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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종남산송광사 사적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4
    종남산송광사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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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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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12월 2일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송광사 약사전에서 승탑원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절의 개창(開創)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높이 240cm, 폭 94㎝이다. 형태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신(碑身)을 올리고 용을 새긴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의 앞면에는 비 이름과 비문이 새겨 있는데, 고려 보조국사가 전주 종남산을 지나다가 절터를 잡아놓고 제자들에게 절을 지을 것을 당부하였다는 내용과, 보조국사 지눌에서 벽암각성 대사에 이르는 스승과 제자의 계보가 주된 내용이다. 뒷면에는 송광사를 짓는데 참여했던 승명(勝明) 스님의 말을 인용하여 절을 짓게 된 경위 및 벽암각성 대사의 제자와 시주한 사람, 개창 당시 장인(匠人)들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조선 인조 14년(1636)에 세운 비로, 신익성이 비문을 짓고, 선조의 아들인 의창군 광이 글씨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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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광사 사적비 이수, 16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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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광사 사적비 비문, 1636년

  2.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종남산송광사 승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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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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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4
    종남산송광사 승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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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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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광사 벽암대사 승탑은 1999년 4월 23일에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44호로 저정되었다.

    완주 송광사 승탑군은 대웅전에서 북쪽으로 약 13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승탑군 주변은 돌담으로 둘러쌓여 있으며 16구의 승탑과 2기의 비가 있다. 완주 송광사 승탑들은 지붕인 옥개(屋蓋)가 있고 탑신이 둥근 형태인 승탑과, 범종 모양의 석종형(石鐘形) 등 두가지 형식으로만 조성되어 있다. 완주 송광사는 승탑원에 명문이 있는 승탑이 남아있기 때문에, 조선후기 어떤 스님들이 이곳에서 수행했는지를 알 수 있어 귀중한 역사 자료로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특히 승병장으로 유명하였던 벽암 각성대사의 승탑이 이곳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은 주목된다. 승탑의 형태는 둥글게 다듬은 바닥돌 위로 종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사각의 지붕돌을 얹어놓은 모습이다.

    탑신에는 ‘벽암당(碧巖堂)’이라는 법호를 새겨 그 주인공을 정확히 밝히고 있다. 벽암각성 대사는 조선 현종 원년인 1660년에 완주 송광사에서 돌아가셨다고 전하고 있어 승탑을 세운 것도 그 즈음으로 추측된다.

  3.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종남산송광사 보조선사 체징(普照禪師 體澄:804~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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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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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4
    종남산송광사 보조선사 체징(普照禪師 體澄:804~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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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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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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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승탑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탑비


    보 체징선사는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가지산파의 제3조로 어려서 출가했다. 827년에 보원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그 뒤 설악산 억성사의 염거화상 밑에서 수행했다.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잠시 백련사에 머물며 수행하기도 했다. 837년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840년에 귀국하여 많은 스님들에게 선(禪)을 가르쳤다.

    선사가 점지해준 절터에 1622년부터 역사를 시작해 많은 전각을 중수해 송광사를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으로 사액됐다. 전남 장흥 보림사에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와 <보조선사탑>이 남아 있다.

  4.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종남산송광사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 105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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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4
    종남산송광사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 105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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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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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각국사 의천의 진영 (순천 선암사 소장)


    대각국사 의천은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로 속명은 왕후(王煦), 호는 우세(祐世), 법명은 의천이다. 불교 전적을 정비하고 『고려속장경』을 간행하였으며, 천태종을 세워 교단의 통일과 국가 발전을 도모하였다. 중국 송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천태종을 개창하자, 사명을 백련사로 다시 고치고 천태종에 귀속했다.

    화엄종 계통의 승려였던 그가 천태종을 세운 것은 천태의 근본 사상인 회삼귀일(會三歸一)과 일심삼관(一心三觀)의 교의로써 국가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선(禪)과 교(敎)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시호는 대각국사이며, 비는 북한 영통사와 선봉사에 건립되었다. 대각국사 의천의 진영은 현재 순천 선암사에 남아 있다.

  5.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종남산송광사 진묵일옥(震默一玉, 1562~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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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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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4
    종남산송광사 진묵일옥(震默一玉, 1562~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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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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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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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묵일옥 대사의 승탑


    진묵대사는 법명이 일옥(一玉)이고, 법호는 진묵(震默)이다. 만경(萬頃) 불거촌(佛居村) 사람으로 서산대사(西山大師)의 법을 이었다.

    진묵대사는 송광사와 인접한 서봉사에 주석하면서 송광사 대웅전 석가여래삼불상 조성 때 증명으로 동참하였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승군(僧軍)으로 활약했던 사명대사와 대조적으로 깊은 산에 머물며 수행에 전념하였다.대사는 완주 송광사 대웅전 불상 점안과 보령 무량사 극락전 불상 점안에 관한 일화를 남기고 있다. 또한 대사는 송광사개창비 · 덕림화주록 등의 기록을 통해 송광사 불사에 증명으로 참여하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진묵대사의 승탑은 현재 전북 완주 봉서사에 남아 있다.

  6.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종남산송광사 벽암각성(碧巖覺性, 1575~1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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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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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4
    종남산송광사 벽암각성(碧巖覺性, 1575~1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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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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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암각성 대사의 승탑 / 벽암각성 대사의 진영 (해인사 국일암 소장)
     

    벽암각성 대사의 대사의 법명은 각성(覺性)이고, 자는 징원(澄圓)이며, 호는 벽암(碧巖)이다. 호서(湖西) 보은(報恩) 사람으로 속성은 김해 김씨이다.대사에 관한 기록은 구례 화엄사에 있는 <구례 화엄사 벽암대사비(求禮華嚴寺碧巖大師碑, 1663년)>와 보은 법주사에 있는 <법주사벽암대사비(法住寺碧巖大師碑, 1664년)>에 남아있다.

    벽암 각성대사는 부휴(浮休)대사의 수제자로 선(禪) 수행과 계율 실천에 투철하였다. 남한산성 축성의 책임자로 활동하였으며, 병자호란 때는 승군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후 적상산 사고(史庫)를 지키는 임무를 맡는 등의 국가적 소임과 함께 종단의 승풍을 진작하였다.

    저술로는 『선원집도중결의(禪源集圖中決疑)』 1권, 『간화결의(看話決疑)』 1편,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 1권 등이 있다.
    벽암대사는 송광사 중창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이곳 송광사에서 입적하였다. 송광사에는 대사의 승탑이 있고, 해인사 국일암에는 진영이 남아있다.

  7.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종남산송광사 추계 유문(秋溪有文, 1614~1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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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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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4
    종남산송광사 추계 유문(秋溪有文, 1614~1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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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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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4
    추계 유문 대사는 1614년 오성(鰲城)에서 태어나 1689년에 전주 쌍계암(雙溪庵)에서 나이 76세, 법랍 63년으로 입적하였다.

    유문대사는 13세인 1626년(인조 4)에 대흥사의 범해(梵海)스님에게 인도되었고, 동림(東林) 혜원(慧遠) 스님께 구족계를 받았다. 원응지근(圓應志勤) 스님의 법을 이어받았다.

    법을 이은 제자로는 무경 자수(無竟子秀)가 있다. 『동사열전(東師列傳)』에 의하면 유문 대사는 청허 휴정대사의 문중 임을 알 수 있다. 송광사 승탑원에 추계 유문대사의 승탑 일부가 남아 있다.


  8.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종남산송광사 무경 자수(無竟子秀, 1665~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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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4
    종남산송광사 무경 자수(無竟子秀, 1665~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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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경 자수대사의 승탑


    무경당 자수의 자는 고송(孤松),호는 무경(無竟)이다. 남양 홍씨(洪氏)로 1664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1675년인 12세에 문식(文式)스님에게 출가했고, 16세에 구족계를 받고 운문사의 추계 유문대사를 찾아 법을 이었다.

    자수 스님은 숙종 때 전국의 큰스님 49인을 뽑아 사나사(舍那寺)에서 대법회를 열었을 때 참여하여 설법하였고, 1737년에 입적하였다.

    자수 스님의 승탑은 완주 송광사에 세워졌고, 제자로는 설영(雪瑛)·처우(處愚)·영봉(靈峰) 등이 있다. 저서로는 『무경집(無竟集)』과 『불조선격(佛祖禪格)』 등이 있는데, 『무경집』은 1738년에 임실 신흥사에서 간행되었다.

  9.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종남산송광사 사암채영(獅巖采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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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4
    종남산송광사 사암채영(獅巖采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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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64년에 사암채영 스님이 간행한 『서역중화해동 불조원류』,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사암채영 스님의 생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후기 영조 때 활약했던 스님으로 추정된다. 호는 사암(獅巖)으로 송광사 행인(幸仁)스님의 문인이며, 도안(道安)스님의 5세 법손(法孫)이다.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으로 선종과 교종의 법맥(法脈)이 분명히 전해지지 않고 있는 점을 개탄하여, 1762년(영조 38) 봄부터 전국의 각 사찰을 다니며 선종 각 문파(門派)에 대하여 고증할 만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1764년 여름에는 각 문파의 고승들을 이곳 송광사로 불러 의견을 수렴하여, 관음전에서 『서역중화해동 불조원류(西域中華海東佛祖源流)』 를 간행하였다.

  10.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종남산송광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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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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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4
    종남산송광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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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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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4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부다가야에서 깨달아 중도(中道)로 가르침의 핵심을 삼은 이래, 그것은 불교 전통의 주요 개념이었다. 불교가 역사적 전통에서 가꾸어온 모든 사상 · 문화· 제도는 모두 중도의 선양을 위한 것이었다. 송광사도 중도의 선양을 위한 곳이다.

    백두대간이 남서쪽으로 기세를 떨치다 마친 이곳 전라북도 완주군에 종남산이 있다. 송광사는 그 산 동남쪽 끝자락에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종남산 남쪽에 영험있는 샘물이 솟아나 그 옆에 절을 짓고 백련사라고 했다고 한다. 송광사가 역사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통일신라 말이다. 보조 체징(普照體澄, 804~880) 선사가 설악산 억성사에서 수행하다 선법의 요체를 구하러 중국에 유학을 가던 길에 백련사가 영험도량이라는 소문을 듣고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 귀국해서도 가지산 보림사와 종남산 백련사에 번갈아 거주하면서 도의국사의 선법으로 널리 교화했다. 이때 체징선사는 백련사를 선종의 종취에 따라 송광사로 개칭했다. 이래로 송광사는 사세를 면면히 이어왔다. 고려 중기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1055~1101)이 중국 송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천태종을 개창하자, 사명을 백련사로 다시 고치고 천태종에 귀속했다.

    조선시대 임진 ·정유 양란 때 송광사는 전소되었는데, 광해군 때 벽암각성(碧巖覺性)의 문도인 덕림화상이 주맹이 되어 응호, 승명, 운정, 득순, 홍신 스님 등과 더불어 노력 끝에 중건하였다.

    송광사개창비(松廣寺開創碑, 1636년)에 따르면, 송광사는 인조의 척족(戚族)인 이취반(李就潘)이 폐허가 된 절터를 시주하였고, 보조국사 체징이 점지해 두었던 터에 1622년부터 역사를 시작하여 이듬 해에 7칸 중층의 대웅전을 건립함으로써 초창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으로 사액되었다고 했다.

    그 후 명부전(1640년), 천왕전(1649년), 나한전(1656년), 일주문 등이 연이어 신축됨으로써 세 번째 중건됐다. 그 후에도 1707년에 네 번째 중건이, 1857년에 다섯 번째 중건이 있었다.

    <송광사대웅전중수상량문(1857년)>에 따르면, 다섯 번째 중건은 전라도 순찰사 김병교, 전라도 관찰사 심경택, 전주부윤 홍종화 등이 백만전을 지원하여 2층 구조로 지어진 대웅전을 49일만에 허물고 53명의 장인이 7개월만에 단층 대웅전으로 다시 건립했다고 한다

    이러한 송광사의 중건을 전하는 바로는 <전주송광사개창비(全州松廣寺開創碑), 1636년)>, <경진년칠월일서방산송광사시왕조성흘공기 (庚辰年七月日西方山松廣寺十王造成訖功記), 1640년>, <불상조성시주목록(佛像造成施主目錄), 1641년>, <대영산십육성중오백성문조성회원문(大靈山十六聖衆五百聲聞造成回願文), 1656년>, <전가경19년갑술법당중수동참기(前嘉慶十九年甲戌法堂重修同參記), 1814년)>, <송광사대웅전중건상량문(松廣寺大雄殿重建上樑文), 1857년> 등이 전해 온다.

    지세를 다듬고 그 터에 당우를 세우는 일은 중도의 법을 바로 세우기 위함이다.
    송광사가 있음으로 인해 부처님의 지혜가 더욱 빛나서 모든 인연있는 이들이 유화하고, 도량이 청정하며, 법륜이 항상 구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