. 이 석단에는 대웅전을 향하는 국보 제23호의 청운교ㆍ백운교와 극락전을 향하는 국보 제22호의
연화교ㆍ칠보교의 두 쌍의 다리가 놓여 있다. 청운교ㆍ백운교는 석가모니불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자하문에 연결되어 있고, 칠보ㆍ연화교는
아미타불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안양문에 연결되어 있다. 이 가운데 청운교ㆍ백운교는 33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33계단은 33천을
상징하는 것으로 욕심의 정화에 뜻을 두고 노력하는 자들이 걸어서 올라가는 다리이다. 이 다리는 1686년(숙종 12)과 1715년
2차에 걸쳐 중수하였고, 1973년의 복원공사 때 없어졌던 돌난간도 복원하였다.
자하문과 회랑 청운교와 백운교를
오르면 자하문이 있다. 자하문이란 붉은 안개가 서린 문이라는 뜻이다. 이 자하문을 통과하면 세속의 무지와 속박을 떠나서 부처님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부처님 의 몸을 자금광신이라고도 하므로 불신에서 발하는 자주빛을 띤 금색 광명이
다리 위를 안개처럼 서리고 있다는 뜻에서 자하문이라 한 것이다. 세간의 번뇌를 자금색 광명으로 씻고 난 뒤, 들어서게 되는
관문이다. 자하문의 좌우에는 임진왜란 후의 중건 때에 만든 동서회랑이 있었지만 1904년경에 무너졌고, 회랑의 양 끝에 역시
경루와 종루가 있었지만 동쪽 경루는 일찍이 없어지고 서쪽의 종루만 남아 있다가 1973년 복원때에 좌경루와 더불 어 옛 모습을
찾았다. 이 회랑은 대웅전의 옆문과 통하게 되어 있는데, 회랑의 구조는 궁중의 것과 비슷하다. 국왕은 세간의 왕이요, 불은
출세간의 대법왕이라는 뜻에서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서회랑을 건립하는 수법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참배객은 최초의 존경을 표하는
뜻에서 정면문으로 출입하지 않고 이 회랑을 통하여 대웅전으로 나가게 된다.
범영루와 경루 범영루는 처음에
수미범종각이라고 불렀다. 수미산모양의 팔각정상에 누를 짓고 그 위에 108명이 앉을 수 있게끔 하고, 아래에는 오장간을 세울 수
있게끔 하였다. 여기에서 108이라는 숫자는 백팔번뇌를 상 징하는 것으로, 많은 번뇌를 안은 중생들을 제도한다는 의미에서
108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범영루는 751년에 건립하였고, 1593년에 불탄 뒤 1612년과
1688년에 중건하였으며, 1708년(숙종 34)에 단청을 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73년의 복원공사 때 중건된 것으로 옛
모습대로 정면 1칸, 측면 2칸이며 3층으로 된 아담한 누각이다. 범영루의 동편에는 좌경루가 있었으나 조선말에 완전히 없어졌던
것을 1973년의 복원 공사 때 재건하였다. 경루는 경전을 보존한 곳으로 보아야 하겠지만 원래의 구조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석가탑과
다보탑 이 두 탑은 불국사의 사상 및 예술의 정수이다. <법화경>에 근거하여 세워진 이 탑은 영원한 법신불인
다보여래와 보신불인 석가모니불이 이곳에 상주한다는 깊은 상징성을 가진 탑으로서, 불교의 이념을 이 땅에 구현시키고자 노력한 신라
민족혼의 결정이기도 하다.
대웅전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불국토를 표현하는 일곽의 중심을 이룬다. 현존하는 건물은
1765년(영조 41)에 중창된 것이나, 그 초석과 석단 등은 대체로 신라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대웅전 안의 중앙 정면에는
수미단이 있고, 그 위에 목조석가삼존불이 안치되어 있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미륵보살과 갈라보살이 협시하고 있으며,
다시 그 좌우에 흙으로 빚은 가섭과 아난의 두 제자상이 모셔져 있다. 무설전 대웅전 바로 뒤에 있는 무설전은 불국사의 여러 건물
가운데 제일 먼저 만들어진 건물이다. 670년에 이 건물을 짓고 문무왕은 의상과 그의 제자 오진 표훈 등 몇 명의 대덕에게
<화엄경>의 강론을 맡게 하였다. 이 건물 도 1593년 임진왜란 때에 불타 뒤 1708년에 중건하여 1910년
이전까지 보존되었으나, 그뒤 허물어진 채 방치되었다가 1972년에 복원하였다. 경론을 강술하는 장소이므로 아무런 불상도 봉안하지
않고 설법을 위한 강당으 로서만 사용하였으며, 무설전이라고 이름붙인 까닭은 진리의 본질, 불교의 오의가 말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한 것이다.
극락전과 안양문 입구에서 연화교ㆍ칠보교을 올라서서 안양문을 지나면 극락전에 이른다.
아미타불이 있는 서방의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곳이다.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이 일곽도 751년에 지어졌고, 그 당시에는 회랑을
비롯하여 석등 및 많은 건물과 석조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건물 및 석조물들은 극락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신라 중기의
전형적인 정토계사찰의 구조로서 매우 정돈된 것이었다. 안양문은 임진왜란 때 불탄 뒤 1626년과 1737년에 중창하였다. 안양은
극락의 다른 이름이며, 안양문은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안양문을 넘어서면 극락전에 이른다. 견고한 석단 위에 목조로
세워진 극락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뒤 1750 년에 오환ㆍ무숙 등이 중창하였고 1925년 3월에 다시 중수하였는데 목조으
수미단은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최근까지 극락전 안에는 아미타불과 비로자나불의 두 불상이 안치되어 있었는데, 비로자나불은 원래
대웅전에 있던 것을 일제의 중수 때 이곳으로 옮겼던 것이며, 지금은 비로전을 옮겼다. 극락전 안의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국보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 극락전에서 대웅전으로 통하여 올라가는 길에는 3열을 지어 쌓은 계단이 있다. 그 각각은
16계단이어서 모두 합하면 48계단이 된다. 이것은 아미타불의 48원을 상징한 것으로, 48원을 성취하여 극락세계를 건립한
법장비구의 뜻을 기린 것이다.
관음전 무설전 뒤의 한층 높은 언덕에 있다. 751년 김대성이 6칸으로 지었던 것을
1470년(성종 1)에 중수하였는데, 1593년 임진왜란의 병화로 불타버렸다. 그 직후 1604년에 해청이 중창하였고,
1694년(숙종 21)과 1718 년에 다시 중창하였다. 원래 이 관음전 안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이 관음상은
922년에 경명왕비가 낙지공에게 명하여 전단향목으로 만든 것이었다. 속전에 의하면 중생사의 관음상과 함께 영험력이 크다 하 여
매우 존중받았다고 한다. 이 관음상은 1674년(숙종 즉위년)과 1701년ㆍ1769년의 세 차례에 걸쳐 개금되었다. 마지막
개금기록으로 보아 18세기 중엽까지는 이 관음상이 있었음이 틀림없는데, 언제 관음상이 없어졌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는
1973년의 복원 때 새로 조성한 관음입상을 봉안하고 있다.
비로전 관음전 아래 서편에 있으며,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있다. 이곳에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을 따로 건립한 것은 <화엄경>에 의한 신앙의 흐름이 불국사의 성역 안에 자리잡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비로전은 751년 김대성이 18칸으로 지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60년(현종 1)에
중수하였으나, 조선말에 무너져서 터만 남아 있었다. 1973년의 복원공사 때에 현재의 건물을 지어서 극락전에 임시로 안치하였던
국보 제26호의 비로자나불을 옮겨 봉안하였다.
부속 암자 및 기타 유물 불국사를 처음 지을 때 토함산일대에는 일곱개의
암자가 있었다. 토함산에 칠보가 많이 나기 때문에 칠보동산이라고 하였으며, 따라서 일곱군데에 암자를 짓고 금ㆍ은ㆍ진주 등 칠보의
이름을 붙였다 고 하나 지금은 그 유지를 찾을 수 없다. 불국사 북쪽 탑동에는 길대성이 751년에 창건하였던 몽성암과 임진왜란 때
잿더미가 된 암자들을 통합하여 만들었던 심적암, 1653년에 승려 지원이 치술령 서쪽 기슭에 세웠던 보덕 굴ㆍ중굴ㆍ상굴 등이
있었다. 그밖에도 청련암ㆍ백련암ㆍ운수암ㆍ천검암ㆍ운창암ㆍ신도암ㆍ임방암 등이 있었다. 이밖에도 칠보교 앞에는 두 쌍의 간주가 서 있고
거대한 석조가 있다. 또한 불국사 경내에는 보물 제61호인 사리석탑 외에도 5기의 부도가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