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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증심사 증심사 7층석탑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6-06
증심사 7층석탑-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6-06
5층석탑과 나란히 있는 7층석탑
7층석탑일체의 복덕, 지혜와 모든 행복의 근원이 담긴 7층석탑
오백전 옆 5층 석탑과 나란히 위치한 7층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에 비해 체감비율이 작아 전체적으로 매우 가늘고 긴 느낌이 들며 안정감이 없어 보인다. 가장 큰 특징은 탑신 부분에 화문과 산스크리트어가 양각되어 있다. 그래서 범자(梵字) 7층 석탑이라고도 부른다. 각 층의 4면에 동일하게 새긴 글씨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읽으면 ‘옴마니반메훔’. 보통의 석탑과는 많이 다른 형태다.
반메훔
옴마니반메훔은 ‘육자대명주’, ‘육자대명왕진언’이라고도 부르는 관세음보살의 보호(寶號)다. 이 보호는 아미타불이 관세음보살을 보고 칭찬한 말로, 일체의 복덕 지혜와 모든 행복의 근원이라 하여 소중히 여겼다. 범자 진언 장엄은 진언을 염송하면 일시에 많은 공덕을 쌓을 수 있고 모든 어려움을 면할 수 있다고 믿는 기복신앙으로 인해 주로 조선시대에 성행했다. 7층 석탑의 조성 시기는 조선 중기 이후로 추정되며 증심사에 있는 석탑 중에서는 가장 후대의 작품이다.
1999년 석조보살입상과 7층석탑 -
대한불교조계종 증심사 증심사 5층 석탑 속 사라진 보물
-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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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증심사 5층 석탑 속 사라진 보물-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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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1910년 유리건판 속 5층 석탑
일제강점기 관보증심사 경내에는 시대를 달리하는 석탑 3기가 모셔져 있다. 그 중 5층 석탑은 7층 석탑과 함께 오백전 옆에 있다. 고려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5층 석탑은 탑으로서 가치보다 이곳에서 나온 보물들의 이야기로 유명하다.
1933년 일제강점기 시절, 해체 수리를 하던 중에 탑 안에서 5층 철탑, 작은 철불 2구, 수정1개, 염주로 추정되는 청옥 23개, 금동불 2구가 나왔다. 이에 일제강점기 문화재보호법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에 의거해 1936년 보물 제211호 금동석가여래입상, 보물 212호 금동보살입상으로 지정되었다.
199년 5층 석탑 위치
해방 후 1955년 보물로 지정되었던 문화재들이 일괄로 국보 승격할 당시 두 불상도 국보 제211호, 제212호로 지정되었으나 6.25 전쟁 중 경찰서 금고에 보관했던 불상이 분실 되고만다. 1957년 문화재위원회 조사 이후에는 국보 해제가 되어 행방을 알 수 없는 사연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아쉽게도 분실된 유물들의 사연은 1963년 2월 5일자 경향 신문 기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아래의 글은 기사의 전문을 요약·수정 글)
1963년 2월 5일 경향신문기사
국보급 두 불상의 마지막 모습을 본 것은 1950년 5월이었다고 한다. 당시 광주 조선대에서 한국 고미술에 대한 특별강좌가 있었다. 국립박물관의 김재원 관장과 최순우 선생이 특별강좌를 마치고 광주 근방의 문화재를 살피고자 광산군 효지면에 있는 증심사로 갔을 때였다.
증심사에 있어야 할 두 국보불상이 없었다. 공비 출몰로 사찰이 불안하다고 해서 경찰서장이 가져갔다는 주지스님의 말씀이었다. 다시 경찰서로 갔을 때 서장은 금고에서 소중히 보관하던 불상을 일행 앞에 내보여주었다.
그러나 6·25 전쟁의 혼란이 가신 뒤 여러 전문가들이 다시 확인하려 했을 때는 이미 두 불상의 행방은 알 길이 없었다. 서장은 바뀌고 불상은 간 곳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의 서장이 전하기를 금동불상들은 금고 속에 둔 채 6·25 전쟁 중 이동했다는 것이다. -
대한불교조계종 증심사 증심사 오백전과 오백나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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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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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증심사 오백전과 오백나한님-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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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세종대왕 재위 시절(1443년), 광주의 생명젖줄인 경양방죽을 축조한 광주목사 김방은 관세음보살 현몽을 좇아 오백전을 불사했다. 6.25전쟁 당시 다른 전각은 불에 탔으나 증심사 오백전만은 불에 타지 않았던 영험한 곳이다. 증심사 오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좁은 공간에 500명의 나한을 모시다 보니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불단을 ‘ㄷ자’ 형으로 배치했다.
대웅전 같은 화려한 닫집도 없다. 그저 비어 있는 공간을 찾아 안치하다 보니 대들보에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앉은 나한도 있다. 그들의 표정만큼이나 재미있는 풍경이다. 증심사 오백나한은 모두 흙으로 빚은 것들이다. 전남지방에서 조선 초기에 오백전이 지어진 절은 증심사가 유일한 것이어서 더욱 귀중하다.
증심사는 매년마다 오백나한대재를 펼치며 입재부터 회향까지 21일간 기도를 드린다. 올해 오백나한대재 입재식은 10월 28일에 봉행한다. 11월 17일 회향 때는 자향회 육법공양, 영산회 스님들의 집전 하에 천수경, 다라니, 바라, 오백나한 기도문 독송, 합창단 축가 등 다채로운 의식이 열린다. -
대한불교조계종 증심사 증심사 신중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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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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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증심사 신중탱화-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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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신중도(神衆圖)는 말 그대로 여러 신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다시 말하자면, 부처의 정법(正法)을 수호하는 신들을 그린 불화(佛畵)다. 증심사 신중탱화는 영조스님이 주지로 계실 적에 조성했다. 불기 2534년(1990) 9월 7일 봉안의식을 치렀으며, 증명법사는 전 송광사 방장 범일 보성스님, 병법(의식 진행)은 도연 법흥스님이 했다.
경전에 의하면 신중탱화 가운데에 모셔진 예적금강은 석가모니불의 화신이라고 한다. 그의 주문에는 큰 힘이 있다고 믿어져 불교의식에서 자주 독송되었다. 더러운 것을 없애므로 예적부정이라 하고, 온 몸에서 지혜의 불길을 내뿜기에 화두(火頭)라고도 한다. 형상은 눈을 동그랗게 뜬 엄한 상을 하고 있으며, 3면(面), 3목(目), 8비(譬)로서 독사를 몸에 감거나 잡고 법륜을 굴리면서 온 몸에 불길이 치솟는 형상으로 나타난다. -
대한불교조계종 증심사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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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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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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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철조(鐵造)의 한문을 풀이하면 쇠 철(鐵) 지을 조(造)입니다. 다시 말해 철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비로자나불좌상(毘盧遮那佛坐像)은 불교의 진리인 ‘법法’을 인격화 하여 형상화한 비로자나불상이 앉아 있다는 뜻입니다.
신라하대(9세기)부터 고려시대까지 특히 서남해안 지역에서 불상의 재료로 유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료 특성상 철불을 만들 때는 목조나 소조 불상처럼 한 번에 만들지 않고 각각 분할하여 주조하는 방법(piece mold)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정면에서 보았을 때 외형 틀을 나누었다가 이은 분할선이 거의 드러나지 않게 감춰져 있어 분할주조법으로 주조된 다른 철불상들에 비해 섬세한 기법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말여초기 이 지역 조각 장인의 뛰어난 솜씨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철은 중요한 재료이기 때문에 권력 있는 사람들이 불상 시주에 참여하였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철불은 총 22기가 있습니다.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이외에도 장흥 보림사, 남원 실상사, 청양 양곡사 등에도 철로 만든 불상이 남아 있습니다.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현재 증심사 비로전에 봉안되어 있습니다. 이 불상은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초에 전남도청 뒤편에 있던 대황사지(大皇寺址)에서 지금의 증심사로 옮겨 온 것입니다.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양손으로 지권인(智拳印)의 수인(手印)을 결하고 있습니다. 지권인은 법신(法身) 비로자나불 특유의 수인手印으로서 일반적으로 왼손 검지의 첫마디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는 수인인데, 이 불상에서는 좌우가 바뀐 모습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처럼 지권인을 결하면서도 좌우 손의 위치가 바뀐 예는 불국사 비로전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을 비롯해 신라하대의 몇몇 불상에서도 보이고 있습니다.
2019년 월간 증심 3월호에 나온 내용입니다. -
대한불교조계종 증심사 증심사 칠성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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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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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증심사 칠성탱화-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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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증심사 칠성탱화는 영조스님이 주지일 당시 고영을 화백이 조성했다. 그 후, 불기 2545년(2001) 10월 3일에 봉안의식을 치렀으며, 증명법사는 전 송광사 방장 범일 보성스님, 병법(의식 진행)은 성호스님이 했다.
칠성탱화를 보면 북극성을 불격화한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작게 그려져 있다. 일반적인 칠성탱화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의 보관에 해와 달을 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증심사 칠성탱화는 해와 달을 상단에 따로 표현했다. 그 옆으로는 성군을 표현한 듯 보인다.
하단 부분에는 무등산과 주상절리가 그려져있다. 이는 ‘무등산 증심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가미한 탱화라고 볼 수 있다. 금륜불정치성광여래불을 중심으로 우측하단부터 순서대로 올라간다. 그리고 각각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① 동방법음세계 법해유희여래불 무곡성군은 모든 복덕을 두루 갖추게 해주며
② 동방무우세계 최승길상여래불 문곡성군은 모든 구하는 바를 모두 얻게 해주고
③ 동방묘보세계 광음자재여래불 거문성군은 모든 장애와 재난을 없애 주고
④ 최승세계운의통증여래불 탐낭성군은 자손들에게 만복을 주고
⑤ 원만세계 금색성취여래불 녹존성군은 모든 업장을 소멸시켜 주고
⑥ 정주세계 광달지변여래불 염정성군은 백가지 장애를 없애 주고
⑦ 동방유리세계 약사유리여래불 파군성군은 병액을 퇴치하고 수명을 연장시켜준다. -
대한불교조계종 증심사 증심사 지장전과 회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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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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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증심사 지장전과 회심당-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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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지장전과 회심당의 기이한 동거
현재 증심사 지장전은 두 개의 현판을 달고 있다. ‘지장전’과 왼편 출입문에 걸린 ‘회심당’이다. ‘지장전’ 이면서 ‘회심당’ 이기도 한 기이한 두 집 살림의 역사는 1950년 6.25 한국전쟁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절에서 옛 스님의 진영(초상화)을 모신 사당은 흔히 볼 수 있으나 수행자가 아닌 일반 신도를 위한 사당은 쉽게 볼 수 없다. 그런데 증심사에는 일찍이 일반 신도를 위한 사당인 회심당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6.25 때 불타버린 지장전을 지을 마땅한 방법이 없어 옆에 있던 회심당을 헐고 지장전을 다시 지은 것이다.
지장전 안에는 회심당 주인 부부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회심당 주인의 이름은 정만재와 그의 부인인 하동 정씨다. 정만재는 조선시대 왕실의 친척들을 위해 설치한 관청 돈영부의 관리였다. 그의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지장전 한 켠에 걸린 ‘회심당기’를 통해 그가 절 안에 따로 사당을 지어 기릴 만큼 증심사를 위해 큰 몫을 했으리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 초상화를 그린 ‘채용신’이라는 화가다. 채용신은 조선 말 고종, 흥선대원군, 최익현, 황현 등 내노라 하는 이들의 초상화를 그린 당대 최고 화가였다. 채용신은 관직에서 물러나 전주에 머물던 때인 78세(1927)에 이 초상화 두 점을 그렸다고 한다. 현재 초상화는 오랫동안 잘 보존하기 위해 송광사 성보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
대한불교조계종 증심사 증심사 취백루 翠柏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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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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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증심사 취백루 翠柏樓-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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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뜰 앞의 잣나무가 있는 누각
취백루에 올라가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면, 봄에는 연분홍빛 벚꽃, 여름에는 푸르른 녹음, 가을에는 노오란 은행나무가, 겨울엔 하얗게 눈 덮인 설경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취백루는 ‘뜰 앞의 잣나무’가 있는 누각이란 뜻이다. 시적 향취 물씬 풍기는 이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 누각의 명칭은 취백홍도(翠栢紅桃)가 피어 있는 아름다운 정경을 묘사한 고려 때의 시인 김극기(金克己)의 시구에서 취해진 것이라 전한다. ‘뜰 앞의 잣나무’라 한 것은 선불교의 간화선(看話禪) 수행지침서로 유명한 <무문관(無門關)>제35칙에 나오는 정전백수(庭前栢樹)를 차용한 것이다.
취백루는 정유재란 때 화마를 입어 1609년(광해군 1년)에 증심사를 중창한 석경(釋經)·수장(修裝)·도광(道光) 세 스님의 원력으로 다시 세워졌다. 이후 6.25전쟁으로 또다시 불에 타버린 취백루는 1998년에 정면 5칸에 측면 3칸 규모로 다시 지어졌다. 현재 상층은 신도교육과 템플스테이 체험 등으로, 하층은 종무소로 사용 중이다.
취백루에는 당대에 유명한 문인, 암행어사, 전라도 관찰사, 광주 목사, 고을 현감들이 다녀가기도 했다. 그들이 남긴 시, 유람기 등은 현재의 우리에게 옛 취백루의 모습과 증심사의 풍경들을 떠올리게 해준다. 또한 시 속에서 사찰이라는 공간은 서로 교유하는 장소이자, 마음 치유의 장소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도 엿볼 수 있다. 많은 시문과 유람기가 남아 있으나, 그중에서 문신이자 의병장인 고경명 무등산유람기<유서석록>에 나온 구절을 소개한다.
이윽고 날이 저물어 지팡이를 끌면서 천천히 걸어 들어가니
절 문 앞에 조그마한 다리가 청류에 걸쳐있고
여기에 고목이 서로 그림자를 비추니 절경이요.
그 그윽함에 마치 선경에라도 온양하여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마침내 취백루에 올라 난간에 기대어 잠깐 쉬면서 생각하니
이 이름은 ‘잣나무가 뜰 앞에 푸르다’는 글귀에서 따온 듯하다.
다음 날 도착한 광주목사를 취백루에서 맞이하였다.
누대 앞에 오래 묵은 측백나무 두 그루 있는 것이 보기에 한가롭고 좋았다.
이것이 비록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것 같지 않으나 취백루라는 이름에 손색이 없다.
고경명(髙敬命, 1533~1592)취백루와 배롱나무
취백루 현판은 광주 출신 서예가 학정(鶴亭) 이돈흥(李敦興)의 작품
템플스테이 다도 체험 프로그램 진행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