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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룩스 불교 :: CYLOOKS 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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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산재보존회
    영산재보존회 영산재의 의의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19
    영산재의 의의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19

    의미
    봉원사에서는 매년 단오절에 대한민국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봉원사 영산재 보존회의 추최로 영산재를 봉행하고 있다.
    영산재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의 모습을 형상화한 불교의식으로서 살아있는 자와 망자 모두 다함께 진리를 개달아 이고득락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데에 그 의의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영산재는 공연이 아닌 장엄한 불교의식임을 알고 삶과 죽음으로 갈라진 우리 모두가 불법 가운데 하나가 되어 다시 만날 것을 기원하고, 이로써 세계평화와 남북통일이 성취되기를 기원하며 부처님전에 행하는 최대최고의 장엄한 불교의식인 것이다.

    절차

    주요의식 순서의 의미
    1. 복청게 (伏請偈) : 觀世音普薩님의 慈悲心으로 一切 衆生의 苦痛을 消滅 시키는 神秘하고 妙한 多羅尼를 念誦해 줄 것을 大衆스님께 請하는 儀式
    2. 천수바라 (千手鈑羅) : 大衆스님이 千手經을 讀經하는 가운데 鈑羅춤을 추는 儀式
    * 바라춤(鈑羅舞)-鈑羅(銅으로 만든 심벌즈처럼 생긴 佛具)를 양 손에 들고 추는 춤 千手多羅尼가 베풀어짐에 歡喜로운 마음을 몸짓으로 나타내는 男性的인 춤
    3. 도량게 (道場偈) : 道場을 깨끗이 해놓고 三寶天龍을 모시는 眞言을 하는 가운데 나비춤을 추는 儀式
    * 나비춤(着服舞) - 백색장삼에 길게 늘어진 紅 袈娑를 입고 塔 模樣의 고깔을 쓰고 양손에 종이 꽃을 들고 추는 춤
    三寶님과 四部大衆 및 靈駕諸位께서 法道場에 雲集하신 가운데 佛法이 베풀어짐에 따른 法悅을 나타낸 女性的인춤
    4. 거불 (擧佛) : 부처님을 禮로써 請해 모셔오는 儀式
    5. 법고춤 (法鼓舞) : 畜生制度를 위한 춤으로 한쪽 북면에서 치 는 북소리와 태징에 맞추어 反對 편 북채를 들고 북을 울리며 추는 춤
    6. 사다라니 (四陀羅尼) : 4가지 종류 陀羅尼의 無量한 위덕과 자재한 광영 그리고 神秘 한 힘으로 부처님과 神衆재위로 하여 금 供養하실 수 있도록 음식의 질과 양을 변하게 하는 眞言을 奉讀하는 가 운데 鈑羅춤을 추는 儀式
    7. 시식 (施食) : 靈駕諸位에서 음식과 法門 그리고 法會 大衆의 精誠을 傳達하여 往生極樂하게 하는 儀式
    8. 공덕게 (功德偈) : 齋를 올린 功德을 同參한 모든 사람과 靈 駕諸位에게 돌려 離苦得樂하기를 祈願하는 儀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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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영산재보존회
    영산재보존회 영산재 순서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19
    영산재 순서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19

    현재 영산재는 3일 영산재 형식에서 1일 영산재로 진행되고 있다. 재(齋)의 구성 면에 있어서 3일영산재와 1일영산재 구성적 차이는 없지만 재(齋)의식 진행에 있어서 범패와 작법무가 축소되어 진행되기 때문에 이러한 작법무 및 범패가 1일 영산재 진행 구성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영산재개요, 범패와 작법무, 작법무, 장엄, 시련, 대령, 관욕, 괘불이운, 식당작법, 영산작법, 시식, 봉송, 옥천범음대학, 영산재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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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영산재보존회
    영산재보존회 불교의식 범패승에 대한 계보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19
    불교의식 범패승에 대한 계보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19

    삼국시대로부터 유래되어 불교수행의 커다란 부분으로서 계승 및 전수되어 오고 있는 불교의식은 한국전통불교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고자 노력하는 영산재 보존회를 통해 우수한 우리문화의 원형으로 보전발전되어 세계속에서 우리 민족의 우수함을 널리 알리고 불법홍포에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계보
    삼국시대의 법회 의식에 기록은 진평왕 15년(613년) 황룡사 백고좌(百高座) 설치기록만이 전하며, 범패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경상도 하동 쌍계사(雙溪寺)에 있는 진감국사(眞監國師) 대공탑비문(大空塔碑文)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지만 범패 계보에 대한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조선시대 계보
    조선시대는 숭유억불정책 가운데에서도 가장 많은 의식 자료가 남아 있고 이 가운데 1748년 영조 4년 대휘화상 작성한 {범음종보}에 범패 계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있다.

    1대 국융(國融 : 세종 1418년-1450년 때 활약) => 2대 응준(應俊) => 3대 혜운(惠雲) => 4대 천휘(天煇) => 5대 연청(演淸) => 6대 상환(尙還 : 임진왜란1592년 이후 활약) => 7대 설호(雪湖) => 8대 운계당법민(雲溪堂法敏 : 효종 1650년-1659년 때 활약) => 9대 혜감(惠鑑) => 10대 순영(순暎)·유민(兪敏)·채청(采淸)-(봉암사), 찬오(贊悟)-(남평, 불회사), 성각(性覺)-(능선 첨불사, 개천사), 축찰(竺察)-(해남, 대흥사), 대휘(大輝)-(장릉, 보림사), 이진(怡眞)·풍식방-(순천, 선암사), 각선(覺禪)-(구례, 화엄사), 도인(道忍)-(순천, 대광사), 연기(演機)-(고흥, 금탑사) => 11대 계환(戒還) => 12대 홍해(洪海)

    1970년대 이후 불교의식 무형문화재 지정 현황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범패는 1973년 11월 5일 박송암(1915-2000), 김운공(1907-1984). 장벽응(1909-2000) 스님 등 세 분이 국가무형문화재 제 50호로 최초로 지정되었다.
    그 후 1987년 11월 11일 범패, 장엄, 작법무부분 이일웅(1920-2003) 스님, 2005년 11월 김구해 스님 보유자 지정 등 문화재로 지정되어 체계적인 계보가 형성되었다.

  4. 대한불교조계종사회복지재단 대한불교조계종사회복지재단 조직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19
    대한불교조계종사회복지재단 조직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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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대한불교조계종 동산반야회 동산불교대학원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19
    동산불교대학원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19

    동산불교대학원에서는 2년과정의 '동산불교대학' 을 마치고 보다 대학원에서 본격적인 부처님의 참뜻을 탐구하시기 바라며, 한편으로는 대승불교의 핵심인 보살도를 실천해야겠습니다.
    물론 공부가 성숙된 분들도계시고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해서 전법하는 것을 소극적으로 생각하시거나 자기 혼자만의 공부로 만족하실 수 있는 분들도 계실 수 있겠습니다만 대승불교에서는 불보살님처럼 우리도 강한 자기 서원을 세워 그 원력을 실천해 가는 과정이 바로 수행이요 공부라고 배워왔습니다.

  6. 대한불교조계종 동산반야회 동산불교의식교육원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19
    동산불교의식교육원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19

    근래 불자교육은 지속적인 관심과 동참속에 나날이 증장되어가고 있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정법이 널리 홍보되고 있다. 그러나 불자 교육 중에 가장 낙후되어 있으며, 관심의 사각지대에 버려지고 있는 분야가 바로 ‘불교의식’ 분야이다. 이는 ‘불교의식’이라 하면 스님들이나 하는 전문분야로만 인식되어져 온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儀式’이 포교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인식의 부재탓이라 할 수 있다.

    재가불자의 포교에 있어 동사섭(同事攝)이 필수적인 행이라 할때 불교의식은 절대적으로 갖추어야 할 요건이다. 포교현장에서의 활동은 ‘설법’이전에 ‘의식’이 먼저 등장되고, 활용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일반법회’ 의식 뿐 아니라 경조사에의 동참에서 그 합당한 의식을 집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종래의 불교의식문은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있어 의식동참자 모두가 그 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는 흠이 있다. 이런점에서 금번에 본회에서 개설하고 있는 한글의식교육원은 저러한 시류에 적절한 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본 한글의식교육을 통해 많은 포교에의 원력불자가 동참하여 쉬운 우리말로 수련 정진한다면 일상의식에서부터 시다림 등 전문분야의 의식까지 스스로 집전하는 능력을 키워서 유능한 포교사로 발돋움하는 좋은 계기가 되리라 확신한다.

  7. 대한불교조계종 동산반야회 동산불교대학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19
    동산불교대학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19

    불교의 대중화와 대승불교 사상을 널리 알릴 사명감 있는 포교인을 양성키 위해, 교계대덕스님 및 교수를 초청하여 불교의 분야별 전문교육을 통하여 직장인을 위한 2년과정의 동산불교대학입니다.

    1992년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설립된 동산불교대학은 국내의 대표적 교학(敎學) 도량이다. 여느 불교대학이 사찰 직할로 운영되는 데 반해 이곳은 재가불자들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런연유로 스님뿐만 아니라 전공학자들이 대거 강사로 참여, 정규대학 못지 않은 수준높은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강좌는 매주 목요일 주간반과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저녁반(50명)과 지방 및 해외교포 불자들을 위한 통신반(50명)이 운영되고 있다.

  8. 원효학연구원
    원효학연구원 원효 생애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19
    원효 생애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19

    원효 元曉 (617-686)는 한국불교가 낳은 불멸의 성사(聖師)이다. 그는 대승불교의 건설자인 인도의 나가르주나(Nagarjuna, 용수龍樹)나 중국불교를 새롭게 열어간 천태지자(天台智者)대사에 비견되기도 한다. 한국불교에서만이 아니라 세계불교사에 있어서 원효의 위치는 그만큼 찬연하게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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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그대로 민족의 첫새벽을 열어간 원효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압량군 불지촌(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에서 태어났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원효를 잉태할 때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그를 낳을 때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원효의 아명은 서동(誓幢)이라 하였다. 서당은 '첫새벽'을 뜻하는데 그의 의미 그대로 비단 한국의 불교사상만이 아니라 철학사상 일반에 있어서도 큰 새벽을 연 밝은 별이었다.

    <송고승전>에서는 원효가 일찍이 나이 십세 무렵에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학업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남달리 영특했던 그에게 일정한 스승은 따로 없었다. 불교가 공인된 지 100년이 지나던 이무렵 신라에는 적지 않은 고승들이 배출되어 있었다. 원효가 그들을 찾아 배우고 물었지만, 뒷날 佛法의 깊은 뜻을 깨달음에 있어서는 특정한 스승에 의존하지 않았던 것이다.

    젊은 날의 원효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는 불교학은 물론 유가(儒家)와 도가자(道家者)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학문을 닦는 한편 수행자로서 간절하고 피나는 고행을 다했던 것 같다. 그가 남긴 다양한 저술들에서 그 편린들을 찾아볼 수 있다.

    원효의 행석 가운데서 각별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두 차례에 걸쳐 입당(入唐) 유학을 시도했던 그가 문득 스스로 크게 깨닫고 발길을 돌린 일이 그것이다. 원효는 34세때 당에 유학하기 위해 의상(義湘)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요동까지 갔다가 그곳 순라꾼에게 잡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45세에 다시 역시 의상과 함께 이번에는 해로(海路)로 해서 당(唐)으로 가기 위해 백제 땅이었던 당주계(唐州界)로 향하였다. 항구에 당도했을 때 이미 어둠이 깔리고 갑자기 거친 비바람을 만나 한 땅막에서 자게 되었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곳은 땅막이 아닌 옛 무덤 속임을 알았지만 비가 그치지 않아 하룻밤을 더 자게 되었다. 그날 밤 원효는 동티(귀신의 장난)를 만나 잠을 이룰 수 없었고, 이는 곧 그에게 큰 깨달음의 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지난 밤 잠자리는 땅막이라 여겨 편안했는데 오늘밤 잠자리는 귀신의 집이므로 이처럼 편안치가 못함을 확인하였다. 이어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원효는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萬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하고 다시 신라로 되돌아 왔다. 마음밖에 법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는 곧 진리이다. 당나라에 진리가 있다면 그것이 왜 신라에는 없겠는가. 그는 이처럼 인간의 내면 속에 간직되어 있는 마음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또한 신라인으로서 주체적인 자각을 이루고 있다. 원효의 이같은 깨달음은 후대 사람들에 의해 더욱 드라마틱하게 각색되어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 그가 무덤 속에서 해골을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았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토리 자체보다도 이 신라인의 주체성, 그리고 이로부터 확장해간 그 사상적 보편성과 세계성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

    젊은 시절부터 장년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열렬하게 유학의 꿈을 품어 온 원효가 한 순간에 전회(轉回)하여 신라로 돌아온 후, 그는 오직 불교학의 연구와 저술 그리고 대중교화에 몰두하였다. 여러 문헌에 의하면 그의 저술은 100여종 240여권(또는 86부 180여권)으로 알려져 있다. 그 연구 범위도 대·소승불교의 모든 부문을 망라하고 있어, 가히 넓고 깊은 學解와 초인적 저술활동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서도 그의 대표적 저술이라 할 수 있는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에서 보인 탁월한 이해와 견해는 중국 석학들까지도 찬탄과 경이를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그의 저술은 19부 22권만이 1천3백년의 장구한 세월을 뚫고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 가운데는 소의 두 뿔 사이에 벼루를 놓고 집필했다는 저술배경에 일화도 많은 「금강삼매경소」, 원효사상의 중심 개념인「화쟁」을 풀이한「십문화쟁론」 등은 다행이 남아있다. 그리고 원효철학의 성격을 가장 잘 말해주는 연구저작으로는 「대승기신론소」를 들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대승기신론」는「금강경」「원각경」「능엄경」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의 근본경전인 사교과에 속하는 논서이다. 마명의 저작이라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치않고 산스크리트 원본은 발견되지 않은채 한역본만 유통되고있다. 그 내용은 치밀한 구성, 간결한 문체, 독창적인 철학체계등 모든 면에서 불교문학사상 최대 걸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대승기신론」은 당시 인도에서 대립하고 있던 중관파와 유가파(유식파)의 양대 불교사상을 지향, 화합시켜「진과 속이 별개의 것이 아니며」(진속일여),「더러움과 깨끗함이 둘이 아니라」(염정불이)는 사상을 나타낸 논서이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는 현실세계(속)에서 깨달음의 세계를 향하여 끊임없이 수행함으로써 완성된 인격(진)을 이룩할수 있으며, 깨달음의 세계에 이른 사람은 아직 염오한 단계에 있는 중생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이「진속일여」,「염정불이」의 사상이다.

    원효는「대승기신론」을 대하자마자 스스로의 삶과 학문의 목표와 너무나 맞아떨어짐에 감명을 받아 기존의 논의에관한 9종의 연구서를 내 놓았다. 그 가운데서 4권(대승기신론소 2권, 대승기신론별기 2권)이 현재까지 남아 전해지고 있다. 국가나 종파를 초월하여 널리 유포된「대승기신론」에 관해서는 수백여종의 주석서들이 나와있으나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기신론삼소」라 일컫는다. 중국 정영사의 혜원(서기 523∼592)의 주석서인「정영소」, 신라의 원효대사의 주석서인 소위「해동소」, 그리고 중국 화엄학의 대가 법장(서기 643∼712)의「현수소」가 곧 그것이다.

    기신론의 3소 중에서도 원효의 「해동소」는 혜원의 「정영소」를 그 내용에 있어 단연 능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기신론」주석의 백미라 일컫는 법장의 「현수소」는「해동소」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은 대목이 허다하며 원효의 견해를 표현만 바꿔 재정리한 면도 적지가 않다. 요컨대「현수소」는「해동소」가 있어서 비로소 그를 토대로 저술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의 징관이 스승 법장으로부터「해동기신소의」를 배웠다고 증언하고 있음을「송고승전」도 밝히고 있다.

    원효는 젊은 시절에 도당유학을 단념하고 국내에 머물었으나 그의 학문과 사상은 국경을 넘어 중국, 일본, 인도로 멀리 세계화되었다.「불출호 지천하」란 노자의 말과 같이 그는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능히 세계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원효는 그러나 교학연구나 관념적인 사상 속에만 머물러 있던 인물이 아니었다. 삼국의 통일을 전후하여 소용돌이치는 한 시대를 살았던 그에게는 왕실·귀족불교도 인도해야 할 대상이었고, 더구나 서민 대중과 고통받는 하층민 그리고 정복지역의 유민들도 다같이 뜨겁게 안아야 할 이 땅의 가엾은 중생들이었다. 원효가 과부가 되어 있는 요석궁의 공주와 짧은 인연으로 아들 설총을 낳고, 스스로 승복을 벗어던진 채 小姓居士라 자처한 일은 분명 놀라운 파격이었다. 그러나 이를 겉에 드러난 액면대로 파계나 타락으로 볼 수 있을까? 그 파계의 소생이 한국 유교의 문묘에 배향된 십팔유현중에서도 첫 번째로 모시고 있는 설총이라니 만만치가 않다.

    염정불이 진속일여(染淨不二·眞俗一如)는 그의 학문적 이론이자 종교적 실천의 기초이다. 더럽고 깨끗함이 둘이 아니고 진리의 길과 세속의 길이 본래 같다는 이해는, 진리의 근원인 우리들 一心의 통찰에서부터 나온다. 이미 그것을 확연하게 깨달은 원효에게 성(聖)과 속(俗)의 구별은 무의미했을 터이다. 그는 聖과 俗을 一心으로 아우르고 있다. 그렇게함으로써 원효는 더욱 역동적이고 자유로운 큰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승려들 대부분이 왕실과 귀족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성내(城內)의 대사원에서 귀족생활을 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원효는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 지방의 촌락이며 시장거리며 뒷골목을 승려가 아닌 세속인의 모습으로 무애가-무애가는 화엄경의 「일체무애인/일도출생사」(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다번에 생사를 벗어 나리로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노래이다.-를 지어부르고 가무와 잡담으로 서민들 사이에 끼어들어 불법을 설법하는 교화작업에 힘썼다. 누가 그런 기이한 행색의 원효를 이 땅에서 가장 뛰어난 학승이며 왕실에서도 존경받는 고승이라 생각했을 것인가. 그러나 그는 자신을 한없이 낮춘 자유로운 성자였고 민중의 벗이었다. 그리하여 가난한 사람, 천민, 부랑자, 거지,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 그런 원효를 허물없이 따랐다. 그들은 가슴 절절히 와닿는 생기를 얻었으며, 염불을 따라부르며 정토에 때어날 희망을 키우기도 하였다.

    원효의 만년에 대해서는 역시 자세한 자료가 없다. 다만 보살행(菩薩行)으로써 민중교화행을 마친 그는 소성거사가 아닌 원효성사로 되돌아가 穴寺에서 생애를 마쳤다는 기록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신문왕 6년(686) 3월 30일의 일이었다.

    자주적인 가성인이자 위대한 사상가로서, 성속(聖俗)을 넘나든 자유인이자 민중의 구제자로서 원효는 그의 70년 생애를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다가 갔다. 그러나 그는 떠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의 정신과 한국사상사의 첫 새벽을 환하게 열어 놓은 원효는 오늘에도 여전히 우리들 가슴속에 살아 있다.

    통일신라 불교의 대중화에 결정적 역할

    당시 신라사회는 원광(圓光)과 자장(慈藏)의 교화에 큰 영향을 입었으나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불교와 일반 서민불교 사이에는 여전히 괴리가 있었다. 이러한 때 혜공·혜숙(惠宿)· 대안(大安) 등이 일반 서민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 그들에게까지 불교를 일상생활화시켰다. 원효 역시 이들의 뒤를 이어 당시의 승려들이 대개 성내의 대사원에서 귀족생활(그들은 엘리트의식에 사로잡혀 민중은 무지와 나약 때문에 어떻게 해도 석가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다고 판단, 애써 민중을 외면했다.)을 하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지방의 촌락, 길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며 무애호(無碍瓠; 이상한 모양의 큰 표주박으로 두드리면서 無碍歌를 불러서 붙여진 명칭)를 두드리고 〈화엄경〉의 "모든 것에 걸림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났도다"라는 구절로 노래(무애가無碍歌=모든 것에 걸림이 없다는 뜻의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가무와 잡담중에 불법을 널리 알려 일반 서민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이는 불교의 이치를 노래로 지어 세상에 유포시킴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무식한 대중에까지 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노래에 담겨있는 무애사상은 원효의 사생활에도 잘 나타난다. 그는 거사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도드나들고 혹은 석공들의 쇠칼과 쇠망치를 가지고 다니며 글을 새기기도 하고, <화엄경>에 대한 해설서를 지어 그것을 강의하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여염(보통사람이 모여있는)집에서 유숙하기도 하고 혹은 명산대천을 찾아 좌선하기도 하는 등 어떤 일정한 틀에 박힌 생활태도가 없었다. 이와 같이 행적도 뚜렷한 규범이 없었고, 사람들을 교화하는 방법도 일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원효의 이러한 행적은 귀족중심의 불교를 대중에 확산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원효의 사상

    현존하는 그의 저술은 20부 22권이 있으며,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100여부 240권이나 된다.특히, 그의 <대승기신론소>는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금강삼매경론>은 인도의 마명(馬鳴)·용수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명칭을 받은 저작으로서 그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대저술이다. 그는 학승(學僧)으로서 높이 평가될 뿐만 아니라, 민중교화승으로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또, 종파주의적인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인 입장에서 회통(會通)시키려 하였는데 그것을 오늘날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라 부르며, 이것은 그의 일심사상(一心思想)·무애사상(無#애14思想)과 함께 원효사상을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그의 사상은 너무나 다양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나 항상 ‘하나’라는 구심점을 향하였고, 화쟁과 자유를 제창하였다.
     
    ① 일심사상:원효의 일심사상은 그의 저서 <금강삼매경론>·<대승기신론소> 등 그의 모든 저술에서 철저하게 천명되고 있다.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하여 본각(本覺)으로 돌아가는 것, 즉 귀일심원(歸一心源: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그는 만법귀일(萬法歸一)·만행귀진(萬行歸眞)을 굳게 믿고 사상과 생활을 이끌어갔다. 그리고 일심이야말로 만물의 주추(主樞)이며, 일심의 세계를 불국토(佛國土) 극락으로 보았고, 이것을 대승·불성(佛性)·열반이라고 불렀다.
     
    ② 화쟁사상:원효는 어느 한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화엄경>·<반야경>·<열반경>·<해심밀경 海深密經>·<아미타경> 등 대승불교 경전 전체를 섭렵하고 통효(通曉)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전체 불교를 하나의 진리에 귀납하고 종합 정리하여 자기 분열이 없는 보다 높은 입장에서 불교의 사상체계를 세웠다.
    이러한 그의 조화사상을 화쟁사상이라고 한다. <십문화쟁론 十門和諍論>은 바로 이러한 화쟁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핵심적인 저술이다. 그는 여러 이설(異說)을 십문으로 모아 정리하고 회통함으로써 일승불교(一乘佛敎)의 건설을 위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그의 이와같은 통불교적 귀일사상은 한국불교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③ 무애사상:원효의 무애사상은 그의 사생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한 자유인이었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애14人 一道出生死).”라고 한 그의 말을 보더라도 그의 무애사상은 짐작된다.
    그는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무릇 중생의 마음은 원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잠잠하기가 오히려 바다와 같으므로 평등하여 차별상(差別相)이 없다.”라고 하였다.그러므로 그는 철저한 자유가 중생심(衆生心)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고, 스스로도 철저한 자유인이 될 수 있었으며, 그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승과 일심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밖에도 원효는 여래장사상 등 불교의 모든 사상에 대하여서도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9. 대한불교천태종
    대한불교천태종 천태금강불교대학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19
    천태금강불교대학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19

    천태종단에서는 일반 신도들의 교육을 위해서 각 지역에 불교교양대학으로서 천태금강불교대학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천태금강불교대학은 서울 관문사와 부산 삼광사를 비롯한 전국 곳곳에 설립되어 있으며 매년 수백 명의 신도들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키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배출한 졸업생은 전국적으로 8천여 명 이상이며, 학생은 불교과와 법사과로 모집하고 있습니다. 천태금강불교대학의 강사진은 불교학 전문가로 구성되어 있어서 누구나 어려운 교리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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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대한불교천태종 금강대학교 금강대학교 대학원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19
    금강대학교 대학원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4-19

    2008년도에 설립
    https://www.ggu.ac.kr/graduate

    불교학과
    금강대학교대학원은 2008년도에 사회복지불교학과(석사과정, 박사과정)로 개설되어 2017년도부터는 불교학과로 개칭하였으며, 2020년에는 심화전공으로 불교교학전공, 불교상담학 심화과정의 2개 전공으로 세분화 하였다. 이는 천태불교사상과 인간복지사상에 기초를 두고, 21세기 지속가능사회에 대응하기 위하여 '참된 인간성, 전문적 지식, 창조적 능력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함이다. 즉 지혜와 자비가 모두에게 차별 없이 충만한 이상세계의 실현을 위하여 불교복지철학과 인간존엄성의 윤리에 근거한 교육목적에 충실하고자 함이다. 따라서 불교학과의 전체적 교과과정에서는 천태불교사상을 비롯한 불교학의 전반적인 연구를 하게 되고, 심화전공에서는 불교교학, 불교복지상담학이 세부적으로 개설되어 개별 분야의 전문분야에 대하여 융합적인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특성화 하였다.

    불교교학전공
    ‘불교교학’이란 불교의 교리적, 사상적 측면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일컫는 말로서 전통적으로 ‘의학(義學)’으로 불리었던 분야이다. 불교교학 전공자는 불교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생겨난 각각의 종파나 학파의 사상 체계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공’, ‘유식’, ‘연기’, ‘무애’, ‘원융’ 등 특정한 교리나 개념의 기원, 의미, 변화, 실천론적 함축 등을 폭넓게 탐구할 것이 요청된다. 아울러 불교교학 전공자들은 여러 교리나 개념들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는지, 다른 종파나 학파에서는 그것들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거나 변용하였는지 등에 대해서도 살펴보게 된다. 불교교학은 대개 고전어에 대한 지식에 바탕하여 문헌학적, 철학적 방법론을 통해 연구되어 왔지만, 전통적인 방법론에만 국한되지 않고 현대사회의 대중을 위하여 불교의 교리를 보다 명료하고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 또한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불교사상을 연구자 스스로가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그 성과를 연구자 집단 및 불교 공동체와 공유하는 것이 불교교학 전공의 목표이다.

    불교상담학 심화과정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은 물질만능 문명의 극심한 사회변화 속에서 인간소외가 심화됨에 따라 개인의 정신건강 황폐화와 함께 가족의 해체, 사회구성원간의 의사소통적인 인간관계의 단절 등의 고통을 겪고 있다. 그로 인해 상당수의 현대인들은 다양한 인간관계 스트레스와 심리적 괴로움에서 자유로움을 구가할 수 있는 전문적 심리상담의 필요성에 직면하고 있다. 이는 불교의 근본적인 실천원리인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四聖諦)에서의 인간심리 이해와 심리치유 접근과도 상통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대학원의 불교상담학 심화과정은 불교정신과 사상을 바탕으로 인문학 및 사회과학의 상관관계와 상통하는 원리들을 중심으로 인접 학문분야를 융합교육하게 된다. 이를 위하여 대학원 과정(석사과정, 박사과정)에서는 불교상담 관련 학습을 기초로 인문학적인 연구와 세미나 방식으로 수업이 이루어진다.

    불교학과 선수과목
    선수과목 이수 대상자의 경우 본교 해당 학부/전공의 교과목 2개과목(6학점)이수를 원칙으로 한다.

    불교학과 (불교교학, 불교상담학 심화과정) 석/박사 교육과정
    불교교학전공, 불교상담학 심화과정(석/박사공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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