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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한불교조계종 선본사 한국의 약사신앙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31
    한국의 약사신앙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31

    한국에 불교가 전래되어 국가적으로 공인된 최초의 기록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의 일이다. 이어서 백제 침류왕 원년(384)과 신라 법흥왕 14년(527)에 잇달아 불교가 공인되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모두 국가적으로 불교를 인정하게 되었다. 이후 삼국의 불교는 급속도로 발전하여 신라의 불교가 들어온 지 채 100년이 넘기전에 이미 우리 나라 불교의 학문적 수준이 중국을 넘어서게 될 정도였으며, 7세기 중엽을 지나면서부터는 우리나라의 스님들이 중국불교에 적지않은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불교학의 발달과 마찬가지로 삼국 시대 불교 신앙의 모습도 변해갔다.


    초기에는 국가 중심적인 구복신앙이 주류를 이루게 되고, 중기 이후에는 국가적 상황과 이름난 스님들의 교화 영향에 따라 현실구복과 내세왕생, 국태민안을 주로 하는 관음.정통.미륵신앙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가운데 관음 신앙은 당시의 일부 스님들의 신행 기록이 뚜렷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의상대사의 낙산사(落山寺) 창건 설화는 관음신앙의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리고 미타정토신앙은 삼국 시대 중기의 대표적인 신앙으로 미륵신앙과 함께 유행하여 민간에도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다. 미타신앙에 대해서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나 있는 몇가지 기록들이 그 전거(典據)가 된다. 대표적인 것은 원효대사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장엄스님이 원효대사에게 수행법을 배워 정토에 왕생하였다는 것과 원효스님이 머리를 기르고 마을을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하였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신라의 미륵신앙은 통일국가를 이루려는 신라 국민 모두의 바람을 미륵 부처님의 가피로 이루려는 것이었다. 곧 자장율사가 경주 황룡사에 금동으로 장육존상을 조성하여 모시고 한편으로는 구층탑을 세워서 통일국가의 민족적 염원을 미륵부처님의 가피로 이루려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신라 국민들과 왕실의 노력으로 통일을 이룬 신라의 불교 신앙은 그 형태에 있어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이 다름아닌 약사 신앙인 것이다.


    8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약사불의 조성은 당시 신라사회 민중들의 보편적인 신앙형태일 뿐만 아니라 국가 왕실의 중요한 신앙형태이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약사 신앙은 선덕여왕 때 밀본(密本)이라는 스님이 「약사경」을 읽고 왕의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를 통일 신라때 경주에 위치한 대표적인 사찰중의 하나인 분황사에 거대한 크기의 약사여래입상을 모신 것, 그리고 통일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둘러싸고 있는 남산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사방불과 약사여래입상, 또한 신라 왕실이나 장군의 무덤 주변에 새긴 12지신상의 지석(支石)등이 약사 신앙과 관계된 유적이다. 통일 신라의 약사 신앙은 앞에서 살펴본 「약사경」에 나타난 각종 형태의 신앙을 골고루 수용하였다. 약사유리광여래가 보살도를 행할 때 세운 12대원에 근거한 현실구복.제병.멸재의 신앙과 통일을 이룬 국가에서 더 이상 국난이 없을 것을 기원하는 호국신앙.정토신앙 등이 고루 포섭된 약사신앙이 통일신라의 형편에 꼭 들어맞았을 것이기때문이다.
    그래서 위에서 열거한 신라 특유의 약사신앙 형태들이 남아 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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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대한불교조계종 선본사 선본사 위치와 환경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31
    선본사 위치와 환경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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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본사(禪本寺)는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 팔공산(八公山)의 관봉(冠峯) 아래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직영사찰이다. 이곳은 절 이름보다는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 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절의 동쪽에 있는 갓바위 부처님에는 가파른 산세에도 불구하고 늘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잔병치레가 유달리 많은 손주아이 손을 붙잡고 주름진 이마에 맺힌 땀방울도 아랑곳 하지 않으며 할머니는 이 곳 갓바위 약사불께 치성을 드리러 오른다. 먼 길 떠난 자식의 무사를 비는 어머니들, 세속에 찌들어 잠시라도 지친 심신을 달래고 마음의 평온을 되찾으려는 선남 선녀들, 모두가 웅대한 갓바위 부처님의 위용에 마음을 의탁하고 살그머니 머금은 미소에 저절로 기쁨을 안고 돌아간다. 정성껏 기원하면 꼭 한가지 소원은 이루어 주신다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선본사는 바로 이 갓바위 부처님에서 내려다 보이는 팔공산의 아늑한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 나라 곳곳의 산천이 예로부터 불교 성지 아닌 곳이 드물지만 특히 팔공산은 한국 불교 역사의 초창기에 있어서 매우 커다란 위치를 차지한다.


    팔공산은 대구광역시와 경북 군위군.경산군.영천군.칠곡군에 걸친 높이 1,193m 의 명산이다. 빼어난 산세와 풍광으로 일찍부터 경북의 영산(靈山)으로 알려져 왔고, 지금은 도립공원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또한 이 산은 신라 시대부터 공산(公山), 또는 부악(父岳)이라 불리며 5악(岳)중의 하나인 중악(中岳)으로 경배의 대상이 되어 왔다. 신라 불교가 국가적으로 공인된 것은 527년(법흥왕 14)의 일이지만 이보다 앞서 불교는 이미 민간에 유포되어 있었다. 즉 일선군(一善郡)에 사는 모례(毛禮, 또는 毛綠)라는 사람이 공인 이전부터 불교를 신앙하고 있었고, 고구려에서 온 묵호자(墨胡子)와 아도(阿道)화상도 이곳에 머물며 포교 활동을 펼쳤다고 한다.


    이 신라 불교의 초전(初傳)이 이루어졌던 일선군이 바로 오늘날 팔공산 아래에 있는 경북 선산군이다. 아도가 머물렀던 모례의 집은 후일에 도리사(桃李寺)가 되어 지금도 신라불교의 초기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 불교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팔공산에는 이후 많은 승려가 주석(住錫)하고 사찰이 자리잡으면서 명실공히 신라불교의 생생한 역사가 전개되었다. 동화사(桐華寺).은해사(銀海寺).송림사(松林寺) 등의 사찰과 제2석굴암이라 불리는 군위삼존석굴(軍威三尊石窟), 그리고 관봉의 갓바위 부처님 등이 이를 잘 말해 준다.

  3. 대한불교조계종 선본사 선본사 창건과 연혁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31
    선본사 창건과 연혁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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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본사는 한국불교 약사신앙의 대표적인 성지이지만, 아쉽게도 그 창건이나 연혁에 관한 내용은 거의 전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점은 우리나라대부분 사찰들이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선본사의 경우는 특히 심한 상태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선본사의 창건과 연혁을 정확하게 서술하는 것 자체 가 대단히 어려운 일임을 전제해 두며, 여기서는 현대 이후에 작성된 몇몇 자료를 근거로 하여 대강의 내용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현재 선본사 사중에서 신뢰하고 있는 창건설은 신라 소지왕(炤知王) 13년인 491년에 극달화상 (極澾和尙)이라는 분이 이 곳을 창건하였다는 내용이다. 정확한 문헌적 근거는 찾기 어렵지만 최근까지 이같은 극화상의 창건설이 유력하게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같은 창건설이 어떻게 해서 전승되기 시작했고, 또 근거가 될만한 자료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일부 자료에는 선본암중수기문(禪本庵重修記文)이라는 자료가 있으며, 여기에 극달화상의 창건설이 언급되어 있다고 밝한 바 있지만, 이 자료의 성격이나 현존 여부도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선본사의 정확한 창건 시기를 언급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무리한 일이 되겠으나, 여기서는 극달화상과 선본사 소재 유물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창건 시점을 유추해 보고자 한다.


    우선 선본사의 창건주로 등장하고 있는 극달화상이라는 스님에 대한 검토이다. 이 스님은 이른바 정사류(正史類)에 해당하는 역사서나 주요 불교 문헌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선본사와 인접해 있는 팔공산 동화사(桐華寺) 관련 일부 문헌에 그 법명이 보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즉 극달화상은 동화사의 창건주로 일부 자료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조선불교선교양종제일수찰대본산경북달성군공산면동화사적비(朝鮮佛敎禪敎兩宗第一首寺刹大本山慶北達城郡公山面桐華寺跡碑)」라는 자료에 실려 있는 다음의 내용을 검토해 보기로 했다.
    (동화사는) 생각컨대 극달존숙(極達尊宿)께서 부악(父岳)의 남쪽 기슭에 창건하고 유가(瑜伽)라고 이름을 붙였으니, 때는 신라 소지왕 15년인 계유(癸酉)년 이었다.


    이 사적비는 1931년에 김정래(金鼎來)라는 분이 찬술하였으며, 여기서 동화사는 신라 소지왕 15년, 493년에 극달화상이 창건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사실 동화사의 창건에 관한 내용도 몇가지 설이 함께 제기되어 있는 상태이다. 극달화상의 창건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보는 사람들은 흥덕왕(興德王) 7년인 832년을 동화사의 실질적인 창건연도로 보고 있디고 하다. 즉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심지계조(心地繼組)> 조에 실려 있는 내용으로 보아 동화사의 실질적 창건주는 심지(心地)라는 스님이며, 그 창건시기는 832년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혼동도 결국 극달화상이라는 스님의 행장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여하튼 동화사는 지금까지도 극달화상을 창건주로 인식하면서 그 분의 영정을 소중하게 봉안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록 행장은 부명치 않지만 극달이라는 법명을 지닌 스님은 이렇게 팔공산의 주요 사찰 창건주로 지금까지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극달화상은 어느 시기에 생존하였던 인물로 보아야 할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선본사 일대에 현존하는 몇가지 유물 자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확한 시기 산출은 어렵겠지만, 이들 유물의 연대 추정을 통해, 선본사의 창건시기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본사의 유물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선본사삼층석탑(禪本寺三層石塔)>(경상북도유명문화재 제115호)이다. 운이 석탑은 8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팔공산에 산재하고 있는 석탑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주목되는 유물이다. 따라서 이 석탑만 놓고 본다면 선본사는 늦어도 8세기 전반 이전에 가람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으며, 팔공산의 여러 사찰 가운데서도 매우 이른 시기에 창건된 사찰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선본사의 가장 중요한 유물인 이른바 '갓바위 부처님'도 석굴암 불상보다 이른 시기인 8세기 초반 이전에 이미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갓바위 부처님'의 조성시기를 보더라도 역시 선본사의 창건은 8세기 이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확신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러면 선본사와 동화사의 창건시기로 등장하고 있는 491년, 493년은 어느 정도의 신뢰성을 지니고 있는가?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신라 왕실에서 불교를 공인하는 527년 이전의 일이므로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신라 일부의 사람들에게 불교가 전파되고 있긴 하였지만, 불교의 공인 이전에 사찰을 건축하고 불상과 탑을 조성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이다. 따라서 선본사의 창건 시점은 6세기 중.후반부터 8세기 이전이라고 일단 가정할 수 있으며, 창건주인 극달화상도 그 시기에 활동했던 스님이 아닐까 한다. 아울러 지금 동화사에 봉안 중인 극달화상의 진영에 '公産開祖極達和尙之眞影' 즉 '공산의 개조' 라는 표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스님은 불교가 팔공산에 자리잡는 과정에 있어 가장 큰 공헌을 하였던 인물로 짐작된다.


    매우 이른 시기부터 가람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던 선본사의 역사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거의 알려진 내용이 없다. 다만 「선본암중수기문」이라는 자료에 의거했다는 몇개의 연혁이 밝혀져 있으며, 여기서는 이를 중심으로 간략하게나마 선본사의 연혁을 구성해 보기로 하겠다.


    491년 (신라소지왕3) 극달화상이 선본사 창건
    638년 (선덕여왕7) 의현스님이 관봉의 약사여래좌상(갓바위부처님)을 조성함
    1614년 (조선 인조19) 수청스님이 사찰을 중창함
    1766년(영조4) 기성화상이 사찰 중건
    1802년 (순조2) 일암당 스님을 증명으로 하여 국성스님등이 신중탱화 조성
    1820년 (순조20) 운암화상이 사찰 중수
    1877년 (고종14) 낙허화상이 사찰 중수 이후 월인화상도 사찰 중수
    1957년 사찰 일부 수리
    1962년 10월 2일자 <동아일보>에 '갓바위부처님'이 소개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
    1985년 극락전을 중창하고 선방 및 산신각을 신축
    1990년 칠성각 개축
    1994년 10월 대한불교 조계종 직영사찰이 됨


    이상이 현재까지 알려지고 있는 선본사 역사와 관련한 내용들이다. 491년의 창건설이 안고 있는 문제점과 창건 시기에 관계된 내용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아울러 '갓바위 부처님'이 조성되었다고 하는 638년은 뚜렷한 명문(銘文)이나 문헌적 근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설화의 내용에 근거한 것임을 밝혀둔다.


    위의 연혁에서 선본사의 중창주로 등장하고 있는 수청(秀廳).기성(箕成).운암(雲岩).낙허(樂虛).월인(月印)스님 등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1802년에 조성된 신중탱화는 확실한 내용의 화기(畵記)를 포함하고 있어 주목된다.또한 화기 가운데는 '...奉安千此庵秩'이라는 글귀가 포함되어 있어 이 불화가 선본사에서 조성된 후 '갓바위부처님' 아래 지금의 전각으로 옮겨져 봉안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19세기 초반의 가람 구조도 지금과 유사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또 화기 가운데의 본암질(本庵秩)에 있는 '조실정우(祖室挺玗)'라는 글도 눈에 띈다. 약사신앙의 성지인 선본사의 역사가 이렇게 소략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큰 안타까움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도 선본사의 역사를 찾아내기 위한 작업은 계속되어야 하겠지만, 문헌자료의 한계를 감안한다면 선본사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발굴조사 등의 고고학적 조사가 시급히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갓바위 부처님이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끈 것은 지금으로부터 그다지 오래된 일은 아니다. 물론 그전부터 계속 있어왔던 불상이지만 조선시대를 지나오면서 한 때 세상 사람들의 머리에서 잊혀졌고 그것은 근처 부락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1960년대 초반에 석굴암이 본격적으로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되면서 앞서 말한 군위 삼존불이 발견되어 이른바 '제2의 석굴암'으로 불렸는데, 팔공산도 함께 본격적으로 조사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때 갓바위 부처님이 발견. 조사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받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2년 당시의 신문을 보면 갓바위 부처님의 발견을 나름대로 특필(特筆)하고 있는데, 그때의 신문 기사를 보면 당시의 발견에 대한 흥분이 그대로 읽혀진다.

  4. 선본사 템플스테이 선본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31
    선본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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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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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대한불교조계종 봉정사 봉정사 무량해회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31
    봉정사 무량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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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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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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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면 4칸, 측면 3칸의 겹처마 집에 전면과 남쪽에 마루를 놓고 양쪽의 중앙에 칸벽을 설치하여 몇 개의 방으로 나누어진 요사이다. 남쪽 면에는 축단 밖 단하로 튀어나온 열주(烈柱)로 받쳐진 누와 후면 내정 쪽에 쪽마루가 연결되어 통로는 3면에 이어졌다. 해회당 몸체에서 약 2미터 가량 띄어 'e'자를 뒤집은 형태로 요사가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트인 ㅁ자형' 평면을 이룬다.


    안마당을 둘러 싼 북쪽의 방사 모서리에 '염화실'이라 한 작은 편액이 붙어 있다. 2칸 방과 작은 대청 그리고 단칸방 둘이 꺾여 북동쪽을 막아 섰고 4칸의 넓은 부엌은 동남 모서리에 돌출된 남쪽으로 3칸통의 큰 방을 만들어 시중과 대중방으로 활용하고 있다.


    중정에 면한 본채는 겹처마와 익공이 가구된 비교적 높고 당당한 건물이나 ㄷ자의 후원 요사 부분은 홑집으로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인다. 안마당을 향한 본채 뒷면 각방에는 띠살문 옆에 살대를 꽂은 광창이 설치되어 내정의 분위기를 아담하게 꾸며준다. 요사란 절에서 스님들이나 신도들이 거처하는 집을 말한다. 불사를 관리하고 강당, 선당에서 수행하는 모든 수행자들의 의식주를 뒷받침해 주는 생활공간이며 휴식공간이다.

  6. 대한불교조계종 봉정사 봉정사 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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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31
    봉정사 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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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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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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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 : 조선 숙종


    문이란 성질을 달리하는 서로 다른 인위적인 공간을 이어주는 것이다. 서로 다른 공간의 경계지점에 담이나 벽을 쌓고 문을 낸다. 문은 열리고 닫히도록 만들어 안과 바깥을 구분짓기도 하며 사람의 출입을 견제하는 구실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찰에 세워지는 일주문은 담장과 연결되지도 않으며 문짝도 없이 자연스럽게 건축한다.


    일주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째 문이다.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되었지만 일심(一心)을 뜻한다고도 할 수 있다. 항상 한마음 한뜻을 가지고 수도하고 교화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봉정사의 일주문은 명옥대를 지나 언덕을 오르다 보면 서서히 지붕이 나타나고 조금 더 오르면 완전한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준다. 일주문을 이곳에 세운 까닭은 봉정사로 오르는 길이 급한 경사를 이루다가 이곳에서 평지를 이루기 때문이다. 일주문은 자연석을 가지고 허튼층쌓기로 마무리 한 기단 위에 둥근 기둥을 나란히 일직선상에 세우고 그 위에 공포를 짜서 결구하고 도리를 걸친 다음 서까래를 걸어 완성시켰다. 지붕은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하고 측면에 풍판을 설치한 구조이다. 공포의 구조는 다포양식을 사용하였으며 처마 밑에는 '天燈山鳳停寺' 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1900년 현 위치에 신축하였다.

  7. 대한불교조계종 봉정사 봉정사 삼성각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31
    봉정사 삼성각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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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 미상


    산신(山神) 칠성(七聖) 독성(獨聖)을 함께 봉안하고 있는 당우(堂宇)이다. 삼성은 각각 재물과 수명과 복을 관장하는 존재로서 전통신앙인 삼신신앙과의 습합현상을 살펴볼 수 있다.


    산신은 원래 불교와 관계가 없는 토착신이나 불교가 전래된 후 일반 대중에게 포교하기 위한 방편으로 재래신앙에 대한 수용력에 의하여 먼저 호법신중이 되었다가 후대에 원래의 성격을 불교 안에서 되찾게 된 것이다. 산신은 가람수호신으로서의 기증과 함께 산속생활의 평온을 비는 외호신으로 받들어지며 자식과 재물을 관장하는 신이다.


    칠성은 북두칠성을 가리키는데 별나라의 주군으로 인간의 복과 수명을 관장하는 신이다. 독성은 나반존자(那般尊者)라고도 불리며 십이인연(十二因緣)의 이치를 홀로 깨달아서 성인의 위치에 올라 말세 중생에게 복을 내린다고 한다. 삼성은 모두 불교 밖에서 유입된 신들로서 일반 중생들을 위해서 우리의 토착신앙인 삼신신앙을 불교와 습합함으로서 중생 구도의 목적을 띠고 있다. 따라서 건물의 이름을 전(殿)이라 하지 않고 한 단계 격을 낮추어 각(閣)이라 일컫는다.

  8. 대한불교조계종 봉정사 봉정사 종각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31
    봉정사 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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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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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 건립
    종을 걸어두는 누각으로 종루(鐘樓)라고도 불리 우며, 사찰의 의식도구인 사물(四物 :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을 걸어놓고 각종 불교의식의 시작과 끝을 알리기 위한 것으로 사용한다.
    봉정사는 범종만 달아놓았다.

  9. 대한불교조계종 봉정사 봉정사 공덕당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31
    봉정사 공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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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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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 건립
    절에서 공양을 만들고 먹는 곳으로 사용하고 있다.

  10. 대한불교조계종 봉정사 봉정사 괘불대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31
    봉정사 괘불대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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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계단 좌ㆍ우에 있는 석조물로 사찰의 행사나 법회 때 법당의 부처님을 대신하여 괘불(탱화)을 걸어두기 위한 지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