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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한불교조계종 표충사 표충사 표충서원(表忠書院)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4
    표충사 표충서원(表忠書院)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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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
    수량/면적: 1동
    지정(등록)일 : 1972.02.12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서 나라를 구하는데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사명대사·기허당 3대사의 충열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원래는 사당이었던 것을 조선 헌종 5년(1839) 지금의 위치인 영정사 안으로 옮겨 표충서원이라 이름짓고 절의 이름 또한 표충사로 고쳤다. 고종 8년(1871)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7년 절을 다시 지을 때 표충서원 건물도 함께 복원하였다. 그러나 일부 승려들이 절 안에는 서원이 있을 수 없으며 부처님과 3대사의 영정이 함께 있는 것은 더욱 안되는 일이라며 반대하였다. 결국 1971년에 표충서원을 절의 서쪽에 위치한 팔상전으로 옮기고 서원건물을 팔상전으로 대체하였다. 현재의 건물 구성 및 배치는 원래의 서원형태를 찾아볼 수 없으며, 일반적인 서원의 구성 및 배치와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2. 대한불교조계종 표충사 표충사 역사와 기원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4
    표충사 역사와 기원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4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충혼을 기리기 위하여 국가에서 명명한 절이다.


    1926년 이보다 앞서 1715년(숙종 41)에 중건한 사실이 있으나 1926년에 응진전(應眞殿)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 문화재 및 건물로는 국보 제75호인 청동함은향완(靑銅含銀香垸)을 비롯하여 보물 제467호의 삼층석탑이 있으며, 석등(石燈), 표충서원(表忠書院), 대광전(大光殿) 등의 지방문화재와 25동의 건물, 사명대사의 유물 300여 점이 보존되어 있다.


    1839년(헌종 3) 사명대사의 법손(法孫)인 월파선사(月坡禪師)가 사명대사의 고향인 무안면(武安面)에 그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세워져 있던 표충사(表忠祠)를 이 절로 옮기면서 절 이름도 표충사라 고치게 되었다.


    1742년 동쪽 10리 되는 곳에 사명대사의 비석(密陽表忠祠松雲大師影堂碑銘幷序)을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다. 이렇게 모든 사우를 정비하여 다시 세웠기 때문에 중흥사(重興寺)라 하였다.


    1738년 남붕(南鵬)이 크게 중창하고자 1738년(영조 14)에 사명대사의 행적(行蹟)을 갖추어 임금에게 올리니, 임금이 교지를 내려 표충사의 잡역(雜役)을 면제하고, 전답(田畓) 5결(結)을 내리고 경상도 관찰사에게 중수하도록 명하였다.


    17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승려들이 흩어지고 폐허가 되었던 것을 1714년(숙종 40)에 밀양 군수 김창석(金昌錫)이 사명대사의 충훈을 알고 퇴폐된 것을 민망스럽게 여겨 지방유지와 승려를 불러 사우를 다시 세울 것을 의논하였다.


    1286년 (충렬왕 12)에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一然) 국사가 1,000여 명의 승려를 모아 불법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829년 (흥덕왕 4)에 인도의 승려 황면선사(黃面禪師)가 현재의 자리에 중창하여 영정사(靈井寺)라 이름을 고치고 3층석탑을 세워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것으로 전한다.


    654년 무열왕 원년(654년)에 삼국 통일을 기원하고자 원효스님이 터를 잡아 창건한 죽림정사(竹林精寺)를 신라 흥덕왕 4년때 인도스님이신 황면(黃面)선사가 현재의 자리에 재건하고 삼층석탑을 세워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영정사(靈井寺)로 개칭하였다.

  3. 대한불교조계종 표충사 표충사 소개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4
    표충사 소개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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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충훈(忠勳)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표충사당(表忠祠堂)이 있는 절이다.원래 이곳에는 원효(元曉)가 창건한 죽림사(竹林寺)를 신라 흥덕왕 때 황면(黃面)이 재건하여 영정사(靈井寺)로 개칭한 절이 있었다. 표충사라는 이름은 사명대사를 제향하는 사당을 당시 서원(書院)의 격(格)으로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 편액하고 일반적으로 표충사로 불렀는데, 이 사당을 사찰에서 수호(守護)하여 왔으므로 사(祠)가 사(寺)로 바꾸어진 것이다.

    원래의 표충사(表忠祠)는 밀양시 영축산에 있던 백하암(白霞庵) 자리에 있었으며, 사명대사의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나라에서 사원(祠院)을 세우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그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 승려들이 흩어지고 폐허가 되었던 것을 1714년(숙종 40)에 밀양 군수 김창석(金昌錫)이 사명대사의 충훈을 알고 퇴폐된 것을 민망스럽게 여겨 지방유지와 승려를 불러 사우를 다시 세울 것을 의논하였다.

    한편으로 관찰사 조태억(趙泰億)에게 보고하여 조정에 계(啓)를 올려 나라에서 제수(祭需)를 내릴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사당을 다시 세워 사명대사와 그의 스승인 서산대사(西山大師),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싸움에서 전사한 기허당(騎虛堂)의 영정을 모셨다. 그리고 한 전각을 사당 왼쪽에 지어 사명대사가 일본에 갈 때 가지고 간 원불(願佛)을 대구 용연사(龍淵寺)에서 가져 와서 봉안하고, 동서쪽에 요사(寮舍)를 지어 수호하는 승려가 살 수 있도록 하였다.그 뒤 남붕(南鵬)이 크게 중창하고자 1738년(영조 14)에 사명대사의 행적(行蹟)을 갖추어 임금에게 올리니, 임금이 교지를 내려 표충사의 잡역(雜役)을 면제하고, 전답(田畓) 5결(結)을 내리고 경상도 관찰사에게 중수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남붕이 총책임을 맡고, 연초(演初)·취안(翠眼)·최심(最心)·상현(尙玄) 등이 도왔다. 사우를 3칸으로 하고 단청을 하였으며,

    또한, 원불전(願佛殿)·노전(爐殿)·예제문(禮制門)·의중당(義重堂)·자하문(紫霞門)·명인루(明禋樓)를 세웠다. 사당의 좌우에 선원(禪院)과 교당(敎堂)을 세웠는데, 향교와 서원의 동·서 재실(齋室)과 같은 모양으로 하였다. 1742년 동쪽 10리 되는 곳에 사명대사의 비석(密陽表忠祠松雲大師影堂碑銘幷序)을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다. 이렇게 모든 사우를 정비하여 다시 세웠기 때문에 중흥사(重興寺)라 하였다.그러나 향례(享禮)를 지낼 때마다 바람과 비를 만나게 되고, 산세가 옹색하고 길이 험하여 살고 있는 자나 제향에 참여하러 다니는 사람 모두 이를 병폐로 생각하여 불편함이 많았다. 이에 남붕이 옮기려고 뜻을 세웠으나 실현하지 못하다가, 1838년(헌종 4) 사명대사의 8세손인 천유(天有)가 예조에 보고하여 부사 심의복(沈宜復)의 도움으로 1839년에 영정사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당시 영정사는 이미 승려가 살지 않는 폐사가 되어 있었다. 여기에 사원의 배치를 옛날 체제대로 하여 영정사 관음전 자리에 사우를 신축하고 사명대사 원불을 대웅전 대들보 위에 봉안하여 예제문 3칸과 자하문 3칸, 명연루 3칸, 정문(正門)을 짓고 의중당 좌우(左右)를 동·서 재실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명부전(冥府殿) 자리에 영당(影堂)을 건립하였다.

  4. 표충사 템플스테이 표충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4
    표충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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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대한불교조계종 청계사 청계사 극락보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청계사 극락보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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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내 가장 뒤쪽 중심에 자리잡은 극락보전(極樂寶殿)은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를 하고 있다. 기단부는 최근에 쌓은 것이지만 중수할 때 대들보에서 ‘庚子 三年 三月'이라는 글씨가 확인되어 1900년(광무 4)에 지은 것으로 생각된다.

    지붕의 포작은 익공식이며, 처마가 이중으로 된 겹처마로 되어 있다. 앞면에는 각각 4분합의 세살문이 있다. 전각 외부의 벽화로는 수행자가 도를 깨우치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아 헤매는 것으로 상징적으로 표현한 심우도(尋牛圖) 10폭이 채색 없이 수묵화(水墨畵) 형태로 그려져 있는데 현재 필선이 매우 흐려져 있어 자세히 알아보기 어렵다.

    안에는 유리장 안에 모셔진 아미타여래삼존좌상과 후불탱, 그리고 신중탱 등이 봉안되어 있다.외부 처마 아래에 걸린 극락보전(極樂寶殿) 편액은 도서와 관지가 없어 작자와 쓴 시기를 알 수 없지만 글씨로 보아서 조선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해서체의 글씨가 별 다른 꾸밈없이 단정하면서 힘이 있어 화려함보다는 내실을 느끼게 한다. 주련은 4점이 걸려 있는데 그 내용과 뜻은 다음과 같다.

    極樂堂前滿月容(극락당전만월용) 극락전 앞에 걸린 보름달과 같은 부처님 얼굴
    玉毫金色照虛空(옥호금색조허공) 옥호에 금빛 찬란산 빛 내어 허공을 비추시네
    若人一念稱名號(약인일념칭명호) 만일 사람이 일념으로 부처님 이름 외운다면
    煩刻圓成無量劫(번각원성무량겁) 번뇌 단박에 없어지고 원만성취 이루리

  6. 대한불교조계종 청계사 청계사 지장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청계사 지장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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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장전(地藏殿)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근래에 지은 건물이다. 편액이 걸려 있지는 않지만 안에 지장보살입상이 봉안되어 있으므로 지장전이라고 부른다.

    주련의 내용과 뜻은 다음과 같다.
    地藏大聖威神力(지장대성위신력) 지장 대성의 위신력은
    恒河沙劫說難盡(항하사겁설나진) 항하의 모래만큼 억겁을 설하여도 다하지 못하여
    見聞瞻禮一念間(견문첨례일념간) 한 마음으로 보고 듣고 또 엎드려 절하니
    이익인천무량사(利益人天無量事) 사람과 하늘 모두에게 한량없는 이로움 주소서

  7. 대한불교조계종 청계사 청계사 극락보전 아미타삼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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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청계사 극락보전 아미타삼존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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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미타삼존불은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로 이루어져 있다. 불상은 높이 110㎝이고 두 보살상은 높이 107㎝로 모두 조선 후기에 속하는 양식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은 한 작가의 솜씨로 보이지만, 관음보살상은 양식에서 조금 차이를 나타내며 조성 연대도 다소 올라가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 삼존불좌상은 사각형의 평면적 얼굴에 가는 눈, 작은 입과 코, 넓은 귀 등을 오려 붙인 듯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하체와 상체, 그리고 머리부분에서도 나발(螺髮)의 모습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어 다른 불상보다는 다소 이색적인 느낌을 준다. 조선 후기의 불상 가운데 보기 드문 정제미를 표현한 수작이라고 평가된다.

  8. 대한불교조계종 청계사 청계사 와불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청계사 와불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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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사 극락보전 오른쪽에는 광장처럼 넓은 대지가 있고 여기에 거대한 와불상(臥佛像)이 봉안되어 있다. 특이하게도 자그마한 자갈들을 모아서 조성한 이 와불상은 지금은 청계사의 명물이 되었는데, 1999년 지명 주지가 봉안하였다.

  9. 대한불교조계종 청계사 청계사 삼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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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청계사 삼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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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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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락보전 왼쪽에 부도가 서 있고 그 뒤로 지장보살입상이 봉안되어 있다.

    1993년에 화강암으로 조성한 이 지장상은 지장전 금동 지장보살입상과 함께 청계사의 지장신앙을 느낄 수 있는 성보문화재라 할 수 있다.

  10. 대한불교조계종 청계사 청계사 동종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청계사 동종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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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락보전 왼쪽에 위치한 종각에 봉안되어 있으며, 현재 보물 제11-7호로 지정되어 있다. 크기는 높이 110㎝, 입지름 76㎝로, 종의 표면에 ‘康熙四十年辛已四月日鑄成 廣州靑龍山淸溪寺大鐘七百斤'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1701년(숙종 27)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명문에 따라 본래 청계사에서 제작한 것이 분명하지만 한동안 봉은사에 봉안되어 있다가 1975년 다시 청계사로 옮겨와 봉안하고 있다.
    이 종은 범종 가운데서 대종에 속하는 큰 종이며, 조선 후기 범종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전체적으로 푸른빛이 감도는데, 종의 꼭대기는 수평으로 펑퍼짐하지 않고 약간 둥그스름하게 불러 있고, 그 한가운데에 서로 반대쪽을 향해 있으면서 몸이 엉켜 있는 쌍룡의 용뉴가 돌출해 있어 여기에 쇠고리를 꿰어 종을 매달았다.

    어깨 부분에 돌려진 띠는 그 안에 연속으로 꽃무늬를 새겨 장식하였고, 맨 아래쪽 종구(鐘口)의 둘레를 장식한 띠에는 보상화문(寶相花紋)이 연속으로 새겨져 있어 신라 이래의 고유양식을 나타내면서 화려한 장식효과를 내고 있다. 한편 보살입상은 연꽃 가지를 쥐고 구름 위에 서 있는 모습인데, 유곽과 유곽 사이에 모두 네 개가 조각되어 있다. 이 같은 보살상은 보은 법주사 종(1636년), 문경 김룡사 종(1670), 양산 통도사 종(1686) 등의 17세기 범종에서만 보이는 특징이기도 하다. 이 종의 제작을 주도한 사인(思印) 스님은 수타사 종(1670), 통도사 종, 강화 동종(1711) 등 모두 8구의 종을 제작한 이 시대의 대표적 승장(僧匠)이지만 그 자세한 행장은 알려진 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