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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증심사 템플스테이 증심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6
    증심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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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대한불교조계종 대승사 대승사 소개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6
    대승사 소개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6

    사불산(四佛山) 대승사(大乘寺)는 아름다운 창건설화와 함께 비교적 풍부한 사적을 보유하고 있다. 본래의 산명은 공덕산(功德山) 이었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사불산(四佛山). 굴불산(掘佛山). 만불산(萬佛山)>의 내용에 따르면 "죽령(竹嶺) 동쪽 백여 리 지점에 높이 솟은 산봉우리가 있는데, 진평왕 9년 갑신년(丁未,587)에 홀연히 사면 10자 정도되는 큰 돌이 사방에 불상을 새겨 붉은 비단에 싸여 하늘로부터 산의 꼭대기에 내려왔다. 왕이 이 사실을 듣고 수레를 타고 가서 예경하고 그 바위 곁에 절을 지어 대승사라 하였으며, <법화경(法華經)>을 독송하는 망명(亡命, 이름을 밝히지 않은) 비구를 청하여 절을 주관케 하였더니, 그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돌에 공양하여 향화(香火) 가 끊이지 않았다.

    산을 덕산(德山), 또는 사불산(四佛山)이라 하였다. 비구가 죽자 장사지냈더니 무덤위에서 연꽃이 나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절은 '천강사불(天降四佛) 하고 지용쌍련(地湧雙蓮)' 의 설화로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창건 이후의 사적에 대하여는 자세치 않으나 <대승사사적기>에 따르면 선조 37년(1604) 서총 대사(瑞聰大師) 가 대웅전 서쪽의 승당(僧堂) 을 중창하였고, 다시 효종 2년(1651) 경묵 대사(敬默大師) 가 대웅전 동쪽의 선당을 중창하였다고 하였다. 이후에도 인조 8년(1630) 에서부터 숙종 29년(1703) 에 이르는 사이에는 계담 대사(桂淡大師), 각인 대사(覺仁大師), 선림 대사(先林大師), 혜탄 대사(惠坦大師), 종수 대사(宗秀大師), 원응 대사(圓應大師) 등 역대제사(歷代諸師) 의 중수가 있었다. 당시 건물의 명칭은 대웅전, 응진전, 관음전, 시왕전, 금당, 요사, 종각, 일주문, 누각, 수각, 주고(廚庫), 문랑(問廊) 등 전각이 사불산 내에 가득하여 교남(嶠南) 의 대가람이 되었다고 하였다.
    고종 12년(1875) 목각후불탱을 부석사로부터 이안하여 계속 시비가 일기도 하였으나, 결국 대승사에 귀속되었다

    그리고 1922년 여름 뜻하지 않은 화재로 여러 건물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에 의운(義雲), 취월(翠月), 덕산 대사(德山大師) 등이 정재(淨財) 를 모아 1927년에 옛모습대로 복구하였다. 그러나 1956년 1월에 다시 화재를 입어 극락전, 명부전, 산신각 등을 남기고 불타버리자 남인(南印), 대휴(大休), 설월(雪月), 정암 대사(晶庵大師) 등이 힘을 보아 대웅전, 응진전, 대방(大房, 無量壽殿, 禪堂), 일주문 등을 중창하였다. 현존 당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정면 3간, 측면 3간의 팔작지붕, 총 30평의 건물이다.

    극락전(極樂殿)
    극락전은 정면 3간, 측면 2간의 팔작지붕 형식이며, 총 18평이다. <사적기>에는 인조 26년(1648) 의현 대사(儀玄大師) 가 법당을 중창하고 아미타불과 관음, 지장 두 보살을 좌우보처로 모셨다고 하였는데, 아마 극락전을 지칭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응진전(應眞殿)
    응진전은 극락전 후편 북쪽 언덕 위에 위치해 있으며 정면 3간, 측면 2간의 팔작지붕, 총 20평의 건물이다.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선당 무량수전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정면 3간, 측면 2간의 맞배지붕 형식, 총 20평의 건물이다. 인조 24년(1646) 각인 대사(覺仁大師) 가 중창하였다.

    산신각(山神閣)
    산신각은 응진전 서편 아래쪽에 위치해 있으며 사방 1간의 작은 전각이다. 내부에는 산신탱(150 X 109cm, 近世 作)과 독성탱(150 X 109cm, 近世 作)을 봉안하였다.

    선당(禪堂) 무량수전(無量壽殿)
    대웅전 동쪽에 위치한 무량수전은 선당으로 사용되었으며, 건물은 H자형으로 복합건물, 총 104평이다. 내부에는 금동관음보살좌상(90X 58cm, 보물 991호)과 후불탱(210 X 268cm), 그리고 신중탱(188 X 178cm, 1876년)을 봉안하고 있다

    요사(寮舍)
    요사는 대웅전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형태는 ㄱ자형 총 46평이다. <사적기>에 선조 37년(1604) 서총 대사가 대웅전 서쪽의 승당을 충장하였고, 또 숙종 15년(1689) 에 종수대사(宗秀大師) 가 중창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바로 이 건물로 짐작된다.

    누문(樓門)
    절 입구의 숲속에 1동의 산문이 건립되어 있는데, 그 양식은 맞배에 다포양식이며 사불산(四佛山) 대승사(大乘寺) 라 하였고, 뒤쪽은 불이문이라 하였다. 크기는 4평이다.

    불화(佛畵)
    대승사에는 영탱 20점을 비롯하여 상당수의 불화가 전래되고 있다.

    산암(山庵)
    산내암자로는 상적암(上寂庵), 대비암(大悲庵), 묘적암(妙寂庵), 윤필암(閏筆庵), 문수암(文殊庵), 보현암(普賢庵), 반야암(般若庵), 사불암(四佛庵), 미륵암(彌勒庵) 등 9암(九庵)이 있었으나, 현재는 묘적암, 윤필암, 보현암만 남아있다. 그 가운데 반야암은 조선 태조의 왕사 무학 대사의 제자 함허 득통(涵虛得通) 선사가 <금강경오가해설의>를 찬술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는 폐사되었다.

    묘적암(妙寂庵)
    묘적암은 신라 선덕여왕 15년(646) 부설 거사(浮雪居士) 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고려시대 나옹 화상(懶翁和尙) 의 출가득도처로서도 유명하다. 또 화상이 심었다는 회목(檜木)이 지금도 전해진다.
    현존하는 전각은 법당과 산신각이 전해지며, 법당은 정면 5간, 측면 2간의 팔작지붕, 총 42평의 건물이다.

    윤필암(閏筆庵)
    윤필암은 고려 우왕 6년(1380) 각관 대사(覺寬大師) 가 창건하였다. 철종 13년(1862) 화재로 당우가 전소되자, 본사의 의운(意雲), 취월(就越), 덕산(德山) 등 삼화상이 중건하였다.
    건물은 관음전, 사불전, 산신각, 그리고 선원이 있다.
    이들 외에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인 안정암(安靜庵) 이 있다.

  3. 대한불교조계종 원효사 무등산원효사 창건과 연혁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무등산원효사 창건과 연혁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원효사의 창건설로는
    ① 신라 법흥왕에서 지증왕 (500~540) 사이
    ② 원효국사(617~686)
    ③ 통일신라 말기
    ④ 고려 충숙왕대(1314~1339)의 창건과 중건설 등이 있습니다.

    원효사의 창건내력을 자세하게 적은 기록으로는 1637년(인조 15년)의 『불상기(佛像記)』, 1641년(인조 19년)의 「법당중창기」, 1847년(헌종 13년)의 「원효암중건기」, 1894년(고종 31)의 「원효암중수상량문(元曉庵重修上梁文)」 등에 비교적 자세한 내용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조선사찰사료」에 전하는 원효암중건기에 「瑞石山之北 有元曉庵 新羅國師元曉 愛其山明水麗築庵 而居乃 以其名之 始創年代 雖未可攷要 在於法興智證 兩朝之間 而瑞石爲湖南之明山 元曉爲瑞石之舊刹也...」라 전합니다.

    풀이하면 서석산(무등산의 옛 이름)의 북쪽에 원효암이 있는데, 신라국사 원효가 그 산자수려함을 사랑하여 이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으므로 그 (사찰)이름이 되었다. 창건 년대는 그러나 법흥왕과 지증왕 양조의 사이에 (이미 사찰이) 있었으므로 상고하여 보면 가하지가 않다. 서석산이 호남의 명산이므로 원효를 서석의 구찰(원찰)로 삼은 것이라. 즉, 원효사는 신라 지증왕(재위 500–514), 법흥왕(재위 514-540), 양대에 이름모를 조그만 암자로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훗날 원효성사가 이곳에서 머물면서 수행정진 하였고 성사의 덕을 추모하여 개창조로 모시고 원효암으로 개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원효사의 신라 창건설이 담긴 문헌기록에 대해 일부 부정적인 주장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1980년 5월에 국립광주박물관에서 대웅전을 해체복원하기 위하여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신라 때 조성한 금동불과 기와조각 등 보물급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 학계의 큰 관심을 모은 바 있으며, 이들을 근거로 신라 때 창건한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즉 원효대사에 의한 창건을 뒷받침할 수 있는 고증자료가 될 만한 옛터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불, 기와조각이 발견되었고, 그 밖에 고려시대 말, 조선 초기로 추정되는 부도와 조선 후기에 조성된 부도, 그리고 강희년명(康熙年銘)의 범종 그 밖에 석탑조각 등이 여기저기에 보이고 있습니다. 이로써 원효사는 천년고찰의 역사를 다시한번 자랑하게 되었으며, 이 때 출토된 유물들은 유형문화재 8호로 지정되어 광주국립박물관에 보관, 전시 하다가 현재는 송광사 박물관에 보관되어지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고승 대덕을 추앙한 나머지 화엄종의 한 명승이 고려 충숙왕(1314 - 1339) 때에 무등산을 찾아 여기에 절을 짓고 원효대사의 이름을 따서 원효암이라 하였다는 ④설도 있으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출토된 유물 등에 비추어보면 근거가 약합니다. 한편 1980년 6월에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 등을 근거로 하여 창건시기를 ③ 통일신라시대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원효사는 통일신라 말기에 소규모 암자로 세워졌다가 고려 충숙왕 때에 대규모의 사찰로 중건된 것으로 봅니다. 이 설은 문헌에 전해오는 사료보다는 출토된 유물에만 의존한 설입니다.

    이상의 여러 설에서 공통되는 것은 오랜 역사이며 원효성사의 업적을 숭상하고 이어가려고 하였다는 점입니다. 특히 발굴조사를 통해 얻어진 통일신라에서 고려․조선시대에 걸치는 와당과 “원효사”명이 보이는 조선초의 명문 기와 등과 같은 유물자료들이 이러한 기록에 의한 사력을 물증으로써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원효사 연혁
    원효사의 확실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습니다. 신라 지증, 법흥왕대(AD 500~539)라는 설이 있으나 불확실하며, 『조선사찰사료』 원효사 중건기에 의하면, 원효성사(AD 617~686)가 산명수려한 서석산을 좋아하여 암자를 지었으므로 그 이름이 원효사가 되었다 합니다. 이상 사료들을 종합하여 원효사의 창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정해 봅니다. 원효사는 신라 지증왕(재위 500–514), 법흥왕(재위 514-540), 양대에 이름모를 조그만 암자로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훗날 원효성사가 이곳에서 머물면서 수행정진 하였고 성사의 덕을 추모하여 개창조로 모시고 원효암으로 개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시대 화엄학의 대강당이었음.
    조선시대 宣祖代(1568~1608)에 의승장이었던 騎虛堂 영규대사가 주석.
    1597년 정유재란시 화신(火燼)됨.
    1609년 을유년에 증심사를 중창한 석경대사(釋經大師)가 복원.
    1636년 인조 14년에 신원대사(信元大師)가 중수.
    1637년 인조 15년에 옥견대사(玉堅大師)가 32불상을 조성봉안, 중수.
    1639년 중종 34년 사찰혁파시 동국여지승람 광산현조(光山縣條)에 원효사(元曉寺)가 기록.
    1685년 숙종11년 신옥(信玉), 정식대사(淨式大師)가 중수.
    1789년 정조 13년 회운대사(會雲大師)가 선방을 지음.
    1802년 순조 2년 회운대사(會雲大師)가 대웅전을 지음.
    1831년 순조 31년에 내원(乃圓) 의관대사(義寬大師)가 중수, 단청까지 마침.
    1847년 헌종 13년 내원대사가 칠성각을 신축.
    1894년 함명 태선(1824~1902)스님의 〈무진주 무등산원효암중수상량문〉에 의하면 학산대사가 관청에 호소해 100금의 재력을 시주받고 고을의 유지들의 도움으로 사찰을 중건.
    1927년 원담대사(圓潭大師)가 중수.
    1930년 이 지방 토호였던 지응현(池應鉉), 김정명월(金淨明月)등이 주가 되어 칠성각, 시왕전 등의 대중수.
    1938년 정응담(鄭應潭) 대사(大師)가 중수.
    1944년 주지 김동성(金東成) 대사(大師), 일학대사(一鶴大師), 지응현(池應鉉) 거사, 김정명월(金淨明月) 보살 등이 중심이 되어 석가탑, 관음탑을 만들고 사우들을 보수.
    1950년 6.25 전화(戰火)로 전소(全燒)됨.
    1954년~1960년 주지 김인곡(金麟谷)과 총무 김금파사(金錦波師), 지응현(池應鉉) 거사, 김명정월(金淨明月) 보살, 옥천 지창선(池昌宣) 거사 등이 대시주가 되어 사우 일부를 옛 규모보다 축소하여 복구함.
    1974년 정지우사(鄭智牛師)가 주지로 취임하여 소유권 문제로 3년간의 재판 끝에 정화를 매듭짓고 복원불사계획을 수립하여 일부 착수하였으며, 축대를 쌓고 헌 건물을 철거함.
    1980년 법타(法陀)스님이 대웅전 요사채 명부전을 신축복원하고, 칠성각을 보수하였다. 또한 무등산 도립공원 원효사 주차장을 만들어 장래의 원효사 수입원을 확보함.
    1992년 현지(玄旨)스님에 의해 성산각, 개산조당, 요사, 종각, 누각 등의 건물을 세움.

  4. 대한불교조계종 원효사 무등산원효사 소개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무등산원효사 소개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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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효스님 진영


    송광사 말사인 원효사는 무등산 북쪽 기슭의 원효계곡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광주시내에서 약 12㎞거리이며 무등산 집단시설지구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계곡을 건너 의상봉(해발 546.6m)이 마주하고, 그 좌우로는 윤필봉(404.4m), 투구봉(465.2m)과 멀리는 천왕봉(1187m)을 마주하고 있으며, 원효사 뒷편으로는 원효봉(567m)이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고 있습니다.

    행정구역은 광주광역시 북구(北區) 무등로(금곡동金谷洞) 무등산(無等山) 원효 계곡에 소재하며,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입니다.

    원효사의 창건연대는 6세기 초에서 중반 무렵인 신라의 지증왕, 법흥왕 때로 추측될 뿐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원효대사가 산자수려함을 사랑하여 이곳에 머무르면서 암자를 개축한 후부터 원효사·원효암·원효당 등으로 불렸다고 전해오며, 고려 충숙왕 때인 14세기 전반에 당시 이름 있는 승려가 절을 창건하고 원효를 사모하는 마음에서 원효사라고 했다고도 하는데, 1980년대에 통일신라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기 때문에 고려시대 창건설화는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조선 명종 때 문정왕후가 섭정하면서 불교가 진흥하자 이 원효사에도 많은 승려들이 모여 들었으며, 후일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었던 영규(靈圭)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하셨습니다.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석경(釋經)스님이 다시 중창하였고,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가 이루어졌습니다. 육당 최남선은 1925년 봄에 국토순례할때 이곳 원효사를 탐방한 바 있습니다. 그 때 천년고찰로서 원효사의 모습을 『심춘순례』에 다음과 같이 자세히 전하였습니다.

    법당(法堂)과 범절(凡節)이 당당한 사찰의 풍모를 갖추었다. 본존인 석가여래상이 거룩하시고 사자의 등에 지운 대법고(大法鼓)는 다른 데서는 못 보던 것이다. 대웅전 오른편에 있는 영자전(影子殿)에는 정면에 달마로부터 원효(元曉), 청허(淸虛) 내지 서월(瑞月)까지의 대정(大幀)을 걸고 따로 1774년(영조 50)에 담양 서봉사에서 옮겨오신 원효화정(元曉畵幀)을 걸었다. 나한전(羅漢殿), 명부전(冥府殿), 선방(禪房), 칠성각(七星閣) 같은 것은 다 있고, 불상도 볼만하니 그래도 원효의 창사 이래 오랫동안 명찰(名刹)이던 자취가 남아 있다.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는데, 1954년부터 당시 주지 인곡스님과 신도들이 중건에 착수하여 사우 일부를 옛 규모보다 축소하여 복구하였습니다. 1980년 5월 대웅전을 해체 복원하기 위하여 그 터를 정리하는 공사를 하였습니다. 이 공사때 절터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불상 6점, 고려시대의 철불두상(鐵佛頭像)·고려자기 토기불두(土器佛頭) 및 고려와 조선시대에 만든 기와 와당 도자기 등이 출토되어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끈 바 있습니다. 이들 출토 유물 32점은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절 주변에는 하대석과 옥개석편(屋蓋石片)만 남은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재(石燈材)와, 화강암으로 된 고려시대 3층 석탑, 조선 중기의 회운당부도(會雲堂浮屠 : 원효사부도) 등이 산재해 있으며, 부근에 선심폭포·풍암정·장운사·의상대 등이 있습니다. 원효봉 한 기슭에 있는 원효사 동부도는 (지방유형문화재 제7호) 현존하는 부도중 조각기법이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사면에 동물모양의 해학적 모습이 특이합니다.

    1980년 법타스님이 대웅전, 요사채, 명부전을 신축복원하였고, 1989년부터 현지스님에 의해 성산각, 개산조당, 요사, 종각, 누각 등의 건물이 세워져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2018년 현재 주요 전각으로는 대웅전과 약사전, 성산각, 지장전과 개산조당(開山祖堂), 무등선원, 요사채, 회암루 등이 있습니다. 이중 대웅전은 전형적인 정면 3칸, 측면2칸의 다포양식이며, 팔작지붕입니다. 개산조당에는 원효사 범종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원효계곡의 원효사 바로 아래에는 관음암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관음암은 원효사에 속한 암자였으나, 1975년 성호(性昊)스님에 의해 별개의 사찰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관음암의 주요 건물로는 대웅전과 극락보전, 요사채가 있습니다. 대웅전 좌측의 자연암반에 새겨진 미륵불이 있고 경내에 삼층석탑과 석등이 있는데, 이들은 근래에 부가된 것들입니다. 극락보전 촤측에는 자승당 단암선사(慈昇堂 檀庵禪師)의 사리탑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관음암과 원효사로 올라가는 도로변에는 어사 민달용(閔達鏞)과 관련된 어사바위가, 그리고 이에 대한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무등산 원효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송광사 말사로서, 원효봉을 뒤로하고 원효계곡을 아래로, 무등산 정상 서석대를 바라보는 수려한 경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원효대사는 661년(문무왕 1년) 의상스님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길에 어느날 한 무덤가에서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목이 말라 달게 마신 물이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 다시 보니 해골바가지에 담긴 더러운 물이었음을 알고 급히 토하다가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깨달아 유학을 포기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 깨달음을 중생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하던 원효대사는 6세기 초에서 중반 무렵인 신라의 지증왕, 법흥왕 때, 산자수려함을 사랑하여 이곳에 머무르면서 수행하셨다고 전해집니다. 이곳은 그후 원효사·원효암·원효당 등으로 불리었습니다.  

  5. 원효사 템플스테이 원효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원효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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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대한불교조계종 실상사 실상사 백장암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실상사 백장암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성종때 저술한 동국여지승람 불우조를 보면 실상사의 부속사찰로 원수사, 장계사, 백장사가 기록되어 있어 이 세 사찰은 실상사의 말사였던 것이 명확하다. 침허조사가 중창할 때에 이르러 원수사는 폐사되었고, 백장사에 속한 8개 말사와 실상사에 속하였던 9개 말사가 남아있었다. 즉 침허조사의 중창 후에는 내원, 정각암, 이명전, 남대암, 조계암, 양수암, 보명암, 세전암, 상암, 금당, 백련암, 수성대, 일출암, 봉계암, 양직암, 장계사, 백장암 등이 있었다. 위의 암자 가운데 백장암, 약수암, 서진암(세전암)이 현존하고 있다. 백장암은 실상사에서 남원 인월 방향 국도로 3킬로미터정도 가다가 백장휴게소가 있는 매동마을에서 우측 산도로 1킬로미터 정도 올라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원래는 백장사였다고 한다. 1679년(숙종 5)에 화재를 당하자 대중이, 백장사는 10년 동안에 두 번이나 화재가 일어났고 장소도 협소하니까 실상사 옛터에다 재건하자고 하였다. 따라서 백장사 터에 몇 간의 작은 건물을 지어 백장암이라 하였다. 1868년(고종 5) 10월에 제3차 화재를 당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운월대사가 아래에 있던 터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1901년(광무 4)에 제4차 화재를 당하였고, 다음 해에 남호대사가 완봉, 환월, 월허, 영담 등과 협력하여 다시 세웠다.

    이 백장암은 목조 맞배지붕으로 된 광명전과 선실이 있고, 광명전 위에 문수전이 있다. 이 광명전은 1910년에 건립되었으며, 선실은 1972년에 지옹선사가 증축하였다. 백장암에는 국보 제10호인 백장암 3층석탑, 보물 제40호 백장암 석등, 조선시대 부도군 등이 있으며, 관련 유물로는 보물 제420호 백장사 만력12년명 은입사향로가 있다.

    백장암 삼층석탑
    이 탑은 백장암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으로 국보 제10호이다. 현재의 백장암 남쪽 아래 경작지에 남아 있어 석탑 바로 뒤에 서 있는 석등과 함께 원위치로 생각된다. 그 북쪽에 법당터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뚜렷한 점으로 보아 본래는 백장암이 이 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층 탑신 각 면에는 사천왕상과 신장상 2구씩을, 2층 탑신 각 면에는 주악천인상 2구씩을, 3층의 각 면에는 1구씩의 천인좌상을 새기고 있다. 이 석탑은 기단부의 구조와 각 부의 장식적인 조각에서 특이한 수법을 보여주는 것으로, 신라하대에 유행한 불국사의 다보탑과 같은 이형석탑의 하나이다. 각부의 구조가 특이할 뿐만 아니라 탑신부의 탑신과 옥개석 밑에 조각이 가득히 있어 더욱 더 주목된다.

    백장암 석등
    이 석등은 백장암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물 제40호이다. 연화대석 위에 간주를 세우고 그 위에 다시 연화대석을 놓았으며, 상륜부는 도난을 당해 현재 그 원형을 찾을 길이 없다.이 석등에서 특이한 것은 앙련의 윗부분에 난간을 표현한 점이다. 이처럼 앙련대석에 난간을 둘러 장식한 것은 석등으로는 유일한 예이다. 화사석은 8각으로 4면에만 직사각형의 불을 켜는 구멍(화창)이 있으며 다른 4면은 아무런 조각이 없다. 화창구에는 창문을 고정시키기 위한 못구멍이 있는데, 이것은 실상사 경내에 있는 석등과 같은 형식이다.

    백장사 만력12년명 청등은입사향로

    예부터 부처님께 올리는 주된 공양물은 향과 꽃이었는데, 향은 몸의 냄새 뿐만 아니라 번뇌와 망상까지도 소멸시켜 주기 때문에 향공양은 매우 중시되었다. '대지도론' 93권에 "천축은 무더위와 냄새가 심하므로 몸에 향을 바르고 여러 부처님과 스님께 공양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향과 꽃을 꽂는 향로나 꽃병을 정성스럽게 만들었다. 특히 향을 꽂던 향로는 갖은 세공을 다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수많은 걸작들이 남아있다. 백장사 만력12년명 청동은입사향로는 넓은 전이 달린 몸체에 나팔형 받침이 붙은 전형적인 향로이다. 몸체에 비하여 받침이 빈약한 감이 있지만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구연 윗부분에는 범어가 새겨진 9개의 작은 원과 당초문양이 빈틈없이 새겨졌고 몸체에는 범자가 있다. 몸 아랫 부분에는 앙련이 있고 큼직한 굽받침에는 소용돌이 무늬가 있다. 받침대는 매우 날렵한 형태로서 정상에 소용돌이 무늬가 있고, 곡면에는 사실적인 연꽃무늬가 묘사되었다. 몸체의 넓은 전 안에는 '운봉백장사은사향완'으로 시작되는 명문이 있고 끝에는 '만력12년 갑신3월주성'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만든 때는 조선 1584년(선조 17)임을 알 수 있다.


  7. 대한불교조계종 실상사 실상사 약수암
    작성자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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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5
    실상사 약수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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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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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5

    약수암은 지리산 줄기의 작은 산중턱 1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해 있다. 1724년(경종 4)에 천은스님이 처음으로 세웠고, 서영대사가 중수하였다. 1901년(광무 5)에 지월대사는 일당을 중수하였고, 1918년에 예암대유 스님이 개인 재산을 모아 보광전을 다시 세웠다. 1937년에는 함양의 불자 한정희의 시주금으로 중수하였으며, 1974년에 운영 비구니 스님이 두 번에 걸쳐 중수하였다. 경내에는 약수샘이 있어 항상 맑은 약수가 솟아나기 때문에 약수암이라 했다고 한다. 약수암에는 목조 팔작지붕으로 된 보광전과 목조 요사채가 있다. 보광전 안에는 1782년(정조 6)에 만든 보물 제421호인 아미타목각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약수암 아미타 목각탱

    목각탱화는 불화의 내용을 부조상으로 표현한 것으로 조각기법과 불화기법이 혼용된 것이다. 이러한 목각탱은 조선 후기에 유행한 것으로 현재 문경 대승사, 상주 남장사, 예천 용문사, 서울 경국사에도 남아 있다. 약수암의 목각탱은 하단부에 "건륭사십칠년임인십일월방장산실상사"라는 기록이 있어 1782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현존하는 6점의 조선후기 목각탱화 중에서 가장 간략한 배치구도를 하고 있다.  비교적 작은 사각형의 목판 1매에 높은 돋을새김으로 조각하였는데 아미타불과 8보살, 2비구가 표현되었다. 즉 화면을 상단과 하단으로 나누어 하단 중앙에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4보살과 2비구를 배치하였다. 불격에 따른 크기의 차이가 거의 없는 반면 본존불인 아미타불만은 몸 전체를 감싸는 광배를 지니고 있다. 본존불은 사자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따로 조각하여 끼워 놓았다. 주위에 서 있는 8보살중 관음보살은 보관에 화불이 있고 손에는 보병을 들었다. 지장보살은 스님의 머리 모양을 하고 지팡이를 짚고 있다. 합장한 2인의 비구는 아난과 가섭으로 생각되며 그 배경에는 연꽃으로 장엄하였다. 이 목각탱화는 원만한 상들의 단순한 배치구도라든가 정교한 세부조각 등 당시 성행하던 목조불감의 불상들과 비교되는 작품으로서 조선후기 목각탱화의 기준작품이 된다고 하겠다.

  8. 대한불교조계종 실상사 실상사 서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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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실상사 서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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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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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5
    서진암은 원래 세암 또는 세진암이라 하였다.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22년(순조 22)에 불탄 후, 1827년에 성윤두타와 대영비구가 다시 세웠다. 1917년에 운담기순이 기금을 모아 중건하였다. 1927년에는 세진암을 서진암으로 명칭 변경을 신청해 총독부로부터 허가를 받았으며, 193년 화재로 불탄 것을 1935년에 중수하였다. 현재 서진암에는 독특한 손모양을 한 불상과, 1516년(중종 11)에 만든 석조 나한상 외 4구의 나한상이 있다.

    서진암 석조나한상
    나한은 깨달음을 얻은 조사를 일컫는 것으로 16나한, 18나한, 500나한 등으로 조성되었다. 현존하는 유명한 오백나한으로는 경북 영천 거조암의 고려시대 오백나한을 들 수 있다. 실상사 서진암에는 현재 석조 나한좌상이 5구가 있는데, 그 중 1구의 바닥에 "정덕십일년병자화주경희"라는 글자가 둥글게 새겨져 있다. 1516년이라는 정확한 조성 연대를 알 수 있어 조선시대 전반기 석조상의 면모를 반영하는 중요한 작품으로 주목된다. 나머지 4구의 상들도 각 부의 양식과 조성기법이 명문에 있는 상과 흡사하여 1516년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5구의 나한상은 모두 머리에 형태가 약간씩 다른 두건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약간 살이 쪘지만 나한상으로서의 면모를 잘 갖추고 있다. 그러나 움추린 어깨와 형식화된 손모양, 양 어깨를 모두 덮은 의복의 옷주름 등의 표현은 조선 전반기 조각양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9. 대한불교조계종 실상사 실상사 화엄학림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실상사 화엄학림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1. 화엄학림의 역사

    ‘새로운 수행자상 확립’을 위한 비구승의 모임인 선우도량의 활동이 1992년 말을 기해 승가교육문제로 집중되었습니다. 승가의 교육문제는 ‘정법불교 사상의 확립을 통한 수행과 전법의 토대를 확립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자연스런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었습니다. 선우도량의 승가교육에 관한 문제의식과 적극적인 실천은 1993년말 ‘선우도량 승가교육개혁안’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개혁안이 근간이 되어 1994년의 개혁회의를 통하여 승가교육법의 제정과 교육원의 탄생 그리고 교육법에 의한 교육체계 확립 작업으로 이어졌습니다.
    [실상사 화엄학림]은 이와 같은 교육개혁 과정에서 얻은 최초의 성과이기도 합니다.
    * 2008년에 조계종 교육원은 교육령을 개정하고 전문과정 교육을 마친 스님들을 위한 연구과정을 개설하였습니다. 이에 화엄학림은 교육원의 공식 인가를 얻어 '실상사 화엄학림 연구과정(3년과정)'을 신설하였습니다. 2008년 3월 24일 화림원을 연구과정 대중들의 수행처로 삼아 개원하였습니다.
    * 화엄학림 연구과정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화림원' 소개를 참조하십시오.

    2. 화엄경 공부의 중요성

    오늘날 많은 수행자들이 오랜 세월 수행하고도 자신의 수행에 대한 확신과 이해가 없이 방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현대 사회가 안고있는 다양한 문제의 해결과 그 대안을 불교를 통해 찾고자 하는데 정작 부처님의 출가제자들은 그들에게 불교적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할 뿐아니라 불교 사상을 요연하게 정리해서 내보이지도 못합니다. 일찍이 서산스님께서 질타하신 ‘벙어리 염소 중’인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에 이르게된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는 경학과 계율을 경시하는 근래의 수행 분위기를 들 수 있습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 없이도 성직자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 교단의 풍토, 그리고 수행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대로 바른 수행은 계정혜 삼학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한국 불교 실천 수행의 주류인 禪의 사상적 토대는 곧 화엄입니다. 일찍이 先師들은 화엄을 통해 禪의 교학적 사상체계를 세웠으며, 禪을 통해 화엄의 실천적 입장을 넓혀감으로써 禪敎가 일치된 조화로운 수행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화엄교학과 禪의 접목을 꾀한 분 중에 대표적인 인물로 보조국사 지눌을 들 수 있습니다. 『勸修定慧結社文』에 禪敎를 함께 닦을 것을 권하였으며, 『圓頓成佛論』등을 지어 화엄의 敎와 禪을 하나로 묶어 定慧雙修를 주장하였습니다. 이렇듯이 禪과 화엄은 한국 불교의 두 축을 이루며 사상의 토대를 심화하고 실천의 활로를 열어왔습니다. 그러므로 한국불교를 제대로 이해하고 바른 수행을 닦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화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로부터 강원에서는『華嚴經』을 大敎科에 두어 매우 중요하게 여겨 배우고 연구해왔습니다.

    그러나 강원에서는 여러 가지 여건상 깊이 있는『華嚴經』공부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화엄은 그 방대한 양과 담겨진 사상의 심후함만큼이나 그에 맞는 전문적이고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합니다. 실상사 화엄학림은 2년 동안 『華嚴經』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수행하는 국내 유일의 화엄경 전문교육기관입니다.

    3. 학림의 응시와 전형

    1) 응시자격 : 기본교육기관(강원, 중앙승가대, 동국대불교학부, 기초선원) 졸업자 및 이와 동등한 자격이 있다고 인정되는 비구, 비구니 혹은 사미, 사미니.
    2) 제출서류 : 입학원서(화엄학림 소정양식)1부
    기본교육기관 졸업(예정)증서 1부
    사진 3매(반명함판)
    승려증, 주민등록증 복사본 각 1매
    3) 전형방법 : 서류심사 및 면접
    4) 입학일시 : 매 년 공지
    문의전화 : (063) 636-3990·3860 (화엄학림) / 636-3031 ( 종무소 )

    * 학림의 사정에 의하여 08년부터 비구니 학인은 모집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해결되는대로 다시 모집할 것입니다. 이점 양지하여 주십시오. ]

    4. 학림의 수업방식

    그 동안 학림의 수업은 간경을 한문 글새김에 그치는 오늘날 한국불교 강당의 경학 풍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이 같은 방식으로는 경전이 담고 있는 사상을 깊이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기 수행을 점검하고 바르게 세워갈 수 없습니다. 경전을 보는 것이 곧 수행과 하나되지 못하고 실천과 괴리된 지식에만 머물 뿐입니다. 이 점을 극복하고자 학림의 강사를 중심으로 학림의 졸업생들이 모여 ‘어떻게 배우고 가르칠 것인가’하는 주제로 2001년 초부터 2002년 말까지 화엄결사를 가졌습니다.

    전통방식에만 매이지 않고 사회의 현대적 수업방식 등 다양한 방법론을 시험하였습니다.가르치는 강사와 배우는 학인의 구분이 없이 같은 주제를 가지고 함께 집중토론하는 방식을 통해 해당 내용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폭넓은 이해를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이로써 화엄학림의 수업은 경전의 자구 해석에 치중하지 않고 우리말로 번역된 경론을 주교재로 삼고 한문 원전을 참고로 하여 공부합니다.

    학림의 모든 본과목 수업은 학인이 제출한 개요와 논점이 정리된 과제물을 중심으로 토론식으로 진행됩니다. 진도에 따른 해당 단원의 내용(줄거리)과 그 안에 담긴 요점(의미)을 개괄적으로 요약 정리하고 이 가운데 주요 논의점을 찾아 토론에 부쳐 다양한 견해를 살핌으로써 해당 내용을 보다 깊고 넓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대중이 함께 모여 절차탁마하는 전통적인 논강 방식의 수업입니다. 한문 경론을 읽어 가는 공부는 한문의 독해력을 기르는데 적절한 방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한문원전의 독해를 위한 별도의 전문강좌를 갖습니다.

    5. 교수진 및 담당 과목 (2008년 현재)

    학장 : 해강 스님 - 화엄경, 화엄현담, 유식
    학감 : 원묵스님
    강사 : 도법 스님 - 화엄경
    재연 스님 - 초기불교, 범어 기초
    각묵 스님 - 아비달마
    도융스님 - 중론
    외래 강사 : 권오민 교수 (경상대 ) - 구사론
    박종혁 교수 (국민대 ) - 노자, 한문
    이도흠 교수 (한양대) - 글쓰기, 인문학

    6. 강의안내

    1) 본과목
    화엄은 대승불교의 두 기둥인 中觀과 唯識의 사상을 아우르고 그 두 사상이 양립하는 관계에서 생겨난 대립적 문제를 법계연기의 이론과 보현행원의 실천 사상으로써 풀어내며 대승불교 사상의 정점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화엄을 체계있게 공부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관과 유식 사상을 개괄적으로나마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또한 본경과 현담, 그리고 여러 화엄논서에는 중관과 유식의 용어가 도처에 쓰여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론의 이해를 위해서도 역시 중관과 유식의 법수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어떠한 교리변천사를 거쳐 중관과 유식, 그리고 화엄사상이 전개되었는지를 살핌으로써 불교 교리의 체계적이고 폭넓은 이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화엄에 들어가기에 앞서 중관과 유식의 개론을 수업합니다.

    08년 각 과목 강의 순서와 기타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학년
    1) 초기불교 - 6주 - 재연스님
    2) 중론 - 9주 - 도융스님
    3) 아비달마 - 6주 - 각묵스님, 권오민 교수
    4) 유식 - 9주 - 해강스님
    5) 화엄사상사, 현담 - 9주 - 해강스님
    6) 글쓰기 - 1학기 내 매주 1회 - 이도흠 교수
    7) 인문학 읽기 - 2학기 내 매주 1회 - 이도흠 교수

    2학년
    1) 화엄경 - 1년 - 해강스님, 도법스님
    2) 특강

    본 과목 이외의 특강은 학인들의 요청이나 교수진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 개설합니다. 03년도 1·2학기에 예정된 특강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 쌍스끄리뜨와 빨리어의 기초
    현대 불교학에 범어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한문 전적에만 의지하던 경전의 이해가 쌍스끄리뜨와 빨리어를 통해 보다 넓고 정확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경학을 하는 학인은 범어를 전문적인 공부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장애없이 사전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학림에서는 우선 쌍스끄리뜨와 빨리어의 기초 지식을 위한 특강을 마련합니다. 10여년간 인도 뿌나 대학에서 쌍스끄리뜨와 빨리를 공부하신 재연스님께서 강의해주십니다. 이 분야에 관심있는 학인은 지속적인 수업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나. 초기 불교 이해 (아함경을 중심으로 )
    비교적 초기불교의 사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아함경을 중심으로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제대로 알고 이를 통해 대승불교의 바른 이해를 위한 지침을 삼고자 합니다. 역시 인도 뿌나 대학에서 10여년간 아함경을 중심으로 어학을 공부하신 각묵스님께서 강의해 주십니다.

    다. 설법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일은 출가 승려의 성스러운 의무입니다. 그러나 많은 스님들이 대중앞에서 강의나 설법하는 일을 어려워합니다. 물론 경험이 부족한 이유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효과적으로 말하고, 몸짓하는가 등에 관해 알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분야의 전문 강사를 모시고 보다 원활한 강의와 설법위한 연설 기법을 배웁니다.

    라. 논문 작성법(논술,작문)
    전법자로서의 승려는 곧 언어와 글을 다루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승려라면 누구나 세련되고 다듬어진 깊이 있는 글을 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글을 쓰는 법을 제대로 배워 많이 써보며 부단히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고 합니다. 역시 전문 강사를 모시고 그 방법 배웁니다.

    7. 학사일정

    1) 수업연한 : 2년 4학기
    2) 학기 : 제1·3 학기는 음력 2월 15일부터 8월 14일 까지.
    제2·4학기는 음력 8월 15일부터 다음해 2월 14일 까지.
    3) 강의 일수 : 주 3일 18개월. 2년차 마지막 1개월은 졸업논문(번역물) 정리
    4) 방학 : 4개월. 한 학기 30일(매 결제 전 10일, 해제일로부터 20일씩)

    8. 졸업증서와 학위

    졸업요건을 갖추어 심사를 거치면 졸업증과 교수아사리 학위증이 수여됩니다. 교수아사리 학위증은 조계종 교육법 학림령 제28조에 의거하여 기본교육기관인 승가대학(강원)의 교수로 우선 임용될 수 있는 자격을 갖습니다.

    9. 학사(學舍)

    실상사 경내에 있는 화엄학림 학사에 거주합니다.(1인 1실)

    10. 화엄학림 후원모임‘화엄회’

    1995년 전국의 불자님들로 화엄학림 후원회인 ‘화엄회’가 결성되었습니다. 매월 일정한 회비를 거두어 화엄학림의 교육불사를 돕고 있습니다. 1996년에는 화엄회의 지원으로 지금의 강당과 학사를 마련하였습니다. 년 4회에 걸쳐 3개월마다 한 번씩 화엄회 대중과 학림의 스님들이 함께 철야 정진법회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법회가 중단되기도 했으나 올해부터 다시 화엄철야정진법회를 갖기로 했습니다.

    * 문의 : 실상사 종무소 (063) 636-3031
    화엄학림 (063) 636-3860,3861
    화림원 (063)636-3994

  10. 대한불교조계종 실상사 실상사 화림원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실상사 화림원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화림원은 승납과 세납, 전공분야 등 개인 간의 다양한 차이를 떠나서 모두가 절차탁마하는 도반으로서 三學을 치우침 없이 닦으며 수행과 전법이 함께 하는 수행도량의 새로운 모범을 만들려는 바람을 가지고 만들어진 곳입니다. 도법스님을 원장으로 모시고 화엄학림 1기 출신인 법인, 해강스님이 주축이 되어 1998년에 문을 연 화림원은 그동안 안거 중에는 참선을 중심으로 경론연구를 함께하고, 해제 기간에는 경론연구를 중심으로 참선을 하며 이론과 실천이 균형과 조화를 이룬 수행을 추구해 왔습니다.

    문을 닫게 될 위기에 빠진 화엄학림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가르치고, 공부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2002년부터 2년간의 ‘화엄학림 결사’를 주도하였습니다. 그 성과로 학림의 공부 방식을 한문 해석위주의 수업에서 한글교재를 읽고 토론하는 논강 방식으로 바꾸고 결사에 참여했던 스님들이 학림의 교수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화림원에 머물며 수행하는 대중들이 학림의 강의를 맡아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2002년 동안거에 금강경을 공부하는 ‘간경결제’를 열었습니다. 이어서 2003년 동안거에는 성철스님의 저술인 ‘백일법문’을 공부하는 간경결제를 가졌습니다. 참선 중심의 결제안거 풍토에서 ‘간경 결제안거’라는 새로운 수행문화의 장을 열었다고 평가된 간경결제는 정기적으로 외부 대중들이 함께 참여하여 치열하게 토론하는 논강형식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화림원의 간경결제는 이후 불교계 여러 곳에서 대중토론식 경전 공부모임을 여는 모델이 되었습니다.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은 학림령을 개정하여 2008년부터 2년제의 전문과정인 학림에 3년 기간의 연구과정을 신설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실상사 화엄학림에서는 제9기와 10기의 졸업생 가운데 6명의 학인을 선발하여 화엄학림 연구과정을 열고 화림원을 그 수행도량으로 정하였습니다.

    화림원에서는 2년간의 공통 연구(중관, 유식, 화엄)와 1년간의 개별연구(삼장)를 합니다. 조계종 교육법이 인정하는 전문과정의 수업을 마친 비구는 소정의 절차를 거쳐 누구나 함께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화엄학림의 모집 공고를 참조 하십시오)

    이로써 화림원 그 모습이 바뀌어 ‘실상사 화엄학림 연구과정 수행도량’이 되었습니다. 2010년 현재 원장인 각묵스님과 3년차 도융 · 호선 · 응묵 · 원묵스님, 2년차 효광,효진,혜진,일과스님, 1년차 원각,혜도스님이 함께 수행정진하고 있습니다.

    화림원은?
    미래의 부처이신 미륵부처님께서 사바의 중생을 남김없이 제도하시고자 오셔서 법을 설하는 장소를 ‘華林園’이라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