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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룩스 불교 :: CYLOOKS 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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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한불교조계종 청계사 청계사 소장 목판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청계사 소장 목판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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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사에는 본 사찰에서 판각되고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14종 466판에 달하는 경판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466판의 경판 가운데는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 총 213판으로 가장 많은데 이들 경판 가운데 간기(刊記)가 명확한 것은「묘법연화경」(1622),「고봉화상선요」(1623),「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1623),「불설천지팔양신주경」(1831), 「대장경목록(1834)」, 「수영대명왕대다라니」(1902) 등이다. 이들이 모두 청계사에서 발행된 것으로 볼 때 여타 간기가 명확하지 않은 경판들도 모두 청계사에서 판각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2. 대한불교조계종 청계사 청계사 극락보전 후불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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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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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3
    청계사 극락보전 후불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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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극락보전에는 삼존불상 이외에 후불탱과 신중탱 등의 불화도 봉안되어 있다. 이들 탱화는 모두 18세기 중엽의 설훈 스님 작품으로 가치성이 매우 높은 편이다. 후불탱은 세로 285㎝, 가로 200㎝ 크기로 비단에 채색한 것이다.

    그림의 구도를 보면 아미타불과 관음?지장보살의 아미타삼존을 중심으로 아난(阿難)과 가섭(迦葉), 타방불(他方佛) 등이 배치된 간략한 구도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은 구도?형태?채색?필선(筆線) 등 전체적으로 볼 때 19세기 불화 가운 매우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특히 차분한 필선으로 밑그림을 그렸다든가, 적색과 녹색이 주조색인 반면 중간색을 많이 사용하여 부드럽고 화사한 느낌을 주려 노력했다는 점 등에서 더욱 돋보인다고 하겠다.

    제작 연대는 함풍년간(咸豊年間, 1851∼1861)으로 추정된다.

  3. 대한불교조계종 청계사 청계사 극락보전 신중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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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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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3
    청계사 극락보전 신중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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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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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락보전 후불탱보다 다소 앞선 시기인 1844년(헌종 10)에 그려진 신중탱은 화폭을 2단으로 구분하여 윗부분은 제석과 범천을 위주로 한 신중의 그림을, 아랫부분은 천룡을 위주로 한 무장 모습의 신중을 그렸다.

    세로 172㎝, 가로 219㎝의 크기로 이전 시대의 것보다 채색이 짙어지고 윤곽선도 뚜렷해졌으나 그림의 각 형태는 도식화된 느낌을 준다.

  4. 대한불교조계종 청계사 청계사 괘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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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청계사 괘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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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청계사에는 비로자나삼신불(毘盧舍那三身佛)을 그린 길이 600㎝, 너비 330㎝의 커다란 괘불이 있다.

    1862년(철종 13)에 조성된 이 괘불은 정확한 내용의 화기가 남아 있어 여러 면에서 도움을 준다. 곧 이 괘불에는 궁중의 상궁(尙宮)이던 차씨(車氏)라는 인물이 왕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이다. 아울러 괘불 제작에 참여한 인물 가운데 증명(證明)은 은파 법담(銀坡法譚), 인성 두찰(仁城斗刹), 예봉 학윤(禮峰學潤) 등의 스님이 맡았으며, 괘불을 그린 금어(金魚)는 화남 총사(化南摠舍)와 윤익(潤益) 스님이었다.

    그림의 내용은 화엄종의 주존불인 법신(法身) 비로자나불이 화엄교리를 설법하는 장면을 구성한 것인데, 비로자나불을 화신(化身) 석가불과 보신(報身) 노사나불이 협시하고 있는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묘사하였다.

    이 괘불의 특성은 삼신불만을 크게 묘사하여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우고 그 밖의 권속들은 철저히 배제하였다는 점인데, 이것은 시기상 다소 차이는 있지만 경기도 일대의 사찰 소장 괘불과 유사한 점으로 보인다. 곧 남양주시 흥국사(興國寺) 괘불(1858년)과 불암사(佛巖寺) 괘불(1895) 등과 구성 형식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림의 주조색은 암홍색과 암록색이며, 거기에 중간 색조의 분홍색, 그리고 군청색을 써서 화면을 어둡게 처리하였다. 아울러 채색 위에 선을 일정한 굵은 선으로 구획하여 줌으로써 그림이 선명하게 보이게 하였다.

  5. 대한불교조계종 청계사 청계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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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청계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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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창건

    청계사의 정확한 창건 연도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봉은사의 사적을 기록한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는 신라 때 창건되었다는 내용이 있으나 구체적 근거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사찰 경내에 있는 석등과 부도 일부는 신라 때 것으로 추정되므로 신라시대의 창건설은 믿을 만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청계사에 관련된 기록은 대체로 고려 후기가 되면서 집중적으로 보인다. 곧 1284년(충렬왕 10) 당대의 세력가였던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인규(趙仁規, 1227~1308)가 막대한 사재를 들여 중창하면서 청계사가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고려시대의 청계사
    조인규의 중창


    청계사의 역사에 있어서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하여 청계사의 중요한 후원자였던 조인규 및 그의 후손들을 빼놓고 말 할 수는 없다. 조인규가 1284년 청계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하였음은 이미 앞서 말한 바와 같은데, 그는 청계사를 중창하면서 사찰 아래쪽에 별당을 짓고 거주할 정도로 대단한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고려시대의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는 이처럼 원찰(願刹)을 지어놓고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사례가 빈번하였다. 이것이 때로 부정적 측면을 빚기도 했지만 불교 융성의 큰 뒷받침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조인규는 평양 상원(祥原) 지역의 미미한 가문에서 출생하였고, 청년 시절 역시 그다지 뛰어난 행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가 중앙의 정치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43세 때 세자의 신분이었던 충렬왕을 수행하여 원나라에 다녀오면서부터다. 기록에 의하면 조인규는 몽고어 통역관을 뽑는 양성 시험에 합격한 후 상당한 노력으로 몽골어에 정통하였다고 한다. 충렬왕이 원나라 세조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자 조인규는 공주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였고 결국 공주의 세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성장을 할 수 있었다. 충렬왕이 즉위하니 조인규의 지위는 점차 향상되었고, 원나라 세조로부터도 신임을 얻어 원나라 관직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그는 1292년 그의 딸이 세자비로 간택되면서 조정에서 가장 유력한 존재가 되었다. 1298년 사위인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자 사도시중참지광정원사(司徒侍中參知光政院事)가 되어 개혁 정책을 크게 뒷받침하여 주었다. 그러나 충선왕비인 계국대장공주가 조비(趙妃)를 질투하여 일어난 조비무고사건으로 왕이 7개월만에 퇴위되고 충렬왕이 복위하면서 조인규도 원나라에 끌려가 안서(安西)지역에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6년 후인 1305년 방면되어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판도첨의사사(判都僉議司事)에 임명되면서 다시 관직에 복귀하였다. 1307년에는 원나라 무종(武宗)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운 충선왕의 정치력이 복권되었으며, 이에 따라 조인규도 다시 자의도첨의사사 평양군(恣議都僉議司事平壞君)에 봉해지면서 선충익대보조공신(宣忠翊戴輔祚功臣)이 되었다.

    말년에 누린 그의 권세는 곧 그의 가문이 튼튼한 세력을 구축해 가는데 밑받침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들은 모두 재상의 지위까지 오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인규가 1284년 청계사를 중창하고 자신의 원찰로 삼았다는 사실은 이후 청계사의 역사에 결정적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을 만큼의 중요한 것이었다. 이 시기는 조인규의 정치적 활동이 절정에 달해 있을 정도로 막대한 권세를 누리던 때였으며, 그의 권세가 그대로 사찰 중건에 이어졌음을 감안한다면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가는 쉽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후손들이 지속적으로 사찰 지원에 관심을 보이고 영당(影堂) 관리를 해왔음을 볼 때, 조인규가 나타내었던 청계사에 대한 열정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결국 청계사가 오늘까지 그 전통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데는 조인규와 그의 후손들에 의해 조성되었던 물질적 기반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청계사의 연혁

    청계사는 서울 근교에 위치해 있으면서 주변경관이 아름다워 많은 신도와 등산객들이 찾고 있다. 전각으로는 극락보전과 요사를 비롯한 10여 채의 건물이 있고 경내에는 국가보물 제11호인 동종과 경기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135호인 목판이 있다. 봉은본말사지에는 1879년까지의 간략한 연혁이 서술되어 있으며, 그 밖에 1689년 건립된 청계사사적비(淸溪寺事蹟碑)와 1881년 작성된 경기좌도광주군청룡산청계사중건기(京畿左道廣州郡靑龍山淸溪寺重建記)를 통해 일부 연혁이 확인된다.

    청계사는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 경허 선사의 출가자로 경허선사의 선맥을 이은 만공, 금오, 월산 선사의 체취가 경내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청계사 창건연대는 확신치 않으나 통일신라 때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세종 때 1차 중창, 숙종 때 2차 중창을 거쳐 사격을 유지해 내려오다가 지난 2001년 종상스님이 주지로 부임해오면서 사격을 일신하고 진입로 불사를 마무리해 대찰의 면모를 갖췄다. 현재는 성행스님이 주지를 맡아 경허, 만공, 금오, 월산 선사의 부도를 조성하는 등 회주종상스님의 지도아래 민족 문화사적 위상제고를 위하여 경허 스님등 청계사와 인연을 가졌던 한국불교의 빛나는 고승 4분의 부도탑 조성을 위하여 선종 종찰로서 명실상부한 “ 한국 선불교 중흥 본찰” 로서 거듭나게 되어 호국안민은 물론 그 위업을 길이 계승하고 후손들의 정신교육의 산실로서 지역사회의 역사문화교육의 산 현장이 되고 있다.

    청계사와 우담바라
    청계사에서는 최근 2000년 10월 극락보전에 봉안된 아미타삼존불 가운데 관음보살상의 상호 횐쪽 눈썹 주변에 우담바라 꽃이 피어 세간에 큰 화제가 되었다. 우담바라는 경전에 따르면 여래나 전륜성왕이 나타날 때 나타나며 3,000년 만에 한번 핀다는 전설 속의 꽃이어서 청계사에 그모습을 나타내자 전국의 불자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놀라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었다. 우담바라가 피면 영화스럽고 상서로운 일이 일어난다하여 영서화(榮瑞花)라고 부르기도 한다.
    청계사의 이 우담바라는 높이 1cm의 작은 크기로 모두 21송이가 피었으며, 아직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청계사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같은 해 10월 6일 ‘우담바라 108일 무차정진 대법회’를 가져 201년 2월 1일 회향하기도 하였다. 내년 5주년을 맞이하여 우담바라 꽃의 의미를 재 조명하기 위하여 다양한 전법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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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대한불교조계종 청계사 지리산청계사 기도와 법회 안내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지리산청계사 기도와 법회 안내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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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회 및 기도 안내
    매월 초하루 기도 법회 (매월 초하루 오전 10시)
    보름 법회 (매월 음력 15일 오전 10시)

    특별기도
    년간법회 : 매년 정초법회 3일~9일간
    년간 방생법회 1, 9월 중 년 2회
    부처님오신날 봉축법회
    우란분재 법회 지장기도
    동지 기도
    부도탑재 : 매년 음, 10월 13일
    경하노스님 탑재일 : 음, 8월 19일(해인사)
    영월노스님 탑재일 : 음, 7월 21일(청계사)
    고봉큰스님 탑재일 : 음, 2월 11일(청계사)

    기도문의 종무소  055-882-1013 / 010-8509-1013
    동참금 입금계좌 : 농협 351-1128-6607-93 청계사

  7. 대한불교조계종 청계사 지리산청계사 성보문화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지리산청계사 성보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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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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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사는 대방광불화엄경소를 비롯하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6점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대방광불화엄경소 - 전적류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554호 지정일 2014.4.
    권수정혜결사문 - 전적류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553호
    몽산화상육도보설 - 전적류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555호
    법화염험전 - 전적류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556호
    정토보서 - 전적류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557호
    현행서방경 - 전적류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558호

    대방광불화엄경소
    해동서상율맥의 경하 노스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대방광불화엄경소'는 119권40책의 목 판본으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557년(명종11) 문정왕후와 보우선사가 국난을 막기위해 승과를 부활하고 그 교재로 '대방광불화엄경소'를 황해도 서흥 고덕산 귀진사에서 판각하였다.  귀진사판 '대방광불화엄경소'는 임진왜란으로 거의 다 소실되었고, 현재 청계사에 유일하게 남아있다.
    대방광불화엄경소는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대방광불화엄경>을 당나라 징관이 풀이하고 송나라 정원이 알기 쉽게 풀이한 해설서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은 법화경과 더불어 한국 불교사상을 굳건히 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경전이다. 청계사에서 보관중인 대방광 불화엄경소는 임진왜란 이전 시기에 간행된 황해도 귀진사본으로 119권40권책으로 구성 되어 있다.

    권수정혜결사문
    고려 중기 승려인 지눌이 승려들에게 선정과 지혜를 함께 할 것을 강조하기 위해 지은 결사문이다. 이 결사문은 조선 선조41년(1608)에 송광사에서 간행되었다.
    권수정혜결사문은 안으로는 결사적 수행을 하고 밖으로는 사회적 통합을 이끌려고 한 고 려의 시대정신을 기록한 중요한 책이다.

    몽산화상육도보설
    원나라의 승려 몽산덕이가 대중을 모아 육도윤회를 설법한 내용을 담고 있다. 육도란 중생이 살아 생전에 지은 업에 따라 가게되는 <천도>, <인도>. <수라도>,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의 여섯 세계를 의미한다.
    몽산화상육도보설은 육도윤회를 벗어나 부처의 길에 오를 것을 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법화영험전
    <묘법연화경>을 늘 생각하고 소리내어 읽고 필사하고 논함으로써 얻게 되는 갖가지 영험담을 고려 후기 승려 요원이 당나라 혜상의 <홍찬전>, 송나라 종효의 <현응록>, 고려시 대의 <해동전홍록> 등에서 모아 수록한 2권1책 분량의 책이다.

    정토보서
    아미타불을 믿고 따름으로써 정토의 업을 닦고 매일 일과로 염불을 하면 정토에서 태어 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긴 경전이다. 청계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정토보서>는 백암 성총이 간행한 197권의 불서 중에 징광사에서 간행한 것이다.

    현행서방경
    고려 충렬왕 24년(1298)에 원참이 저술한 수행 의식집으로 현신으로 정토왕생 할 것을 지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 세종 30년(1448), 중종 26년(1531), 숙종 36년(1710)에 각각 간행되었으며 현재 가장 널리 유통되고 있는 것은 1710년 본이다.

  8. 대한불교조계종 청계사 지리산청계사 선대선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지리산청계사 선대선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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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景霞 大宗師 행장

    1869년 7월 2일
    경북 고령군 임천면 신기동에서 수원백씨 가문에서 부친 白一彩님의 넷째로 출생하시었다.
    1884년 16세 되시던 3월 15일 가야산 해인사에 화상을 은사로 출가 得度하시고 법명은 載英이시었다.
    1885년 17세 되시던 4월 8일 해인사 백련암에서 海耕화상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하시다.
    1986년 18세부터 해인사 강원에서 龍溟, 無碍, 應海강백으로부터 사집, 사교, 대교과를 수료하고 수의과로는 법화경과 범망경을 이수하시었다.
    1901년 33세부터 해인사 선원에서 수선 안거 이래 30 안거를 성취하시다.
    1918년 50세에 수도암 선원에 조실로 취임하시다.
    1922년 54세에 동화사에서 대구시 포교사로 임명 하시다.
    1927년 59세에 해인사 주지에 취임하시다.
    1928년 60세에 종회의원이 되시다
    1928년 60세부터 10년간 해인계맥인 龍城律師에게 傳戒받으시고 법호를 景霞라 하셨으며 그 후 갈마, 교수, 전계사에 취임하여 많은 계단을 設施하셨고, 70세에 도원화상에게 계맥을 전하시었다.
    1933년 65세부터 해인사, 직지사, 동화사, 송림사, 유가사, 호국사 등에서 자비도량참법산림, 화엄산림, 정토산림 등을 회주로 주재하시다.
    1944년 76세에 대중의 권청으로 해인사 주지에 재임하시다.
    재임기간중 전임자의 부체를 모두(8천원) 상환하였고, 은행부체도(2천3백원) 해결하였고, 거창에 유실되려던 땅도 찾아서 해인사 소유로 하였고, 그외 명월당, 국일암, 극락전, 보수 및 대적광전 앞 석축과, 관음전 현당의 축대도 수축하였다.
    1957년 89세 8월 19일 해인사 국일암에서 입적하시니 세수 89세요 법랍 73세시다.
    경하 종사께서는 당대 제일가는 律師요, 布敎師요, 法師요, 禪師이니 理事에 능통하였고 三藏을 廻容하였으니 宗匠으로서 당대 우뚝하였다. 경하종사께서는 臨終을 앞두고 杲峰스님께 傳法하시고 임종게를 남기시었다.

    景霞大和尙 임종게
    人世百年內 사람이 세상에서 백년을 살아도
    別離無送迎 죽을 때는 보내거나 마지하는 이 없네,
    畢竟了此生 필경에는 모두 이생을 마치고
    孤輪獨照明 외로운 달처럼 홀로 비칠뿐이네.

    영월선사 행장

    영월선사는 1907년 정미년 음, 4월 8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논산리 224번지에서 부친 丁京三님과 모친 金姓女 사이에 막동으로 출생 하시다. 본명은 丁還甲 이며 본관은 靈城이시다.
    1926년 19세 시에 전주 威鳳寺로 발심 출가하시다. (당시 위봉사는 현 금산사의 본사임)
    1930년 4월15일 23세 시에 전주 鳳棲寺에서 普門禪師를 은사로 월운계사로부터 사미계를 수지하시고 法名을 尙基라 하시었다.
    1932년 恩師이신 普門선사를 따라 해인사에 入房하여 經學을 배우시다.
    1937년 海印寺에서 보탁스님을 계사로 具足戒를 수지 하시다.
    1938년 해인사에서 보탁스님을 계사로 菩薩戒 수지 하시고 법호를 迎月이라 하시다.
    1938년부터 49년간 海印寺 일생 수행 근본도량으로 정진하시면서, 간혹 수도산 수도암 선원, 속리산 복천선원, 지리산 벽송선원, 팔공산 성전선원 등 전국 소 선원에서도 정진하시었다.
    특이한 것은 해인사 원림대중 처소에서 항상 낮은 후원 소임인 원주 도감 소임만을 도맡아 하시고, 그 이상의 소임을 맡거나, 대중공사에 나서거나, 법상에 오르거나, 그 많은 결제 해제때 대중 사진 한번 찍은 일 없이 일체 상을 낸 일이 없이 보살의 수행으로 일관하시다.
    1950년 한국동란을 맞아 최후까지 해인사를 지키시었고, 그 후부터 희랑대와 지족암에서 수행하시다. 만년에 지족암에 계실 때 손수 땔감을 마련하시려다 다리를 다쳐 극락전으로 거처를 옮겨 노후 정진하시다.
    1987년 7월 21일 새벽2시 세수 80세 법납 61세를 1기로 열반에 드시니 스님은 부처님과 같은 날 나시고 같은 나이에(舊典에 세존은 19세 출가 12년간 고행성도 49년 설법 80세 열반으로 되어있음) 출가하시어 12년간 경학을 배우시고 49년간 수행자의 삶을 보이시고 80세에 열반에 드셨으니, 스님은 前世로부터 부처님 행장을 닮은 수행자가 되시려는 자기 誓願이 堅固하셨는지? 아니면 相으로 가득한 末世에 부처님이 化現하시어 우리에게 菩薩의 삶을 다시
    보이심인지? 의심케 하는 수승한 삶을 사시다.
    1987년 7월 23일 해인사 九光樓 앞에서 일타스님이 기록한 臨終偈를 걸어놓고 山中葬으로 永訣式을 올리고 해인사 蓮花臺에서 법답게 茶毗하니 맑은 연기가 가야산을 덮으며 온 산림이 그대로 법신 사리가 되시다.
    1987년 음, 9월 8일 성주 관운사에서 49재를 올린 후에 영월선사의 문하가 모두 모여 선사를 정점으로 하는 문도회를 결성하였으며 그 문장에는 고봉스님이 되시고 8명의 문도 중심을 선임하여, 매년 음, 7월 21일 제사 후 문도회일로 정하고, 영월선사의 수행 정신(참선수행, 하심수행, 무소유정신) 을 되새겨 문도는 서로 탁마 장양하기로 하였다.
    당시 상좌는; 고봉, 등각, 금해. 당시 손상좌; 지산, 일화, 정일, 청파, 불암, 초암, 법산, 남강, 대안, 상락, 진오, 성종, 성호,성보, 설봉. 당시 증손상좌; 효담, 효신, 효덕
    2007년음, 7월 21일 문도회에서 영월선사 제사를 관운사 한 곳에서 20년 이상 봉행 하였으니 차후로는 徒弟 寺刹에 제사를 지내다가 탑전 다례로 올리기로 협의 하였다.
    2009년 음, 2월 21일 지리산 청계사에 영월선사의 부도탑을 세우고 처음 다례제를 올렸다.

    杲峰堂 慧雄大禪師 行狀(고봉당혜웅대선사 행장)


    큰스님께서는 1931년 10월 23일 충북 충주시 동량면 대전리에서 全州李氏 가문에서 탄생하셨으며, 부친은 李鍾德 이시고 무친은 慶州金氏 였습니다. 2남2녀의 자녀 가운데 次男으로 태어난 스님의 속명은 相洁 였습니다.
    17세가 되던 1948년 홀연히 발심하여 가야산 해인사를 입산 출가하여 영월스님을 은사로, 인곡스님을 계사로사미계를 수지 하였으며, 이때 스승으로부터 받은 법명은 慧雄이었습니다.
    1950년 19세가 되던 해에 상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신 후 수년간 선원에서 정진을 하시게 됩니다.
    1956년 25세가 되던 해 경하스님께 입실하고 법호를 고봉(杲峰)이라 하였습니다.
    1958년(27세) 해인사 강원에서 佛祖語錄을 열람하시고 大敎科를 수료하였으며, 이듬해인 1959년(28세)에는 가야산 幻寂臺에서 목숨을 내놓고 용맹정진을 하시게 됩니다. 그 해 겨울 幻寂臺에서 疑團이 擉路하더니 하더니 문득 한 경계를 보시고 다음과 같은 悟道의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昨夜千萬毘盧峰(작야천만비로봉) 어제 밤의 그 많던 비로봉들이
    今覺一無太虛空(금교일무태허공) 이제 깨고 보니 본래 빈자리네
    無無無字亦無空(무무무자역무공) 무라, 무라 하는 무자도 또한 비었으니
    幻寂臺下幻寂空(환적대하환적공) 환적대도 환적한 공이네.

    1962년(31세) 응석사와 범어사 백흥암에서 일타스님 등과 함께 琢磨長養하면서 수선수행에 일관하였습니다.
    1964년(33세)에는 포교일선에 뛰어들어 하양포교당에서 중생제도에 전념하셨으며 그 후 1971년(41세)에는 종회의원을 역임하고 1973년(43세)에는 총무원 교무부장 소임을 맡아 종단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1983년(52세)에는 해인총림 선원장에 취임하여 禪風을 진작하고 후학을 재접함으로서 佛祖의 은혜에 보답하였으며 또한 본분 납자로서의 정진원력은 수행자의 사표가 되었으므로 대중으로부터 존경과 흠모가 이어졌습니다.
    이후 1985년(54세)부터는 해인사 극락전에 주석하시면서 禪德으로서 개인적 수행에 철저하였으며, 총림대중에게는 정신적 스승이 되어주셨습니다.
    2001년(70세) 8월에 팔공산 갓바위에서 造塔法門을 하시다 병환을 얻으시고 지리산 함소굴에서 요양하면서 문도들과 안거를 나셨습니다. 하루는 시자에게 전법을 하고 싶다고 하시면서 벽암록의 '碧巖' 두 글자를 써 보이고 상좌 智山에게 다음과 같이 법을 전하는 傳法偈를 내리셨습니다.

    碧水深處泥牛耕 (벽수심처니우경) 푸른 물 깊은 곳에 진흙소가 밭갈고
    巖刻古佛石人去 (암각고불석인거) 바위에 새긴 고불이 돌사람 되어가네

    2003년 3월 13일 正午에 해인사 極樂殿에서 문도들을 모아놓고 "서로 화합하여 중노릇 잘하라"는 당부를 하신 뒤

    一生離相相裏生(일생리상상리생) 일생동안 상을 버리려는 상 속에 살았는데
    一切諸相今際壤(일체재상금제과) 모든 상이 이제야 무너지는구나
    西傅祖道誰問我(서전조도수문아) 서쪽에서 전한 조사의 도리를 누가 묻는다면
    伽倻旲峰七佛峰(가야고봉칠불봉) 가야산 높은 봉은 칠불봉이라 하리라

    하시고, 편안히 열반에 드시니 世壽는 72세가 되시고 法臘은 55세 이십니다.

  9. 대한불교조계종 청계사 지리산청계사 소개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지리산청계사 소개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지리산 동쪽에 위치하여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는 청계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12교구 해인사 말사입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6점(대방광불화엄경소외 5점)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절 주변에는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과 편백 숲과 대나무 숲이 있습니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일상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힐링하고  부처님의 법음을 느낄 수 있는 사찰입니다.

    지리산 청계사는 진주에서 서쪽으로 17km, 지리산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17km 그 중간지점인 오대주산 남쪽에 위치하며, 주위에 600여m 5봉 속에 해발 300m 지점에 물 좋고 공기 맑은 안식골 계곡에 청계사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1993도에 노후 수행 처 작은 암자로 출발하였고, 2005년도에 대웅전과 문수원 보현당을 지어 대한불교 조계종에 등록하여 청계사라 하였으니 연륜은 길지 않지만 청정한 불국토 도량을 가꾸고 있습니다. 2015년도에 해인사 경하노스님의 유책이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보존각을 짓게 되고, 편의사 대방전 명상선원등 10여동의 템플스테이 수행관과 극락전 그리고 다양한 부대누정을 지어 2022년 4월 8일 청계사가 창건불사를 마치고 금빛 문화축제로 낙성식을 거행하였습니다. 2023년에는 계곡 길을 정비하고, 차茶 체험 장과 편백 숲길과 대밭 안식로를 조성하였고, 1.2km의 청량봉에 올라 지리산 천왕봉도 볼 수있고, 1km일신봉에 올라 새해맞이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으로 24년도 템플스테이 예비사찰로 지정받게 된 청계사입니다.

  10. 청계사 템플스테이 지리산청계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1ebfe81651725ea6abac316823a5e0b9_1717375807_92.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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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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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3
    지리산청계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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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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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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