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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화계사 화계사 가람배치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5
화계사 가람배치-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5
백운대(白雲臺), 만경대(萬景臺), 인수봉(仁壽峰) 세 봉우리가 삼각으로 나란히 우뚝 솟아 있어‘삼각산(三角山)’이라 불리 운다. 삼각산의 굳센 기세가 주능선 끝자락에 이르러 시원한 계곡과 울창한 숲을 이루니 이 푸근한 곳에 화계사가 자리 잡고 있다.
화계사는 앞에서도 살펴보았듯 왕실에서 시주하여 중창과 중수를 거듭하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래서 여느 사찰과 다른 가람 배치를 이룬다. 특히‘보화루’라는 대방이 주 불전인 대웅전 앞에 배치되어 있다. 이 건물은 일반 살림집의 이모저모를 갖춘 곳으로 왕실 가족이 절에 와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게 배려한 건물이다.
절 입구인 일주문 바로 오른쪽에 백상원이 있는데, 이 건물은 동국대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승이 머무는 곳으로 기숙사로 사용하고 있다. 템플스테이를 겸하고 있는 국제선문화체험관을 지나면 넓은 마당과 그 위에 대적광전이 웅장하게 서 있다.
대적광전 뒤쪽이 화계사의 중심 구역이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천불오백성전과 명부전이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천불오백성전 뒤쪽에는 삼성각이, 명부전 우측으로는 조실채와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가 있다. -
대한불교조계종 대각회 대성사 대성사 법회 및 행사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4
대성사 법회 및 행사-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4
제대성중법회 : 매월 음력 1일 ~ 3일 사시
인등법회 : 매월 음력 3일 사시
산신용왕대재 : 매월 음력 13일 오후 3시
미타(지장)법회 : 매월 음력 15일 ~ 18일 사시
관음재일법회 : 매월 음력 24일 사시 -
대한불교조계종 대각회 대성사 대성사 신도회 안내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4
대성사 신도회 안내-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4
총신도회장 : 묘성화(김종선)
자원봉사자 모임 : 미타회, 선재회
거사림회 : 회장 조자종, 부회장 김두칠, 총무 정광옥, 매주 화요일 저녁 6시 30분, 대성사 대웅전
서초 반야회 : 회장 김명수, 총무 반정우, 매월 셋째주 수요일 저녁 6시 30분, 대성사 대웅전 -
대한불교조계종 대각회 대성사 대성사 전각 둘러보기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4
대성사 전각 둘러보기-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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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대각회 대성사 대성사 소개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4
대성사 소개-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4
百濟佛敎 初傳 法輪聖地 牛眠山 大聖寺 史記
백제불교초전법륜성지 우면사 대성사 사기
삼국사기(三國史記) 제 24권 백제본기(百濟本記) 제 15대 침류대왕(枕流大王)편에 이르시기를 침류대왕 원년인 갑신년[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9년(九年)]인 서기 384년 9월에 서역 천축 인도의 마라난타(摩羅難陀) 대사께서 중국 동진을 거쳐 해동 백제의 서울인 한주(漢州)에 이르렀으므로 침류대왕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마라난타 대사를 친히 환영하여 궁중에 모시고 극진한 예로써 공경하였는데 백제에는 불법(佛法)이 이로부터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다음해 을유년인 서기 385년 2월에 광주(廣州)인 한산(漢山)에 절을 창건하고 득도(得道)한 승려(僧侶)가 십인(十人)이라 하였으니 백제불교 승가생활(僧伽生活)의 시초라 하겠다.
삼국유사 제3권 난타가 백제의 불교를 열다
백제본기에 이르시기를 제 15대 침류대왕이 즉위한 갑신년(동진 효무제 태원 9년)에 호승(胡僧) 마라난타가 진나라로부터 오시니 맞이하여 궁중에 모시고 예로써 공경하였다. 이듬해인 을유년에 새 도읍지 한산주에 불사를 창건하고 득도한 스님이 열 분이시었으니 이는 백제불교의 시초라 하겠다. 또 제 17대 아신 대왕이 즉위한 태원(동진 효무제의 연호) 17년 2월에 하교하여 불법을 숭배·신앙하여 복을 구하게 하였다. 마라난타를 번역하면 동학(童學)이라 한다(그의 이적은 고승전에 상세히 보인다).
難陁闢濟 讚嘆曰난타벽제에 찬탄하여 가로되
天造從來草昧間아무것도 없을 때 무엇을 만들려면
大都爲伎也應難재주부리기에 얼마나 어려울까
翁翁自解呈歌舞노래 부르고 춤을 출 줄 알기만 하면
引得旁人借眼看옆사람 끌어내어 구경이야 않으랴
原文
三國遺事 百濟本紀云 第十五(僧傳云十四誤) 沈流王 卽位 甲申(東晋孝武帝太元九年)에 胡僧摩羅難陀 至自晉하니 迎置宮中하여 禮敬하고 明年乙酉에 創佛寺於新都漢山州하고 度僧十人하니 此百濟佛法之始라. 又阿莘王卽位 太元十七年二月에 下敎崇信佛法求福하다. 摩羅難陀는 譯云童學(其異迹詳見僧傳)이라. 讚曰 天造從來草昧間하니 大都爲伎也應難이라. 翁翁自解呈歌舞하니 引得旁人借眼看이라.
우리나라 불교전래는 해로(海路)와 육로(陸路)의 두 길이었다
해로(海路)로는 서역 천축 아유타국(阿踰陀國)의 허황옥(許黃玉)공주께서 해동가야 김수로대왕에게 건무(建武) 24년인 무신(戊申) 서기 48년에 오빠 장유화상(長遊和尙)과 같이 오셨을 때 불사리를 봉안한 파사탑을 모시고 온 것이 가야불교의 시초가 된 것이다. 김수로대왕과 허황옥황후의 사이에 십왕자(十王子)와 이 공주(二公主)를 두셨는데 첫째왕자는 후일 제 2대 거등대왕(居登大王)이 되시어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시조(始祖)가 되시었다. 그리고 둘째 왕자, 셋째왕자는 어머니 성(姓)인 허씨(許氏)로 사성하여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시었다. 칠왕자(七王子)는 외삼촌인 장유화상(長遊和尙)을 따라 가야정사(伽倻精舍)에서 출가(出家) 삭발위승(削髮爲僧)하였다. 가야불교(伽倻佛敎) 초전법륜성지(初傳法輪聖地)인 가야정사지는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봉림동 176번지 일대의 봉림산 봉림사지(鳳林寺址)이다. 이곳이 바로 가야불교(伽倻佛敎) 초전법륜성지(初傳法輪聖地)이다.
칠 왕자는 창원 가야정사에서 장유화상을 모시고 수행한 뒤 합천 가야산으로 자리를 옮겨 수행하다가 실상산(實相山)인 하동 지리산 칠불암에서 성도하였던 것이다. 중국 불교의 전래는 중국 후한 명제의 사신 채음등의 간청으로 서역 천축 인도에서 영평 10년 서기 67년에 가섭마등 법사 님과 축법난 법사님은 함께 낙양에 이르시어 백마사에 기거하시면서 불설사십이장경(佛說四十二藏經)을 번역하였다. 이것이 중국불교의 시초이다.
가야불교의 전래는 서기 48년이니 중국불교 전래보다 19년을 앞선 것이다. 육로(陸路)로는 고구려불교·백제불교·신라불교의 전래가 있다. 고구려불교의 전래는 삼국유사 순도조려(順道肇麗) 고구려(高句麗) 본기(本記)에 이르시기를 고구려 제 17대 소수림대왕(小獸林大王) 2년 임신(壬申) 서기 372년에 관중(關中) 장안(長安)에 도읍을 한 전진(前秦)의 부견대왕(符堅大王)이 사신과 순도대사(順道大師)를 파견하여 불상(佛像)과 불경(佛經)을 함께 모셔왔다.
또 소수림대왕 4년 갑술(甲戌) 서기 376년에 아도 화상(阿道 和尙)이 진나라에서 고구려에 오셨다. 그 이듬해 을해(乙亥) 서기 377년 2월에 성문사(省門寺)를 창건하여 순도대사를 계시게 하였고, 또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아도 화상을 계시게 하였다. 이것이 고구려불교의 시초이다.
順道肇麗 讚曰순도조려에 찬하여 가로되
鴨淥春深渚草鮮압록강 봄이 깊어 저 물가에 풀빛 곱고
白沙鷗鷺等閑眠백사장 갈매기 한가로이 조는데
忽驚柔櫓日聲遠홀연히 멀리서 들려오는 노젓는 소리
何處漁舟客到煙어디서 고깃배가 손님 싣고 오는가
신라불교의 전래는 삼국유사 아도기라(阿道基羅) 신라본기(新羅本記)에 의하면 신라 제 19대 눌지대왕(訥祗大王) 시대에 묵호자(墨胡子) 사문(沙門)이 신라의 일선군(一善郡) 모례장자(毛禮長者)의 집에 오셨다. 일선군 도개부곡(道開部曲)에 살고 있는 모례장자는 본래 가야국의 왕손(王孫)으로써 그의 시조(始祖)는 김수로대왕이시었고 그의 시조모(始祖母)는 불교의 나라 천축 아유타국의 허황옥(許皇玉)공주로써 김수로대왕의 왕비로 오셨을 때에 그 오빠 허보옥(許寶玉) 장유화상(長遊和尙)과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한 파사탑을 모시고 가야에 오심으로부터 가야는 건국 초기로부터 역대의 대왕과 왕궁에서는 불법을 숭배하고 신봉하게 되었다. 모례장자의 비조(鼻祖)는 신라에 귀화하여 일선군 도개부곡의 모례장자의 대에 이르러 모례장자는 조상의 빛나는 얼을 이어 받아 불법을 숭상하고 있었다. 모례장자는 묵호자 사문을 맞이하여 집안에 굴실을 만들어 편히 계시게 하였다. 마침 중국 양(梁)나라에서 사신으로 하여금 의복과 향을 보내 왔었다. 임금과 신하가 그 향의 이름과 용도를 몰라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전국 명인들에게 물어 보게 했다는데 묵호자 사문이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향(香)이라는 것인데 불에 태우면 향기가 좋으므로 신성(神聖)에게 정성드릴 때에 쓰는 것이요. 신성은 불(佛)·법(法)·승(僧)인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만일 이 향을 사르면서 기원하면 반드시 영묘한 증험이 있으리라」 하였다. 때마침 대왕의 딸인 공주가 병이 위중하므로 사람을 시켜 묵호자 사문을 모셔 그 향을 피우고 기원을 하니 공주의 병이 곧 나았다. 대왕이 기뻐하여 상을 후하게 주었는데 얼마 후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또 신라 제 21대 비처대왕(毘處大王) 시대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시자(侍者) 세사람과 함께 역시 모례장자의 집에 오셨는데 묵호자 사문과 같았다고 한다. 수년을 지난 후 병도 없이 입적(入寂)하시고 시자 세분 스님은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을 강설하며 독송하니 왕왕 믿고 받드는 자가 있었다. 이것이 신라불교(新羅佛敎)의 시초이다.
難陁闢濟 讚嘆曰난타벽제에 찬탄하여 가로되
天造從來草昧間아무것도 없을 때 무엇을 만들려면
大都爲伎也應難재주부리기에 얼마나 어려울까
翁翁自解呈歌舞노래 부르고 춤을 출 줄 알기만 하면
引得旁人借眼看옆사람 끌어내어 구경이야 않으랴
백제불교 초전법륜성지 우면산 대성사 사적진언에 의하면 「예로부터 한강 북녘 남산인 목멱산(木覓山)과 한강 남녘인 이곳 대성사(大聖寺)가 위치한 우면산(牛眠山)은 소남소녀(小男小女)의 형국을 지어 이 생기에서 약수가 흘러나와 두 줄기의 생명수를 이루었다. 마침 마라난타 대사께서는 서역 천축 인도와 동토 중국을 거쳐 해동의 백제에 불교를 전래하시다가 수토병(水土病)으로 크게 고생하시게 되었다. 이에 생명수를 찾아 우면산 기슭에 대성초당(大聖草堂)을 세우고 이 생명수를 드시어 수토병을 고치셨다」한다. 그러하기에 우면산 대성초당은 백제불교(百濟佛敎) 초전법륜성지(初傳法輪聖地)가 되었다. 대성초당지(大聖草堂地)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3동 산 140번지 일대를 말한다. 또 근세에 있어 선(禪)과 교(敎)와 율(律)에 가장 밝으신 대선지식(大善知識)이며 경(經)·율(律)·론(論) 삼장(三藏)의 번역 내지 저술에 이바지한 온 겨레 전 인류 만 중생을 위한 자비 보살이신 석가여래부촉법 제 68세 용성진종(龍城震鍾)대사께서 대각응세 경술년 서기 1910년 경술 국치의 치욕에 의해 지리산 쌍계사 칠불암(七佛庵) 칠불선원(七佛禪院) 조실로 계시다가 이곳 백제불교 초전법륜성지인 서울 서초동 우면산 대성초당에 주석하셨다.
이 지리산 쌍계사 칠불암은 가야불교 초전법륜성지이기도 하지만 조선왕조시대에 숭유억불정책에 의하여 승려의 계맥이 희미하게 되었다. 이에 지리산 칠불암 금담장로께서 그 제자 대은스님과 함께 불전 서상수계의 기원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서상수계(瑞相受戒)가 대은스님에게로 내려져 조선불교 중흥율 초조가 되시었다. 그리하여 그 스승에게 계법을 전해 제 2조 금담율사, 제 3조 초의율사, 제 4조 범해율사, 제 5조 선곡율사, 제 6조 용성율사에게 율맥이 전하여졌다. 용성진종대종사께서는 석가여래부촉법 제 68세이신 동시에 조선불교 중흥율 제 6조가 되시었다. 용성진종대사께서는 우면산(牛眠山) 대성초당(大聖草堂)에 주석하시면서 다음해 불교중흥 민족중흥을 발원하고 서울 종로 봉익동 1번지에 민가(民家)를 구입하여 개조·수리하여 불교를 개혁하고져 대각사(大覺寺)를 이룩하셨다.
9년여 동안의 이적(理的) 보림과 사적(事的) 교화의 공덕으로 기미독립선언문 조선민족대표 33인 중 제 1번 서명에 천도교 대표 손병희(孫秉熙)교주님, 제 2번 서명에 기독교 장로회 대표 길선주(吉善宙)목사님, 제 3번 서명에 기독교 감리회 대표 이필주(李弼柱)목사님, 제 4번 서명에 불교 대표로 백용성(白龍城)대사가 차례로 서명하고, 이어서 제 5번에 김완규(金完圭) 천도교 교주님, 제 6번 김병조(金秉祚)목사님, 제 7번 김창준(金昌俊)목사님, 제 8번 권동진(權東鎭) 천도교 도사님, 제 9번 권병덕(權秉德) 천도교 도사님, 제 10번 나용환(羅龍煥) 천도교 도사님, 제 11번 나인협(羅仁協) 천도교 도사님, 제 12번 양전백(梁甸伯) 장로 목사님, 제 13번 양한묵(梁漢默) 천도교 도사님, 제 14번 유여대(劉如大)선생님, 제 15번 이갑성(李甲成)선생님, 제 16번 이명룡(李明龍) 장로 목사님 · 제 17번 이승훈(李昇薰)선생님, 제 18번 이종훈(李鍾勳) 천도교 도사님, 제 19번 이종일(李鍾一) 천도교 월보과장님, 제 20번 임예환(林禮煥) 천도교 도사님, 제 21번 박준승(朴準承) 천도교 도사님, 제 22번 박희도(朴熙道) 청년회 위원님, 제 23번 박동완(朴東完) 청년회 위원님, 제 24번 신홍식(申洪植) 감리 목사님, 제 25번 신석구(申錫九) 목사님, 제 26번 오세창(吳世昌) 천도교 도사님, 제 27번 오화영(吳華英) 청년회 위원님, 제 28번 정춘수(鄭春洙) 감리 목사님, 제 29번 최성모(崔聖模) 전도사님, 제 30번 최린(崔麟) 천도교 보성학교장, 제 31번 한용운(韓龍雲) 스님, 제 32번 홍병기(洪秉箕) 천도교 장자님, 제 33번 홍기조(洪基兆) 천도교 도사님 등이 서명하시어 독립운동을 전개 15세 연하의 제자와 같은 만해 한용운 대사를 앞세워 천도교와 기독교 대표들과 손과 손을 맞잡고 발과 발을 맞추어 대승적 독립운동을 전개하셨다.
이 독립운동으로 말미암아 민족대표 등과 같이 그 당시 일본제국주의 시민통치 국가보안법 제 7조에 적용,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루시었다. 이 때에 이곳 우면산 대성초당은 일본인 경찰에 의해 소실되고 말았다. 석가여래부촉법 제 69세 동헌완규 대선사님의 증명아래 석가여래부촉법 제 70세 불심도문 법사는 뜻있는 불교도의 옹호로써 4차에 걸쳐 민간인의 소유에서 백제불교 초전법륜성지인 서울 서초동 우면산 대성사 도량입구 불사현황은 아래와 같다. -
대한불교조계종 대각사 사찰연혁 및 유래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4
사찰연혁 및 유래-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4
대한불교조계종 대각회 총본산 대각사
대각사(大覺寺)는 서울의 종산(山)이며 진산(眞 山)인 삼각산에 위치한 종로구 봉익동에 자리한 전 통사찰로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대각사상을 기본으 로 하는 한국 근대민족 불교의 산실인 대각회(大覺 會)소속의 근본도량 사찰로서, 1911년 용성(龍城) 진종(震鍾) 조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백용성 조사는 남원(南原)에서 백남현(白南賢)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속명을 상규(相圭)라 하고 출가 후 법명을 용성(龍城)이라 하였다. 1879년 16세 때 해인사 극락암(極樂庵)으로 출가하여 전국 각 사암들을 찾아다니면서 수도하여 23세에 견처가 있었고, 44세에 중국 불교계의 선지식들과도 불법의 진리를 논하기도 하였다.
47세에는 『귀원정종(歸源正宗)과 「대각교 의식』 등 수많은 역경과 저술을 하 | 였으며 『화엄경』, 『천지팔양신주경』, 『금강경』, 『능엄경』등 많은 경전을 번역. 간행하였고, 세종대왕 이후 최초의 한글 역경(譯經) 사업을 펼쳐 경전(經典)의 한 글 대중화를 적극 추진하였다. 서울 종로구 봉익동에 민가를 구입, 수리 개조하여 대각사(大覺寺)의 간판을 내 걸고 불교 중흥과 민족중흥을 발원하였다.
이후, 1969년 대한불교조계종 종정(大韓佛敎曹溪宗 宗正)이셨던 고암(古庵)스님과 동 헌(東軒)스님, 자운스님, 성철스님, 운문스님, 광덕스님, 도문스님을 비롯한 용성스님의 상자와 손상자들이 용성스님의 대각교 창립정신을 기리고 대각사상을 널리 드러내기 위 하여 재단법인 대각회를 1967년 대각사에서 설립하였으며, 1986년 대각사 경내에 있던 대각성전 요사채 목조건물(木造建物) 147평을 철거하고, 지하 1층, 지상 3층 총 건평 400여 평의 규모로 현 건물을 대각사 주지 효경스님이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봉익동(鳳翼洞)은 북으로 권농동, 동쪽으로 종묘가 자리하고 있고, 남쪽으로 종로 3가, 묘동과 인접하고 있다. 묘동과 종로 3가는 상가지대이고 대각사가 위치한 봉익동은 비교적 대로변을 벗어난 주택 지구에 해당되어 쾌적한 곳으로 종묘와 작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있다. 대각사는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왼편에 범종각이 자리하고 있고, 경내중심에는 지하 1 층, 지상 3층 (2층까지는 현대식, 3층은 한식형 건물이면서 팔작지붕 구조로 된 대각성 전(大聖殿)이 자리하고 있다. 경내 한편에 대각성전(大覺聖殿) 건립을 기념하기 위한 대각사 대각회사적비(大覺寺大覺會寺)가 세워져 있고, 사적비(寺碑) 뒤로 심검당이 있다. 2012년 주지 장산스님의 원력으로 30년이라는 세월 속에 노후된 대각사 단청을 새롭게 단장하고 이야기가 있는 작은 뜰' 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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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대각사 용성스님 행장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4
용성스님 행장-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4-14
용성대종사께서는 1864년 5월 8일 전라도 남원군(현재 장수군) 하번암면죽림리에서 수원 白氏로 탄생하였다.
7세에 한학을 익혔으며, 9세에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16세에 해인사에서 출가하였으며, 23세에 깨달음을 얻었다. 그 뒤 전국 각 사암들을 찾아다니면서 수도 정진하였으며, 44세때에는 중국불교계의 선지식들과도 불법의 진리를 논하기도 하였다. 47세에는 ≪歸源正宗≫이란 책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불교적인 측면에서 기독교의 교리에 대하여 해석하고 논박한 것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최초이다.
1910년 경술국치를 맞이한 선사는 산중 수행을 정리하고 1911년 48세 되던 해에 백제불교 초전법륜성지인 서울 서초동 우면산 대성사에 오신 이후, 다시 종로구 봉익동에 민가를 구입해서 수리 개조하여 大覺寺의 간판을 내걸고 불교중흥과 민족중흥를 발원하여 불교계의 혁신작업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1일에는 만해 한용운스님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중 불교대표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에 4번째 서명하였으며, 이로 인해 서대문 감옥에서 3년간 영어의 생활을 하였다.
1921년 출옥과 더불어 三藏譯會를 조직하여 한문으로되어 있던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였으며, 1922년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고 만주에 간 독립군들을 돕기위해 만주 연길 명월촌과 봉년촌에 대규모의 大覺敎堂을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61세 되던해에는 평소의 수행력에 의해 치아에서 齒舍利가 나왔으며, 62세에는 도봉산 망월사에서 萬日參禪結社會를 조직하여 수행에도 전력을 하였다. 1926년에는 민족정신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시행하고 있던 왜색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建白書를 2차에 걸처서 제출하여 전통불교의 맥을 계승하기도 하였다.
1927년 64세 때에는 ≪大覺敎儀式集≫을 발간하면서 往生歌, 勸世歌 등 창작국악조의 創作讚佛歌를 최초로 작시, 작곡하여 이 분야에서는 국내에서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大覺寺에 일요학교를 설립하여 오르간을 손수 치기도 하였으며, 한문으로 된 불교의식을 한글화하여 불공, 제사 등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많은 노래들이 있었으나 현재는 2곡만이 악보까지 남아있으며, 그외에는 가사만 전하고 있다. 대종사 께서는 우리나라에서 찬불가의 창시자일뿐만 아니라, 국악조의 창작국악으로 된 창작찬불가를 남겼다는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같은해 함양에 華果院을 만들어 사원경제의 자립을 부르짓는 禪農佛敎를 주창하기도 하였다.
이후 30여가지의 경전을 번역하였으며, 30여가지의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40년 2월 24일 대각사에서 입적하니 세수는 77세이고, 법납은 61세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正法眼藏을 전수한 傳燈 68代의 祖師인 동시에 근세 中興律의 6祖이다.
1941년에 만해 한용운이 撰한 비를 해인사에 건립하였으며, 1962년 3월 1일에는 國家功勞賞이 추서 되었고, 그의 유업을 계승하기 위해 제자들은 1969년 9월 11일에 문화공보부로부터 재단법인 大覺會를 인가 받았다. 1990년 10월 9일에는 총무처로부터 銀冠文化勳章을 추서 받았고, 같은날 한글학회로부터 감사패를 추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