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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한불교조계종 전등사 전등사 약사전석불좌상 (인천유형문화재 제57호)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0
    전등사 약사전석불좌상 (인천유형문화재 제57호)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0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고, 최근에는 1621년에 약사전을 건립하면서 만들었을 가능성도 제시되었다. 두껍게 개금된 현재의 상태로는 조성 당시의 불상 원형을 파악할 수 없지만, 경기와 서울에 있는 사찰 가운데 약사전에 봉안된 석조약사불좌상과는 양식적으로 차이가 있다. 하나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불상이다. 머리가 신체에 비해 작은 편으로 안정감이 있다. 어깨가 넓은 각진 신체, 간략한 옷주름 표현 등에서 단순하고 도식적인 느낌을 준다. 머리 위의 육계는 높이 솟아 있고, 둥글고 큰 나발(螺髮)을 새겼다. 불상을 개금하기 전 사진을 보면 육계를 중심으로 정상계주와 중앙계주가 있었지만 개금을 두껍게 하여 현재는 보이지 않는다. 타원형의 얼굴에 반쯤 뜬 것 같은 작은 눈은 수평에 가깝고, 코는 원통형으로 곧게 뻗어 있으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고 있다. 두 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손바닥을 위로 하고, 왼손 위에 오른손을 포갠 다음 중지를 구부려 맞대고 엄지의 끝과 닿게 한 상품중생의 아미타 수인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 불상은 약사불로 불리고 있는데, 약사전에 봉안되어 있어 그렇게 인식된 것인지, 혹은 아미타 수인으로 후에 보수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러한 수인(手印)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제작된 예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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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대한불교조계종 전등사 전등사 대조루(인천문화재자료 제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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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4-20
    전등사 대조루(인천문화재자료 제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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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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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0

    전등사의 남동쪽으로는 멀찌감치 강화해협이 내려다보인다. 강화해협은 일명 ‘염하’라고도 부르는데 이 염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전등사 대조루이다. 전등사의 남문이나 동문으로 올라와 두 길이 합치는 지점에 이르면 2층 건물이 보이고 1층 이마에는 ‘전등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 건물이 바로 전등사의 불이문 구실을 하는 대조루이다. 지금의 대조루는 1932년에 중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건물 자체가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며 전등사의 여러 건물 중에서도 아주 소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조루에서 대웅전을 바라볼 때의 시선은 25도쯤 위쪽으로 향하게 된다. 대웅전의 석가모니불을 가장 존경하는 시선으로 보게 하는 각도로, 이런 부분까지 섬세하게 고려해 지어진 건물이 대조루이다. 대조루에는 1726년 영조 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서 썼다는 ‘취향당’이라는 편액을 비롯해 추사가 쓴 ‘다로경권’ 등 많은 편액이 보관되어 있다. 본래 대조루는 기도를 하거나 법회를 열던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불교 서적과 기념품 등을 파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다. 인천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어 있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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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대한불교조계종 전등사 전등사 양헌수 승전비(인천기념물 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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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4-20
    전등사 양헌수 승전비(인천기념물 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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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4-20

    전등사 경내에는 인천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된 양헌수승전비가 있다. 이 승전비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양헌수(1816~1888) 장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1873년(고종 10)에 건립된 것이다. 이 때는 아직 양헌수 장군이 살아있을 때였지만 대원군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뒤 외침을 물리친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운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양헌수 장군은 1838년(헌종 4)에 무과에 급제한 이래, 병인양요 때 공을 세워 한성부좌윤으로 특진되었으며 중군을 거쳐 어영대장·금위대장·형조판서·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충장공이며 저서로는 <하거집(荷居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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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대한불교조계종 전등사 전등사 정족산성진지 (인천시 기념물 제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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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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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0
    전등사 정족산성진지 (인천시 기념물 제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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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4-20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를 보호할 목적으로 설치한 군사 주둔지 정 족진(鼎足鎭)이 있던 곳이다. 1907년 방화로 소실되었으나, 2009년 발굴 조사하여 11개소의 건물지를 포함해 대규모의 유구가 발굴되었다.
    1870년대 무렵에 제작된 정족산성 일대 지도인 ‘정족산성진도(鼎足山城鎭圖)’에 보이는 진사(鎭舍), 내사(內舍) 및 무기와 군량을 저장하던 창고인 포량고(砲糧庫) 등의 건물지와 담장 시설, 문지 등이 대부분 확인되었다. 포량고 건물 바닥 전면에는 벽돌을 깐 것으로 파악되며, 정족진 내부에서 전면 외부로 빗물 등을 빼내기 위해 배수구 시설도 온전한 모습으로 발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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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대한불교조계종 전등사 전등사 정족산사고지 (인천시 기념물 제67호)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0
    전등사 정족산사고지 (인천시 기념물 제67호)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20

    정족산사고지(鼎足山史庫址)는 정족산성 안 전등사 서쪽 높이 150m에 위치하며, 사고지의 보호철책 안쪽에는 주춧돌들이 놓여져 있다. 또한, 성내에는 수호사찰(守護寺刹)인 전등사가 사고를 보호해왔으므로 1910년 조선 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실록과 서적들이 옮겨질 때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사고 건물이 언제 없어졌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931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 朝鮮古蹟圖譜≫에 정족산 사고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때를 전후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고 건물에 걸려 있었던 ‘장사각(藏史閣)’과 ‘선원보각(璿源寶閣)’이라 쓰인 현판이 전등사에 보존되어 있다.
    이 사고에 보관되어오던 정족산사고본 실록들은 많은 변동은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에 유일본으로 남은 전주사 고본이 묘향산사고로 피난했다가 마니산사고로 옮겨졌고, 이 마니산사고본의 잔존실록들을 옮겨서 보관, 관리해 오늘에 전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정족산사고본 실록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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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대한불교조계종 전등사 전설속 전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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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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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0
    전설속 전등사
    작성자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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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0

    전등사에는 두 그루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이 5백 년이 넘는 나무들이다. 한 나무는 노승나무, 다른 한 나무는 동승나무로 불리는가 하면 암컷, 수컷으로 불리기도 한다. 은행나무는 암컷과 수컷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전등사 은행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가 맺지 않는다고 한다. 이 신기한 나무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강화도령 철종 임금 때의 일이다. 조정에서는 전등사에 은행을 스무 가마나 바치라고 요구한다. 전등사 은행나무는 기껏해야 열 가마밖에 열매를 맺지 않는데 스무 가마를 요구하니 관리들의 횡포가 이만저만 심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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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시를 듣게 된 동승이 노스님께 고했다.
    “스님! 정말 관가에서 너무들 하는 것 아닙니까요?”
    “허허,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얘야,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미워해선 안 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
    노스님은 이렇게 타일렀지만 자신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은행 스무 가마를 내놓을 수도 없었고 관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더욱 더 불교를 탄압할 것이 분명했다. 노스님은 하는 수 없이 백련사에 있는 추송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추송 스님은 도력이 높기로 소문이 난 분이었다.
    며칠 후 추송 스님이 전등사에 나타났다.
    곧 전등사 일대에 ‘전등사 은행나무에서 은행이 두 배나 더 열리게 하는 기도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추송 스님의 3일 기도를 지켜보았다. 그 중에는 관리들도 섞여있었다.
    “어떻게 은행이 두 배나 많이 열린단 말인가?”
    “맞아! 추송 스님이 제 아무리 정성을 드려도 소용없는 짓이겠지.”
    사람들은 저마다 이렇게 수군거렸다.

    이윽고 기도가 끝나는 날이었다.
    갑자기 추송 스님의 기도를 지켜보던 관리들의 눈이 얻어맞은 것처럼 퉁퉁 부어버렸다.
    “이제 두 그루의 나무에서는 더 이상 은행이 열리지 않을 것이오.”
    추송 스님이 기도를 끝내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로 그때 때 아닌 먹구름이 전등사를 뒤덮더니 비가 무섭게 내렸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일제히 땅에 엎드렸다.

    얼마 후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땐 추송 스님은 물론 노스님과 동자승까지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은 보살이 전등사를 구하기 위해 세 명의 스님으로 변해 왔다고 믿게 되었다. 그 때부터 전등사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

  7. 종로노인종합복지관 본관 조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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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4-19
    조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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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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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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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서울특별시립 서울노인복지센터 조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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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4-19
    조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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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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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행복나눔가피봉사단 자원봉사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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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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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9
    자원봉사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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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4-19

    집수리 봉사 : 매월 1차례 이상 어려운 이웃에 도배, 장판등 집수리 봉사 진행
    찾아가는 의료봉사 :매월 2째주 일요일에 관내 어려운 이웃에 찾아가는 의료봉사 진행
    문화재지킴이 봉사 : 매주 1회 문화재 관리 및 청소를 진행하는 봉사
    특별행사 봉사 :일회성이거나 한시적 행사 위주의 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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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행복나눔가피봉사단 집수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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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4-19
    집수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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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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