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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선본사 선본사 종각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선본사 종각-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절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계단 윗쪽 끝에 누각을 놓아 종각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래서 절 안에서 보면 종각이고 바깥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누각으로만 보이고 있다. 바깥쪽에는 '선정루(禪定樓)'라는 현판을 걸어 놓았다.
또한 계단 중간쯤에 계단과 계단 사이 평평한 공간이 있는데, 이 좌우 벽에 사천왕상을 그려놓아 사천왕문도 겸하고 있다. 결국 이 선정루는 벙종각. 누각. 산천왕문 등 세 가지의 기능을 겸하고 있는 셈이다.
범종은 1988년 조성되었는데 종신(鍾身)에는 당시 주지이던 재희(宰喜)스님 및 증명스님과 여러 시주자 명단이 있다. 이 선정루는 범종과 함께 1988년 새로 지어졌고, 그 전에는 단지 계단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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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선본사 갓바위 주변 요도 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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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갓바위 주변 요도 상단-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상단은 팔공산 남쪽 봉우리 해발 850m의 관봉(冠峰) 정상을 일컫는 다른 이름입니다.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좌상이 자리하고 있는 상단은 선본사의 중심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우리나라에서 명실상부한 약사신앙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관봉을 우리말로 해석하면 “갓(관)+바위(봉)”가 되므로 많은 사람들이 약사여래 부처님을 “갓바위 부처님” 이라고 친근한 명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관봉석조여래좌상은 높이가 4 m에 달하는 대형 불상으로 보물 제43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을 대표한다고 하겠습니다.
1934년 지방지인 “화성지 승지”에는 관암석불로 기록되어 있고, 선덕여왕 때 조성되어 세인들이 관암미륵불로 부르고 있으며 기도에 영험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오래전부터 기도영험이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지금까지도 그 기운이 변함없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회백색의 화강암으로 조성된 불상과 좌대는 한 돌로 조각되어 있으며 머리위에는 판석 형태의 보개가 얹혀있습니다. 화성지에 따르면 조성 시기는 선덕여왕대로 기록되어 있으나 불상의 조각양식은 통일신라시대의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상단은 약사여래 부처님과 그 앞의 공간을 내어 야외 법당처럼 쓰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유리광전(琉璃光殿)을 두어 내부에 약사여래 삼천원불을 모셔두고 우천이나 추위에도 법당에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유리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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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선본사 갓바위 주변 요도 중단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갓바위 주변 요도 중단-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상단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대웅전과 그 앞의 삼층석탑이 불자들을 반기고 있습니다. 이 공간은 중단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중단에 위치한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좌우 협시로 문수, 보현 보살님을 모시고 있으며 석가모니 부처님 뒤로 대웅전 후불탱화가 모셔져 있고, 신중탱화와 십육나한 탱화가 모셔져 있습니다.
대웅전 앞에는 관봉 약사여래부처님 만불을 동으로 제작, 축소하여 봉안한 선본사 만불대원탑이 있습니다. 신라 감은사지 삼층탑을 모델로 제작한 이 탑은 부처님 진신사리 10과와 팔만대장경 희귀인경본 80여권, 사리장엄구 75가지를 봉안하여 그 가치는 실로 대단하다고 할 것입니다.
대웅전 법당 아래층에는 중단 종무소가 있어 사찰 업무와 기도 접수 등 종무 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종무소 앞에 마련된 벤취에서 지친 다리를 잠시 쉬어가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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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선본사 갓바위 주변 요도 하단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갓바위 주변 요도 하단-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중단에서 1~2분만 내려오면 삼성각과 범종루를 보실 수 있습니다.
삼성각과 범종루, 대중 공양간이 있는 이 공간은 하단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삼성각에는 목각으로 제작된 칠성도, 산신도, 용왕도가 모셔져 있습니다. 삼성각 맞은편에 자리한 대중 공양간은 팔공산 관봉을 찾는 수많은 불자들과 탐방객들의 허기진 배를 든든히 채워줄 수 있도록 공양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삼성각의 우측으로 위치한 범종루에는 밀랍과 자연재료를 이용하여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과 같은 전통 방식으로 제작된 약사여래범종이 하루 두 번 삼라만상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범음(梵音)을 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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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선본사 갓바위 주변 요도 3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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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갓바위 주변 요도 3층석탑-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하단에서 지친 다리를 쉬며 공양을 마치고 내려오는 참배로에서 일주문으로 가는 다리를 건너기 전 좌측 산길로 300m 지점에 선본암 3층 석탑이 있습니다. 2중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이 있는 석탑은 1층 탑신에 사리공이 있다가 도괴된 것을 1979년에 복원하였습니다. 긴 세월을 견디며 서있는 선본암 3층 석탑은 선본사와 극락전을 내려다보며 다가올 불국토를 기다리고 있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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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선본사 갓바위 주변 요도 선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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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갓바위 주변 요도 선본사-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신라 소지왕 13년인 491년에 극달화상의 창건설이 유력한 선본사 본 사찰을 이릅니다. 선본사의 중심 전각은 극락전으로 아미타부처님을 주존으로 좌우에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님이 봉안되어 있으며, 불보살님의 뒤로 후불탱화가(영산회상도) 모셔져 있으며, 법당의 좌우측으로 신중도, 칠성도가 모셔져 있습니다.
극락전 좌우로 종무소 및 대중공양간 각 1동과 극락전 오른쪽에 산신각이 있습니다. 또 절은 경내가 축대 위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절 앞쪽에 범종각인 선종루를 세워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통한 주요 입구로 이용하고 있습니다.신라 창건설이 무색하게 전각에 모셔진 불,보살님들은 근,현대에 조성되어 아쉬움이 남지만 사찰 주변에서 어렵지않게 볼수 있는 석등의 간주석이나 하대석, 석탑 기단과 기와 파편 등 여러 가지 부재들이 그 역사를 짐작케하는데 어려움이 없으며, 많은 신도들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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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선본사 선본사의 성보문화재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선본사의 성보문화재-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본사는 멀리 관봉 (冠峰)이 바라다보이는 나지막한 언덕 위 평평하게 땅을 잘 골라 만든 터에 자리하고 있다. 아담한 경내는 팔공산의 지맥(支脈)이 뻗어 내린 끝자락에 포근히 감씨여져 있어 아늑하며, 좌향(坐向)도 전체적으로 서남향(西南向)이라 햇빛도 잘 들어 늘 따사로운 느낌을 갖게 한다. 깊이 따져 보지 않아도 예로부터 이 곳이 좋은 터로 여겨졌음을 넉넉히 알 수 있을 듯 하다. 아울러 절이 정남방(正南方) 正 으로 들어앉지 않은 것은 관봉 아래 있는 갓바위 부처님을 향하기 위한 배려로 풀이할 수 있다.
지금 절에 남아 있는 성보문화재는 대부분 근래의 것들이다. 특히 극락전을 비롯한 전각 전부와 그 안의 불상(佛像) 불화(佛畵)에 모두 최근작들만 남아 있어 절에서 전하는 496년(소지왕 2) 극달(極達)스님의 창건설을 무색케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남아 있는 전각과 당우, 불상, 불화 등으로는 천년 고찰(古刹)의 분위기를 느끼기 어렵다. 하지만 옛 터야 어디 가지 않는 법. 눈을 조금만 낮추어 보면 이 곳이 그 옛날 신라의 옛 가람터임을 알아보는 데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우선 선정루(禪定樓)아래 계단을 지나 막 절 경내로 들어오면서 오른쪽을 보면 예전 이 곳 부처님이 앉아 있었던 석조 대좌(臺座)가 땅 위에 놓여진 것이 눈에 띈다. 팔각 하대석 위에 방형의 좌대가 있는 이 대좌에는 안상(眼象) 조각이 있어 한 눈에 통일신라시대 부처님이 앉던 대좌임을 알아 볼 수 있다.또 극락전 계단 양쪽으로 기둥처럼 세워진 석조물도 한 번 찬찬히 살펴보면 곧 신라시대 석등(石燈) 좌대 위에 그렇게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오른쪽 좌대는 영남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형식의 신라시대 석등 좌대이기도 하다. 불대좌(佛臺座)나 석등 대좌 모두 옛날의 제모습이 아니고 부서진 채 놓여 있지만 예전 신라 때의 모습을 상상케 해주는 단초(端初) 역할은 충분히 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극락전 등이 자리한 지금의 경내를 조금 벗어난 곳, 예컨대 극락전 뒤편이나 요사 왼쪽 밭둑을 거닐어 보면 무수한 와편(瓦片)속에 심심찮게 신라시대 와편도 눈에 띄고 있다. 게다가 극락전 뒤편 경사(傾斜)가 그다지 심하지 않은 언덕에는 상당히 오래 전에 조성된 듯한 석축(石築)더미가 무너진 채 남아 있어 역시 옛날의 자취를 말없이 전하고 있다.
이렇게 일부 남아 있는 석물(石物)과 유적으로 보아도 통일신라 무렵 이 곳에 세워졌던 고사(古寺)를 확인하는 데 별 어려움은 없다. 다만 앞서 말한 석조물의 제작 연대가 통일신라 시대라서 이것만 가지고는 이 절의 5세기 창건설을 곧바로 뒷받침하지는못하고, 또 창건 당시의 절 이름이 지금과 같은 선본사였는가도 확증하지 못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아무튼 창건 이후 천 여년이 흐르는 동안 절은 성쇠를 거듭하였으므로 남아 있는 유물이 드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현재 있는 성보문화재를 살핌으로써 아쉬움을 달래 본다.절의 전각으로는 금당인 극락전을 비롯, 좌우로 선방및 요사 각 1동과 극락전 오른쪽에 산신각이 있다. 또 절은 경내가 축대 위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절 앞쪽에 선정루를 세워 범종각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통한 주요 입구로 이용하고 있다. 그 밖에 기와 건물은 아니지만 선방과 요사 옆으로 각각 자그마한 시멘트 건물을 지어 놓았는데 창고 및 처사 거처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편 갓바위 부처님이 있는 관봉 아래에도 칠성각.산신각.용왕각을 비롯하여 요사 몇 채가 있다. 이 전각들은 주로 갓바위 부처님 봉안을 위해 세워진 것인데 절에서는 말하기 편하고 듣기 쉬우라고 흔히 밑에 있는 선본사를 '본절', 이곳을 '웃절'로 부른다. 웃절은 갓바위 부처님을 찾는 신도가 많은 탓으로 규모가 대단하다. 요사만 하더라도 식당으로 쓰이는 삼층 건물을 포함해서 전부 6동, 그리고 기타 건물도 6동이나 되어 오히려 본절을 능가한다. -
대한불교조계종 선본사 선본사 관봉 석조약사여래좌상(갓바위부처님)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선본사 관봉 석조약사여래좌상(갓바위부처님)-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지성으로 기도드리면 누구나 한가지 소원은 이루게 해준다는 약사여래좌상, 갓바위 부처님으로 더 잘 알려진 이 불상은 군위 삼존불과 함께 팔공산 불교 문화의 정수를 이루는 작품이다.
팔공산의 남쪽 봉우리 관봉(冠峰)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불 좌상으로서, 전체 높이는 4m에 이른다. 관봉이 곧 우리말로 '갓바위'이므로 흔히 '갓바위부처님'이라고 부른다. 또 머리에 마치 갓같은 판석(板石)이 올려져 있기에 그렇게도 부른다. 관봉은 인봉(印峰).노적봉(露積峰)과 함께 팔공산의 대표적 봉우리로서 해발 850m의 고봉(高峰)이다. 그래서 이 곳에서는 팔공산의 서남쪽이 모두 두루 조망(眺望)된다.
이 부처님은 화강암 한 돌로 만든 것인데, 몸뿐만 아니라 대좌도 역시 한 돌로 되어 있다. 불상의 광배(光背)는 없지만 뒤쪽에 마치 병풍을 친 듯 기다랗게 바위가 둘러져 있어 혹시 이 자연 바위를 광배로 삼았기 때문에 따로 광배를 만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머리는 소발에 육계가 큼직하고 그 위로 두께 15cm정도의 흡사 갓모양을 한 얇은 바위가 얹혀졌다. 바위 아랫면에는 육계에 맞닿는 곳에 둥근 구멍을 파서 육계에 맞도록 하였으며, 웃면 가운데는 같은 식의 둥근 구명을 도드라지게 하고 그주위에 화판(花瓣)을 조각했다. 그래서 어느정도는 인공적 조각임을 느끼게 한다. 얼굴은 양쪽 볼이 두툼하게 되어 있는 등 비교적 둥글고 풍만한 편이다. 입술은 굳게 다물어 대체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이목구비가 조화스럽게 잘 표현되어 있다. 이마 한 가운데는 백호(白毫)가 둥글게 솟았고, 오똑한 코 아래의 인중도 두드러지고 있다. 두 귀는 길게 양쪽 어깨에까지 늘어졌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두 어깨는 반듯하고 넓어 당당한 신체와 잘 어울리고 있다.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을 아래로 향하고 있어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과 비슷한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이 수인은 석굴암(石窟庵) 본존불의 그것과 양식상 흐름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왼손은 결가부좌한 왼쪽 발 부근에서 손바닥을 위로 향해 약합(藥盒)을 올려놓았다.불상에 표현된 불의(佛衣)는 통견(通肩)인데 두 팔을 거쳐 두 무릎을 덮고 대좌 아래로 흘러내려 있으며, 불의의 옷주름을 표현한 선각(線刻)이 매우 유려하다. 그리고 가슴 앞에는 속옷의 일종인 승가리(僧伽梨) 혹은 군의(裙衣)의 띠매듭이 보인다. 불상의 뒷면에는 옷의 표현이 없고 그냥 평면으로 되어 있다.
대좌는 신체에 비해 작은 편이다. 대좌 윗부분에는 길게 입은 옷의 끝자락이 엎고 있는데 이같은 대좌 형식을 상현좌(裳懸座)라고 한다. 이것은 팔공산 부근에 있는 군위(裙衣) 삼존불 가운데 본존불의 대좌형식과도 유사하다. 이 갓바위 부처님은 절에 전하는 바로는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수제자인 의현대사(義玄大師)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638년(선덕왕 7)에 조성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전체적 양식으로 보아 8~9세기 작품으로 보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정설이다. 현재 보물 제 4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불상의 학술상 정식 명칭은 '관봉석조여래좌상'. 이름에서 굳이 약사불인 것을 밝히지 않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간 이 부처님의 명칭에 대해 미륵불, 아미타불 등 이론(異論)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위에서도 말했듯이 왼손에 보면 약합이 있는 것이 뚜렷하다. 또 옛날부터 이 부처님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약사여래로 생각하고 있었다. 단순히 전하는 말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이 근거 없이 전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리고 어쨌든 손위의 약합이 분명한 이상 앞으로는 약사여래로 부르는 것이 옳을 듯 하다.현재 갓바위 부처님 앞에는 약 80평 가량 널찍하게 터가 닦였고, 바닥에 돌이 깔리고 주위에는 철제 난간이 둘러쳐져 있다. 또 그와 함께 선본사에서 올라오는 길이 좀 더 넓혀지고 계단과 철제 난간이 많이 보완되었다. 그래서 예전에 비해 한결 기도드리기 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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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선본사 선본사 갓바위 부처님과 약사신앙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선본사 갓바위 부처님과 약사신앙-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신자(臣子)가 정성을 쌓으매 구하는 것은 꼭 이루어질 것이며, 부처와 천신께서 약을 주시니 병이 낫지 않음이 없으리다. 이에 붉은 정성을 다하여 가만히 도우심을 바라나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태상왕께서 해가 바뀔 때부터 병에 시달리셨다가, 저번에 하늘의 도우심을 받아 잠시 차도가 있었습니다. 건강해질 희망이 있다 하여 놀라운 기쁨이 평시보다 배가 더하였었는데, 나았다 더했다 서로 뒤치니,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나이다. 중생들의 생각은 대개 질병만을 걱정하나이다. 장년(壯年)의 때라도 오히려 위태롭고, 하루를 넘어도 벌써 괴로운데, 하물며 70세의 노쇠기에 다 석 달이 넘는 오랜 병이겠습니까. 좋은 의술이 없음을 탄식하고, 부처님의 함께 의탁하려 합니다. 듣자오니 석가모니께서 경을 설하실 때에 특별히 약사여래의 발원이 깊은 것을 말씀하시되, "맹세코 병고에 신음하는 이를 구제하려고 손바닥에 바리를 들고 다닌다." 하였으니, 부처께서 어찌 헛말을 하시겠씁니까. 내가 이에 징험(懲驗)합니다. 이에 스님들을 모아 법회의 자리를 베풉니다. 천명의 합장 정진으로 백억 신(身) 부처님의 돌보심을 얻고자 합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부처님께서 태상왕이 여러 해 동안 귀의한 간절함을 어여삐 여기시고, 소인이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정성을 생각하시와 큰 자비를 내리어 본래의 서원을 어지기 않으시와, 우리 태상왕으로 하여금 몸이 경쾌하고 기운이 순하여서 모든 병의 뿌리를 갑자기 녹여 없애며, 음식이 맛있고 잠이 편안하여 길이 만년의 수명을 누리게 해 주시옵소서.
-「동문선(東文選)」제113권.
<정릉행태상왕구병약사정근소(貞陵行太上王救病藥師精勤梳)>조선초기의 대학자 변계랑(卞季良,1369~1430)이 쓴 <정릉에서 태상왕의 병을 구하고자 약사 정근을 거행하는 글>의 내용이다. 숭유억불을 국가의 기본 시책으로 내세운 조선 왕조에서 약사불에게 국왕의 치병과 장수를 기원하는 애틋한 글이다. 유학으로 무장하고 불교를 등한시했던 당시 사람들에게도 약사불은 치병을 위한 귀의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약사불은 동방의 정유리세계(淨流璃世界)에 머물며 중생의 질병고를 치료하는 대의왕불(大醫王佛)이다. 이 부처님은 12가지 커다란 원을 세워 중생들의 온갖 고통을 소멸시킬 것을 맹세하였는데, 특히 중생의 질병에 가장 큰 주안점을 두었다.12가지 대원 가운데는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대승(大乘)의 가르침에 편안히 머물게 하거나 폭군의 악정에서 벗어나 사회적 부조리나 강도(强盜) 등의 해악을 면하게 하고, 기아(飢餓)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등의 다양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여러 발원과 역할은 대승불교의 불보살들에게서 보편적으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섯 번째의 '일체의 신체장애자로 하여금 그 장애가 완전히 회복되도록 하는 서원'과 일곱 번째의 '온갖 질병을 다 없애고 몸과 마음이 안락하여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도록 하는 서원'이 약사불을 대표하고, 또 이기능이 생로병사에 시달리는 중생들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약사신앙이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유행하고 있었다. 앞에서 살펴본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밀본법사(密本法師)의 영험담과 함께 다음과 같은 김양도에 관한 일화는 신라 시대의 약사신앙을 잘 보여준다. 승상(丞相) 김양도(金良圖)가 어릴 때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입이 붙어버리고 몸이 뻣뻣해지더니 말도 못하고 몸도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었다. 집안 식구들은 귀한 아들이 석상처럼 굳어진 데 놀라서 야단법석이었다. 그런데 김양도가 가만히 보니 큰 귀신 하나가 작은 부하 귀신들을 거느리고 집안으로 들어와서는음식이란 음식은 다 맛을 보는 게 아닌가. 또 푸닥거리를 하러 온 무당이 굿을 할라치면 귀신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 욕을 해대는 통에 무당들도 쫓기듯 가버리는 것이었다. 김양도가 이런 사실을 알리고 싶어도 입이 붙어 말을 할 수가 없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김양도의 아버지는 무당굿을 해도 소용이 없자 이번에는 법륜사의 스님을 초청해서 불경을 읽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스님이 경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곧 큰 귀신이 나타나 부하 귀신들에게 쇠방망이로 스님의 머리를 내리치게 하였다. 쇠방망이를 맞은 스님은 피를 토하여 죽고 말았다. 김양도의 아버지는 집에 큰 귀신이 붙은 것을 알고 비로소 밀본법사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사람을 보내 청했더니 곧 오겠다는 전갈이 왔다. 밀본이 오기로했다는 말을 들은 귀신들은 아연질색했다. 부하 귀신들은 겁에 질려 수군거렸다. "밀본법사가 오면 우리가 불리할텐데 지금이라도 빨리 피하는게 좋지 않을까?" 그러자 큰 귀신이 눈을 부라리며 윽박질렀다. "밀본이라는 자가 도대체 뭔데 너희들은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느냐? 제 아무리 신통력이 있다해도 내 앞에서는 어림없다." 귀신들이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사방에서 갑옷을 입고 한 손에는 긴 창을 꼬나잡은 대역신(大力神) 여럿이 나타나더니 귀신들을 붙잡아 꽁꽁 묶어 버렸다. 그 뒤를 이어 수많은 천신들이 나와서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물러서서 기다리는데 마침내 밀본법사가 도착했다. 김양도는 그 자리에서 병이 나아 붙었던 입이 열리고 굳었던 몸이 풀렸다. 김양도가 그 동안 자기가 본 일을 낱낱이 얘기하자 모두들 놀라며 새삼스럽게 밀본을 우러러 보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김양도는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어 흥륜사에 미륵상과 좌우보살상을 만들고 금색 벽화를 그려넣는 등 일생 동안 부처님 받들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위와 같은 신비한 영험담은 신라시대의 밀교를 살피는데 있어 중요한 기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자체로 약사신앙의 위신력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인간의 삶에서 생로병사는 가장 근원적인 고통의 하나이다. 그것은 또한 석가모니가 세속의 쾌락과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출가한 근본 이유이기도 하다. 생로병사 가운데서도 특히 질병은 사람의 생활을 피폐하게 만들고 고통이 뒤따라 늘 질병의 예방과 치료는 가장 큰 근심거리가 되곤 한다. 그렇기때문에 일찍이 원시 사회로부터 질병을 퇴치하는 주술(呪術)신앙이 번성하였고, 이를 담당하는 주술사는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권능을 지닌 존재로 인식되었다. 고대 국가가 성립하면서 국가를 대표하는 인물들 가운데는 이 주술사 출신들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지령의 치료는 시대를 막론하고 중시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불교가 우리 나라에 수용되면서 재래의 주술 신앙은 이제 불교 속으로 동화되었고, 약사신앙은 치병을 기원하는 사람들에게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위에서 본 밀본법사와 김양도에 관한 이야기는 약사신앙의 효용성이 널리 신라 사회에 자리잡았음을 말한다. 또한 신앙의 번성과 함께 약사불의 조성이 뒤따라 오늘날까지 상당수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동화사(桐華寺)입구 마애약사여래좌상을 비롯하여 경주의 백률사(柏栗寺) 금동약사불입상, 남상 용장계곡 석조약사불좌상, 삼릉계곡 석조약사불좌상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불상의 모습은 대개 왼손에 약그릇[藥盒]을 받쳐들고 오른손은 가지런히 펴 땅을 가리키거나 두려움 없는자세[施無畏印]를 취한다. 약사신앙이 번성하던 삼국 및 통일신라 때의 약사불상은 약그릇을 간략하게 나타낸 둥근 구슬 모양의 보주(寶珠)를 들기도 하였다. 한편 사방불(四方佛)이라 하여 사각형의 바위 각 면에 불상을 새겨 방위불(方位佛)을 상징하는 형식도 유행하였는데, 동방에 약사불을 조성하여 약사신앙이 널리 대중화되기도하였다. 굴불사지(窟佛寺地) 사면불과 경주 남산 칠불암(七佛庵) 사면불의 약사불은 그 대표적 예이다.
이 밖에도 약사불의 조성은 작은 불상으로도 많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선남선녀가 약사여래상을 조석으로 모시면서 꽃을 올리고 향을 사르면 장수하게 됨은 물론 부귀를 얻는다는 「약사경」에서 유래한다.
고려시대에도 약사신앙은 널리 유행하였다. 특히 잦은 국가적 위기를 맞으면서 이를 불력으로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기원도량이 개설되었는데 약사도량 역시 국난 극복의 민심을 모으는 데 기여하였다. 이는 약사불의 명호를 외우면 국가의 재난이 소멸된다는 약사불의 본원에 근거를 둔 것이다. 한 나라에 질병이 유행하거나 외적의 침입등 재난이 있을 때에는 국왕이 솔선하여 약사도량을 베풀면 국토가 평안해진다고 한다. 첫머리에서 말했듯 이러한 흐름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상당수의 약사 탱화가 조성되었고, 불교가 민간화되면서 하나의 민중 신앙으로서 자리매김해 나갔다. 오늘날 큰 사찰의 대부분에는 약사전이 위치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반드시 약사불을 봉안하여 지성을 다한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약사신앙의 대중적 호응은 높아만 가고 있다.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은 이러한 역사적 연원을 지닌 약사신앙의 성지(聖地)라고 할만하다. 대개 우리 나라의 불교 신앙에서 가장 널리 번성한 것은 관음신앙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관음신앙의 성지는 전국 곳곳에 걸쳐 있다. 그러나 약사신앙의 성지라고 이름을 붙일 만한 곳은 흔치않고 또 이 때문에 이 곳 갓바위 부처님이 더욱 소중한 의미를 지녔는지도 모르겠다.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850M에 달하는 이곳 관봉의 약사불을 친견하러 온다. 제각기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또 약사신앙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개인적 소망을 빌기도 한다. 엄밀한 신앙의 입장에서야 아미타불에게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관음보살에게 자비심을 구하고, 또 약사불에게는 치병을 기원해야 하겠지만 무명을 떨치지 못한 중생들에게는 그저 모든부처님이 모든 서원(誓願)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인지 모든 부처와 보살님들은 중생들의 바람을 내 담당이 아니라고해서 내치는 일은 없다. 갓바위 부처님도 마찬가지다. 정성껏 기원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꼭 한 가지 소원만은 이루어 주신다는 이야기가 그래서 생겼다.신라 때 조성된 이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올라 소원을 빌고 뜻을 얻어갔는지 헤아릴 수야 없다. 또 아쉽게도 약사불에 관련된 영험담이 활자로 전하지 않아 여기에 소개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갓바위 부처님이 그저 그 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위안과 안식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동방의 유리광세계(溜璃光世界)에서 세상을 환히 밝혀주는 약사불이 이곳 팔공산 자락에서 부드러운 미소로 중생의 온갖 고난을 어루만지는 듯 하다. 그래서 오늘도 선본사의 갓바위 부처님을 찾는 많은 중생들은 약사불의 위신력에 감화를 얻고 기쁜 마음을 안고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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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선본사 약사신앙의 참뜻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약사신앙의 참뜻-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약사신앙은 약사여래의 본원(本願)에 의거하여 전개된 대표적인 불보살신앙 가운데 하나이다.
동방의 정유리세계(淨溜璃世界)를 교화하는 부처님인 약사여래는 보살도를 닦을 때 열두가지의 크고 거룩한 원을 세워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구하는 바를 다 이루게 하여 부처님이 되신 분이다.
약사여래의 본원 공덕과 그 이익을 설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약사여래경」을 달마급다가 번역하여 유통시킨 이래 현장 삼장과 의정 삼장 등의 번역본이 이루어졌고, 이 후 동북 아시아 불교권의 중요한 소의경전(所依經典)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이 통일된 후 8세기 무렵부터는 국가적인 외호와 민간 신앙이 함께 어우러지는 신라 사회의 보편적인 신앙으로 확산되었다. 그 결과 당시 크고작은 여러 사찰에서 약사불을 모시는 약사 도량이 개설되고, 왕이나 장군의 무덤에 12지신상을 새긴 지석(支石)을 세우는 등 토속 신앙과 결부시키려는 노력도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경주 분황사 약사전과 김유신(金庾信)묘의 지석 등이다. 이러한 국가적이고 민간의 보편적인 신앙이었던 약사신앙은 현대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곧 선본사의 갓바위 부처님을 찾는 현대 한국 불자들의 한 신앙형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