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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룩스 불교 :: CYLOOKS 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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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각사 템플스테이 무각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무각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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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대한불교조계종 실상사 실상사 전각 배치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실상사 전각 배치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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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대한불교조계종 실상사 실상사의 문화재 목록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실상사의 문화재 목록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사적
    제309호 실상사 일원

    국보
    제10호 백장암 삼층석탑 (신라말)

    보물

    제33호 수철화상 능가보월탑 (신라말)
    제34호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 (신라말)
    제35호 실상사 석등 (신라말)
    제36호 실상사 부도 (고려시대)
    제37호 실상사삼층석탑(쌍탑) (신라말)
    제38호 증각홍척국사 응료탑 (신라말)
    제39호 증각홍척국사 응료탑비 (신라말)
    제40호 백장암 석등 (신라말)
    제41호 철조 여래좌상 (신라말)
    제420호 백장암 청동은입사향로 (1584)
    제421호 약수암 목조탱화 (1782)
    편운화상승탑 (후백제)

    지방유형문화재

    제45호 극락전 (1684)
    제88호 위토개량성책 (조선시대토지대장)
    제137호 보광전 범종 (1694)
    제258호 건칠아미타불좌상, 건칠관음보상립상

    중요민속자료

    제15호 석장승 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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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대한불교조계종 실상사 실상사 보광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실상사 보광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실상사의 주법당인 보광전은 1884년(고종 21)에 월송대사가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건물 안에 모셔진 삼존상 중 본존불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고, 좌우의 관음, 세지 두 보살은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월씨국(베트남)에서 모셔왔다고도 한다.

    현재는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 소박한 모습으로 실상사를 찾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렇지만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로써, 보광전 주변에는 83평을 추정케 하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 굉장한 규모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1991년 동국대 박물관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에서 이미 증명된 적이 있다. 불상 뒤에는 아미타여래도가 있고, 불단 오른편에는 1981년에 만든 신중불화와 산신불화가 있다.

    실상사 동종(銅鐘)

    절에서 사용하는 종을 흔히 범종이라고 하는데, 그 소리로써 하루의 일과를 모든 대중에게 알리는 역할을 한다. 범종은 소리로 장엄하고 시간을 알려주며, 귀신을 쫓고 지상 및 하늘과 지옥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실상사에는 통일신라시대의 범종이 있었는데 깨진 상태로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고, 강희(康熙) 33년(1694)에 주조한 범종은 현재 보광전에 있다.

    이 종은 몸체의 위는 좁고 아래로 가면서 넓게 퍼진 모습이다. 종 몸체에 기록된 글에 의하면 강희 33년에 만든 것으로 무게는 800근이다. 종을 만든 사람은 김상립, 정칠립, 김천수, 김선봉 등으로 여기에서 처음으로 범종을 만든 사람을 편수(便手)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보아 이 종은 침허대사가 실상사를 중창할 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용두(龍頭)는 앞을 바라보고 있고, 뒤에 붙은 소리통은 형식적으로 작게 만들었다. 상대(上帶)는 표현하지 않고 대신에 범자(梵字)를 돌아가며 새겼으며, 유곽(乳廓)은 종 몸체 중간쯤에 치우치게 배치하였다. 유곽대에는 당초무늬와 연꽃 모양의 유두(乳頭)가 9개씩 있고, 보살상은 유곽을 중심으로 합장한 채 서 있다. 보살이 서 있는 아래 부분에는 명문(銘文)이 있고 당좌(撞座)와 하대(下臺)는 표현하지 않았다.

    이 종에 얽힌 이야기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전해 온다. 즉 실상사를 중창하고 난 후 국왕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종을 만들고 아침 저녁으로 나라가 번창하기를 기도하며 종을 쳤다고 한다.

    그런데 이 범종에는 우리 나라 지도와 일본의 지도가 새겨져 있어, 이 종을 치면 일본의 경거망동을 경고함과 동시에 우리 나라를 흥하게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와 같은 소문 때문에 일제 말기에는 주지스님이 문초를 당하기도 하였으며 종 치는 것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지도 일부가 그대로 남아 있어 그러한 사실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5. 대한불교조계종 실상사 실상사 약사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실상사 약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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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약사전은 몸과 마음의 질병을 낫게 함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는 서원을 세운 약사여래를 봉안하는 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1883년 함양, 산청 유생들의 방화에도 불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특히 ㅈ우앙의 꽃문창살은 단청이 선명해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전각 안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철로 만든 약사불상과 불상 뒤에는 조선 후기에 그린 약사불화가 있다.

    철조 약사여래좌상

    약사여래는 중생의 병고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현실이익적인 부처님이다. 이처럼 약사여래는 인간의 생노병사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병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 약사신앙이 전래된 이후 계속 신앙되었다.

    약사불상이 다른 불상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한 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현재 약사불로 신앙되고 있는 불상 가운데는 약그릇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실상사의 약사여래도 약그릇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불상을 통일신라 말 구산선문에서 본존으로 모시던 노사나상(盧舍那像)이라고도 하며, 근래에는 원래의 손이 아미타 수인을 하고 있어 아미타불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제2대 조사인 수철국사가 약사여래상과 석탑 2기를 세웠다는 설이 있어 현재 약사전에 봉안된 철조여래상은 수철국사가 조성한 약사불이 아닌가 한다.

    이 불상은 실상사가 중창될 때까지 들판에 있었으며, 약사전을 세운 후 그 안에 봉안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불상에는 보화(寶貨)가 많이 들어 있다는 말이 있어 일찍부터 도굴꾼에 의해 훼손된 적이 있다. 불상의 복장품에는 효령대군의 발원문과 사경(射經) 및 인경(印經)이 수백 권이나 있었고, 고려판 화엄경소 등 보기드문 서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일부는 도난 당하였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탔다고 한다.

    실상사 약사여래불상은 9세기에 접어들면서 유행하는 철불(鐵佛)의 초기작품으로써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불상은 건장한 신체와 물결식의 옷주름에서 가장 융성했던 시기의 양식이 남아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현재의 두 손은 나무로 만들어 끼워넣은 것으로, 1987년 복원할 때 나온 철제 손과 같은 모양이다. 대좌는 흙으로 만들었으나 허물어진 곳이 많아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다.

  6. 대한불교조계종 실상사 실상사 명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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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실상사 명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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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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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5

    명부전은 갖가지 지옥의 장면을 그린 시왕(十王)의 그림이나 조각을 모신 전각으로 주존은 지장보살이다.

    실상사의 명부전은 길선당(吉禪堂)의 옛터에 건립된 것으로 장육전(丈六殿) 동쪽에 있던 것으로 1821년(순조 21)에 의암대사가 옮겨 지은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안에는 지장보살 삼존상, 시왕상 10구, 판관상 6구, 인왕상 2구가 있다. 지장보살상 뒤에는 1987년에 조성한 지장시왕도가 있다.

    시왕상은 본존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제1 진광대왕, 제3 송제대왕, 제5ㅓ 염라대왕, 제7 태산대왕, 제9 도시대왕이 있고, 왼쪽으로는 제2 초강대왕, 제4 와관대왕, 제6 변성대왕, 제8 평등대왕, 제10 전륜대왕이 배치되었다.

  7. 대한불교조계종 실상사 실상사 극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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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실상사 극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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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극락전의 옛이름은 부도전(扶道殿)으로 계오대사가 1684년(숙종 10)에 건물을 짓고 부도전(浮屠殿)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부도전이라 한 것은 근처에 홍척국사와 수철화상의 부도가 있기 때문이다. 1751년(영조 27)에 포문비구(抱文比丘) 한심(漢諶)이 옛 연하당(蓮荷堂)과 금당(金堂)의 기와를 사용하여 요사채를 수리하고 부도전(扶道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788년(정조 12년)에 금파 관오대사가 대시주 이휘와 별좌 홍찬, 재민과 더불어 중수하였다. 1832년(순조 32)에 의암대사가 기봉, 처윤과 함께 중건하여 극락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극락전은 명면 3칸, 측면 2칸인 맞배지붕의 목조건물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45호이다. 불단 위에는 아미타여래좌상이 있으며, 그 좌우에는 목조보살상이 있었으나 몇 년 전에 분실하였다. 극락전 요사채는 1932년에 남성법(南性法) 스님이 영원사(靈源寺)에서 옮겨 세운 것으로, 지리산의 기운이 솟아오르는 명당으로 알려져 수행납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8. 대한불교조계종 실상사 실상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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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실상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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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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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5

    지리산 자락이 감싸 안은 듯 평화롭고 풍요로운 고을 남원시 산내면에 천년 고찰 실상사(實相寺)가 있다. 지리산의 북쪽 관문인 인월에서 심원, 달궁, 뱀사골 방면으로 향하다 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 마천방면으로 가다 보면 만수천(萬壽川)변에 천년의 세월을 버티고 지내온 실상사가 나타난다.

    만수천과 뱀사골 방면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만나는 지점이 산내면 면소재지, 즉 인월에서 뱀사골 방면으로 가다 보면 나타나는 삼거리 부근이다. 이 삼거리에서 동쪽을 향해보면 천왕봉이 손에 닿을 듯 눈 앞에 선하다. 그 발 아래 산내면 입석리 들판이 넓게 펼쳐지는데 그 곳에 실상사가 자리잡고 있다.

    실상사는 지리산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만수천을 끼고 풍성한 들판 한가운데 위치해 있으며 동으로는 천왕봉과 마주하면서 남쪽에는 반야봉, 서쪽은 심원 달궁, 북쪽은 덕유산맥의 수청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채 천년 세월을 지내오고 있다. 대부분 우리나라의 사찰이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해 지리산 자락의 실상사는 들판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지리산 사찰 중 평지에 자리한 절은 이 곳 실상사와 단속사가 있는데 단속사는 폐허가 된 채 석탑만 남겨져 있는데 비해 실상사는 여전히 사찰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실상사의 역사 개관 천년사찰, 호국사찰로 잘 알려진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서기 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스님이 당나라에 유학, 지장스님의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배운 뒤 826년 귀국했다가 선정처(禪定處)를 찾아 2년동안 전국의 산을 다닌 끝에 현재의 자리에 발길을 멈추고 창건했다. 증각대사가 구산선종(九山禪宗) 가운데 최초로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절을 세운 것이다.

    증각대사의 높은 불심을 높게 기린 흥덕왕이 절을 세울 수 있게 해줬고 왕은 선강태자(宣康太子)와 함께 이 절에 귀의했다. 증각은 실상사를 창건하고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켜 이른바 실상산파(實相山派)를 이루었고 그의 문하에서 제 2대가 된 수철화상과 편운(片雲)스님이 가르친 수많은 제자들이 전국에 걸쳐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신라 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는 그 이후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화재로 전소됐다가 3차례에 걸쳐 중수 복원돼 오늘에 이른다. 세조때(1468)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됐다는 기록과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전소됐다는 설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다.

    화재로 인해 실상사의 승려들은 숙종 5년(1680)까지 약 200년 동안 백장암에서 기거했으며 절에는 철불, 석탑, 석등 등만 남아 있었다 한다. 그러다가 숙종 때 300여 명의 수도승들과 함께 침허대사가 상소문을 올려 36채의 대가람을 중건했다. 또 순조 21년(1821) 의암대사가 두번째 중건을 했으며 고종 21년(1884)에 월송대사가 세번째 중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제3중창을 하게 된 것은 고종 19년(1882) 어떤 사람들이 절터를 가로챌 목적으로 방화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실상사는 6•25를 맞아서는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비들이 점거하는 등 또 한 차례의 수난을 겪게 됐는데 용케도 사찰만은 전화를 입지 않았다.

    천년 세월을 보내오면서 호국사찰로 알려진 실상사에는 유독 일본, 즉 왜구와의 얽힌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앞서 언급한 사찰의 전소원인을 정유재란 당시의 왜구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는 부분에서도 일본과 관련된 전설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져 있다 한다. 이 때문에 가람배치도 동쪽을 향해 대치형을 하고 옆으로 강이 흘러 대조적이다.

    이 절에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구전이 있는데 이는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서도 전해지고 있어 흥미를 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실상사 경내의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에 일본 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종에 그려진 일본열도를 두들겨 치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우리나라와 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한다는 구전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스님들이 이 속설에 따라 범종의 일본지도를 많이 두드린 탓에 범종에 그려진 일본지도 중 훗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

    최근의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망언이 있는 오늘날 한일관계를 두고 볼 때 보광전의 범종에 얽힌 사연이 갖는 의미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하다. 이 같은 전설과 구전들을 살펴볼 때 실상사가  일본에 대한 호국사찰이며 불교문화의 큰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실상사에는 백장암과 서진암, 약수암 등의 암자가 있으며 이 곳에는 신라시대의 많은 문화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국보 제10호로 지정된 백장암 삼층석탑은 전형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설계를 하고 있어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공예탑이기도 하다.

    실상사의 문화유적은 보물급에는 수철화상능가보월탑(33호, 905),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34호), 석등(35호, 개산당시), 부도(36호, 고려), 삼층쌍탑(37호, 887년), 증각대사응료탑(38호, 861년 이후), 증각대사응료탑비(39호), 백장암석등(40호, 9세기 중엽), 철제여래좌상(41호, 개산당시), 청동은입사향로(420호, 1584년), 약수암목조탱화(421호, 1782년)등 11점이 보존되어 있다. 지방유형문화재로는 극락전(45호,1684년), 위토개량성책(88호, 토지대장), 보광전범종(138호, 1694년), 백장암보살좌상(166호,고려), 백장암범종(211호, 1743년)등 5점이다. 중요민속자료는 실상사 입구의 만수천을 가로지르는 해탈교 양쪽에 세워져 있는 석장승 3기(15호)가 그것이다.

    장승은 벅수라고도 하는데 보통 한 쌍으로 세워져 있으나 이 곳의 장승은 남녀를 판별할 수 없으며 만수천 양쪽에 원래는 4기가 세워져 있었다. 절을 향해 건너기 전에 세워진 한쌍의 돌장승 중 오른편 장승은 1936년(또는 1934년) 홍수 때 떠내려 가고 없다. 잡귀를 막기 위해 세워진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은 두 눈과 코가 크고 둥글며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손은 창을 든 것 같은 모습이며 "대장군(大將軍)"은 뒤에 만들어진 듯 이렇다 할 특징은 없다. 실상사에는 이렇듯 호국의 정신이 흐르며 찬란한 신라불교문화의 숱한 문화재가 잘 보존돼 있는 천년고찰이다.

  9. 실상사 템플스테이 실상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실상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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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종남산송광사 대웅전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 유물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4
    종남산송광사 대웅전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 유물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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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8월 8일 보물 제1274호로 지정되었다.

    송광사 대웅전에 모셔진 이 삼불좌상은 본존불인 석가여래를 중앙에 모시고, 좌협시(향우측)로는 약사여래를, 우협시(향좌측)로는 아미타여래를 배치하고 있다.

    무량사 소조아미타불상(540cm)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거대한 소조불상(565cm)으로, 신체 각 부분이 비교적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장중하고 원만한 얼굴과 두껍게 처리한 옷은 당당한 불상 양식에 걸맞는 표현 기법을 보여준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 표현은 강한 인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존불인 석가여래상에서는 세 불상의 조성기와 『묘법연화경』을 비롯한 불경류, 후령통(喉鈴筒) 등 다수의 복장품이 발견되었다. 불상 조성기에 의하면 숭정 14년(인조 5년, 1641) 6월 29일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축원하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기원하면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나라와 청나라의 연호를 함께 사용하고 있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당시의 극심한 혼란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난 극복의 의지와 역사 의식의 반영과 함께 당시의 문화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불상은 만든 연대가 확실하고 역사 의식이 반영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불상과 함께 복장유물 12종 중 불상조성기 3점과 후령통 3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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