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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봉정사 봉정사 부도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봉정사 부도-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시대 : 조선시대
고승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하는 묘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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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봉정사 봉정사 만세루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봉정사 만세루-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시도유형문화재 325호
지정일 : 2001년 11월 01일
시대 : 조선 숙종
누문은 대부분 이층으로 건축되며 아래층은 사찰의 중정으로 통하는 통로로서의 기능을 하며, 윗층은 산사의 전망을 감상하거나 목어(木魚), 운판(雲版), 범종(梵鐘), 법고(法鼓)등을 걸 수 있는 종루(鐘樓)나 고루(鼓樓)의 기능을 겸하기도 한다.
만세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측면에 풍판을 달아 가구의 노출을 방지하고 비나 바람으로부터 보호받도록 하였다. 건물의 구조는 이층 누각식 건물로 일층인 아랫부분은 자연석 기단에 자연석 주츳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우하주는 누상주에서 사용한 것보다 더 굵은 부재를 사용하여 견고하게 보이며 사찰의 중정으로 오르는 통로의 구실을 한다.
만세루는 우물마루 바닥에 평난간으로 둘러져 있으며 법고와 목어 판이 놓여져 있어 예불을 알리는 고루로서의 기능을 한다. 목어는 나무를 깎아서 잉어 모양을 만들고 속을 파내어 비게 한 다음 그 속을 막대로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불구이다.
염불과 독경이나 예배할 때 쓰이는 것으로 물속에 사는 고기들을 구원하고 수중중생의 해탈을 위하여 두드리는 것이다. 불사에 쓰이는 이 기구를 목어라고 이름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하고 있다.
「옛날 덕이 높은 고승의 제자 하나가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속된 생활을 하다가 그만 몹쓸 병에 걸려 죽었다. 어느날 스승이 배를 타고 물을 건너는데 등에 커다란 나무가 있는 물고기가 나타나 전생의 죄를 참회하며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등에 달린 나무를 없애주기를 간청하는 것이었다. 그 물고기는 다름아닌 말썽을 부린 제자가 물고기로 다시 태어나 고통을 받고 있는 모습이었다. 스승은 가엾게 생각하여 수륙재를 베풀어 등에 난 나무를 없애주었다. 그날 밤 제자는 스승의 꿈에 나타나 자신의 업보를 벗겨준 것에 고마움을 표하고 자신의 등에 난 나무를 깍아 물고기 형상을 만들고 소리를 내면 그 소리를 듣는 수행자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게 될 것인 동시에 물에 사는 물고기들을 구원하는 소리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스승은 제자의 말대로 목어를 만들고 여러 행사에 두루 쓰이는 법구로 삼았다.」고 한다.
민간 신앙에 있어서도 물고기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장석이나 노리개에 잉어 형상이 새겨지고 장농이나 소품들에도 잉어문양을 많이 사용한다. 이것은 물고기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눈을 감지 않으므로 물고기의 속성을 따라서 도난을 방지하는 부적으로 주로 사용한다. 불교에 있어서는 수행자들로 하여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행에 정진하라는 뜻으로 물고기 형상의 목어를 만들어 사용한 것이다.
법고는 네 발 달린 짐승들을 구원하고 해탈하라고 치는 북이다. 북을 받치고 있는 북대는 구름 모양의 형태를 띠고 있다. 운판은 날아 다니는 짐승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구름의 형태로 만들어서 걸어두고 친다.
범종은 지옥에 빠진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울리는 것이다. 이상 네 가지 범종, 운판, 법고, 목어를 사물이라 한다. 누에는 '덕휘루(德輝樓)'라는 현판이 하나 더 걸려 있어 이 누문의 이름이 덕휘루였음을 알 수 있으나 언제 만세루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
대한불교조계종 봉정사 봉정사 영산회괘불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봉정사 영산회괘불-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보물 제1642호
시대 : 조선시대 예종
탱화의 일종으로 야외에서 법회를 할 때 걸어놓고 예배하는 의식용 불화이다. 일반적으로 탱화는 법당의 본존불(本尊佛) 뒤에 후불탱화로 걸어놓고 예배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큰 재(齋)나 초파일과 같이 많은 대중이 운집하는 날에는 의식용의 큰 불화가 쓰이게 되는데, 이러한 의식을 거행할 때 법당 앞의 괘불대에 걸어 놓고 예불을 드리는 것이 곧 괘불탱화이다.
괘불은 일반탱화와 마찬가지로 재료의 취약성으로 인하여 오래된 불화는 많이 남아 있지 않고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대부분 조선시대 후기의 작품들이다. 그러나 현재 사찰의 뜰에 남아 있는 당간지주 등을 볼 때 훨씬 오래 전부터 제작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봉정사 소장 괘불은 강희(康熙)49년(1710)에 조성된 것이다. 견본채색(絹本菜色)으로 제작된 것으로 크기는 가로 576cm, 세로 731cm 이다.
괘불의 내용은 석가모니가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할 때의 모임장면을 그린 영산회상도이다. 괘불의 구도는 중앙에 거대한 입상의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와 하단에 팔대보살이 시립하였으며 상단에 십대제자를 등장시킨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필법은 매우 견실하고 전체적인 색조는 적색과 청록색이 주조를 이루면서 우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보관은 말아서 대웅전내에 함에 넣어 보관 하고 있다. 대웅전 앞에는 괘불을 걸 때 사용하는 괘불대가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의 좌우에 마련되어 있다. 괘불의 사용은 법당의 크기에 비해 많은 대중이 참여하는 법회에는 괘불대를 세우고 괘불을 걸어서 야외에서 법회를 개최할 때 사용하고, 방생재(放生齋)나 수륙재(水陸齋)와 같이 법당이 아닌 어떤 특정 목적을 가지고 특수한 장소에서 법회를 열어야 할 경우에 사용한다 -
대한불교조계종 봉정사 봉정사 영산회상도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봉정사 영산회상도-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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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31
보물 제1614호
지정일 : 2009년 4월 22일
시대 : 조선시대 전기
안동시 서후면 봉정사 대웅전에서는 현존하는 국내최고의 후불벽화 (後佛壁畵 : 불상뒤 벽체에 그린 그림)인 '미륵하생도(微勒下生圖)'가 발견 되었다. 봉정사 대웅전을 해체 수리하던 중 지붕아래 종보받침에서 '1428년(조선 세종 10년)에 미륵하생도를 그렸다' 와 '1435년(세종17년)에 대웅전을 중창했다.'는 내용이 적힌 묵서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1476년(조선성종7년)에 조성된 전남 강진의 무위사 극락전(국보 제13호)의 후불벽화보다 최소한 40-50년정도 앞서 제작된 것으로 확인됐다. 가로 387.5cm, 세로 380cm 크기의 봉정사 후불벽화는 고려불화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본존 왼쪽상의의 금구장식과 왼쪽 팔꿈치의 Ω모양의 옷주름, 대의에 세필로 그린 그림의 세련된 둥근 꽃무늬와 옷깃의 보상당초무늬 등 고려시대 불화의 대표적인 특징이 선명하게 간직된 국보급 벽화로 평가되고 있다. -
대한불교조계종 봉정사 봉정사 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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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봉정사 동종-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문화재자료 제404호
시대 : 조선시대
조선 순조 13년(1813)에 만들어진 것으로 크기는 높이 67㎝, 음통 높이 22㎝, 종입구 지름 55㎝이다. 종은 전체적으로 어깨 부분은 완만한 곡선을 이루다가 중간 부분부터 종 입구까지는 거의 직선으로 처리되었다.
종 머리에는 종을 매다는 용뉴와 음통이 있는데, 용뉴는 용의 머리를 조각하였으나 약식화되었고 조선시대 종에는 생략된 소리의 울림을 좋게 하는 음통은 모양만 갖추었을 뿐 구멍은 막혀 있다. 종은 전체적으로 가로로 선을 돌려 세부분으로 나뉘었다. 가장 윗부분에는 서있는 모습의 보살상을 2구 조각하여 대칭적으로 배치하고 그 사이에 네모난 유곽이 자리하고 있다. 유곽안에는 9개의 유두가 있다. 종의 가운데 부분에는 범자(梵字)가 새겨진 동그란 원을 4개 배치하였고 그 나머지 여백에는 종의 내력을 적은 글이 새겨져 있다.
이 종은 비록 약식화되고 형식화되었으나 신라시대, 고려시대의 양식을 갖추고 있어 19세기에 만들어진 종으로서 신라, 고려 시대의 종 모습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된다. -
대한불교조계종 봉정사 봉정사 아미타설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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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봉정사 아미타설법도-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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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31
보물 제1643호
시대 : 조선시대
이 그림은 조선조 후기 아미타설법도상의 규범이 되며 또한 17세기와 다른 18세기 초반의 화풍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어 불교회화사의 중요한 자료이다.
1713년 도익(道益) 등이 조성한 아미타불화로서, 본존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보살과 범천, 제석천, 10대제자, 벽지불, 사천왕, 팔금강 등을 배치하였다. 다른 불화에 비해 본존의 비중을 작게 함으로서 다수의 권속들을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이면서도 답답하지 않은 화면을 구성하였다. 원만한 상호묘사와 균형 잡힌 신체묘사, 유려한 필치, 금니의 화문 등 동일한 화승이 제작한 1731년 수다사 영산회상도 및 삼장보살도와 유사한 특징을 보여준다. 18세기 전반 경상북도 지역 불화의 특징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
대한불교조계종 봉정사 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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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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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31
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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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31
보물 제1620호
시대 : 고려시대
안동 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여러 개의 나무들을 접합한 접목조기법(接木造技法)으로 이루어졌으며 눈은 수정을 감입하였다. 사찰에 전하는 대웅전관음개금현판(大雄殿觀音槪金懸板)과 1753년의 중수원문(重修願文)을 통하여 1199년에 처음 조성되어 1363년에서 1364년 사이와 1751년에서 1753년 사이에 중수된 상임을 알 수 있다.
양식적으로도 이 관음보살상은 아직 고려적으로 변모하지 않은 이국적인 풍모, 마치 배흘림기둥을 연상시키듯 맵시 있게 땋아 올린 보계(寶髻), 어깨 위에서 중첩된 고리모양을 이루며 늘어진 보발(寶髮)의 표현, 긴장감 넘치는 옷 주름, 세련된 조각기법과 균형미 넘치는 비례 등에서 중국 남송대의 불상이나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이나 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과 비교 된다. 따라서 이 상은 <대웅전관음중수현판기>에 기록된 대로 승안(承安) 4년, 즉1199년(高麗 神宗 2) 무렵에는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관음보살상은 고려후기 새롭게 대두하는 신고전주의(新古典主義) 양식 불상의 시원적 형태를 간직한 상으로 이러한 불상 양식의 성립과 전개과정을 살펴보는데 매우 중요한 상으로 평가 된다. -
대한불교조계종 봉정사 봉정사 전각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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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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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31
봉정사 전각 배치도-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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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봉정사 봉정사 대웅전(국보 제3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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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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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31
봉정사 대웅전(국보 제311호)-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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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31
분류 : 국보 제311호
지정일 : 2009년 6월 30일
시대 : 조선시대 초기대웅전의 건립 연대는 자세한 사료가 없어서 정확한 연대를 알지 못하나 건물의 일부를 해체하여 수리할 때 일부분의 묵서명이 발견되어 추정이 가능하다. 이 대웅전은 현존하는 다포계 건물로는 최고의 목조건물이라 추정된다. 대웅전은 조선시대 초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자연석의 막돌허튼층 쌓기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건물이다. 겹치마 팔작지붕에 다포양식을 한 이 건물은 산 중턱에 세워진 건물이면서도 평야를 끼고 있는 지역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원기둥 위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돌리고 그 위에 공포를 올려 놓았으며, 주간이 넓고 오포작(五包作)이라서 포벽(包壁)이 넓게 보이는 반면 기둥은 짧게 보여 매우 안정감을 준다.
공포의 짜임은 내외 모두 2출목으로 외부쪽으로는 쇠서형이며 내부쪽은 교두형(翹頭形)으로 짜여 그 수법이 고려말 조선초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건물 전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는데 이러한 예는 툇간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전면 3칸은 전부 개방하고 문비를 설치하였는데 궁판 받친 띠살무늬의 사분함(四分閤)이다. 이 문짝은 앞의 쪽마루와 함께 후대의 구조물이다. 기둥위의 공포도 간의 높이를 낮게 하여 기둥의 기초로부터 처마 끝까지의 간격이 다른 다포집에 비하여 작다.
가구(架構)는 일고주구량가(一高柱九樑架)인데 천장이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어서 상부 가구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지붕은 팔작으로 비교적 처마 깊이가 깊고, 처마는 겹처마로서 네 귀의 추녀끝에는 활주를 받쳐 추녀마루를 지탱하고 있다. 내부의 바닥은 널마루를 전면에 깔고 내부 고주(高柱)를 이용하여 후불벽(後佛壁)을 만들었고 고주 앞에는 불단을 짜서 불상을 모셨다. 불단은 150cm정도의 높이로 만들고 청판에는 연화문을 조각하여 장엄하였다. 불단 위에 연화좌를 놓고 삼존불을 봉안하였다. 주불인 석가모니불은 높이 150cm정도이고 좌 우 협시불인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은 높이가 130cm정도 크기이다.
불단 위쪽은 아름다운 소란반자를 설치하고 그 중심에 따로 닫집을 대신해 보개를 구성하여 장엄미를 추구하였다. 보개의 천장에는 구름이 둥실 떠 있는 하늘을 두 마리의 황룡과 백룡이 날아가는 모습을 그려 하늘의 신비함과 권능을 표현하였다. 보개 아래의 본존상 뒷벽에는 불벽(佛壁)을 조성하였다. 대량(大樑)에 세운 간주(間柱)를 의지하여 벽체를 구성한다. 간주에는 아래 위로 주의(柱衣)를 입히고 그 사이에 기둥을 감싸안으며 상승하는 용을 장엄하게 그렸다. 불벽의 앞쪽에는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를 걸었다.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10대 제자 사천왕 등을 배치한다.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는 강희(康熙) 52년(1713) 윤(潤) 5월 1일 제작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 380cm, 세로 360cm이다.
후불탱화를 보수하기 위하여 불사를 할 때에 희귀한 벽화 형태의 후불탱화가 하나 더 발견 되었는데 이 탱화는 수미단과 보개를 연결하는 주불 뒷벽에 채색으로 그려진 가로 세로 약 417cm 크기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관무량수경을 설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 이 그림의 정확한 제작 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려 변상도에서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꽃비의 표현을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고려 변상도의 상단부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구도, 벽화 테두리의 연화 당초문의 색상과 기법이 건물 내부 단청과 유사한 점, 벽화가 훼손되어 1712년에 새로이 후불탱화를 제작하여 봉안한 사실 등으로 미루어 대웅전 초창기 때 그려진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조선 초기 불화자료가 희귀하고, 조선 전기 이전의 후불벽화도 1476년에 그려진 전남 강진의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 3존도가 유일한 것임을 감안할 때, 이번에 발견된 봉정사 대웅전 후불벽화는 우리나라 불화의 도상과 양식 연구 뿐 아니라 회화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
대한불교조계종 봉정사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31
국보 제15호
지정일 : 1962.12.02
시대 : 고려시대 후기극락전은 현존하는 우리 나라의 목조건축 중 가장 오래된 최고(最古)의 건물이다. 가공석 및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과 주심포(柱心包)건물로 고려시대의 건물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내포하고 있다.
극락전 해체 보수공사 때에 1625년(인조3)에 작성한 상량문을 발견하였다. 이 상량문은 '천계 5년 3월'에 중수하면서 작성한 공사 기록인데, '前中創至正 二十三年 癸卯 三月日'이라는 구절이 있다. 중창은 중창(重創)을 의미하며 지정 23년은 고려 공민왕 12년(1363)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께서 개창하였다고 상량문의 신라 때에 창건은 이를 가리킨다. 공민왕 12년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은 이보다 오래 전에 이미 건물이 조영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3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갑석을 올리고 크기가 다른 자연석 주춧돌을 사용하였으며 정면 3칸, 측면 4칸의 구조이다. 이 건물은 감실형으로 주벽이 토벽으로 밀폐되고 따로 낸 문얼굴에 널빤지 2장을 사용한 문짝을 달았고 좌우 협칸에는 살이 각 11개가 달린 광창이 있다. 공포는 외 1출목 주심포의 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가구는 9량가인데 그 구성이 매우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고주 2본이 뒤쪽에 있다. 그러나 평주상의 대량과 퇴량을 동시에 받을 수 있는 높이로 만들어진 특색을 보인다. 다른 법당에서는 보기 드문 구조이다. 대량은 단면이 청자매병의 윤곽을 연상시킨다. 굵지않은 목재를 홍량으로 다듬어 걸었는데 이로 인하여 중첩하는 부재가 거듭됨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맛을 덜고 간결하게 처리하였다.
건물의 내부는 바닥에 방전을 깔고 뒤쪽에만 2개의 고주를 세워 그 사이에 이동식 불단을 설치하였다. 불단 위에는 불상과 불화를 봉안하였는데, 그 주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 윗몸을 짜맞춘 뒤 다포식 구성을 지닌 지붕을 씌워 집을 마련하였다.
극락전이 지닌 몇 가지 특징은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까지 계승된 이른바 고식으로 여겨지고 있다. 즉 기둥머리와 소로의 굽이 곡면으로 내반되어 있는 점, 대들보 위에 산 모양에 가까운 복화반대공을 배열하고 있는 점, 첨자 끝에 쇠서를 두지 않은 점 등으로 미루어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양식적으로 선행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봉정사 극락전의 경우에는 아미타불을 전각의 가운데에 이동식 불단을 설치하여 그 위에 봉안하고 있고 좌우 협시보살은 모셔져 있지 않다. 단지 불단에는 높이 100cm정도의 아미타불만 모시고 있지만 불단의 뒤에 있는 후불탱화는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좌우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그린 삼존도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종(高宗)37년인 1900년에 그린 후불탱화는 가로 195cm, 세로176cm의 크기로 비단 바탕에 5cm폭의 흰 테두리를 두르고 중앙에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아난존자와 가섭존자를 그려 전체적으로는 아미타불의 관배를 감싸듯이 배치된 구도를 가지고 있다. 탱화의 표현 기법은 본존불의 경우 결가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고 상체보다 두부(頭部)를 상대적으로 크게 표현하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 앞까지 들어올려 엄지와 검지를 맞대었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왼손은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는데 손가락 끝이 뾰족하지만 우아한 곡선미를 간직하고 있다. 광배는 원형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그렸다.
좌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은 본존불을 향하여 약간 틀어 앉은 자세를 취하고 머리에는 화불(化佛)이 그려진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고 왼손은 연꽃 줄기를 잡고 있다. 우협시보살인 대세지보살은 관세음보살과 대칭되는 자세를 취하고 보관(寶冠)에 보병(寶甁)을 표시하고 경책을 받쳐들고 있다. 본존불의 두광 좌우에 합장한 아난과 가섭존자가 상반신만 표현되어 있고, 그 위로 화면의 여백없이 구름을 화려하게 그렸으며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에는 광선을 그려넣었다. 탱화하단 중앙에도 한덩이 구름을 그려서 아미타여래가 극락세계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