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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8교구 백양사 백양사 창건기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8
    백양사 창건기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8

    632년(무왕 33) 여환이 창건하여 백암산백양사라고 하였으며, 1034년(덕종 3)중연이 중창하면서 정토사라 개칭하였고, 1350년(충정왕 2) 각진국사가 3창하였다. 다시 백양사로 개액한 것은 1574년(선조 7)환양이 중건 하면서 부터이다. 환양이 백양사에 주석하면서 매일 <법화경>을 독송하니 백양이 경을 읽는 소리를 듣고 몰려오는 일이 많아 절 이름을 백양사라 개칭하고 승려의 법명도 환양이라 하였다.

    그 뒤 1786년(정조 10) 환성이 중건하였고 1864년(고종 1) 도암이 중건하였으며, 1917년 송만암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암은 45세 때부터 백양사 주지직을 맡아 30년 가까이 주석하면서 불사에 진력하는 한편, 강원을 개설하고 중앙불교전문학교장을 겸임하면서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백양사는 31본산시대의 본산이었으며, 현재 부속말사 26개소를 관장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극락보전ㆍ명부전ㆍ칠성각ㆍ진영각ㆍ천왕문ㆍ선실ㆍ요사채와 범종ㆍ법고ㆍ목어ㆍ운판 등의 사물 을 소장하고 있는 범종각이 있다. 이 가운데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43호인 대웅전은 1917년 송만암이 백양사를 중건할 때 건립한 것으로 내부에는 석가여래삼존불과 1979년 보각행이 조성하여 새로 모신 10척 높이의 불 상, 그 왼편에 용두관음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또한 대웅전내 오른쪽으로 바늘귀를 꿰는 모습, 등을 긁는 모습 등 해학적인 모습을 한 나한상 16체가 봉안되어 있다.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32호인 극락보전은 300여년 전에 지은 것으로서 백양사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조선 선조 때 환양이 세웠다고 전하며, 건평 50㎡에 세워진 정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 1973년 단청하였으며 1976년 보수하였다. 명부전은 1896년에 건립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이며, 각 주 두마다 공포가 장식되어 있다. 전내에는 흙으로 조성한 시왕과 흙에다 금을 도금한 지장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44호인 사천왕문은 백양사의 정문으로 1917년 건립되었으며, 현재 문의 오른쪽에는 지국천왕과 증장천왕, 왼쪽에는 광목천왕과 다문천왕이 봉안되어 있다.

    이밖에도 대웅전 뒤편의 팔정도를 상징한 팔층탑에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3과가 안치되어 있으며, 부도전에는 백양사에서 배출, 주석하였던 휴정ㆍ유정ㆍ모운ㆍ태능ㆍ범해등 18승려의 사리와 유골을 모신 석종 모양의 탑과 비가 있다. 이 중 소요대사부도는 백양사 재흥에 힘쓴 태능의 유업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탑으로, 그 둘에에는 용이 구름을 감고 하늘로 올라가는듯한 조각이 되어 있고, 좌대에는 연잎들이 조각되어 있다. 이 부도는 석종형으로서 상대ㆍ유곽ㆍ하대 등에 양각으로 섬세하게 조각되었으며, 기단은 복련으로 덮은 위에 2단의 몰딩을 두어 종신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이 부도는 1974년 12월에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다.

    백양사의 사내암자로는 약사암과 영천굴, 1351년에 창건한 청류암, 1981년에 지은 수도도량 물외암, 천진암 등이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부터 있어온 운문암 등 많은 암자들이 6ㆍ25 때 불타버렸다. 이 중 운문암은 6ㆍ25 전 까지만 해도 백양사 8개 암자 중 대표암자였으며, 백양사 뒤 계곡을 끼고 3.5Km 위에 위치한다. 고려 때 각진이 창건했다는 운문암은 백양사 수도도량 중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 있으며, 조선시대에 신승 진묵의 일화가 전해 오고 있다. 진묵이 임진왜란 직전 이 암자에서 차를 달이는 소임을 맡고 있었는데, 어느날 전체 대중이 차를 달이는 운문암 중을 조사로 모시라는 현몽을 한 뒤 진묵을 조실로 앉혔다. 어느날 진묵은 “내가 올 때까지는 이 불상을 도금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으므로 지금도 그 불상은 거뭇한 그늘색을 띤 채 진묵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또 백양사 오른쪽 계곡 상부에 있는 국제기는 천신께 제사를 올리던 곳으로서 호남일대에 재난이 있을 때에는 나라의 명을 받아 이곳에서 천제를 올렸다. 그 유래는 조선시대 영조 때 호남지방에 대유행병이 나돌아 호남감사 가 영조에게 상소를 올리자 영지를 택하여 크게 기도를 드리라고 하였으므로, 이곳 바위에데 ‘국제기’를 음각하여 새기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또 영천굴은 20평 남짓한 천연석굴로 단칸의 영천암이 있는 곳이다. 굴 속의 바위큼에서 샘이 솟아나오는데 이를 영천이라 한다. 장마때나 가뭄 때나 항상 일정한 물이 흐르는 이 샘에는 옛날 한 사람이 먹을 만큼의 쌀이 나왔는데, 하루는 어떤 손님이 와서 더 많이 나오라고 작대기로 쑤셨더니 그 뒤로는 쌀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또 백양십이경의 하나인 일광정에서는 해마다 사월초파일에 불가의 시련법식이 거행되며, 백양사 뒤의 학바위는 고려 때부터 조선 중종 때까지 천제를 지낸 곳이라 한다. 절 일대의 비자나무는 천연기념물 제 153호로 지정되어 있고 약 3만그루가 밀집하고 있어 춘백양 추내장의 칭호를 얻고 있다.

    이밖에도 백암산의 학봉ㆍ상왕봉ㆍ사자봉ㆍ가인봉 등의 절경과 설경 등이 어울려 백양사일대는 예로부터 조선팔경의 하나로 유명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632년 여환선사 개창, 백암산, 백암사라 칭함
    1034년 중연선 정토사(淨土寺)라 개칭
    1350년 각진국사 3창, 운문암, 영천암, 청류암 건립
    1352년 천진암, 약사암, 물외암 건립
    1574년 환양선사 백양사라 개칭
    1786년 도암선사 4창, 명부전, 진영각
    1864년 만암대종사 5창, 대웅전, 사천왕문 건립

    ~현재
    1950년 500나한전, 쌍계루, 암자소실
    1980년 운문암, 물외암, 금강암 복원
    1985년 쌍계루 복원
    1996년 고불총림 승인
    1997년 종무소, 공양소, 중화당 건립
    1998년 국제무차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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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양사는 노령산맥 끝자락에 호남평야를 마주하고 솟아 오른 백암산(741m)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왕조의 정치적 설계자인 정도전은 ‘이 산만은 장성 북쪽 30리에 있는데 이름을 白巖이라 하고, 혹은 암석이 모두 흰색이라서 그렇게 부른다고도 한다. 석벽이 깎아지른 듯 험하고 산봉우리가 중첩하여 그 맑고 기이하며 큰 모습이 실로 한 곳의 명승지가 될 만하다.’고 하였다. 백양사는 백암산 백학봉 아래 상왕봉, 사자봉, 금강봉, 월영봉, 수령봉 등 여러 봉우리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조선초 백양사에 주석하였으며 선종판사였던 晦堂 中皓는 백암사의 사세에 대하여 ‘우뚝한 산 빛은 항상 푸르게 솟아 있고 청정한 시냇물 낮에도 햇빛을 머금었네.’라고 하였다. 우암 송시열의 후손이자 애국지사인 宋秉璿(1836-1905)은 백암산이 ‘奇麗幽壯 爲南國名山’이라고 하였다. 薝園 鄭寅普(1893-?)는 ‘백양사는 본해 기인한 승경을 독차지하고 있는데다가 건물과 구조가 그윽하고 아담하기 산수와 걸맞다.’고 하였다.
    백암산은 전라남도 북쪽 끝에 있는 장성군 북하면에 소재한다.

    장성 지역은 백제의 변방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백제 말기에는 불교가 전래되었을 것이다. 장성 지역의 불교와 관련된 문헌 기록은 후대의 것이지만 백양사가 가장 오래된 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근현대 국학자인 담원 정인보는 ‘호남의 산들은 빼어났건만 거드름스럽지 않고 바다에 가까워 어여쁘고 어여쁜데 백암산이 문득 우뚝해라.’라고 하였다.
    정도전이 1377년에 지은 「白巖山淨土寺橋樓記」에 의하면 ‘신라 때에 어떤 異僧이 처음으로 절을 짓고 살면서 이름을 白巖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후기 문신 洪鍾應(1783-?)이 1859년에 지은 것으로 알려진 백양사의 「極樂殿佛糧禊序」에 의하면 ‘633년에 백양사가 창건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異僧’은 대개 如幻으로 보고 있다. 즉, 근현대 불교학자인 無能居士 李能和(1869-1943)는 ‘백양사는 백제 무왕 33년(632) 壬辰에 신라 고승 如幻禪師가 梵宮을 개창하였다.’고 하였다. 退耕 權相老(1879-1965)는 ‘新羅 如幻祖師 開山道場’이라고 하였다. 鄭寅普가 1926년에 지은 「白羊寺紀蹟碑銘」에 의하면 ‘여환이 백제 무왕 때 창건하였다.’고 하면서 ‘如幻의 뒤로, 覺眞이 다시 넓히었고, 중간에 임진 병화로 재 된 걸 겨우 회복, 道巖이 계획했다네. 曼庵이 이 일을 이어 받아……옛날 盛時와 다름 없었으니.’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632년(백제 무왕 33)에 如幻이 사찰을 창건하고 절 이름을 白巖寺라고 하였다고 간주해야 할 듯하다.
    백양사의 절 이름은 백암사, 정토사(또는 정토선원)로 불리다가 현재의 백양사로 불리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백암사는 백제 무왕대 異僧 창건시의 명칭이며 宋 景平間에 淨土禪院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法豕가 1341년 지은 「白巖山淨土寺事蹟」에는 각엄존자께서 문도 등 산중의 碩德을 불러 모아 뒷일을 부촉하면서 ‘저 내 본사인 백암산 정토사는 삼남의 소금강’이라고 하여 정토사라고도 하였다. 「白巖寺轉藏法會堂司榜」에 의하면 정토사는 15세기에 다시 백암사로 불리었다. 중종대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정토사로 다시 개칭되었다가 조선중기 이후 백양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과는 달리 백양사의 이름은 조선중기인 1574년(선조 7) 喚羊禪師가 정토사를 개칭한 것에서 유래한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조선후기 읍지류인 「여지도서」 사찰조와 「장성부읍지」 사찰조, 불교 사지류인 「범우고」와 「가람고」에도 여전히 ‘淨土寺’로 기록되어 있는 등 조선후기에도 여전히 정토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19세기 백양사를 중창한 道巖 印正(1805-1883)은 1840년(헌종 6) 이후 정토사를 중창하여 사명을 백양사라고 하였다는 사실에 무게감이 실리기도 한다.
    이러한 백양사는 창건 이후 대체로 크게 다섯 차례의 중창이 있었다.

    즉, 백제의 고승 여환이 백제 무왕때 백암사를 개창한 후 명종 대 승려 中延이 중창하면서 절 이름을 고쳐 ‘淨土寺’라 불렀다. 1350년(고려 충정왕 2) 覺眞國師 復丘가 3창하였으며, 1786년(정조 10) 喚惺이 4창하였고, 조선말기 고종 원년 道巖이 5창하였다. 그리고 근현대의 고승 曼庵이 6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양사의 역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창건 이래 여말선초의 시기에 수선사 제13세 사주 각진국사 복구 이후 고성이씨 가문 출신의 승려들에 의하여 사세를 확장하였다는 사실이다.
    백암사는 高麗 侍中 杏村 李文貞公의 願刹인데, 그의 아들 平齋 文敬公과 손자 容軒 國老가 각기 先人의 뜻을 이어서, 출가한 자손 중에 操行이 있는 자를 가리거나 혹은 승려 중에 명망이 있는 자를 간택하여 이 절을 주관하게 함으로써 서로 전하여 수호해 온 지가 이미 100여 년이 되었다.
    억불의 시기인 조선후기에는 청허 휴정의 문도 편양 언기의 적손인 喚醒 志安(1664-1729)의 문손들이 호남지역 불교계를 주도하여, 백양사의 운문암은 ‘北摩訶衍 南雲門庵’이라 불리듯이 선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특히 근현대의 고승 曼庵 宗憲(1876-1956)과 西翁 尙純(1912-2003)을 비롯한 백양사 출신이 종정으로 선출되고 현대 불교계를 주도한 고승들을 배출하는 등 6대 불교총림이었다.
    앞서 언급한 운문암을 비롯한 물외암과 영천암은 고려 말에 사세를 크게 진작시킨 覺眞國師 復丘(1270-1355)에 의해 창건되었다.

    복구에 의해 창건된 백양사의 누정인 쌍계루는 牧隱 李穡의 기문과 圃隱 鄭夢周의 詩가 縣額되면서 대대적으로 명성을 얻었고, 그 후 조선시대 210여 명의 문인들이 남긴 題詠詩는 240여 수에 달하고 있다. 그 외 산내 암자로, 天眞庵은 1644년(인조 22) 白谷 處能(1617-1680)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金剛庵은 1892년(고종 29) 경암이 창건하였고, 서양암은 1915년 비구니 치호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백양사는 초창 이후 중연이 중창하였다.
    宋 景平間에 이르러 淨土禪院이라 이름을 바꾸었는데 그 문손도인 中延선사가 이를 이어 殿堂과 門廡, 丈室, 賓僚 등 80여 칸을 다시 짓고 중연의 문도들이 차례로 전하여 지켜왔다.
    중연은 백양사 전각 80여 칸을 짓는 등 백양사 가람을 중창하였다.

    1378년 3월 23일 작성된 문서에 의하면 중연이 중창한 당시 백양사의 전각은 法堂 3칸, 東俠藏堂 2칸, 犯隅學寮 3칸, 副舍 1칸, 客樓西俠室 2칸, 下隅食堂 3칸 食廚 1칸, 法堂南斜廊 5칸, 上房 1칸 廳 1칸 侍奉房 1칸 기타 堂舍 85칸이었다고 한다.
    신라 때에 어떤 異僧이 처음으로 절을 짓고 살면서 이름을 白巖寺로 했었다고 한다. 宋 景平間에 이르러 淨土禪院이라 이름을 바꾸었는데 그 문손도인 中延선사가 이를 이어 殿堂과 門廡, 丈室, 賓僚 등 80여 칸을 다시 짓고 중연의 문도들이 차례로 전하여 지켜오다가 一麟이 그 절을 맡게 되니 그 初法을 떨어뜨리지 않은 것이다.
    <寺乘> 백양사는 백제 무왕 33년(632) 임진에 신라의 고승 如幻 선사가 梵宮을 개창하고 고려 덕종 3년(1034) 갑술에 中延선사가 정토법문을 선양하기 위하여 정토사로 이름을 고치었다.
    담원 정인보가 33세인 1925년에 백양사 승려 舟峰이 같은 사찰 주지인 만암의 말을 빌려 전한 기록에 의하면 ‘옛 기록을 상고하건대, 이 절이 창건된 것은 如幻에 의해서니, 실로 백제 무왕 때의 일이요, 무너진 절을 물려받아 크게 일으킨 분으로는 고려 때 중연이라는 분이 있었다.’고 하였다. 백암사의 승려 중연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사실은 다음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승려는 별도의 敎가 없이 焚修하고 祝聖하는 자입니다. 지금부터 9년 전인 戊申年(1188, 명종 18) 7월쯤 祝聖을 위한 觀音尊像을 조성하러 발원하며 잘 맞이해 놓을 곳을 왕께 주청하온 때에, ‘僧이 처음으로 짓는[造排] 장성군 땅 白巖寺에 봉안시키도록 落點하신 것을 말미암아 봉안하고, 이 절은 이미 殘亡한 산기슭[山枝] 5결로서 나뉘어서 8곳의 田과 處所이던 것을, 한 칸도 버림 없이 고쳐[改排] 온 바로 祝聖法席을 길이 행하고 이제 萬日 焚修를 시작하도록 하사되’라고 했습니다.
    당시 백양사는 이미 쇠락하였지만 소속 전답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중연이 1188년(고려 명종 18) 7월경 명종을 위해 관음상을 조성하여 백암사에서 봉안하고 祝聖法席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백양사를 중창한 중연의 이름이 보이는 기록은 1198년(고려 신종 1) 3월 23일에 長城監務官에서 長城郡司로 발급한 문서에 처음 등장한다. 1198년 「監務官貼官貼」에 의하면 中延은 백양사 중창할 때 斯備를 寺主로 삼았으며 中延의 法孫으로 공인받기 위해 첩을 발행하였다. 즉, 聖住寺 住持 性照 中延이 올린 所志로 말미암아 왕께서 판부하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퇴락한 백양사를 중창한 중연은 성주사 주지로 호는 성조였던 것을 알 수 있다.
    1197년(고려 명종 27)부터 1205년(고려 희종 5)까지 9년간 수선사 중창시 白巖寺 승려였던 性富가 ‘평생 梓匠으로 업을 삼았는데 법을 듣고 발심하여 염불을 일삼었던 바, 이 절은 그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시 수선사의 중창은 수선사 승려 覺純과 더불어 9년간 이루어졌는데, 백암사의 승려 性富의 설계와 기술에 의하여 건축되었다. 백양사와 수선사와의 관련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고려 원 간섭기 백양사를 중창하였던 수선사 제13세 복구와 마찬가지로 백양사와 수선사 간에 교류가 깊었던 듯하다.
    1198년 「長城監務官貼」에 의하면 백양사는 중연의 법손 斯備에 의해 계승되었던 듯하다.

    즉, ‘중연의 문도들이 차례로 전하여 지켜오다가 一麟이 절을 맡게 되니 처음의 법도를 떨어뜨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후 백양사의 사세는 알려진 바 없으며 원 간섭기 말 이후 조선 초까지 각진국사 복구와 그의 문도들이 주도하였다. 복구의 비문에 의하면 그는 10세에 수선사 제5세 사주 원오국사 천영에게 머리를 깍고 출가하였다. 수선사 제8세 사주 慈覺國師 道英 대선사에게 10여 년간 사사하였는데 21세 승과에 합격한 후, 월남사, 송광사 등의 사찰에 가기 전 ‘白巖寺에 가서 동지 몇 사람과 함께 10여 년이나 밤낮으로 참선하며 진리를 탐구하였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정도전의 「白巖山淨土寺橋樓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 문계인 中延의 문도들이 차례로 전하여 지켜오다가 一麟이 절을 맡게 되니 처음의 법도를 잘 이은 것이다. 우리 王師인 覺儼尊者에 이르러서는 나이 겨우 8세에 一麟公을 좇아 살다가 뒤에 松廣寺 圓悟國師에게 들어가 현지를 참구하여 법기를 대성하고 月南寺 주석을 비롯하여 20여 년간 松廣寺 주석을 거치는 동안 그 도가 대흥하였다.……또 尊者는 一麟公의 뜻을 잊지 않고 옛 것을 철거하고 다시 새롭게 하였다.
    복구는 수선사 제5세 사주 원오국사 천영에게 가기 전인 8세에 백암사 一麟에게 사사받았던 사실을 알 수 있다.

    一麟은 중연의 문손 법손 斯備 이후 원 간섭기 백암사에 주석하였던 승려였다. 복구는 백암사 일린에게 사사받고 수선사에 가서 천영과 도영에게 다시 사사받았다. 후에 수선사 제13세 사주(1322년경-1350)가 되었다가 1295년(충렬왕 21) 백암사에 다시 머물다가 입적하는 등 수선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복구는 수선사 사주가 되기 전 처음으로 사사받았던 백암사를 중흥시켰다. 복구는 ‘한탄할 일은 이 절의 창건이 오래되어, 절의 모든 집들이 다 타락하고 佛像과 法寶 및 天人像이 모두 이지러져 거의 수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부자는 곡식과 비단을 내고, 가난한 사람은 노역을 해서 한 마음으로 힘을 합쳐 한결같이 모두 새롭게 해 나갔다.’
    정도전의 기문에 의하면 ‘또 존자는 一麟公의 뜻을 잊지 않고 옛 것을 철거하고 다시 새롭게 하였는데, 그 비용은 모두 당신의 바랑[鉢囊之資]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그의 문인들이 도운 것도 많았다.’고 하였다. 당시 백양사의 중창은 복구를 비롯해 문인들의 도움으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議政府關字傳書」에 의하면 복구의 조카 杏村 李嵒(1297-1364)의 사재를 기울여 중창하였다고 한다. 중창으로 ‘몇 년 안 되는 사이 寶刹을 열고 佛殿을 세우니 金壁의 빛남과 象設 鐘鼓의 엄숙 화려함, 僧房 및 각 집의 고요하고 그윽함과 三門과 廚庫의 크고 빛남, 담장[墻垣] 및 섬돌[階砌]의 곱고 정밀함과 밥상[床敷] 그릇[器皿], 이불[茵褥] 같은 일용품을 구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백양사는 弘揚佛教에서 ‘祝釐佛敎’를 하는 곳으로 중요한 곳이 되었다. 중창을 하여 불보는 갖추었지만 법보의 사찰이 되기 위해 복구의 문인 心白과 智孚 등을 송에 보내 대장경을 구입하여 가져오게 하여 1년도 안되어 大藏殿을 짓고 봉안하였다.
    今 相國 洪綏와 더불어 同心共願으로 각각 淨財를 내어 문인 心白과 智孚 등에게 바다를 건너 송나라로 들어가 대장경을 갖춰 오도록 하였다. 1년이 못 되어 바다 건너서 대장경을 구해오고 옻칠 장과 香囊, 紗幅 등 모든 장엄구가 갖추어졌다.
    그리하여 1341년 낙성을 기념하여 轉藏法會를 개최하였다.

    心白은 主寺營辨으로, 智孚는 幹大藏의 직임을 맡았다. 여기에는 재상 洪綏가 함께 願을 세워 재원을 마련하여 지원하였다. 홍수는 친원파인 洪福源의 아들 洪茶丘의 아들이며, 그의 막내 동생이 明理和尙이었다. 명리화상은 ‘그의 누이가 원의 寵臣인 이라치[亦剌赤]에게 시집을 가자, 따라가 마침내 이라치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므로 원에서 「대장경」의 확보에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한다. 복구는 건물과 부대시설을 완성한 후 결여된 法寶를 구하고자, 宋에 문도들을 파견하여 大藏經을 마련토록 했다. 이를 위해 3칸 규모의 大藏殿을 조성하여 봉안토록 한 듯하다.
    1353년 제3차 전장법회에서는 心白이 前白巖社主로 나타나고 있다.

    제1·2차 전장법회는 復丘가 주맹하였으며, 제3차 전장법회는 수선사 제14세 사주 復庵淨慧가 주맹하였다. 「白巖山淨土寺轉藏第三回榜」에 따르면 淨慧도 역시 復丘의 문도였으며, 粲英은 정혜의 제자였다. 息影庵은 수선사의 분원이었던 선원사의 승려로서, 蒙山德異의 제자인 鐵山紹瓊을 직접 모시고 온 雪峰國師 冲鑑의 제자이기도 하지만 수선사 제13세 각진국사 복구의 문도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복구의 문도는 비문에 의하면 ‘元珪와 禪源·白華·迦智·麻谷 등 1000여 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 복구의 문인으로 알려진 승려는 「1357년 승록사 첩문」에 의하여 더 찾아진다. 즉, ‘大禪師 須彌, 禪師 祖□, 禪師 覺瑚, 中德 白盖, 中德 覺曒, 大選 汲深, 大選 戒氷’ 등이 있었다.
    연구에 의하면 수선사 제10세 사주 혜감국사 만항과 雪峯 圓明國師 冲鑑(1274-1388)에 의해 받아들여진 몽산선풍은 수선사 제13세 각진국사 복구와 그의 문도들에 의해 전승되었다.

    충감의 제자이면서 나옹의 고제인 竹磵 宏演도 제2의 수선사인 선원사 주지로 재임하였는데, 그가 바로 백양사 쌍계루의 기문을 청할 때 청수와 함께 하였던 無說 逌至였다. 無說 逌至는 演西堂이라는 호를 지녔다. 이는 태고 보우가 演西堂이 無說이라는 두 자를 題號로 정하였다거나, 목은 이색의 다음 詩題 가운데 ‘演無說’라는 글귀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색이 수안방장에서 승려 演無說과 聶伯敬과 함께 자리를 하였는데 ‘丹丘先生은 필법이 대단히 신묘하고 竹磵老禪은 시어가 새롭구나.’라는 시를 준 것으로 미루어 보아 演無說은 竹磵 宏演인 것이 확실하다.
    이렇듯 복구의 문도들은 고려말 불교계에서 주요 역할과 그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복구의 입적 직후인 1357년 복구의 문도들과 관계없는 若雲이 주지로 임명되어 그의 문도들이 백암사를 장악하자, 복구의 문도와 후손인 右副承宣 李岡 등이 1357년(고려 공민왕 6)에 이를 저지시켜 축출하였다.
    그 후 백양사는 복구의 조카인 淸叟가 계승하게 된다.

    청수는 이우의 3남이자 杏村 李嵒(1297-1364)의 막내 동생인 梅村 李澄이다. 「고성이씨족보」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찾아진다.
    李澄 初名君保 性淸秀善松雪體 官至密直 號 梅村 出家號雲庵大禪 一云 梅堂和尙 恭愍朝人也
    李澄은 초명이 君保였으며 性情이 淸秀하다고 하였다. 이에 호가 淸叟라고 불린 게 아닌가 한다. 이징은 조맹부의 송설체에 능하였으며, 密直의 관직에 올라 호를 梅村이라고 하였다. 출가 후 법명이 祖澄이며 雲庵(雲巖, 雲唵) 또는 梅堂화상이라, 三重大匡 福利君에 책봉되었다. 祖澄은 앞서 언급한 무설의 제자 祖明과 도반일 개연성이 높다. 청수는 그의 스승이자 삼촌인 복구가 ‘절을 부탁하여 뒷일을 맡게 하였다.’고 하여 그의 뜻을 충실히 따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佛菩薩 천인의 형상이나 經唄鐘磬의 선양과 곳집의 수입과 같은 것이 옛날에 비해 배나 증가하였다.’고 한다.
    그 뒤 경술년(1370) 여름에 비가 심하게 와서 계곡 물이 넘치니, 누각이 미친 듯한 물결에 휩쓸려 붕괴됨에 청수는 다시 재목과 기와를 모아 날을 새워 이를 이루어 내었다. 갈고 깎은 것이 법도에 맞고 채색도 알맞아 검소하지도 사치하지도 않다. 날마다 누각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면 산은 더욱 기이하고 물은 더욱 맑으니, 이 누각을 지은 것이 우연이 아니다. 나와 자네가 다행히 누각 위에서 만나 친히 둘러보았는데 그냥 말없이 갈 수 있는가 하면서 기를 청하였다.
    경술년(1370) 여름에 큰물이 나서 돌 축대가 무너지는 바람에 樓도 무너져버렸다. 淸叟翁은 이 누를 중수하고 쌍계루 기를 지어달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쌍계루는 우리 스승님이 세운 것인데 이처럼 무너져도 내버려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스승님은 스승을 이어받기 五代나 되었으므로 절에 뜻을 둔 것이 지극하였습니다. 그런 누가 지금 없어졌으니 그 책임을 어디로 돌려야 할 일입니까. 그래서 부랴부랴 날을 다투어 공사를 끝내고 옛 모습대로 다시 세우자 썩었던 재목이 견고하여지고 알 수 없게 되었던 채색이 선명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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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계루는 청수의 스승 복구가 지은 것인데 1370년 여름에 폭우로 계곡에 물이 넘쳐 쌍계루가 무너져 버리자 ‘재목과 기와를 모아 날을 새워’ 다시 지었다.

    그런 후 청수는 絶磵을 통하여 그 누각의 이름을 지어 달라 하였다.
    李穡의 淨土寺 雙溪樓記에 ‘三重大匡 福利君 雲巖 澄公 淸叟가 絶磵倫公을 통하여 그 누의 이름을 지어 달라 하고 또 三峯鄭氏가 지은 기를 보이는데, 그 기에 정토사의 내력이 자세히 나왔으나 溪의 내력과 樓의 내력은 모두 생략하고 쓰지 않는다.’ 했으니, 대개 누의 이름을 짓기가 어려워서 그런 것이다.
    또한 정도전이 지은 기문을 보였는데 자세하지 않으므로 이색에 다시 부탁을 하였다.
    幻庵스님은 書法이 절묘하여 眞體를 터득하였다. 한때 그의 글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지만 반드시 시문을 보고 마음에 흡족해야만 붓을 들었다. 雲庵澄公 淸叟가 장성부에 있는 白巖寺의 樓閣을 중수하여 三峰 鄭先生에게 樓의 이름을 지어 줄 것을 청했다. 三峰이 克復이라고 이름을 짓고 記는 雲庵의 문도인 絶澗倫師로 하여금 幻庵에게 가서 글을 받으라고 하였다. 幻庵이 ‘이는 내가 쓸 만한 글이 못됩니다. 牧老가 세상에 계시는데 감히 누가 장문의 대작을 짓는단 말입니까’하였다. 그리고는 沙彌僧을 絶澗에게 보내 목은에게 가서 누각의 이름과 기를 청하도록 하였다. 牧隱이 絶澗에게 물으니 絶澗은 ‘절은 두 물줄기 사이에 있고, 물은 절의 남쪽에서 합쳐집니다. 물의 근원은 동쪽이 가깝고 서쪽은 멀기 때문에 그 수세가 크고 작고합니다. 그러나 합수가 되어 못이 된 뒤에 산을 빠져 나갑니다.’라고 하였다. 牧老가 말하길 ‘그러면 雙溪樓라하면 되겠군.’하고는 붓을 들어 기를 썼다. 그 글은 한 점 더할 것도 없는데, 그 끝에 이르기를 ‘내가 늙었구나, 밝은 달빛이 누각에 가득해도 하룻밤 그곳에서 묵어갈 수 없으니, 젊어서 길손이 못된 것이 한스럽구나!’라고 하였다. 幻庵이 글을 받아썼다.
    청수가 정도전에게 누각의 이름을 지어 줄 것을 청하자 ‘克復’이라 이름을 짓고, 청수의 문도에게 ‘기문은 환암에게 받으라.’고 하여 절간이 사미승과 함께 환암을 찾았다.

    이에 목은 이색에게 글을 받게 하고 자신은 누각의 글씨를 썼다는 것이다. 이렇듯 환암도 백양사에서 머물렀던 듯하다. 이는 환암의 侍子였던 慶觀이 시를 남긴 사실에서 충분히 유추된다. 이에 의하면 경관은 법호가 ‘中谷’이었다. 경관은 환암의 비문에 湛圓, 紹安, 卍雨 등과 함께 등장하며, 환암이 국사 책봉을 꺼리자 수용하게 한 환암의 侍子였다.
    그런데 당시 백양사에는 앞서 언급한 무설 죽간 굉연이 함께 하였다. 무설은 1375년 珍原山 佳祥寺에 그의 제자 祖明과 함께 머물기도 하였다. 정도전(1342-1398)은 나주 유배기간 나주 聳珍山(해발 349m)에서 ‘湧珍山 湧珍寺克復樓記’를 지었다. 이 克復樓에 竹澗(竹磵) 宏演 無說이 記를 남겼는데, 그는 쌍계루에도 올라 시를 읊었다.
    굉연은 珍原山 佳祥寺에 그의 제자 조명과 함께 머물기도 하였다. 특히 김구용의 동생인 金齊顔(?-1368)도 無說에게 준 詩가 남아 있다. 무설은 특히 이색과 정도전 등 신진사류들과 교유하였다. 특히 정도전은 청수가 지은 누각에서 만났었는데, 유배 후에 다시 누각에 와서 무설이 지은 기문을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무설은 원에 유력하였다고 한다.
    예전에 북으로 燕都에서 놀고 남으로 江浙를 떠돌며 泗川에 이르기까지 천하의 명산거찰이라는 곳은 거의 다 실컷 보았다.
    위의 기문에서 보는 것처럼 무설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원에 유력하였던 것이다. 필자가 이미 밝힌 바처럼 그(竹磵 宏演)는 나옹의 고제로 幽谷 覺宏, 無及 覺信, 野雲 覺玗, 仲英 覺雄 등과 같이 원에 유력하였다. 혹 중국의 문집에 의하면 無悅이 원에 유력하였다고 하는데, 동일 인물이거나 도반일 가능성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청수의 문도인 듯한 絶磵 益倫은 ‘삼봉이 克復이라고 이름을 짓고 記는 운암의 무리인 絶澗 倫師로 하여금 환암에게 가서 글을 받으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다음 기록에 의하여 더욱더 확실히 알 수 있다.
    三重大匡 □군 雲菴 澄公 淸叟가 絶磵 倫公에 부탁하여 雙溪樓의 이름을 지었다. 또 三峯 鄭氏가 지은 樓記를 가지고 와 보여주었다.
    [按] 李穡의 淨土寺雙溪樓記에 ‘三重大匡 福利君 雲巖 澄公 淸叟가 絶磵 倫公을 통하여 그 누의 이름을 지어 달라 하고 하였다. 또 三峯鄭氏가 지은 기를 보이는데, 그 기에 정토사의 내력이 자세히 나왔으나 溪의 내력과 樓의 내력은 모두 생략하고 쓰지 않는다.’ 했으니, 대개 누의 이름을 짓기가 어려워서 그런 것이다.
    絶磵 益倫은 혜근의 문도 가운데 竹磵 宏演과 더불어 ‘磵’字를 쓴 대표적인 인물이다.

    松風軒이라는 당호로 불렸으며, 천마산 지족암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는 1376년부터 古菴 日昇이 주지를 맡기까지 회암사의 주지로 있었으며, 당시의 문인 이색에게 「檜巖寺修造記」와 「長城白巖寺雙溪樓記」라는 기문을 청한 바 있다. 그런데 이색이 「檜巖寺修造記」를 쓸 당시인 1379년(고려 우왕 5) 무렵에 주지 絶磵 益倫과 覺田이 후속불사를 담당하였는데, 나옹이 주도한 중창 불사 시에도 참여했을 것이다.
    絶磵은 혼수가 주관한 법회에 참여하였으며, 靑龍寺에 가서 혼수를 만나 글을 받기도 하였다. 조선 초에 이르러 환암의 비문 건립에도 참여하였고, 法王 華嚴宗都僧統 雪悟와 나옹의 문도인 絶磵 益倫도 무학 자초와 더불어 태종대 함흥에 머물고 있는 이성계를 환궁하게 하여 이성계 세력과 태종 세력과의 알력에서 빚어진 갈등을 푸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신사년(1341)봄에 제산의 석덕을 불러 모아 轉藏法會를 닦음으로써 낙성하였다. 문인 牧 등이 각기 한 가지 씩 일을 맡아 慶讚會를 베풀되 오직 근엄하게 하였다. 경찬회 첫날 伽梨和羅 등의 물건을 베풀며, 약 10일간 修法하여 布施 功德住를 遷度함이 풍성하였으며, 粧校를 건 것도 특수하여 士女와 老幼가 修敬함이 지금과 같은 것이 예전에는 없었다. 나 法豕는 대중의 維那직책을 맡아 성대한 일을 보고 감히 이 榜을 들어 祝壽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회에 나아간 禪流를 아래에 열거한다. (至正 元年 辛巳(1341) 四月 日)
    백양사 경찬회는 1341년 4월 복구의 문인 牧과 維那 法豕 등이 주관하여 인근 사찰의 승려들을 불러 모아 개최하였다. 그 후 1348년, 1353년, 1409년에 각기 실시되었다.
    여말선초 백양사의 사세 규모를 짐작케 하는 것으로 전장법회에 참여한 규모를 통해 알 수 있다. 백양사를 비롯해 전라도 인근의 승려들이 100여 명에서 150여 명 가량 참여한 규모였다. 즉, 1341년(고려 충혜왕 2) 제1차 전장법회에 知識 83명과 道者 70명, 제3차 전장법회에 知識 46명과 道者 52명, 1409년 제4차 전장법회에 知識 55명과 道者 45명이 참여하였다.

  2. 백양사 템플스테이 백양사 템플스테이 프로그램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8
    백양사 템플스테이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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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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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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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백양사 템플스테이 백양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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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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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8
    백양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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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한국불교태고종 탑사 탑사의 불가사의 01feb5583d67ef8812678aa4208083c6_1715108821_4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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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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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8
    탑사의 불가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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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8

    접착제를 쓴것도 아니고, 시멘트로 이어 굳힌것도 아니며, 더더구나 홈을 파서 서로 끼워 맞춘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1백여년의 풍상속에 태풍과 회오리 바람에도 끄덕없이 견고하게 버티고 서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100여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이 탑들이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탑들이 위치한 곳은 암마이봉과  수마이봉 사이의 계곡인데 이곳에는 유난히 세찬바람이 사시사철 불어 오고 있다. 지형적으로 앞쪽이 넓고 뒤쪽이 좁은 계곡이어서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쳐  오는 것이다.
    특히 여름철 태풍이 불어오면 옆 언덕의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웬만한 나무는 뿌리째 뽑혀 나가만,이곳의 돌탑들은 조금씩 흔들리기만 할뿐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런 접착물 없이 서로 맞닿아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놀라운 돌탑의 축조비법은 무엇이고 100년 풍상을 견뎌낸 돌탑의 신비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낮에는 돌을 날으고 밤(자시)마다 하루 한 개씩 정성으로 올렸고, 음에 날에는 양에 돌을 올리고 양에 날에는 음에 돌을 올렸다. 또한 탑을 쌓기 위해 자리를 잡고, 다음 올라갈 음,양돌을 앞에 놓고 좌선을 하면서 천기를 받아 지기를 올리고 온 몸에 기를 넣어 자시에 정확히 단번에 올려 작은 돌맹이로 고정시킨다.
    탑을 쌓은 것은 2가지 방식이 있는데 피라밋 형식과 일자형 탑인데 피라밋 형식의 탑은 팔진도법에 의해
    타원형으로 돌아 올라가며 밖으로 돌을 쌓고 안으로 자갈을 채우고 그속 가운데 비문을 넣고 올라가며 쌓은것이다. 또한 맨 꼭대기 마지막 돌을 올리는데는 100일의 정성의 기도 후 올렸고 피라밋 상단부분에는 잔돌로자리를 만들고 그곳에 우물정(井)자로 나무를 고정시킨 후 그 위에 올라서 음양돌을 올렸다 한다.
    정성도 정성이지만 이갑룡의 진법과 기공법등 축지법의 힘이 사용되었다 한다 , 이갑룡 처사는 축지법을 39살부터 터득하였는데 이때부터는 몸이 가볍고 사픈이 다니는등 아무리 무거운 돌도 으흑음! 하고 소리를 내면 겉든 이 돌을 들어 올렸다 한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의 이야기는 이갑룡처사는 매일 다람쥐 바뀌돌 듯 돌만 들고 다니거나 산속에서 혼자 앉아있거나 암,수 마이산을 오르내리고 암 마이봉과 수 마이봉에 강목천을 묶어 놓고 건너 갔다 왔다 하는 것을 본 이도 있다고 한다.
    또한 전주를 단숨에 갔다 왔다하는데 당시 진안경찰서장이 찾아와 면담을 하고 전주에 갔는데 벌써 이갑룡은 전주에서 볼일을 다 보고 진안으로 오는 것을 보고 "아니 언제 전주에 오셨습니까?" 물으니 "당신이 나가고 나서 바로 출발해서 왔네" 하니 그 사람은 아니 놀랄 수 없다고 한다.
    이렇듯 이갑룡의 축지법에 대해 많은 이들이 목격하고 이 탑을 쌓는데는 축지법이 아니고서야 이러한 불의의 명작을 축조할 수 있겠나 생각된다.
    이와 같이 불가사의한 이 현상은 이갑룡 처사의 정신력이라 할수 있겠다.

    이갑룡처사와 신서

    이처서가 축탑 수도중 신의 계시를 받아 섰다는 신서와 부적의 일부이다.
    이부적은 재난을 막아 주는 신비의 부적으로 유명하며 지금도 찾는 이가 많다.
    이갑룔 처사의 나이 육십이 넘자 틈틈이 글을 써서 30여권에  이르는 책들을 남겨 놓았다. 그가 기도하면서 령의 계시를 받고 썼다는 이 책의 글자는 책자 조주예현자 등의 기본형에 필획이 가감된 형태를 띠고 있는데, 그가 이 신서를 남긴 때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그 뜻을 풀이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어려운 환경속에서 서당의 글을 독량하여 조금씩 글을 배웠으나 글문이 짧아다고 했는데, 어떻게 해서 이런 3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서적을 남길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죽기 전 '앞으로 령에 통달한 사람이 나와 해독 될수 있다는 암시를 주었다고 한다. 글을 알게 되고 이 글을 해독하게 되면 제세의 비법을 알게 될 것이므로 소중히 간직하라'고 유언을 했다.
    참으로 믿을수 없는 얘기들이지만 이런 것들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그를 멀리서 그리고 가까이서 지켜봤던 그곳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이다. 특히 그가 령의 계시를 받고 남겼다는 신서는 대부분 분실되고 현재 마이산 탑사에 두 권만 보관되어 내려오는데 아무리 해독하려고 해도 도저히 알 수없는 글자들이었다.
    일부 국내의 유명한 학자들이 그 내용을 판독하려고 복사를 해갔지만 현재까지 아무도 그 내용을 밝혀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갑룡 처사의 예언대로 앞으로 령에 통달한 삶이 나와 그것을 해독할 날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갑룡 처사의 손자되는 이왕선 씨에 의하면 이 처사는 이 글이 자기로부터 4대 손에 의해 해독될 수 있다는 암시를 줬다고 하는데, 이갑룡 처사의 4대 손은 현재 갓 돌이 지난 갓난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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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고드름

    겨울에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를 드리면 그릇에서 역고드름이 솟아 오르고 그 고드름 속에는 이처사가 쓰신 신서가 박혀 나오는 신비가 있어 속칭 신비의 관광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갑용 처사가 세워 놓은 돌탑 아래 정한수를 떠놓고 그들의 소원을 비는 기도를 많이 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기도의 정성이 지극하면 그 정한수 밑면에 이 처사가 썼던 신서가 선명하게 비친다는 것이다.
    특히 날씨가 추운 한겨울에는 이 정한수 위에 고드름이 생기는데 보통 고드름같이 위에서 아래로 생기는것이 아니라 물그릇 안의 물이 얼면서 고드름이 역으로 위를 향해 치솟는다는 것이다.
    이곳 탑사에 오시면 그런 역고드름 현상이 찍힌 사진을 볼 수가 있다. 이런 역고드름 현상은 요즘도 매년 한 겨울에 몇 차례씩 일어나고 있다.
    자연적 현상~ 바람의 영향이 탑사 오른편쪽으로 들어와 천지탑에 부딫쳐 암마이봉 절벽으로 돌아 올라가는 현상이 있어, 돌풍으로 역 고드름이 오라 간다고 한다,
    그러나 탑사에서 이 현상을 실험해 본 결과 그것만은 아니다는 것이다. 각단이 27개의 단이 있고 탑이 108기를 쌓았는 27+27=54+54=108 이 되기에 27개의 단이 있다.  
    이 단위에서는 역고드름이 올라오나 바로 아래 바닦에서는 고드름이 올라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자연형상과 신비를 어떻게 이해를 해야하는지 ?..탑이 있으면 단이 형성되고 그곳 단에서 기도를 하는데 단 위에서는 기가 넘친다는 것이다,
    역고드름안에서는 물방울 형식으로 이처사의 신서처럼 보이는 것이 몇 년에 한번씩 나타나 신비를 주고 있으나 정확한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고 있다.
    탑사의 겨울철은 기도와 소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이들로 분비고 있고,비와 눈 폭풍속에서도 탑신은 굳굳하게 서서 묵언하고 있다.

  5. 한국불교태고종 탑사 마이산탑사의 역대 인물 제1대 탑의 축조자 이갑룡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8
    마이산탑사의 역대 인물 제1대 탑의 축조자 이갑룡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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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경의
    호: 석정
    1860~1957 전북 임실 태생
    전주이씨 효령대군 16대손
    25세때 마이산에 입산하여 수도중 중생의 죄업을 씻고자 고행탑, 중생탑을 축조(1886~1928)
    저서: 신서30여권


    구한말 시기적으로 어려운 때에 지혜는 총명했지만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서당에 다니지 못 하고 창호지 틈으로 세어 나오는 글소리로 학문을 읽혔으며, 군불에 나무를 집히고 앉아서 나무 가락으로 땅바닥에 글을 쓰며 틈틈이 일하시면서 공부에 열중하셨다.  
     
    아주 어릴 적에 갓 돌을 넘기시고 제삿날에 조상 제삿상에 홀로 술을 올리고 절을 하면서 침묵과 함께 기도를 한참 동안 하셨다 한다.
     
    남달리 어릴 적부터 효성이 지극했으며 같은 동내에서도 이경의를 이길 자가 없었다 한다. 어릴 적부터 효성이 지극한 갑룡은 부모님이 자리에 누워 임종하실 때 이갑룡은 자기의 손가락을 조금 잘라 피를 먹이시어 약 석 달간을 더 사시게 하셨다 한다.
     
    16세 때 부모님을 여의시고 부모님 묘소 옆에서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시다 삶과 죽음의 허무와 무상을 탄식하시다가 19세 때 시묘살이를 마치고 전국을 만행하시면서 속세를 떠나셨다 한다. "疊疊山中, 萬康漁萬來"라 오직 홀로의 산과의 대화요, 강을 건너도 또한 물고기와의 대화로다.
     
    외로움을 달래며 이 산 저 산, 이 절, 저 절에서도 자리 잡지 못하시고 결국 ‘고향에서 농사나 지으며 인생을 살아야지’하며 전국을 누비시다가 거창에서 장수로 임실 둔덕으로 넘어가실 무렵 어느 두 봉우리가 이갑룡을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가 1885년경, 나이 25세 되던 해로 그는 젊음을 이곳에 묻으리라 결심하신다. 유, 불, 선에 바탕을 두고 龍華世界의 실현이 이상적이라 믿고 구도의 행각 끝에 수도에 들어갔다.

    마이산에서 남자산이라는 지리산이 200리, 여자산이라는 계룡산이 200리 그 한복판의 마이령봉은 남녀 두 봉우리가 역역하고 그 절묘함이 어느 곳에 비할 수 없어 그 정기로 사바세계를 개척하리라 마음먹고 중생 구제를 위해 고행을 자처하며 1기, 2기, 쉬지 않고 탑을 쌓기 시작했다.

    세속과는 완전히 등진 채 낮에는 돌을 날랐고 밤에는 기도하다 자시에 돌탑을 하루에 한 층씩 30여 년 동안 쌓아 올렸다. 인간의 괴로움을 달래기 위해 108기의 탑을 쌓으면서 108 번뇌를 해탈하고자 108개의 석탑을 구상했다. 자연석을 탑촌으로 하나둘 올려놓으면서 뭇 중생이 지은 죄를 대신해 비는 기도로 일관하였으며 나라를 잃은 아품을 하늘에 알리고 독립을 기원하면서 탑이 완성될 동안에 보통 사람이면 고독을 느껴서라도 하산의 길을 떠나 세속에 묻혔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의 힘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큰 돌로 기초를 쌓고, 그 위에 돌탑을 완성했으니 이미 석정은 그때부터 령의 힘으로 그 같은 일을 했을 것이라고 탑을 보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더욱이 받침대(기둥) 하나 없이 가파른 탑신을 축지법으로 오르내리며 누구의 도움 하나 빌리지 않고, 돌탑들은 전국의 명산 각지를 순례할 때 산하에 기도하고 돌아올 때 한 덩어리의 돌이라도 배낭에 지고 와서 탑신에 섞어 쌓았다고 한다.

    이러한 자연석 석탑은 세계 조탑사에 비추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자연석으로 탑군을 축조하였는데 주탑인 천지탑은 같은 형태로 원형의 기단부로부터 70도 정도로 타원형인 포물선을 그리며 유유히 뻗어 상륜부에 해당하는 윗부분은 잔석으로 괴여 힘이 눌리고 흔들릴 때 쿠션 역할을 하고 자연판석을 그대로 올리고 높이 15m로 쌓아 올렸다 한다.

    원추형으로 쌓은 두 천지탑은 알맞게 조화를 이룬 수법으로 역학적인 면에서 보다 자연석으로 조탑했다는 기발하고 독창적인 착상에 경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 탑의 신비와 가치는 그러한 축조 기술보다 하나하나의 조형미와 전체적인 조화미에서 오는 감동인데, 펑퍼진 기단부로부터 유연히 뻗어 오른 선의 미와 육중한 탑신의 중량감에서 탑봉의 예각이 주는 섬세하면서도 신비한 아름다움을 주는 법열이다.

    더군다나 돌로 이어지는 패턴은 절묘함과 처연한 아름다움을 더하고 높고, 낮고, 크고, 작은 탑의 배치는 단순한 가운데 다양한 변화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모든 탑군은 저마다 입부리를 하늘을 향해 애절한 염원을 소원하는 듯하다.

    자연석과 같은 암반으로 형성된 마이산의 산세를 이용하여 이 공간에 높고 낮으며 체감률이 뾰쪽한 탑과 원추형의 탑을 알맞게 조화시켜 황홀하게 구조한 배치의 솜씨는 범중생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천지탑, 일광탑, 월광탑, 약사탑, 중앙탑, 월궁탑, 용궁탑, 신장탑, 등 배열은 팔진도법을 적절히 이용하였으며 각각 다른 탑형은 음, 양의 이치를 살렸으며 높고 낮은 구조는 환생과 오행의 이치 조형미의 극치를 이루고 신비의 전경을 이루게 했다.

    이와 같은 조탑의 근본적인 원리보다는 갑룡의 천부적인 미적 감각이 뛰어났던 것이며 이러한 조형 의욕을 작품으로 형상화하였을 것이다.
    그는 또한 고된 작업에서도 자기의 뜻이 공간속에 이루어져 가는 탑들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조화 속에 도취되고 법설과 무아지경 속에 고달픔을 잊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후의 걸작을 남겼을 것이리라.

    우리나라는 백제 때부터 석탑이 발달하여 신라에 이르러 더욱 많이 축조되어 ‘탑탑응행(탑이 기러기처럼 줄서있다)’이라고까지 말했으며 고려를 거쳐 조선 초까지 1300기의 탑이 쌓여져 우리나라를 "석탑의 나라" 라고 불렀으나 조선 중엽에 이르러 억불숭유정책에 의하여 조탑이 자연 이루어지지 못 했다.

    서양에서도 사원 탑 건조가 중단되어 오다가 철재로 파리에 에펠탑이 세워질 때 마이산 일각에 백여 기의 탑군이 신비롭고도 화려하게 축조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동서양을 통하여 근세에 조탑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을 때 마이산 탑과 같은 연대에 건조된 파리의 에펠탑을 들 수 있다.

    이 두 탑을 대조해 보면 매우 흥미롭다, 프랑스 대혁명의 백년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1889년에 8백만 프랑의 거액을 들여 300m 상공에 철재탑을 완성시켜 예술의 도시 파리를 상징하고 세계에 과시하고 있다.
    (석탑의 문화재로서의의 논문중에서......)

    그러나 마이산 석탑은 단돈 백원의 예산도 없이 적수공권으로 이 만불탑을 이룬 것이다. 석정은 축조를 완성한 후에도 수도와 기도생활로 일관해 왔으며 영의 경지에 더욱 도달하여 60대에 불가사의의 신명글을 남겨 놓았다.

    30여 권에 이르는 이 대부서는 밤에 기도하면서 영의 계시를 받아 쓴 것으로 이두어 한자 등 기본형에 필획이 가감된 형태의 보통 사람이 도저히 판독 불능의 문자로서 생전에 이 글을 밝히지 안 했으며 이 신명글은 영의 계시에 의한 통달한 사람이 나오면 이글을 알게 될 것이란 유언이 있었다.
    참고로 말하면 석정은 세속의 문자와 접한 것이 적었고 그리 사용한 적이 없었다 한다.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30여권의 신서를 남기었는지? 신서의 내용뿐 아니라 석정은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기도하는 시간을 축내지 않으려고 무답무언으로 대답을 멀리 했다. 또한 소문을 듣고 제자 되기를 자원하여 찾아온 사람이 있어도 허락한 적이 없고 어쩌다가 다른 사람과 자리를 같이한 경우에도 도무지 말이 없었다 한다.

    전주 관성묘에 가서 관성장군 사당에서 기도를 올리셨다고 한다. 마이산에서 힘들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플 땐 항상 관성 장군상과 대화를 했다 한다.

    어느날 은천리 누군가가 갑룡을 비판하고 다니고 탑사에서 그릇을 흠쳐 가면 그 괴로움을 관성 장군상에 물으니 ‘그놈을 내가 죽여주랴?’ 하고 물으니 갑룡은 그러지 말고 그냥 혼을 내주어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해달라고 하자 그 다음 날부터는 그가 자리에 누워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그러자 자기가 갑룡에게 잘못을 뉘우치고 나니 병이 나아졌다고 한다.(전주 관성장군 성전 대표 대담)

    갑룡은 유, 불, 선 선인으로써 통합 종교로써 일관했고 삶의 생활은 유교를 바탕으로, 수련은 도교를 바탕으로 기도는 불문을 바탕으로 경전에도 가까이 하셨다 한다.

    40세 중반에 고금당 굴사에 기도 갔다가 어느 여인과 음양 합일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같이 탑군에 와서 정화수를 뜨고 혼례식을 올렸다 한다. 그 후 자식 3형제를 두고 얼마 안 돼 최씨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다시 50후반부터 혼자서 살았다고 한다. 자식 3형제가 있었는데 이갑룡의 친형님이 종가집의 종손을 보지 못한다하여 적자생존법에 따라 장남을 형님에게 양자로 보내어 장손으로 대를 잊게 만들고 차남 이도생씨가 갑룡의 뒤를 잇게 되었다고 한다.

    삼남은 장성해서 완주로 가 터를 잡고 후손을 내렸고, 차남인 이도생씨가 탑사를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옛 어른말로는 암마이산과 수마이산의 중턱에 강목천을 묻고 산을 왔다 갔다 하면서 솟금령 영신합이라 글을 쓰고 천을 타곤 했다 한다. 낮에는 돌을 구분하면서 날랐고 밤 자시마다 하루에 한 층식 올렸다 한다.

    천지탑과 같은 타원형 탑은 둥근 원형 나선형 방향으로 쌓아 올라가다 계단식으로 조금씩 튀어 나오게 하여 원형계단을 이용해서 오르고 내려왔고 상단부위에 잔돌을 70cm 높이로 차곡차곡 올려서 그 위에 널판 돌을 올렸다고 한다.
    상단 부위는 잔돌 사이에 사각모양으로 나무를 대고 그 위에서 축지법으로 몸에 기공을 넣어서 몸을 가볍게 만들고 돌을 올렸다 한다. 맨 꼭대기 부처님 머릿돌을 올리기 위하여 백일 동안 기도하고 천신에게 기공으로 매달려 마지막 돌을 올렸다고 한다. 천지탑은 만 3년이 걸렸다고 한다. 탑이 완성되면 내려오면서 사각 우물 정자모양의 나뭇대를 철거하고 돌망치로 툭 튀어 나온 계단형 돌을 쳐서 들어가게 하면서 내려왔다고 한다.

    천지탑은 음, 양으로 나누어지는데 보는 쪽에서 좌측이 음이고 우측이 양이다. 돌덩이 자체는 밑에부터 음으로 시작해서 위칸은 양이고 음양, 음양 순으로 이루어져 서로의 흡입력 때문에 비바람이 몰아쳐도 넘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상판의 널판돌은 음은 14기 양은 15기 음은 짝수이고 양은 홀수로 표현했다고 한다.

    천지탑 앞에 오방탑을 세우고 오행을 상징하듯 우뚝 서 있다. 천지탑을 위해 지지하는 오방탑은 천지의 지, 수, 화, 풍, 사대와 자신의 몸체를 말한다. 그리고 천지탑 주변 일렬 신장탑들은 천지탑을 보호하는 신군장들로 33기의 장수의 탑이다. 천지탑을 보호하고 마귀의 칩입을 막기 위함이니 어느 마귀가 침입을 할 수 있겠는가.
    천지탑 아래 갑룡의 처소를 잡고 기도실과 방사를 만들어 생활의 처소로 삼았다. 대웅전 아래 용궁이 있고 앞에 중앙탑(일명:흔들탑) 있는데 일자 신장으로 탑사의 정중앙에서 기준을 삼고 있다고 한다. 바람에 흔들거려도 꿋꿋하게 넘어지지 않고 잘 흔들린다고 해서 별명이 흔들탑이다.

    일렬 중앙탑에도 작은 신장탑들이 보호하고 있고 꼭 하늘을 치솟아 오를듯한 경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우측에는 내공단 외공단이 있고 작은 용궁단이 바로 밑에서 자리하고 있다. 갑룡 좌상 옆과 앞에 일광탑이 있고 좌상 앞은 약사탑이 있으며, 암바위 옆으로 월광탑이 있다. 일월은 이 사바세계의 세월을 나타내듯 인간의 세월을 보여준다. 그중  약사탑은 인간의 육체적인 병, 정서의 병 등 병고를 쾌유케 하기 위함이다.

    탑군은 우주의 축소판이며, 인간의 삶의 현장이라 하셨다고 한다. 묘법연화경 15품에 나오는 연화의 세계요, 하늘을 찌를 듯한 기상이다. 항상 백두루마기를 걸치고 백의민족의 얼을 배움의 터전으로 삶을 살았다고 한다.

    95세 때 일이다. 갑룡은 아무 말도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자 후손들은 관을 짜고 초상을 치르는데 36시간(하루 반) 만에 다시 일어나시며 죽음을 잘못 정했다고 하여 다시 살아 나셨다가 97세 때부터 단식에 들어가 일 년 동안 용궁의 물만을 마시며 몸속의 이 세상의 사물의 이치를 씻어내고 있었다.

    아들은 뭐라도 드시고 기운을 차리기를 원했지만 갑룡은 절대로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인간의 모든 때를 씻고 몸속에 똥오줌을 완전히 제거해서 깨끗한 마음과 몸으로 이 세상과 하직 하고 싶고 내 몸이 정화가 되어야 이 세상에서 수도한 내가 조상을 찾아 갈 수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시고 용두봉 산위에 자리를 정하시고 98세로 눈을 감으셨다.

    묘자리가 완전히 바위로 된 산을 어떻게 파고 묻을까 걱정하면서 후손들은 정상에 올라가서 그곳을 파보니 진찰흙이 깊이도 나왔다고 한다.

    그곳에 잠든 갑룡은 ‘지나가는 너희를 돌봐주고 행인을 돌봐 주겠노라’고 했다. 가파른 정상 위에 자리한 묘소는 산을 3고개를 넘어야 오를 수 있다. 멀리서 보고프면 암마이산 정상에서 남서쪽으로 내려다보면 이갑룡의 묘소가 보인다.

    오로지 인간의 구제와 지은 죄를 대신 속죄하고자 기원과 기도로 일관 하시다 가신 갑룡은 30여 년의 축조탑과 신서만을 남기고 1957년 1월 9일에 몸을 보내고 탑사 모든 곳에 갑룡의 혼이 숨을 쉬면서 찾아오는 이들을 격려와 축원으로 인도하면서 계시는 듯하다.

  6. 한국불교태고종 탑사 마이산탑사의 역대 인물 제2대 이도생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8
    마이산탑사의 역대 인물 제2대 이도생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8

    본명: 기동
    호: (쌍암)
    1912~1985 전북 진안 마이산탑사 태생
    전주이씨 효령대군 17대손
    부친의 업적을 지키고 난항을 견디어 지금의 탑사를 이루는데 크게 공헌함.
    저서: 쌍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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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한국불교태고종 탑사 마이산탑사의 역대 인물 제3대 이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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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8
    마이산탑사의 역대 인물 제3대 이혜명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8

    본명: 왕선
    호: (원암)
    전북 진안 마이산탑사 태생
    전주이씨 효령대군 18대손
    득도: 1971년 신벽산큰스님으로부터 출가
    직책: 현 마이산탑사 조실
    저서: 전북사찰록집, 한국 불가사의 마이산탑사 등 다수
    포상: 문화부장관상, 검찰총장상, 총무원장상등 감사패 및 공로패, 30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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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한국불교태고종 탑사 마이산탑사의 역대 인물 제4대 이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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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8
    마이산탑사의 역대 인물 제4대 이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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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8

    본명: 재동
    호: (도암)
    전북 진안 마이산탑사 태생
    전주이씨 효령대군 19대손
    득도: 1985년 신벽산큰스님으로부터 출가
    직책: 현 마이산탑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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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한국불교태고종 탑사 마이산탑사 馬耳山塔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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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8
    마이산탑사 馬耳山塔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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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8

    수박크기의 돌덩이에서 부터 엄지손가락만한 작은 돌멩이에 이르기까지 돌에 돌을 포개얹어 크고 작은 외줄 돌탑을 80여개  쌓아 만든 석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장관을 이루고 있는 곳 마이산 탑사(馬耳山塔寺).

    높이 15m, 둘레 20여m의 거대한 돌탑도 즐비하다.접착제를 쓴것도 아니고,시멘트로 이어 굳힌 것도 아니며, 더더구나 홈을파서 서로 끼워 맞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1백여년의 풍상속에 태풍과 회오리 바람에도 끄덕 없이 견고하게버티고 서있는까닭은 무엇일까?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보기드문 불가사의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 신비로운 얘기는 1백여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 탑을 쌓은 이갑룡 처사(본명 경의, 호 석정)는 1860년 3월 25일 임실군 둔남면  둔덕리에서 태어난 효령대군 16대 손이다. 수행을 위해 25세때 마이산에 들어와  솔잎으로 생식을 하며 수도 하던중 신의 계시를 받는다. "억조창생 구제와 만민의  죄를 속죄 하는 석탑을 쌓으라"는 것이었다.

    이처사는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전봉준이 처형되는 등 시대적으로 뒤숭숭했던 어두운 세속을 한탄하며 백성을 구하겠다는 구국일념으로 기도로써 밤을 보내고 낮에는 탑을 쌓기 시작했다.
     
    이처사는 탑을 쌓기 위해 30여년을 인근 30리 안팎에서 돌을 날라 기단부분을 쌓았고,상단부분에쓰인 돌은 각처의 명산에서 축지법을 사용하여 날라왔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모아온 돌로 팔진도법과 음양이치법에 따라 축조를 하고 상단부분은 기공법(氣功琺)을 이용하여 쌓았다.
     
    위치와 모양이 제각기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소우주를 형성하고, 우주의 순행원리를 담고 있다. 외줄탑 가운데 있는 중앙탑은 바람이 심하게 불면 흔들렸다가 다시 제자리에 멎는 신비한 탑이다. 돌에도 암수가 있어 암수의 조화를 이뤄 쌓은 것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오행을 뜻하는 오방탑(五方塔)의 호위를 받고 있는 돌탑의 우두머리 천지탑(天地塔)은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모 또한 가장 큰 한쌍의  탑이다.
     
    이와 같이 형성된 석탑들이 1백여년의 풍상을 하나같이 지켜오고 있는것은 정녕 부처님만이  아실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이 불가사의에 더하여 마이산탑사에는 또하나의 신비가 있다. 바로 역고드름이다.
    겨울에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를 드리면 그릇에서 고드름이 뻗쳐 오른다. 정성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릇속에는 이처사가 쓴 신서가 박힌다. 이 신서는 이처사가 신의 계시를 받을 때마다 그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부적과 같은 형태도 있으며 30여권의 책에 전해 내려온다. 사적비에는 언젠가 이 글을 해독하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없다.
     
    마이산 탑사아래로 500m 지점에 위치한 관광지가 있으니 이것이   탑영제 벗꽃길이다. 이곳엔 봄마다 저수지를 따라 벗꽃길이 펼쳐지는데, 본래 관광풍치 조성을 위해 축조 되었다. 이곳에도 전설이 전해지는데 이태조가 백일기도를 드린 후 영험을 받았다고 한다.
     
    탑영제에서 탑사를 올려다보면 산에 가리워져 탑은 보이지 않지만 암마이봉과 나도산 봉두굴이 유연한 자태로 탑영제 수면을 비추고 있다. 이곳은 큰 가뭄이 들때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방생의 최적지로 꼽힌다.
     
    현재 이곳에 주석하고 있는 혜명스님은 바로 이갑룡 처사님의 3대손이다. 혜명스님위로 2대손인 도생 처사님이 이곳에서 수도하였고 지금은 혜명스님과 4대손인 진성스님이 함께 마이산 탑사를 지키고 있다.
     
    스님은 처음엔 신비감과 호기심에 관광차원으로 찾은 사람들을 부처님과 연을 맺어주는 일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포교라 강조하면서 "마이산 탑사를 찾는 많은 불자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불교의 연을 잇는 관광 사찰로 더욱 발전시키겠다."며 "이제 불교는 산중불교에서 대중불교로 활성화 되어야 한다. "고 설명하면서 조용한 미소를 짓는다.
     
    또, 4대손인 진성스님과 함께 3억원을 투입, 미륵당 앞에 나한전을 짓고 종각, 요사채, 화장실 설치는 물론 주위 조경과 사찰 환경정화 사업을 사업을 완공 하였다. 혜명스님은 사회봉사활동에도 적극적이다. 마이산 탑사문화재관리소장, 진안경찰서 치안행정자문위원회 회장, 진안 애향운동본부 본부장 등(진안애향본부장 및 마이산탑사 갑룡장학회를 10여년동안 운영하고 있으며 곧 장학재단도 설립중이며) 10여개가 넘는 사회사업직책을 가지고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현대적인 스님상구현을 위해서는 생활에 뛰어들어 봉사활동 등 사회활동을 통해 포교를 하고 또 지역민과 한데 어울어져 지역발전에도 한몫을 담당하는게 제 나름대로의  생각입니다."며 사회활동에 대해 설명하는 혜명스님.
     
    스님의 이와같은 희망찬 포교의지에서 우리가 그려본 내일의 밑그림은 밝다. 1년에 약 1백 20여만명이 넘게 찾아오는 마이산 탑사에서 그 만큼의 사람들이 불자로 거듭날 때 불국토는 앞당겨질 것을 믿는다.

  10. 대한불교조계종 대각회 죽림정사 백용성조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8
    백용성조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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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명 : 진종(震鍾)
    법호 : 용성(龍城)
    속명 : 백상규(白相奎)
    아명 : 형철(亨喆)

    탄생·열반
    서기 1864.음 5. 8 전북 장수군 번암면 죽리리 252번지 탄생
    서기 1940.음 2.24 서울 대각사 대각선원에서 세수 77세로 입적

    출가·득도
    14세시 남원 교룡 산성 덕밀암에 출가
    16세시 합천 해인사극락암에서 화월화상을 은사로 득도, 혜조율사를 계사로 사미계수지

    수계
    20세시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선곡율사로부터 비구계·대승보살계 수지

    경전번역·어록저술
    경전번역·어록저술
    우리글 화엄경등 20여종 번역. 각해일륜등 20여종 어록저술

    상훈
    1962.3.1 건국 공로훈장 추서
    1990.10.9 은관 문화훈장 추서
    1990.10.9 재단법인 한글학회 감사패 수여

    중생구제와 일본 민족정신 말살정책에 맞서기 위해 불교의 대중화에 나서다.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기자 우리민족을 일제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곧 중생구제이고, 이를 위해서는 불교의 대중화가 무엇보다도 절실하다고 인식한 용성조사는 48세가 되던 1911년 산속 사찰에서 참선수행해 오던 산사생활을 끝내고 속세에 뛰어들어 서울 종로 봉익동에 대각사(大覺寺)를 창건하고 대각교운동(大覺敎運動)을 전개 하게된다. 대각교 운동이란 “내가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자(自覺覺他)”는 정신을 바탕으로 그간 서민들의 삶과 동 떨어진 산중불교 중심에서 사회변화에 발 맞추어 중생과 함께하는 대중불교로 전환하고, 개항이후 일본 불교의 침투로 왜색화 되고, 천시받던 불교를 개혁.정화하여 호국불교(護國佛敎)로서의 한국불교의 전통을 되 살리자는 것이다. 그후 대각운동의 본산인 대각사는 불교계 민족운동가들이 시국을 논하는 독립운동의 거점이자 대중, 호국불교의 포교. 수련장이 되었으며, 일본식민지 정책중 한국불교를 왜색화를 통해 민족정신을 말살 하고자 하는 정책에 끝까지 굴하지 않고 이나라 민족정신과 불교의 맥이 끊어지지 않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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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해 한용운대사와 함께 3.1독립운동을 주도하다.
    조사께서는 대각사가 창건되기 전 백제불교 도래지인 서울 우면산 대성초당에서 임제종 운동으로 인연을 맺고 있던 만해 한용운 대사와 국내외 정세에 관해 의논을 나누었다. 용성조사는 호법을 담당하는 대체(大體)가 되고 만해 한용운 대사는 호국을 담당하는 대용(大用)이 되었던 것이다. 이 대체와 대용이 굴러져 천도교와 기독교의 장로회, 감리회 등 민족대표들을 설득하고 독립선언문에 차례로 서명 함으로써 천도교, 기독교,불교가 하나의 얼이 되어 3.1독립운동을 일으키게 된 원동력이 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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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으로 옥고를 치르다.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과 태화관에서 자리를 함께하여 독립선언서를 작성 하고 서명하였다. 백용성조사는 불교 대표로서 천도교 대표 손병희. 기독교 대표 길선주 목사및 이필주 목사에 이어 네 번째로 서명하였다. 이날 용성조사는 일부러 제자 동헌스님으로 하여금 태화관 주인을 가장하고 일본순사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을 하고 있다며 민족대표들을 현장에서 체포하도록 만들었다. 이 구금 소식은 전국에 퍼졌고 3.1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어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는 소리가 전국 방방곳곳으로 울려 퍼졌다. 일본경찰에 붙들린 백용성 조사는 법정에서 재판을 받던 날“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주어 진다면 또 독립운동을 할 생각이다”라고 말해 독립운동에의 변함없는 의지를 밝혔다. 조사께서는 서대문 구치소에서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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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독립만세 운동 당시 태극기 사용을 주장하다.
    만해 한용운 대사가 “흰 바탕위에 푸른색의 대한반도기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 는 제안을 했고 천도교.기독교장로회 측에서 무방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용성조사는 “독립만세 운동에 반도기를 사용하면 발해와 고구려의 옛땅을 포기하는 선언임과 동시에 삼천리 반도 강산만 대한제국의 영역으로 한정된다”면서 “태극기 물결을 일으키자”고 역설했다. 태극기를 들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자는 용성 큰스님의 주장 배경은 별도로 소개하고자 한다.

    윤봉길의사를 만주에 보내다.
    백용성 조사는 대각사에서 윤봉길의사에게 삼귀오계를 수계하고 만주 임시정부에 가서 항일 독립운동을 할것을 권유 하였고 윤의사가 뜻을 받아 항일 운동에 나서 므로서 홍커우 공원거사를 통해 대한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게 되었다. 용성조사 입적후 대각사를 찾은 백범 김구 선생은“용성 큰 스님께서 보내주신 독립운동 자금으로 나라의 광복을 맞이하는데 크게 이바지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헌 윤봉길 의사를 보내 주시어 만대에 순국의 사표가 되도록 하여 주셨습니다“ 라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조사 영전에 감사함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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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에 선농당, 함양 백운산에 화과원을 조성 독립자금을 지원하다.

    백용성조사는 옥고를 치르고 나온 이후 만주 연길 명월진과 봉영촌에 대각사 선농당(禪農堂)을 설립하고 700ha의 농장을 마련, 일제의 압박을 피해 유랑하는 동포들에게 생활의 터전을 마련해 주고 이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주었고 경남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 백운산에 임야 30여ha와 많은 전답을 구입하여 화과원(華菓園)을 만들 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금과 전국 불교계 에서 모은 자금을 만주 북간도 연변 용정 대각사에 운반하여 일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고 일부는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가에게 전달, 항일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 넣는 원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