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본문 바로가기
싸이룩스 불교 :: CYLOOKS BUDDHISM
카테고리 Hot
전체보기
  1. 대한불교조계종 무위사 무위사 선각대사편광탑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6
    무위사 선각대사편광탑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6

    1969년 6월 16일 보물 제507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약 2.35m, 너비 1.12m.
    무위사 극락보전 서쪽 약 30m에 위치하는데 돌로 쌓은 담장 안에 남향으로 있다. 귀부(龜趺)·비좌(碑座)·비신(碑身)·이수(首) 등을 다 갖춘 전통적 양식의 비이다.

    귀부의 두부(頭部)는 양 뿔을 뚜렷이 조각한 용머리이며, 여의주를 물고 있는 입은 투조(透彫)로 되었다. 거북의 등에는 6각갑(六角甲)무늬를 양각하고 비좌의 앞뒤 2면에는 보운(寶雲)무늬, 양 측면에는 안상(眼象)을 각각 양각·음각으로 새겼다. 이수에는 3단의 층급형(層級形) 받침을 새겨 겹송이 연꽃무늬를 장식하였다.

    비제(碑題)는 ‘高麗國故無爲岬寺先覺大師遍光靈塔碑銘 幷序’라고 시작하여 지은이 최언휘(崔彦)와 쓴이 유훈율(柳勳律)의 성명을 기록하였다. 각부의 조각기법은 당대의 다른 비석에 비하여 사실(寫實)의 경향을 띠어 조각예술로서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여기에 새겨진 글자의 크기는 2cm이고 해서체(楷書體)이다.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76709_56.jpg
     

  2. 대한불교조계종 무위사 무위사 아미타내영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6
    무위사 아미타내영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6

    무위사 보존각에 보존되어 있는 벽화. 1476년 제작. 흙벽에 채색. 아미타불이 죽은 자를 극락으로 인도하는 모습을 도상화(圖像化)한 것으로 원래는 극락전 서측 벽면에 있었던 것을 1976년 극락전을 수리할 때 벽채로 떼어내어 보존각에 보존하였다. 내영도는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 사자의례(死者儀禮)와 깊이 관련된 것이며, 한국에 전하는 것은 독립적으로 구성된 것은 찾아보기 힘들고 감로탱화(甘露幀畵)라는 불화에서 내영의 장면을 찾아볼 수 있다. 감로탱화의 구도는 극락과 지옥을 대비시켜, 상단에는 극락을, 하단에는 지옥을 묘사한다. 그리고 내영의 모습도 아미타불 단독으로 맞이하는 것, 관세음보살 및 대세지보살과 함께 맞이해 가는 것, 아미타불이 25보살과 함께 와서 맞이해 가는 것, 아미타불과 성중(聖衆)이 맞이해 가는 것 등이 있다.

    이 내영도는 아미타불이 8보살 및 8비구(比丘)와 함께 와서 맞이하는 극락내영도이다. 본존인 아미타불은 극락왕생자를 맞이하는 듯 오른손은 앞으로 내밀어 뻗고 왼손은 들어 엄지와 장지를 맞대고 있다. 둥근 육계(肉)에 중앙의 계주(珠)만 표현한 머리모양, 사각형의 얼굴에 눈꼬리가 길게 올라간 긴 눈, 구불구불한 옷자락의 표현은 고려 말 불화(佛畵)의 특징이며, 군의(裙衣)를 묶은 매듭끈을 법의 자락 앞으로 대칭시켜 늘어뜨린 것은 조선 초의 특징이다. 관음보살상은 보관(寶冠)에 화불(化佛)과 보병(寶甁)을 강조하였으며, 대세지보살은 정병(淨甁)과 경함(經函)을 들었고, 무릎 부근을 구슬로 장식하였다.

    그 밖의 보살들도 제각기 특징있는 물건을 들고 있으며, 지장보살의 경우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두건을 쓰고 있는 점 등 극락전의 아미타삼존벽화의 지장보살과 비슷하게 묘사되었다. 이러한 점은 이들 일련의 작품이 동일 작가에 의하여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 보살들 위로 상체만 묘사된 8비구들은 다양한 표정과 자세를 취하여 전체 화면이 활기를 띤다. 화면 전체적으로 풍기는 밝고 엷은 적색과 녹색은 고려 불화의 양식을 보여주며, 나한(羅漢)의 등장과 세부묘사에서는 조선 초기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3. 대한불교조계종 무위사 무위사 수월관음벽화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6
    무위사 수월관음벽화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6

    불벽(後佛壁) 뒷면에 그려진 수월관음벽화. 아미타삼존 후불벽화와 같은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두광(頭光)과 신광(神光)을 지고 선 수월관음이 관음보살을 예배하는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내려다보고 있다. 머리에는 아미타불이 묘사된 보관(寶冠)을 썼으며, 왼손에는 정병(淨甁)을 들고 오른손에는 버들가지를 잡고 있다. 얼굴은 넓으며, 목은 굵고, 넓은 어깨가 강건함을 느끼게 한다. 주위에 물결을 묘사하여 바다 위에 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였으며, 천의(天衣) 자락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이러한 모습이 화면 전체에 표현된 파도의 곡선과 더불어 긴장감과 생동감을 불러일으킨다.

    보통 선재동자의 모습은 작은 동자의 모습이지만 여기에서는 승복을 입은 노비구(老比丘)의 모습이다. 무릎을 꿇고 합장하는 자세에서 구도자의 모습, 간구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후불벽화에 관한전설은 극락보전 건립 후 어느 날 노승 한사람이 사찰을 찾아와 벽화를 그리겠다며 100일동안 법당분을 열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99일째 되던 날 궁금증이 많은 한 승려가 창살을 통해 법당안을 들여다보자 한 마리의 새가 입에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날아가 버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존 후불벽화 중 가장 오래된 무위사 후불벽화는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그려지지 못한 미완성의 그림으로 남아있다.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76635_33.jpg
     

  4. 대한불교조계종 무위사 무위사 아미타삼존불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6
    무위사 아미타삼존불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6

    후불벽화(後佛壁畵)로 그려진 아미타삼존도. 흙벽에 채색. 210 × 270 cm. 1476년 작. 후불벽화로 그리기 위하여 따로 세워진 벽면에 그려졌다. 구도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앞의 좌우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배치하고 뒤쪽으로 6명의 나한(羅漢)을 배치하여 원근감을 표현하였으나 상하로 구분하는 2단구조의 고려 불화나 16세기의 조선 불화와도 다른 것이다.

    아미타불의 뒤에 표시된 광배(光背)의 모양은 키를 연상케 하는 것으로 15세기부터 사용되었다. 착의법(着衣法)은 고려 후기의 단아양식(端雅樣式)을 계승한 것이며, 가슴 아래까지 올라온 군의(裙衣)의 상단을 주름잡아 고정시킨 매듭끈을 대좌(臺座) 좌우로 길게 드리운 것은 조선 초기의 특징이다. 내용상에서도 변화가 있다. 곧 고려시대의 삼존형식에 자주 등장하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대신 지장보살이 배치된 것은 고려 후기의 신앙대상의 변화를 말해주고 있다. 화기(畵記)에 의하면 아산현감을 지낸 강노지(姜老至) 등 수십명의 시주로 혜련(海連) 대선사 등이 그렸다 한다.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76606_32.jpg
     

  5. 대한불교조계종 무위사 무위사 소개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6
    무위사 소개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6

    무위사는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출산에 있는 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 말사이다. 무위사는 본 절에만 23동 건물과 35개 속암을 거느릴 정도의 대찰에 속했으나 거듭된 화재로 규모가 축소되었다. 현재 경내에는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전각 앞에 1678년에 세운 <괘불대>가 있고 서쪽에 성보박물관이 있으며 946년에 세워진 <선각대사탑비>와 고려시대 <삼층석탑>이 있다. <선각대사탑비> 북쪽으로 미륵전과 산신각이 자리하고 있으며 경내에서 떨어진 독립된 공간에 천불전이 남동향하여 위치하고 있다.

    1739년 무위사 주지 극잠이 쓴 『전라좌도강진월출산무위사사적』(이하『무위사사적』이라 칭함) 기록에 따르면, 617년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관음사’라고 불렀으며 대광명전, 미타전, 비로전, 동선당, 서승당 등 전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효 스님의 생몰년과 사찰 창건 시점이 맞지않아 신빙성이 떨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946년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생몰년과 건립 시기가 맞지 않다.

    『무위사사적』에는 도선국사가 875년 2중창을 하고 ‘모옥사’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무위사는 1407년 천태종 17개의 자복사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이후 1555년 태감선사가 4중창을 이루고 ‘무위사’라고 불렀다고 하며 이때 비로전, 미타전, 영산저, 문수전 등 전각과 35개 처에 달하는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근대 이후 무위사 기록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 문서 가운데 『사찰고』에서 간략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1909년 내무부 소속 지방국사사과에서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무위사는 안주면 월출산에 있으며 본존불명은 ‘阿彌陀佛아미타불’로 표기했다. 관리자는 ‘정성희’로 군수가 차임한 인물이었으며, 사찰 소유 논밭이 4마지기가 있어 그 수입으로 유지했다. 연혁 부분에는 ‘月比菩薩이 一次修葺함’이라 기록했다.

    1934년 8월 27일 조선총독부는 극락보전을 보물 제67호 ‘무위사 극락전’으로 지정했다. 이후 1935년 해체수리를 진행하고 1943년에는 우천시 누수로 인한 지붕수리를 진행했다. 해방 이후 1962년 국보 제13호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으로 승격했다.
    1974년에는 성보박물관을 건립하여 극락보전에서 분리한 내부 벽화 27점을 보관하고 해탈문, 분향각, 천불전, 미륵전을 중건했다. 1982년에는 극락보전 해체 수리 과정에서 발견한 명문을 통해 1430년 극락보전 건립을 확인했다. 이후 산신각, 요사채 등이 건립되고 2001년 <극락보전 아미타여래삼존상>과 후불벽화 <백의관음도>, <내벽사면벽화> 일괄 29점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연혁 (창건~조선말)
    617년(진평왕 39) 원효대사 창건
    875년(헌강왕1) 도선국사 중창
    946년(정종1) 선각대사 형미3중창
    1430년(세종12) (선각대사탑비) 건립
    1476년(성종7)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아미타내영도> 조성
    1478년(성종9) <극락전 아미타삼존불상> 조성
    1526년(중종21) 극락보전 단청
    1555년(명종10) 태감선사 4중창
    1678년(숙종4) <괘불대> 조성
    1739년(영조15) 미타전, 천불전, 시왕전 보수

    연혁 (근대 이후)
    1934년 <무위사 극락전>보물 지정 제67호
    1935년 극락보전 해체 수리
    1943년 극락보전 수리
    1956년 극락보전 해체 수리
    1962년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문화재 지정
    1969년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문화재 지정
    1974년 성보박물관 건립, 해탈문, 분향각, 천불전, 미륵전 중건
    1979년 성보박물관 증축
    1982년 극락전 수리 공사
    1984년 극락전 벽화표면 채색 및 경화처리, 벽화 단청 문양 모사, <무위사 삼층석탑> 문화재 지정
    1987년 미륵전 번와, 바닥 강화 다짐
    1991년 산신각 신축
    1993년 선원 건립
    1995년 화장실 개축
    1997년 주차장, 배수로 공사
    2000년 요사채 개축
    2001년 <강진 무위사 아미타여래삼존좌상> 문화재 지정, <무위사 극락전 백의관음도> 문화재 지정, <무위사 극락전 내벽사면벽화> 문화재 지정
    2002년 명부전 보수
    2009년 <강진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 문화재 지정

  6. 무위사 템플스테이 무위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6
    무위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6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76350_9.png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76361_24.png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76360_04.png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76360_63.png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76360_85.png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76361_05.png
     

  7. 대한불교조계종 능가사 능가사 대웅전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68243_13.jpg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6
    능가사 대웅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6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68243_13.jpg
     

    보물 제1307호


    대웅전은 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전각이다. 능가사는 팔영산 아래에 있는 평지사찰로 일명 보현사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탔던 것을 조선 인조 22년(1644)에 벽천대사가 다시 지어 능가사라 했다. 이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이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각지붕이다. 기둥은 약간 거칠게 다듬은 배흘림 형태이다.

    특이한 것은 건물 방향이 입구에 맞춰 북향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조선후기의 건물이지만 규모가 크고, 건축양식이 우수하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지금의 모습은 최근에 해체 보수한 것이다.

    능가사대웅전은 18세기 중엽에 중건된 정면 5칸, 측면 3칸, 57.58평의 건물로 공포는 외3출목, 내4출목, 다포계의 일반적 수법을 따랐지만 정면 기둥머리의 안초공 수법과 건물 내·외부에 연봉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기법은 보물로 지정된 영광의 불갑사대웅전, 부안의 개암사대웅전과 그 맥을 같이 한다.

    포벽 수장재에 도드라지게 새긴 첨차(檐遮)는 사찰건물에서 보기 드문 예에 속하는 등 조선 중·후기 호남지역 사찰건축의 일면을 보여주는 건물로 학술적·미술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8. 대한불교조계종 능가사 능가사 동종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6
    능가사 동종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6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68197_09.jpg
     

    보물 제1557호

    종신에 「강희삼십칠년 무인삼월일 흥양팔영산능가사 康熙三十七年戊寅三月日 興陽八影山楞伽寺…’」 라는 문구가 있어 절대연대(1698년,숙종 24)를 알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높이는 154㎝, 입술 지름은 101.5㎝(1구)이다. 쌍용으로 정상에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음관(용통)을 두지 않고 조그마한 운형 구멍으로 대신하고 있다. 천판은 이중의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는데, 상단은 16엽이고 하단은 활짝핀 무늬이다. 그 밑으로 보이는 상대에는 범자문을 돌렸으며, 4면이 장방형인 유곽 안에 9개의 유두를 뚜렷하게 조각했다.

    양 옆에는 천의를 걸친 보살입상과 문짝 모양을 장식하였는데, 그 안에 ‘주상전하수만세’라는 문구가 양각되었다. 또 종신 중앙부에는 주역에서 나타나는 전양인 건에서 전음인 곤에 이르기까지의 팔괘를 양각으로 둘렀는데, 이는 조선 범종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라 할 수 있다. 팔괘 밑으로 음각의 명문대가 있는데, 여기에 능가사 창건주인 정현대사의 이름이 보인다. 하대로 내려와서는 두 줄의 띠를 둘렀고 그 안에 꽃잎과 당초문대를 돌렸다.

    이 종은 용뉴의 웅건한 표현과 단정한 보살입상, 세부 문양의 정교함 등 김애립 범종의 완숙한 기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17세기를 대표하는 범종으로 꼽기에 손색이 없는 수작이다.

  9. 대한불교조계종 능가사 능가사 사적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6
    능가사 사적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6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68151_68.jpg
     

    고흥 능가사 사적비(高興 楞伽寺 事蹟碑)는 전라남도 고흥군 점암면 능가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적비이다. 1978년 9월 22일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었다

    사적비란 어떠한 사건에 관련된 사실이나 자취를 기록한 비로, 이 비는 능가사의 창건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능가사는 비문에 의하면, 신라 눌지왕 3년(419)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고, 창건 당시에는 ‘보현사’라 이름하였다 한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린 것을 인조 22년(1644) 정현대사가 다시 건물을 지어 ‘능가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새겨진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고흥 능가사 사적비 건립연대 표기 ‘숭정기원후재경오(崇禎紀元后再庚午)’는 1690년으로 알려 졌는데, 숭정 재위 기간의 경오(1630년)는 포함하지 않고 그 뒤로 이어지는 두번째 경오로 보아야 하고, 비문 찬자, 서자, 관련 인물의 활동연대와 비교하여 보면 건립연대는 1750년이다.

    비의 몸돌은 화강암을 매끄럽게 갈아서 만든 것으로 별다른 조식이 없다. 이수는 장방형으로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이수 하단은 전.후면에 8엽의 앙련과 운룡문,화문을 조식하였다.상단은 두 마리의 용이 중앙의 여의주를 향해서 서로 안쪽을 보게하였다. 네 귀퉁이에는 역시 용을 새기고 정면과 중앙에 오른편측면에는 귀면상을 조식하여 장식을 더하고 있다.

  10. 대한불교조계종 능가사 능가사 목조사천왕상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6
    능가사 목조사천왕상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6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68113_11.jpg
     

    고흥능가사목조사천왕상 -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24호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4호. 능가사 천왕문 내부에 안치되어 있는 4구의 사천왕상이다. 좌우 2구씩 목책 안에 안치되어 있는데, 천왕문 입구 왼쪽 앞쪽에 북방 다문천왕이, 뒤쪽에 서방 광목천왕이 배치되고, 오른쪽 앞쪽에 동방 지국천왕이, 뒤쪽에 남방 증장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이 사천왕상 중 동방 지국천왕상에서 발견된 발원문과 능가사사적비 등에 이 사천왕상이 1666년(현종 7)에 조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사천왕상이 안치된 천왕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1995년 천왕문 해체 복원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여 1666년에 건립된 후 1824년(순조 24)과 1931년에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천왕상은 나무로 제작되었고 서 있는 입상이 아니라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의 의좌상(椅座像)으로, 높이는 450㎝이다. 머리에는 화려한 연화문이 그려진 원통형의 보관을 쓰고, 머리 양 옆으로 보관에 달린 끈이 휘날린다. 얼굴은 불법을 수호하기 위하여 험상궂은 표정을 하면서도 눈썹과 수염 등에서 부드럽고 해학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천왕상은 갑옷을 입은 무장형으로 어깨 위로 한 가닥의 천의(天衣)가 휘날리고 있다.

    천왕이 든 지물은 북방 다문천왕이 당(幢)을, 서방 광목천왕은 용과 보주를, 동방 지국천왕이 비파를, 남방 증장천이 칼을 들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 제작된 대형 사천왕상은 중국 원대와 명대에 갑옷을 입고 위협적인 얼굴을 한 용맹스런 장수의 모습에 비파, 용과 보주, 당, 탑 등의 다른 지물을 가지고 있다.

    조선 후기 사천왕상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사찰의 중창과 중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인조와 숙종 연간에 집중적으로 조성된다. 능가사 사천왕상의 특징은 다른 사찰에 봉안된 것보다 크고, 천왕문에 사천왕상을 배치한 방향이 다르다. 또한 동방 지국천왕 발 아래에는 동녀(童女)가 천왕의 왼쪽 다리를 받쳐 들고 있어 특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