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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룩스 불교 :: CYLOOKS 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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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한불교조계종 능가사 능가사 응진당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6
    능가사 응진당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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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진당은 나한전(羅漢殿)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석가모니 삼존불을 모시고, 좌우에 부처님의 제자들인 16나한(아라한의 줄인 말)을 봉안한 법당이다. 원래 소승불교의 수행자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고승을 지칭하는 말이였으나, 아라한(阿羅漢)과를 증득하여 마땅히 존경과 공양을 받을 만한 큰 성인이라는 뜻으로 응공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으로부터 미륵불이 출현할때까지 중생을 교화하라는 수기를 받은 분들이다. 일반적으로 석가여래와 16나한상을 모신 전각을 응진전이라고 하며, 석가삼존불과 500나한을 모신 전각은 나한전이라고 한다. 여기서 500이란 숫자는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에 마하가섭이 부처님 생전에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 제1차 경전결집을 위한 회의를 진행했을 때 칠엽굴에 모인 비구(아라한)가 500명인데서 유래하였다.

  2. 대한불교조계종 능가사 능가사 추계당및사영당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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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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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능가사 추계당및사영당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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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64호

    고흥 능가사 추계당 및 사영당 부도는 조선시대 후기 승려로 사제간인 추계당과 사영당 부도이다. 추계당 부도는 석종현(石鍾形)부도이며, 사영당 부도는 방형의 기단부 네 귀퉁이에 용두가 조각되고 중석을 높직하게 안치한 이형부도로 불교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가치 있다.능가사에는 경내에 팔각원당형 부도 1기, 능가사 외곽의 계곡 간에 9기 등 10기의 부도가 있는데, 9기 가운데 추계당(秋溪堂) 부도와 사영당(泗影堂) 부도는 원 위치로 알려져 온다.추계당 부도는 석종형으로 기단부는 방형의 하대석 위로 8각의 복련을 새겼다. 16엽 연화문으로 별화려한 문양이 없이 오히려 소박한 편이다. 그 위에 원형의 홈을 파고 탑신부를 얹었다. 탑신부는 크게 나눠 상대, 하대로 구분되는데, 하대에는 돌아가면서 물고기, 게 등이 조각되었다. 탑신 중앙에는 4군데 유곽과 그 안에 9개의 유두가 돌출되고 있으나 그 기법도 매우 간략화 되었다. 북쪽인 두개의 유곽 사이에 방형의 위패형(61×17cm)을 새기고 그 안에 “秋溪堂”(추계당, 자경 9cm)이라는 당호를 새겼다. 상대로 올라와서는 주위에 아무런 문양이 없고 바로 천판으로 연결되었는데 희미한 연화문이 장식되었다. 상륜부는 사방으로 피어

    오르는 구름문양을 새겨 더욱 장엄을 더했다.
    사영당 부도는 석종형과 8각원당형의 양식에서 벗어난 이형(異型) 부도이다. 방형의 큼직한 하대석을 앉히고 귀퉁이에 각기 4방을 향하고 있는 용두를 조각하였는데, 매우 사실적이고 역동감이 감돌고 있다. 입에는 여의주가 보이지 않는 대신 양쪽 눈을 크게 부각시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턱밑으로 역린(逆鱗)이 선명하며 목 뒤로는 굵은 비늘을 새겨 사실성이 뛰어나다. 그위로는 한 돌로 연결된 복련이 이어지고 있는데, 각 면이 2엽씩 모두 8엽의 연화문이 장식되었다. 다시 복련 위로는 8각의 중석이 연결된다.

  3. 능가사 템플스테이 능가사 템플스테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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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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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능가사 템플스테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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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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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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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능가사 템플스테이 능가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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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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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능가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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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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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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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대한불교조계종 증심사 증심사 3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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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증심사 3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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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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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등산에서 가장 오래된 탑 - 3층석탑

    무등산에 있는 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석탑인 증심사 삼층석탑은 오백전 앞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아 1972년 1월 29일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이 탑의 절대연도는 알 수 없지만, 탑의 양식을 살펴보면 철감선사가 증심사를 창건한 시기인(855~868)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졌을거라 추정하고 있다.

    증심사 삼층석탑의 특징을 살펴보자면 아래층 기단 각 면에는 가늘고 긴 안상(眼象)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의 네 귀퉁이는 살짝 치켜 올라가 경쾌한 느낌을 주고, 상륜부는 네모난 받침돌위로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만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몇 층 석탑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지붕돌(옥개석)을 기준으로 세어 보는 것이다. 증심사 삼층석탑은 지붕돌이 3개이기 때문에 삼층석탑인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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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륜부 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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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개석 층급받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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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단면의 안상

  6. 대한불교조계종 증심사 증심사 부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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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증심사 부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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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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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가불자 공덕비


    증심사에 공덕을 지었던 사람들 증심사 부도전

    증심사 부도전에는 증심사 중수에 공덕이 많은 신도와 스님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6기의 부도(浮屠)와 17개의 비석이 있다. 과거 증심사 부도전은 취백루 아래쪽 공터에 있었으나, 현재는 일주문 좌측 언덕으로 옮겨놓았다. 6기의 부도 중 3기는 스님의 부도고, 3기는 신도들의 것이다. 먼저 수월당, 월암당, 규봉당 부도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수월당 부도’는 ‘수월당보문’이 새겨진 탑호만 있을 뿐, 건립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은 없다. 재미있는 것은 기단부를 받치고 있는 거북모양의 조형물이 파격적이라는 점이다. 일반적인 거북이의 모습을 단순화 시킨데다 왼쪽으로 고개를 약간 꼬아 민화속의 거북이를 보는 듯 해학적인 느낌이다.

    월암당 부도는 ‘월암당대사민성’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부도다. 뒷면에는 ‘강희 56년 을미 5월에 세움(康熙五十四年五月日乙未立)’이라 쓰여 있어 조선 숙종 41년(1715)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스님의 정확한 행적은 알 수 없으나 증심사 유물 가운데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기에 그 가치가 높다. 4면 중 정면과 양쪽 측면은 다소 변형된 연화문을 시문하였다. 후면에는 인면을 조각하였는데, 주먹코에 왕방울 눈으로 웃는 모습이 흡사 장승의 얼굴처럼 표현되었다.

    규봉당 부도는 석종형 모양으로 산신각 옆에 있던 것을 옮겨 왔다. 당호로 보아 증심사와 규봉암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3기의 신도의 탑(부도)은 1900년대에 세워졌다. 고려시대의 석탑 양식을 부분적으로 함유하고 있으나, 일본식 영향을 받기도 했다. 각각의 이름과 연도는 다음과 같다. 康津崔氏之塔(강진최씨지탑 : 1914), 曺氏淨行華化塔(조씨정행화화탑: 1919), 大德華安魂塔 大德華 漢陽趙南洙(대덕화안혼탑 대덕화 한양조남수: 1927)

    1950~60년대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재가신자들의 납골탑이 대웅전 앞에 세워졌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지만, 증심사에 시주한 공덕이 클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이처럼 부도전을 통해 증심사를 위했던 사람들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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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60년대 대웅전 앞마당에 있던 신도비

  7. 대한불교조계종 증심사 증심사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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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증심사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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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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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오백전 옆에 자리한 관세음보살


    지극한 마음으로 정성을 들이면 보이는 증심사 관세음보살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된 증심사 석조보살입상은 증심사에서는 관세음보살님으로 통하고 있다. 오대산 월정사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과 같이 높은 원통형 보관을 쓰고 있다는 점과 세부표현이 간략해진 것으로 보아 고려후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성춘경은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원통형 보관을 쓰고 있으며 보관전면에 화불이 새겨진 것을 고려해 관세음보살로 판단한다”고 전했다. 증심사 석조보살입상의 원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우선 1966년 간행된 『광주시사』에 따르면 ‘담양 서봉사터에 있던 것을 현준호(광주의 부호이자 호남은행의 2대 은행장)가 자신의 재산을 들여 증심사로 옮겨왔다’고 기록돼 있다.

    한편, 박선홍의 책 『무등산』에는 ‘전남도청에서 대황사에 옮겼다가 폐사된 뒤인 1930년대 초 증심사로 옮겨왔다’고 광복 전후 주지였던 종산, 최용식 스님에게서 필자가 직접 들었다고 적혀있다.

    석조보살입상이 증심사에 처음 모셔졌을 때 위치는 오백전 왼쪽, 7층 석탑의 옆자리였다. 1990년대 사진을 보면 보관, 눈, 코, 입 등의 형태가 온전히 보였으나 바깥에서 몇십 년 이상 서 있으며 풍화로 훼손되었다. 그러다 2003년 오백전 건물을 보수하면서 대웅전 오른쪽에 원통전을 지어 모셨다.

    2021년부터 원통전에 연등을 달아 연등불을 밝혔다. 현재는 풍화로 훼손되어 관세음보살님의 형태가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정성을 들이면 관세음보살님의 자비로운 미소를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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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음재일 예불 드리는 모습

  8. 대한불교조계종 증심사 증심사 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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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증심사 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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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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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에 주요행사가 있으면, 일주문에 현수막을 걸어 알리고 있다.


    깨달음으로 가는 첫관문인 일주문

    일주문(一柱門)은 사찰의 산문 중에 첫 번째 문이다. 일반적인 건물과 달리 기둥을 한 줄로 세워서 일주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흔히 일주문에 현판을 걸어서 그 사찰의 품위를 나타내기도 하는데, 대표적으로 보물로 지정된 범어사 일주문과 통도사·해인사·송광사 삼보사찰의 일주문을 들 수 있다. 통도사의 경우, 문 중앙에 “영축산 통도사(靈鷲山 通度寺)”라는 현판을 걸어 사찰의 이름을 밝히고, 좌우 기둥에 “불지종가(佛之宗家)”와 “국지대찰(國之大刹)”이라는 주련을 걸어 불보사찰(佛寶寺刹)로서의 절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일주문의 현판에는 보통 산 이름과 절 이름이 쓰여 있다.

    증심사 일주문은 1980년대 다시 복원되었으며, 無等山證心寺(무등산 증심사) 현판의 글씨는 남도 동국진체의 맥을 이어온 용곡(龍谷) 조기동(1929~2019) 서예가가 썼다. 일주문은 출입을 위한 기능적인 역할 뿐만이 아니라 불(佛)과 중생(衆生), 극락과 사바의 경계를 이루는 상징적 구조물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화엄경』의 ‘일심사상(一心思想)’, 『법화경』의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의 표출로 볼 수 있다. 즉,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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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등산 증심사 현판(용곡 조기동 선생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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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미(山彌) 사이에 연꽃들이 조각되고, 최상부에는 봉황을 장식했다.

  9. 대한불교조계종 증심사 증심사 산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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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증심사 산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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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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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등산 산신을 모시는 산신각


    오늘날 한국불교 내에서 산신은 가람의 수호신 역할과 함께 수행 생활의 평온을 기원하는 외호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부분 산신각의 입지는 사찰영역의 가장 배후, 후면의 산림과 만나는 접경지역에 위치한다. 증심사 산신각도 비로전 뒤편의 암반 지형을 이용해 건축했다. 산신각에 오르려면 사다리형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하는 보기 드문 형태다.

    증심사 산신각은 2004년 10월 20일에 점안법회를 봉행했다. 전 송광사 방장 보성스님을 증명 법사로 받들고 치른 점안법회에는 호남지역의 불자 150여 명이 동참해 산신각 낙성을 축하했다.

    산신각을 중심으로 왼쪽 벽화는 산신과 동자, 천녀를, 오른쪽 벽에는 어미 호랑이와 아기 호랑이 두 마리를 귀엽고 친근하게 표현했다. 나머지 벽에는 천녀와 모란, 연꽃, 매화 등을 그렸으며, 서까래는 청색으로 칠해 금색으로 사군자를 그려놓았다.

    증심사 산신탱화 속 산신은 백발의 수염과 눈썹에 머리가 벗겨지고 손에는 하얀 깃털 부채를 들고 있어 도교적 색채를 띠고 있다. 한편, 산신각 뒤 암벽에는 ‘서석산신지위(瑞石山神之位)’라는 조성연대를 알 수 없는 음각 명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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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신각 호랑이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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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신, 동자, 천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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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심사 산신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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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신각 뒤 암벽에 새겨진 서석산신지위 명문

  10. 대한불교조계종 증심사 증심사 사천왕문과 사천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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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증심사 사천왕문과 사천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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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증심사를 수호하는 사천왕문과 사천왕상

    증심사 도량 내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복원한 건축물인 증심사 사천왕문과 사천왕상은 본래 1609년에 중창한 정문 누각인 취백루 1층에 모시고 있었으나 6.25때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2000년대 초반 증심사 주지를 역임하셨던 일철스님과 진화스님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2003년 사천왕문 복원불사의 원력을 세우고 2006년부터 사천왕상 복장봉안을 위한 사경 100일 기도를 봉행했다.

    그 후, 증심사 집단시설지구이전공사로 공사재개가 늦어졌던 사천왕문 복원 불사는 지장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2009년부터 다시 재개 되어 그해 8월 6일 상량식을 봉행했다.

    2011년 사천왕상 채색 및 단청불사 시작해 2012년 2월 23일에는 사천왕상 복장 유물 안치 재현 의식을 치렀다. 사천왕상 불복장은 불복장 전통의식을 전수받은 용화사 주지 도원 수진 스님이 집전했다. 이튿날 증심사 주지를 역임하셨던 영조스님, 지장스님, 당시 주지인 연광스님, 동구청장 등 500여 명의 대중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천왕상 복장 봉안 및 점안식을 봉행했다.

    증심사에 사천왕문을 복원하기 전에는 광주지역에 전통적 사천왕문이 있는 사찰이 없었다. 민족사의 우여곡절과 함께 사라져버린 사천왕문을 복원하고 다시금 온전한 사천왕상을 모셨다는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천왕문 및 사천왕상 복원 추친 경과

    2003년 복원 사업 계획
    2005년 7월말 사천왕문 착공
    2005년 11월 사천왕문 조성을 위한 각종 목재 구입 및 목재 다듬기, 사천왕상 조각 작업 진행
    2005년 11월 4일 ~ 2006년 2월 12일 사천왕문 복원불사 원만성취 100일 화엄신중기도
    2006년 11월 25일 ~ 2007년 3월 4일 사천왕상 복장봉안 위한 1차 100일 사경기도
    2007년 3월 4일 ~ 6월 12일 사천왕상 복장봉안 위한 2차 100일 사경기도
    2007년 6월 13일 ~ 9월 20일 사천왕상 복장봉안 위한 3차 100일 사경기도
    2009년 3월 14일 ~ 6월 23일 사천왕상 봉안불사 4차 100일 사경기도
    2009년 8월 6일 午時 사천왕문 복원불사 상량식
    2012년 2월 23일 사천왕상 복장 유물 안치 재연 의식
    2012년 2월 24일 사천왕상 복장 봉안 및 점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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