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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정보
상세설명
병인박해 전후 난을 피해 조성된 교우촌
황점공소는 경북 김천시 증산면 황점리 원황점 마을에 위치 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증산면 장전리 서무터 공소와 같이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1866) 때 난을 피하여 천주교 교우들이 이곳으로 숨어 들어와 처음에는 황점리에서 약1km 떨어진 장자터라는 골짜기에서 교우촌을 형성하여 숯과 옹기를 굽고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황점 공소는 원래 장자터 공소에서부터 비롯된 공소이다. 현재는 없어진 장자터 공소는 경북 김천시 증산면 황점리 장자터 22-24번지에 위치했다.
이곳에 언제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병인박해 때 경남 사천에 살던 유재선(베드로)의 조부인 유 바오로가 이곳으로 피난와 살기 시작한 것이 시초인 것 같다. 김령 김씨인 김 멜키올의 조부와 박용삼의 웃대 가정과 경남 합천에서 살았던 김영준(시실로)의 증조부 가정도 이사와 살았다. 병인박해가 끝난 후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하던 김보록 신부가 이곳 황점 공소에 판공성사를 주러왔었다. 현재 신자 가정은 5가구 10명이다. 김천 지례 서당 소속 공소이며 현 공소회장은 김정선(도마)씨이다.
병자년 수해(1936)로 마을이 유실되었으며 박용준, 박용백 형제와 김영준(시실로)과 김용석 4가구가 8.15 해방 직후까지 장자터에 교우촌을 형성하여 살아오다가 6.25 전쟁 후 이 지역에 공비들의 출몰이 극심하여 관에 의하여 황점으로 4가구마저 철거되어 지금은 황점이 새로운 교우촌으로 형성되어 황정리로 공소를 옮기게 되었으며, 현 황점리 공소는 1972년 윤 에릭 신부가 16평의 공소 건물을 신축한 것이다. 그 당시에는 전기가 들어 오지 않아 윤 에릭 신부가 독일에서 가져온 발전기를 설치하여 산골인 이곳 황점에 전기를 제일 먼저 사용 하게 되었다.
2002년 태풍 루사로 산사태와 계곡 물이 마을을 덮치면서 모든 집들을 휩쓸었고 주민들 은 1년여 컨테이너 생활을 한 끝에 2003년 9월 대부분 새 집에 입주했고 주변도 정비가 되었다. 이젠 집들이 마치 별장 같고 마을이 “펜션타운”으로 바뀌어 예전의 정취를 느낄 수 없지만 해발 600m 고지에 위치한 마을의 공기는 도심과는 완전 딴 판이다. 유서깊은 이 교우촌의 개발을 위하여 대구대교구에서는 장자터를 중심으로 마을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황점 신앙유적지로 조성중이다.
원황점(元黃店)이란 지명의 유래는 원래 황을 구운 황점이 있었던 마을 이라고 하여 원황점 이라고 하며 김해 김씨(金海 金氏) 중간 시조가 유황을 구워 조정에 상납한 것이 마을 조성의 시초였으며 당시 암행어사 박문수가 이곳 목통령 고개를 넘다가 기아 상태에서 실신하여 쓰러진 일이 있었는데 이 광경을 황점에 살던 어떤 부인이 발견하여 자기의 젖을 빨아 먹여 소생 시켰다고 하며 그 후 어사 박문수는 그 사례로 부인의 소망을 물으니 매년 황을 구워 조정에 상납하는 부담을 없에 달라는 청을 했는데 이 청이 임금님께 상주되어 이 후로는 황을 굽는 일이 중지 되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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